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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모두스 비벤디(지그문트 바우만)

견고한 것에서 유동하는 것으로

 

바우만의 글들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유동한다’가 될 것이다. 그는 유동성에 관한 일련의 연작들을 발표해 왔다. <유동하는 근대>, <유동하는 사랑>, <유동하는 삶>, <유동하는 공포>가 그것들이다. 이 책은 이 시리즈 중 <유동하는 시대>를 옮긴 것으로, <모두스 비벤디>라는 타이틀은 이탈리어판에서 따온 것이다.

 

바우만에게 유동성이라는 개념은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불확실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곧 바로 공포와 결부된다. 부정적 지구화로 인해 위험은 전지구적 수준에서 발생하는데, 개인들은 이 위험을 통제하기는커녕 제대로 인식할 수조차 없다. 불투명한 세상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개인들은 무기력할 뿐이다.

 

그럼에도 개인들은 편재하는 위험 속에서 그 위험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전략들을 수행한다.궁극적으로 통재 불가능한 그런 위험들은 전문가의 지도 아래 몇 가지 회계 기법들과 더불어 계산 가능한 위험, 즉 리스크로 환원된다. 그것들이 계산 가능해 지는 순간, 개인들은 그 위험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개인들은 환경오염을 막을 수도, 치안을 강화 할 수도 없지만, 보험을 통해 환경오염이 야기시키는 병에 대처할 수 있고, CCTV를 설치하고 사설 경비업체에 등록함으로써 안전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런 전략들 자체가 공포에 근간을 둔 하나의 상품이라는 점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던 것이 국가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변했고, 국가는 더 이상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바우만은 국가가 “사회(복지) 국가”에서 “개인 안전 국가”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민족-국가의 “힘은 전지구적 공간으로 증발하고 있으며 … 규모가 작아진 국가는 개인의 안전을 겨우 책임지는 국가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바우만은 여기서 개인화를 재론한다. 그는 “새로운 개인주의의 등장과 인간적 유대의 소멸”을 강조하면서, 과거에는 “공동체와 조합들이 보호의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이 적용되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개인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살피며, 스스로를 보호하고 구제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고 진술한다. 이를 근거로 바우만은 “공동체라는 말이 이제 점점 공허”한 말이 되어 가고 있으며, 민족-국가 형태에서도 민족과 국가가 결별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본주의 국가를 유지케 했던 개인들의 공동체로서의 민족이 해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지구화는 그가 부정적 지구화라고 부른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가? 나아가, 진짜 ‘지구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는가?(혹시 지구화라기보다는 일국적 단위를 넘어선 지역적 층위의 문제는 아닌가?) 과연 지구화라는 것은 국가 주권을 침식하고 있는가? 민족-국가라는 기초 단위 없이 지구적 경제나 정치는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국가가 변형되고 있을지언정 쇠퇴하기 보다는 어떤 측면에서는 강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국가와 결합되어 있는 민족/국민 역시 해체되고 있다는 주장은 재평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난민은 민족/국민 국가의 쇠퇴나 해체의 징후가 아니라 그것들이 변형/강화되는 과정의 필연적 산물은 아닌가?

 

만약 이런 질문들이 유효하다면, 모든 것이 유동하고 있다는 바우만의 주장은 상당부분 수정 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우만은 이런 질문들을 세밀히 분석하고 평가하기보다는, 어떤 결론들을 미리 가정한 채 자신의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는 듯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에게 근대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미리 가정된 상상의 대상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가 탈산업사회론이나 정보사회론 그리고 지구화론과 너무 쉽게 영합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견고한 것들이 유동하는 것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견고하다면, ‘유동성’은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견고한 보편 개념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의 국면들을 분석할 때 쓰일 수 있는 유동적인 정세적 개념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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