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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11
    [서평] - 모두스 비벤디(지그문트 바우만)
    와라
  2. 2010/09/28
    명절, 유감스런 후유증
    와라

[서평] - 모두스 비벤디(지그문트 바우만)

견고한 것에서 유동하는 것으로

 

바우만의 글들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유동한다’가 될 것이다. 그는 유동성에 관한 일련의 연작들을 발표해 왔다. <유동하는 근대>, <유동하는 사랑>, <유동하는 삶>, <유동하는 공포>가 그것들이다. 이 책은 이 시리즈 중 <유동하는 시대>를 옮긴 것으로, <모두스 비벤디>라는 타이틀은 이탈리어판에서 따온 것이다.

 

바우만에게 유동성이라는 개념은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불확실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곧 바로 공포와 결부된다. 부정적 지구화로 인해 위험은 전지구적 수준에서 발생하는데, 개인들은 이 위험을 통제하기는커녕 제대로 인식할 수조차 없다. 불투명한 세상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개인들은 무기력할 뿐이다.

 

그럼에도 개인들은 편재하는 위험 속에서 그 위험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전략들을 수행한다.궁극적으로 통재 불가능한 그런 위험들은 전문가의 지도 아래 몇 가지 회계 기법들과 더불어 계산 가능한 위험, 즉 리스크로 환원된다. 그것들이 계산 가능해 지는 순간, 개인들은 그 위험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개인들은 환경오염을 막을 수도, 치안을 강화 할 수도 없지만, 보험을 통해 환경오염이 야기시키는 병에 대처할 수 있고, CCTV를 설치하고 사설 경비업체에 등록함으로써 안전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런 전략들 자체가 공포에 근간을 둔 하나의 상품이라는 점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던 것이 국가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변했고, 국가는 더 이상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바우만은 국가가 “사회(복지) 국가”에서 “개인 안전 국가”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민족-국가의 “힘은 전지구적 공간으로 증발하고 있으며 … 규모가 작아진 국가는 개인의 안전을 겨우 책임지는 국가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바우만은 여기서 개인화를 재론한다. 그는 “새로운 개인주의의 등장과 인간적 유대의 소멸”을 강조하면서, 과거에는 “공동체와 조합들이 보호의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이 적용되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개인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살피며, 스스로를 보호하고 구제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고 진술한다. 이를 근거로 바우만은 “공동체라는 말이 이제 점점 공허”한 말이 되어 가고 있으며, 민족-국가 형태에서도 민족과 국가가 결별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본주의 국가를 유지케 했던 개인들의 공동체로서의 민족이 해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지구화는 그가 부정적 지구화라고 부른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가? 나아가, 진짜 ‘지구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는가?(혹시 지구화라기보다는 일국적 단위를 넘어선 지역적 층위의 문제는 아닌가?) 과연 지구화라는 것은 국가 주권을 침식하고 있는가? 민족-국가라는 기초 단위 없이 지구적 경제나 정치는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국가가 변형되고 있을지언정 쇠퇴하기 보다는 어떤 측면에서는 강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국가와 결합되어 있는 민족/국민 역시 해체되고 있다는 주장은 재평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난민은 민족/국민 국가의 쇠퇴나 해체의 징후가 아니라 그것들이 변형/강화되는 과정의 필연적 산물은 아닌가?

 

만약 이런 질문들이 유효하다면, 모든 것이 유동하고 있다는 바우만의 주장은 상당부분 수정 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우만은 이런 질문들을 세밀히 분석하고 평가하기보다는, 어떤 결론들을 미리 가정한 채 자신의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는 듯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에게 근대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미리 가정된 상상의 대상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가 탈산업사회론이나 정보사회론 그리고 지구화론과 너무 쉽게 영합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견고한 것들이 유동하는 것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견고하다면, ‘유동성’은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견고한 보편 개념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의 국면들을 분석할 때 쓰일 수 있는 유동적인 정세적 개념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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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유감스런 후유증

명절 유감, 불안에 대처하는 가족의 자세

 

추석 연휴가 반갑지 않았다. 육감같은 것이 아니다. 기습 폭우로 도시가 잠겨 수많은 이재민이 생겨날 것을 미리 알게된 예지력 같은게 아니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경험을 통해 몸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역시나 정확했다. 유독 나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선후배나 동료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도 비슷한 것들이다.

 

민족 고유의 명절, 풍요롭고 아름다운 전통의 명절. 추석 앞에 붙은 수식어들이다. 그래도 사실 추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민족 대이동이라는 표현이다. 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도로로 쏟아져 나온다. 뭐 개인적으로야 대부분 고향이나 부모님을 찾아 가는 발걸음이겠지만, 그 도로의 풍경을 볼 때면 야릇하고 수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은 때로 종교적 의례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전쟁시의 피난민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체 그 풍경의 정체는 무엇일까.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전통, 근대화로 인한 핵가족화, 기형적 도시화가 야기한 탈향민의 급증 등이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명절이 되면 멀리 떨어져 거의 다른 공간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슨 변신로봇마냥 합체를 한다.

 

추석을 맞이할 때 느껴졌던 불안한 예감은 그곳에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그렇다. 나이는 찼는데 번듯한 직장도 없고, 아이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심지어 배우자가될 예비 후보마저 자신있게 거론할 수 없는 사람에게 명절은 괴로운 것이 된다. 변변한 대화한번 해본적 없는 친적(촌수가 멀건 가깝건 상관없다)이 지나가며, 갑자기 남의 직장과 연애 사정을 걱정한다. 마치 어릴적 “그래 공부는 잘 하고 있냐?”라고 묻던 어느날 문득 찾아온 삼촌(실제 촌수로는 사실 3촌도 아니다)의 느낌, 평소에 내 생각따위 한 번도 해본적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내가 공부를 잘하건 말건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던 그 삼촌의 느낌으로 말이다. 사실 그들은 내 직장이나 연애, 내 공부에는 별 관심도 없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와 다른 공간에 자신들만의 삶을 살고 있다. 그 무관심한 관심이 듣는 당사자에게는 상당한 자괴감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아는걸가 모르는 걸까.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아마 그것이 맞을 것이다. ‘실업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결혼 늦게 하는것도 트렌드로 여겨지는 세상 아닌가’라고 생각해봐야 3초짜리 위안도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그것은 내 문제인 것이다. 취직도 잘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번듯하게 사는 엄친아는 어디든 있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남들 취직하고 결혼할 나이에 대학원에 다니는 사람이나, 고시 공부 하는 사람, 대기업 직장인만큼의 월급을 받지 못하는 단체 활동가들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제대로’된 월급을 받는 ‘제대로’된 직장에 다니고 있지 않은 만큼, ‘제대로’된 삶을 살고 있지도 않은 것으로 취급된다.

 

예전에도 어느 집안에나 한두 명쯤은 ‘제대로’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그들은 그냥 그런 사람들이었다. ‘못난놈’ 취급을 받거나 기분나쁜 혓소리(쯧쯧~)를 들어야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좀 다른 듯하다. 두 번의 거대한 경제 위기를 겪고, 신자유주의가 국가 통치 전략의 기본 기조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안전망은 급속히 해체되어가고 있다. 삶의 불안, 불확실성, 불확정성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가족은 안전망의 최후 보루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적 안전망이 급속히 파괴되고, 삶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만큼 개인이 짊어져야할 삶의 무게,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증가한다.

 

이제 우리(나와 그들)는 기분나쁜 혓소리 대신 ‘고생하는 엄마’를 생각하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자기네들과는 별 상관없는 오지랖이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있는 것 같다. 혈연이라는게 그런 측면이 있다. 누구하나 잘못되면 도움을 주진 못하더라도, 부채감이나 죄의식 같은걸 만들어낸다). 이것은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넘어 전면적인 삶의 불안정에 대처하기 위해 너도 동참해야 한다는 명령처럼 들린다. 여기에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넘어 마지막 남은 안전망으로서의 가족을 재강화해야 한다는 가치관, 즉 삶의 불안정성의 유래 없는 확산에 대응해 가족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독특한 가치관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이제 취업과 결혼은 전통이나 당위가 아니라 생존이 되어가고 있다.

 

명절 주간이 되면 복권 판매량이 증가한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이지만, 거기에는 어떤 간절함이 항상 함께 하고 있다. 그 절박함이 극단화된 삶의 불안을 보여준다. 명절 후유증은 연휴로 인한 업무 부적응, 과도한 음식 섭취 때문에 불어난 뱃살, 주부들의 시집살이만 나타내는게 아니다. 그 목록에 ‘제대로’된 삶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혹은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스트레스와 삶의 공포가 추가되어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명절 때면 찾아오는 더부룩함과 소화 장애의 원인이 기름진 음식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삶의 불안과 공포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그리고 굳이 친절하게 꼬치꼬치 그것들을 드러내고, 따져주시는 그 친지분들 때문인 것도 같다. 이제 연휴도 끝났다. 남은건 후유증 뿐이다. 명절 때 남은 음식 다 먹어치울 때쯤 같이 사라지면 좋겠지만, 아마도 다음 명절 때까지 어지간히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다시 명절이 오면 혹시 우리가 잊어먹을까 걱정되 누군가 다시 확인시켜줄 것이다. 그렇게 삶도,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전통 명절도, 친척들의 오지랖도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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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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