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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 않은 미학을 위해 희생당한 도시민의 삶 : 개발과 투기의 일상화 2

 

 

지난 칼럼(개발과 투기의 일상화 1 : 개발에 미치고 투기에 목맨 우리시대의 자화상<칼럼보기>)에서는 개발과 투기의 열풍이 단순히 토건국가와 건설자본의 결탁으로 인해 발생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 이야기 했다. 거기에는 개발을 찬양하는 투기하는 시민이 함께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사회는 소수 지배자들의 머리 속에 설계된 대로만 형성되지 않는다. 한 사회의 성격은 지배자의 의도와 함께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독특한 합리성이 만나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구성된다. 때로 그것들은 서로 반대의 지점에 위치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친화력을 발휘하여 같은 지점에 서서 같은 목표를 바라보기도 한다. 적어도 개발과 투기의 열풍은 후자의 측면이 강해 보인다.

 

재개발 논리의 미학적 정당화

 

개발과 투기에 대한 열정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경제적 이득과 관련되어 있다면, 다른 한 축은 미학적 삶과 관련되어 있다. 도시 미학은 도시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을 넘어 도시민들의 삶 자체를 재구조화 하는 기능을 한다. 브랜드 아파트의 유행은 이 지점과 관련되어 있다. 1999년 삼성중공업의 ‘쉐르빌’을 시작으로 래미안, ‘트럼프 월드’, ‘아이파크’, ‘캐슬’, ‘e편한세상’, ‘힐스테이트’, ‘더샵’, ‘푸르지오’, ‘비발디’, ‘상떼빌’ 그리고 최근의 ‘Z클래스’까지 브랜드 아파트는 그야말로 봇물터지듯 등장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직접적으로는 외환위기 직후 단행된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조치와 관련된 것이지만, 보다 폭 넓게 보자면 당대의 독특한 합리성이 발현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브랜드 아파트의 유행은 도시가 과잉유입된 인구의 수용이라는 기능에서 삶의 미학적 구성이라는 기능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징후처럼 보인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라는 광고문구, 웰빙 열풍과 맥을 같이 하는 ‘친환경 아파트’, 성에서 음악회를 여는 귀족적 삶을 보여주는 ‘캐슬’ 같은 아파트, 미래지향적인 최첨단 아파트 등 브랜드 아파트 광고가 보여주는 삶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것들은 “사람다운” 삶, “자연과 함께 하는” 삶, 기술발전이 가져올 “미래지향적” 삶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 광고들은 개인들을 ‘대신하여’ 생태와 기술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바람직하게 도래할 삶의 이상을 만들어준다. 미래는 그렇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 광고가 늘 그렇듯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혹은 아직-오지 않은, 미-래) 이미지를 주조해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바로 그 도래하지 않을 삶의 이미지를 자신의 삶 속으로 투사시킨다.

 

여기서 삶의 미학적 구성이라는 테제의 목표가 도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맞춰져 있기 보다는 개발과 투기의 새로운 시장 개척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른바 컬쳐노믹스(culturenomics)가 보여주는 것이 미학의 시장화라는 지점이다. 도시를 미학적으로 디자인 하는 것이 도시의 경쟁력이자 경제적 힘이라는 것이 컬쳐노믹스의 모토이다.

 

세운상가 철거후 녹지를 조성하고, 동대문운동장을 디자인플라자로 조성하고, 강남대로에 거대한 미디어 폴을 세우고, 인공 꽃밭과 인공분수로 꾸며진 광화문 광장을 만드는 모습 속에서 컬쳐노믹스는 그 실체를 드러낸다. 미학적 도시를 만든다면서 그 장소 고유의 문화와 생태 그리고 역사적 특수성과 지역성을 파괴하는 모습은 재개발 논리(혹은 신개발주의) 속에서 파괴된 미학적 상상력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상상력이 제거된 문화와 미학은 재개발 논리를 세련되게 정당화해주는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 전락한다.

 

브랜드 아파트의 유행 속에서도 미학화된 재개발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브랜드 아파트는 사실 원주민들의 삶을 뿌리 뽑는 강제 철거와 미학적 상상력이 배제된 막개발의 중심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도시적 삶의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주는 듯한 미래를 향한 희망과, 다른 한편으로 부동산 가격 상승이라는 현재의 희망을 동시에 제공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도시 재개발의 주역이 된다. 이 희망들의 결합은 사회적으로 정당화된 개발과 투기에 대한 열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축이 된다. 개발과 투기에 대한 사회적 용인은 재개발의 실질적 피해자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람들조차 재개발(혹은 뉴타운 건설)을 지지하게 하는 강력한 동인이 된다.

 

우리 사회가 조감도를 보는 방식
 
미학적 도시라는 세련된 개발 논리의 실질적 효과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보기에 좋은 것은 어두운 현실에 한줄기 빛이라도 던져주는듯한 제스쳐를 취하며 그것을 넘어선다. 미학과 생태를 개발 논리의 키워드로 내세우며 미학적 도시 개발의 원형을 만들어낸 것이 청계천 복원이었다. 그 청계천에서는 비가 오면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청계천을 둘러싼 인도와 도로에 쌓여 있던 온갖 도시오염물질들이 빗물에 쓸려 유입되기 때문이다. 비가 와서 물고기가 죽고 나면, 죽은 물고기는 조용히 치워지고 새로운 물고기들이 방류된다. 다음날 청계천에 나가보면 물고기는 여전히 그곳을 유영하고 있다. 도시에서 죽음은 이렇게 감춰지거나, 쉽게 잊혀진다. 바로 이것이 도시에서 보여지지 않는(혹은 보기에 좋지 않은) 개발의 어두운 측면이 감춰지는 방식이다.

 

보기에 좋은 것이나 보여지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 자체가 아니다. 보여지는 것은 대상을 ‘보는 방식’(way of seeing)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는 방식은 생물학적 시각의 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으로 공유되어 학습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상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사회적 관점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본다는 것 자체가 대상을 의미화 하는 실천인 것이다.

 

특히 근래에 들어 사회적으로 고유한 ‘보는 방식’은 더욱 중요해 지고 있다. 시각 자체가 사회적 소통의 기반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기반을 둔 텔레비전, 영화, 사진과 같은 매체나 미디어 아트, 시각 예술의 부흥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의 지위 등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알 수 있다. 나아가 전통적으로 소리에 기반을 둔 매체였던 전화와 같은 매체는 화려한 인터페이스와 함께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즐기고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각적 매체로 전환되고 있다. 좀 더 극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보여지는 대상은 이제 우리가 보는 방식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다.

 

1년 365일 공사중인 대한민국의 수많은 건설현장이나 유래없는 규모의 개발을 진행하는 뉴타운 계획을 보자. 그 공사현장이나 재개발 설명회를 가면 항상 보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조감도이다. 최근 도시민들은 바로 이 조감도를 보는 방식을 새롭게 익혀가고 있다. 조감도는 개발이 끝나고 난 이후 지역이나 건축물의 모양을 한눈에 보여주는 청사진이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아닌 새의 시점에서 그려진 것이며, 유토피아를 가시화 시킨 것이다. 그 조감도 속에는 풍요롭게 발전한 지역의 미래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새겨져 있다.

 

조감도는 공사현장과 재개발 설명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천에서 열린 세계 도시 축전에도, 서울 디자인 올림픽에도, 2010년 세계 디자인 수도로 지정된 서울시에도 있다. 조감도는 현재 있는 것을 그리지 않는다.(그것이 실제로 있다고 해도 새의 시점에서 그려진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람들이 “직접 인지할 수 없는 세상을 다양하게 전문화된 매체를 통해 보여지게끔 하는 것”이다. 조감도는 미래에 대해 그려진 것이지만, 스스로를 현재에 드러내며 현재보다 우위에 서려는 이미지이다. 조감도의 미래에 다가가기 위해 현재는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 되며,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견뎌야 하는 것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재개발은 도시민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많은 경우 원주민들의 삶을 파탄내고 있다. 그럼에도 뉴타운 재개발이 발표되면 수많은 주민들은 그것을 열렬히 지지한다. 그 지지자의 상당수는 재개발을 통해 아무런 직접적 이익도 얻지 못하고 심지어는 재개발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모순적으로만 보이는 이 상황 속에는 현대인이 가진 독특한 합리성이 발견된다. 한편으로는 눈앞에 놓인 물질적 이익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경제적 인간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높은 삶의 질을 위해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미학적 인간이 있다. 그러나 두 태도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것들은 인간의 삶은 문명 발달과 물질적 풍요 속에서만 질적으로 향상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두 태도가 공유하는 물질적 풍요라는 전제는 언제나 직접적인 물적 대상이 아니라, 추상화된 물질성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흔히 물신주의라고 이야기 하는 그것말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물신주의의 물신은 구체적인 물질이 아니라 비물질적 물질(혹은 물질의 비물질적 육체)을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를 향하도록 하는 자본의 욕망이다. 지금 소비해서 없애지 않고, 미래를 위해(혹은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다시 투자되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 아니던가. 때문에 물신의 대상으로서의 물질은 축적할 수 있되, 소비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요컨대 현대사회에서 개발에 대한 열정은 (그것이 경제적 태도이든, 미학적 태도이든) 물질적 풍요에 대한 열망을 전제로 하며, 나아가 자본의 욕망과 연결된다. 개발과 투기가 일상화된 시점에서 투기하는 시민들, 재개발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자신이 아닌 자본의 욕망을 내화한 자본화된 시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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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에 미친고 투기에 목맨 우리 시대의 자화상 : 개발과 투기의 일상화 1

개발에 미치고 투기에 목맨 우리 시대의 자화상

: 개발과 투기의 일상화 1

 

## 개발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드는 생성의 과정이지만, 필연적으로 폭력적 파괴를 수반한다. 과거에는 토건국가와 건설자본이 자연을 훼손시키고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의 주체였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그들과 조용히 공모하여 스스로의 목을 죄기 시작했다. 스스로 나서 자연을 훼손시키고 서로의 삶을 파탄내기 시작한 것이다.

 

작년에 나온 가장 흥미로운 책 중의 하나는 『부동산 계급사회』라는 책이다. 이 책의 가치는 부동산 투기와 개발의 관계를 비판적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도 있지만, 그보다도 자신의 모든 주장을 “통계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이 가치 있는 이유는 통계(statistics)라는 것이 그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국가의 (이해를 대변해주는) 학문(state + -tics)이라는 점에서 국가를 비판하기 보다는 국가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기능을 더 잘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손낙구는 그러한 통계를 기능전환시키고 있다. 특히 그는 국가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새로운 통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토해양부와 행정안전부, 통계청, 국세청 등의 통계를 재구성해 활용하고 있다.

 

개발이나 부동산 투기와 관련하여, 저자가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지금까지 “정부나 기업이 만들어 온 통계는 대부분 부동산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려는 것”이었다. “건설회사가 집을 많이 지어야 주택문제가 해결된다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 쓸 만한 통계”나 “주택 공급을 확대함으로써 주택 사정이 좋아졌다는 통계는 많아도 지하실, 판잣집, 움막, 동굴과 같이 처참한 곳에서 몇 명이 살고 있는지에 대한 통계”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가장 흥미로운 통계 중 하나는 부동산값 폭등기를 정부의 개발정책과 관련하여 4단계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1차 폭등기는 1965~69년으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맞물려 있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착공을 계기로 이 시기의 부동산 투기는 정점에 달한다. 2차 폭등기는 1975~79년 사이이다. 이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선언한 박정희 정권의 대규모 개발 정책과 각종 특혜를 받으며 땅 개발과 주택 공급에 나선 민간 건설회사의 급성장, 중동 건술 붐에서 벌어들인 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부동산값 폭등을 야기한 것이다. 3차 폭등기는 1988~89년 사이로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위한 대규모 개발 사업, 서해안 개발, 3저 호황으로 발생한 여유 자금의 투기 자금화 등이 겹치면서 발생했다. 끝으로 4차 폭등기는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 지금까지이다. 4차 폭등기는 아파트값 폭등, 강남 투기 열풍의 강북․수도권으로의 확산, 지역 도시 개발 정책 등의 영향 때문이었다.

 

손낙구는 이러한 4차례의 부동산값 폭등의 주체를 부동산 5적이라 부르며 비판한다. 부동산 5적은 건설재벌, 부동산 관벌, 정치인, 보수언론, 일부 학자 들을 가리키며, 그는 이들의 투기 동맹이 부동산값 폭등의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결국 토건 국가 관료와 건설 재벌, 그리고 그들에게 빌붙은 언론과 학자들이 개발과 부동산 투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중요한 변화 하나를 놓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정부와 재벌 그리고 그들과 공모한 일부 특권 계층 이외에) 개발과 부동산 투기 주체로 일반 시민이 등장하는 과정이다.

 

1966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의 방문과 함께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있었다. 당시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 참전 우방국들을 순례하고 있었고, 우리나라도 그 방문국들 중 하나였다. 이 방문은 미국의 입장에서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것이었다. 때문에 존슨 대통령이 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오는 모습부터 도착까지 모든 과정이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 생중계 되었다. 이 때 존슨 대통령의 환영식이 서울시청 근처에서 열렸고, 카메라에는 자연스레 주위 풍경이 담겨졌다. 당시 그곳 대부분은 판잣집이었다. 이 모습이 미국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교포들에게까지 비쳐졌다. 이후 재미동포들이 청와대에 연판장을 보내왔는데, 여기에는 몇 천 명의 서명과 함께 서울 도심을 재개발해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1966년은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점으로, 이 사건은 정부나 투기 자본이 아닌 민간 영역에서 개발을 독려한 최초의 사례라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 사건 하나를 보편화 시켜서 개발과 부동산 투기가 민간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었다고 일반화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개발이 단순히 국가와 자본의 이익을 위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83년에는 도시 재개발의 새로운 형태로 ‘합동재개발’ 방식이 도입된다. 합동재개발은 재개발 지역의 주민들과 민영회사가 함께 재개발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이는 이전까지 시행되었던, 정부와 주민추진위 그리고 민영 건설 업체가 함께 재개발을 진행하던 위탁개발과 기본적으로 비슷한 형식을 띄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역할이 축소되고 건설 업체의 역할이 증대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정부는 합동재개발 방식을 시행하며 민간 자본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조세경감과 공공지원 등 다양한 조건들을 제공했다. 정부는 이 방식을 조기 정착시키기 위해 1984년 1월에 ‘합동개발세부시행방침’을 마련하기도 했다. 정부가 나서서 민간 영역에서의 개발을 장려한 것이다. 또한 건설 업체는 자체적으로 개발을 시행할 수 없기 때문에, 정부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주택 소유자로 구성된 재개발 조합과의 파트너십이 중요해 진다. 민-관 파트너십이 민-민 파트너십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손낙구의 분석에서 빠져 있는 민간 영역의 역할은 그가 4차 투기 시점이라고 이야기 한 외환위기 이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4차 투기 시점은 외환위기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때 김대중 정부는 위환위기 극복 수단으로 부동산 투기를 막는 각종 규제를 완화시킨다. 예를 들어 김대중 정부는 1998년 5월 22일부터 1999년 12월 31일까지, 그리고 2000년 11월 1일부터 2003년 6월 30일까지 두 시기 동안 신축 주택을 구입하는 경우 잔금 지급일로부터 5년 안에 되팔기만 하면 1가구 2주택이라도 조세특례제한조치로 양도소득세를 면제해 주었다. 이는 전용면적 50평 이하의 경우로 한정되기는 했지만, 주택을 소유한 이들이 다른 주택에 투기를 하고 그에 따른 이익을 보장해 주는 조치였다. 이러한 조치는 국가가 직접 민간 영역에서의 개발과 부동산 투기를 인정하는 것, 나아가 투기를 장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 투기와 개발 열풍을 불러온 핵심적 대상은 아파트이다. 아파트 가격 상승의 직접적 원인은 정부와 민간 두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정부의 영역에서 보자면 외환위기 직후 단행된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조치를 아파트값 상승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다른 한편, 지금 주목하고 있는 민간 영역에서는 아파트 부녀회 등의 민간 자치회가 아파트 가격 상승을 이끈 주체로 등장한다. 그들은 아파트 가격을 올리기 위해 담합을 하고 아파트 입주자들을 상대로 캠페인을 벌인다. 2006년 강북지역의 한 아파트 입구에는 “평당 1,500 이하로는 팔지 맙시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아파트에 설치된 엘리베이터 주민 게시판에는 “지방도 평당 천만원인 넘습니다. 강북의 대치동, 아름다운 우리 아파트. 최고의 아파트를 만듭시다. 우리 모두 하나가 됩시다.”와 같은 선동적인 문구가 등장했다.

 

아파트 가격 담합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부녀회와 같은 아파트 자치회는 구체적인 거래 액수를 정해 그 액수 밑으로 매물을 내 놓는 집을 공개하겠다고 압박을 넣기도 하고(“시세 이하로 매물이 나올 경우 동호수를 실명공개하며, 이전에 내놓은 매물은 해당 세대와 협의해 매물가격을 고치도록 하겠다”), 그 매물을 받은 부동산 중개업소와는 거래를 하지 않도록 결의함으로써 실질적인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부동산 업소에게는 매물 회수와 불매 운동에 들어갈 수 있음을 엄중히 경고해 주십시요”). 이 외에도 경기 부천시 중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단결하라, 그리하면 오르리라”는 제목의 전단지가 신문에 끼워져 배포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2006년 여름 이러한 담합행위를 ‘시장질서 교란행위’로 규정하고 법적으로 규제하려했다. 하지만 정부는 곧바로 태도를 바꿔 담합 자제를 유도하는 간단한 행정 조치로 마무리 지었다. 이후 자치회의 직접적인 아파트 가격 담합 행위는 자제되는 듯 했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공공연하게 가격 담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개발과 부동산 투기는 토건 국가와 건설 자본의 고유한 영역이 아니다. 일반 시민들은 개발과 부동산 투기의 주체가 되었으며, 그들에게 투기는 일상이 되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서울시의 뉴타운 재개발은 이러한 투기의 일상화와 강하게 유착되어 있다.

 

이제 일상의 투기꾼들은 재개발 뉴타운이 “MB시대 부동산 투자의 핵”이며, 이러한 투자를 통해 “강남부자 따라 잡기”가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그들은 소액으로 투자에 성공할 수 있다고 외치며, “내집 마련 최고의 기회”가 재개발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전 부동산 투자 교육”을 통해 그러한 기회를 포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이 사회는 시민들에게 “뉴타운이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뉴타운 재개발에 미쳐라”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 외침들을 내화하여, 삶을 꾸려나가고 행동을 규제하는 원칙으로 받아들인다. [『재개발 뉴타운:MB시대 부동산 투자 핵, 금액대별 투자 비법. 알짜 투자지역 전격 공개 』(중앙일보조인스랜드, 2008); 『강남부자 따라잡기 재개발 뉴타운』(위더스콤, 20008); 『앞으로 5년, 내집 마련 최고의 기회 재개발에 있다: 소액으로 성공하는 뉴타운ㆍ재개발 투자의 모든 것』(더난출판사, 2008);『재개발.뉴타운 100% 정복하기: 실전 부동산 투자교육 』(예응, 2009); 『뉴타운이 희망이다』(제플린 북스, 2009);『뉴타운 재개발에 미쳐라』(제플린 북스, 2009)]

 

요컨대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4차 투기와 개발의 열풍은 이전의 단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개인들이 개발과 투기의 주체로 등장하면서 투기의 일상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토건)국가와 (건설)자본과 (투기) 시민은 개발과 부동산 투기라는 지점에 모여 있는 모종의 공모자가 된다.

 

그런데 시민이 개발과 투기의 공모자가 된다는 점은 여전히 미심쩍어 보인다. 투기하는 시민은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 능력을 가진 이들과 일확천금을 노리고 없는 돈까지 끌어들여 투기자금으로 활용하는 일부 과잉 투기꾼에 한정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발과 투기에 대한 열정은 중산층이나 과잉 투기꾼과 같은 일부의 욕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광범위한 시민들의 동참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집이 없는 거주민과 뉴타운 재개발 때문에 자신이 살던 지역에서 쫓겨나야 하는 사람들마저도 서울시의 뉴타운 재개발을 지지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재개발 지역 원주민의 재정착률은 20% 미만이다) 2008년 총선에서는 뉴타운 재개발을 공약으로 내세운 이들이 당선되면서 ‘타운돌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신도시 건설과 같은 개발 사업에서도 역시 (재개발의 피해자가 될 것이 분명한)다수의 주거 약자들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개발과 투기에 대한 열정이 단순히 경제적 이득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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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이제 빈대떡 신사에게 돌아갈 집은 없다

 

대한민국은 1년 365일 공사중이다. 도로를 뒤엎고, 건물을 올리는 개발의 풍경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그것은 배정된 예산을 모두 소진해야 하는 공무상의 이유 때문만도 아니고, 유독 삽질을 좋아하는 대통령 탓만도 아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가진 강박의 풍경이다. 지속적이고 강제적이며, 보편적이고 중독적인 개발은 시대의 강박 그 자체이다. 개발은 경제적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여겨지며,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의 직접적 산물이기도 하다.

 

개발이란 의도적으로 자연을 변형시켜 인간의 질서 속으로 편입시키는 행위이다. 마르크스는 최악의 건축가가 정교한 벌집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꿀벌보다 훌륭하다고 말한다. 건축가는 건축물을 짓기 전에 이미 머리 속에 완성된 건물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추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하는 능력은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추상력에 기반을 둔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언급은 개발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드러내 준다. 개발이란 단순히 자연의 인위적 변형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중심에 두고 그것에 조응하도록 자연을 새롭게 발명하는 작업이다. 인간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디자인 하는 것은 하나의 도로, 하나의 건축물, 하나의 공원이 아니라 그것들을 둘러싼 자연 그 자체인 것이다.

 

다시, 인간은 자연 자체를 설계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을 그 자체의 의지에 반하여 강제적으로 인간의 질서로 편입시키는 과정에는 폭력이 개입된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폭력이기도 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할 인간 자신에 대한 폭력이기도 하다. 청계천 복개 과정을 통해 우리가 확인한 것이 바로 이 과정이다. 개천이나 강은 그 발원지에서 시작해 더 큰 강이나 바다로 흘러간다. 그것은 끝없는 물의 순환이며, 자연의 흐름이다. 그러나 복개된 청계천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청계천이 시작되는 소라광장에는 마치 그 곳이 발원지나 되는 마냥 물이 솟아오르는 분수가 있고, 청계천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있다(그러나 정작 물은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면 청계천을 둘러싼 폭 좁은 긴 풀숲이 나오지만,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대한 건물과 도로밖에 없다.

 

청계천은 마치 도심 속의 자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시선 속에서만 자연이 된다. 개발은 이처럼 인간의 의도와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自-然)을 강제적으로 인간의 삶 내부로 포섭하여 새롭게 배치하는 작업이다. 4대강 개발 역시 마찬가지이다. 4대강 개발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자연을 비자연화-인간화 하는 작업이다.

 

재개발 역시 이러한 개발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것을 개발이라고 부르지 않고 재(再)라는 접두사를 붙여 부를 때는 그냥 개발과 다른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개발은 개발과 무엇이 다른가. 용어만 풀어보자면 재개발은 다시 개발한다는 말이다. 개발의 대상이 자연 그 자체 였다면, 재개발은 개발을 통해 인간화 된 것을 개발의 대상으로 삼는다. 개발이 자연을 인간의 질서로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면, 재개발은 인간화 된 것을 재-인간화 시키는 과정이다.

 

인간화 된 것을 재-인간화 시키는 것은 현대라는 독특한 시대의 리듬에 맞게 대상을 파괴하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신이 아닌 인간에 의해 일어나는 일인 이상, 그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파괴가 수반된다. 새로움에 대한 열정이 파괴와 생성의 반복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개발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적으로 사용되는 과정이라면, 재개발은 파괴와 생성의 반복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과정이다. 재개발은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 투사되어 파괴와 생성을 강박적으로 되풀이하며, 그 자체가 생산이자, 소비이자, 욕망이 되는 사태이다.

 

“현대의 조건은 끊임없는 움직이는 데 있다. 선택은 현대화 아니면 소멸일 뿐이다. 따라서 현대사는 설계하기의 역사이자, 자연에 맞서 진행된 꾸준한 정복전/소모전에서 시도되고 퇴색되고 폐기되고 버려진 설계도의 박물관/묘지였다.”(지그문트 바우만)

 

재개발은 보통 도심 재개발과 주택 재개발로 구분된다. 도심 재개발을 통해 현대적 시설을 갖춘 업무 지구와 주상복합 지역 그리고 꿈과 희망이 넘치는 소비로 가득한 복합소비공간이 만들어진다. 주택 재개발은 무허가 주택과 저소득층 주거지역을 대상으로 하며, 재개발을 통해 고급 빌라나 맨션 혹은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형성된다.

 

개발에서 훼손된 자연이 문제시 되었다면, 재개발에서는 인간의 삶 자체가 문제시 된다. 재개발을 거쳐 만들어진 새로움은 그것을 소비할 재력이 없는 사람들을 배제한다. 새롭게 만들어진 상업 및 주거 공간에서 기존에 있던 거주자들이 배제되는 것이다. 재개발 이후 원주민들의 재정착률은 20퍼센트 이하이다. 서울의 경우,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거의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한 재개발이 계획되어 있고, 상당부분 이미 진행중이다. 재개발이 진행될수록 서울은 점점 중산층화 될 것이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민중은 점점 주변화 될 것이다.

 

용산 참사는 재개발의 이러한 모순을 정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민중의 저항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예외적인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재개발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그것이 새로운 것의 소비에 대한 열망이라는 현대의 강박으로부터 연원하는 이상, 현재에도 미래에도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인 것이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붙여 먹지.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라는 재미있는 가사 때문에 ‘빈대떡 신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재개발이 일상이 된 요즘 이 노래는 더 이상 농담으로도 못 쓰이게 되었다. 이 노래가 유행할 즈음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빈대떡 붙여 먹으러 돌아갈 집이나 방 한 칸 정도는 있었나보다. 지금은 그것도 없다. 1인당 국민 소득이 그렇게 올랐다는데, 삶은 더 팍팍해져만 간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도시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시민권이라는 용어는 재활용도 안되는 쓰레기가 되었다. 어원상 시민권(citizen)은 도시(city)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권리였다. 이제 시민권은 그 원래 의미를 찾아가는 듯하다. 시민권은 도시에 살 수 있는 중산층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재개발로 인해 도시에서 쫓겨나야 하는 민중들은 시민권을 가질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죽여도 아무도 처벌 받지 않는다. 최악의 재판으로 기억될 용산 참사 판결에서 보았듯이 말이다. 집도, 권리도, 생명도 보장받지 못하는 우리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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