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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04
    2009년, 이제 빈대떡 신사에게 돌아갈 집은 없다
    와라

2009년, 이제 빈대떡 신사에게 돌아갈 집은 없다

 

대한민국은 1년 365일 공사중이다. 도로를 뒤엎고, 건물을 올리는 개발의 풍경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그것은 배정된 예산을 모두 소진해야 하는 공무상의 이유 때문만도 아니고, 유독 삽질을 좋아하는 대통령 탓만도 아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가진 강박의 풍경이다. 지속적이고 강제적이며, 보편적이고 중독적인 개발은 시대의 강박 그 자체이다. 개발은 경제적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여겨지며,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의 직접적 산물이기도 하다.

 

개발이란 의도적으로 자연을 변형시켜 인간의 질서 속으로 편입시키는 행위이다. 마르크스는 최악의 건축가가 정교한 벌집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꿀벌보다 훌륭하다고 말한다. 건축가는 건축물을 짓기 전에 이미 머리 속에 완성된 건물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추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하는 능력은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추상력에 기반을 둔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언급은 개발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드러내 준다. 개발이란 단순히 자연의 인위적 변형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중심에 두고 그것에 조응하도록 자연을 새롭게 발명하는 작업이다. 인간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디자인 하는 것은 하나의 도로, 하나의 건축물, 하나의 공원이 아니라 그것들을 둘러싼 자연 그 자체인 것이다.

 

다시, 인간은 자연 자체를 설계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을 그 자체의 의지에 반하여 강제적으로 인간의 질서로 편입시키는 과정에는 폭력이 개입된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폭력이기도 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할 인간 자신에 대한 폭력이기도 하다. 청계천 복개 과정을 통해 우리가 확인한 것이 바로 이 과정이다. 개천이나 강은 그 발원지에서 시작해 더 큰 강이나 바다로 흘러간다. 그것은 끝없는 물의 순환이며, 자연의 흐름이다. 그러나 복개된 청계천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청계천이 시작되는 소라광장에는 마치 그 곳이 발원지나 되는 마냥 물이 솟아오르는 분수가 있고, 청계천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있다(그러나 정작 물은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면 청계천을 둘러싼 폭 좁은 긴 풀숲이 나오지만,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대한 건물과 도로밖에 없다.

 

청계천은 마치 도심 속의 자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시선 속에서만 자연이 된다. 개발은 이처럼 인간의 의도와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自-然)을 강제적으로 인간의 삶 내부로 포섭하여 새롭게 배치하는 작업이다. 4대강 개발 역시 마찬가지이다. 4대강 개발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자연을 비자연화-인간화 하는 작업이다.

 

재개발 역시 이러한 개발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것을 개발이라고 부르지 않고 재(再)라는 접두사를 붙여 부를 때는 그냥 개발과 다른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개발은 개발과 무엇이 다른가. 용어만 풀어보자면 재개발은 다시 개발한다는 말이다. 개발의 대상이 자연 그 자체 였다면, 재개발은 개발을 통해 인간화 된 것을 개발의 대상으로 삼는다. 개발이 자연을 인간의 질서로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면, 재개발은 인간화 된 것을 재-인간화 시키는 과정이다.

 

인간화 된 것을 재-인간화 시키는 것은 현대라는 독특한 시대의 리듬에 맞게 대상을 파괴하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신이 아닌 인간에 의해 일어나는 일인 이상, 그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파괴가 수반된다. 새로움에 대한 열정이 파괴와 생성의 반복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개발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적으로 사용되는 과정이라면, 재개발은 파괴와 생성의 반복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과정이다. 재개발은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 투사되어 파괴와 생성을 강박적으로 되풀이하며, 그 자체가 생산이자, 소비이자, 욕망이 되는 사태이다.

 

“현대의 조건은 끊임없는 움직이는 데 있다. 선택은 현대화 아니면 소멸일 뿐이다. 따라서 현대사는 설계하기의 역사이자, 자연에 맞서 진행된 꾸준한 정복전/소모전에서 시도되고 퇴색되고 폐기되고 버려진 설계도의 박물관/묘지였다.”(지그문트 바우만)

 

재개발은 보통 도심 재개발과 주택 재개발로 구분된다. 도심 재개발을 통해 현대적 시설을 갖춘 업무 지구와 주상복합 지역 그리고 꿈과 희망이 넘치는 소비로 가득한 복합소비공간이 만들어진다. 주택 재개발은 무허가 주택과 저소득층 주거지역을 대상으로 하며, 재개발을 통해 고급 빌라나 맨션 혹은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형성된다.

 

개발에서 훼손된 자연이 문제시 되었다면, 재개발에서는 인간의 삶 자체가 문제시 된다. 재개발을 거쳐 만들어진 새로움은 그것을 소비할 재력이 없는 사람들을 배제한다. 새롭게 만들어진 상업 및 주거 공간에서 기존에 있던 거주자들이 배제되는 것이다. 재개발 이후 원주민들의 재정착률은 20퍼센트 이하이다. 서울의 경우,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거의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한 재개발이 계획되어 있고, 상당부분 이미 진행중이다. 재개발이 진행될수록 서울은 점점 중산층화 될 것이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민중은 점점 주변화 될 것이다.

 

용산 참사는 재개발의 이러한 모순을 정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민중의 저항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예외적인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재개발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그것이 새로운 것의 소비에 대한 열망이라는 현대의 강박으로부터 연원하는 이상, 현재에도 미래에도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인 것이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붙여 먹지.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라는 재미있는 가사 때문에 ‘빈대떡 신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재개발이 일상이 된 요즘 이 노래는 더 이상 농담으로도 못 쓰이게 되었다. 이 노래가 유행할 즈음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빈대떡 붙여 먹으러 돌아갈 집이나 방 한 칸 정도는 있었나보다. 지금은 그것도 없다. 1인당 국민 소득이 그렇게 올랐다는데, 삶은 더 팍팍해져만 간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도시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시민권이라는 용어는 재활용도 안되는 쓰레기가 되었다. 어원상 시민권(citizen)은 도시(city)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권리였다. 이제 시민권은 그 원래 의미를 찾아가는 듯하다. 시민권은 도시에 살 수 있는 중산층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재개발로 인해 도시에서 쫓겨나야 하는 민중들은 시민권을 가질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죽여도 아무도 처벌 받지 않는다. 최악의 재판으로 기억될 용산 참사 판결에서 보았듯이 말이다. 집도, 권리도, 생명도 보장받지 못하는 우리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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