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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 님의 '고대녀와 네이년은 한끝 차이'를 읽고 예전에 썻던 글이 생각나서 올려본다.
2006년에 쓴 글이니 벌써 3년이 지난 글이지만... 그래도...
(예전에 문화사회 2호에 기고했었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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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편향의 사회 : 영상매체의 발달과 된장녀 논란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은 시각이다. 우리는 어딜가든 만들어진 영상들과 대면한다. 거리에서는 만들어진 영상들이 나와 함께 걷고, 집과 사무실에서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쏟아내는 영상들의 폭격을 받는다. 필자는 현대사회의 주된 특징이 이러한 시각 편향성-그 중에서도 특히 영상매체에 의존한 시각 편향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의 시각편향성은 다른 감각을 억압할 뿐 아니라 같은 시각에 의존한 매체인 활자매체마저 배제시킨 채 영상매체를 특권화 시킨다. 영상매체가 특권화되는 과정에서 기술복제가 가능한 사진과 영화 그리고 텔레비전 등의 전자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현대사회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 매체발달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매체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대상을 재현하고 인식하는 방식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글은 영상매체의 발달과정을 추적하고 그에 따른 인지방식의 변화(혹은 그 가능성)를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나아가 마지막 사례인 된장녀 논란이 발생하는 과정을 매체의 특성과 함께 분석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머물고 있는 매체발달의 지형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 사례 1. Video killed the radio star
1981년 하나의 살해사건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범인은 video였고 피해자는 radio star였다. 1981년 개국한 MTV는 그들의 첫 뮤직비디오로 그룹
“… Video killed the radio star / Video killed the radio star / In my mind and in my car / We can't rewind / We've gone to far / Pictures came and broke your heart / Put the blame on VCR …”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어 / 내 마음, 내 차 속에서 살아 있던 / 되돌릴 수는 없어 / 너무 멀리 와버렸거든 / 영상이 너의 맘을 짓이겼지 / VCR을 원망해라.)
- The 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 중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건 살해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은 라디오 스타의 청각 중심 음악이 시각성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청각중심의 음악에 시각성을 부여하는데 실패한 몇몇 음악인들은 살해당하기도 했고, 크게 다치기도 했다. 안타깝지만 그것은 청각에만 의존하던 음악인들의 필연적인 퇴화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청각만으로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VCR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VCR을 활용하는 것이다.
# 사례 2. 전화와 카메라
멀리 있는 것을 소리를 통해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전화이다. 따라서 전화는 청각에 기반을 둔 매체이다. 핸드폰도 전화의 일종이고 당연히 청각에 기반을 둔 매체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청각 장애인은 전화를 사용할 수 없지만 핸드폰은 사용할 수 있다. 2001년 방영된 드라마 <엄마야 누나야>에는 청각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나왔으며 핸드폰은 타인과의 중요한 소통수단으로 쓰였다. 핸드폰에는 시각에 기반한 소통 수단인 문자 서비스 기능이 있다. 따라서 당연히 청각장애인도 사용 가능하다. 근래에 나오는 핸드폰에는 문자 서비스 외에 중요한 기능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이 바로 ‘카메라’ 기능이다. 요즘은 카메라 없는 핸드폰은 구하기도 힘들다. 카메라 없는 핸드폰은 잘 팔리지도 않는다니 핸드폰에 카메라는 필수적인 구성요소라 할 수 있다. 핸드폰 기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게임과 인터넷은 기본이고, 작년에는 핸드폰에 텔레비전마저 부착되었다. 이쯤 되면 핸드폰은 더 이상 전화가 아닌듯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핸드폰이 전화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오늘날 시각과 청각이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마샬 맥루한에 따르면 (알파벳의 발명과 함께) 인쇄술의 발달 이후 인간의 감각은 시각에 편향되어 왔다. 활자매체를 접하기 위해 인간은 시각을 사용해야 했다. 활자매체를 해독하기위해 시각을 주된 정보 수용 감각으로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경험은 단편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선형적 문자에 따라 선형적 사고가 복합적인 비선형적(혹은 직물적) 사고를 가로막아왔다.(선형적 사고에 대해 빌렘 플루서는 그의 글 ‘코드화된 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의 텍스트를 해독하려면(읽으려면) 눈은 행을 따라 미끄러져야 한다. 행의 마지막에 가서 비로소 우리는 메시지를 수신해 그것을 요약하고 종합하도록 해야 한다. 선형의 코드는 그것의 통시성을 동시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전진적인 수신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결과 새로운 시간 체험이, 말하자면 선형의 시간, 철회할 수 없는 진보의 흐름, 반복 불가능성이라는 극적인 상황, 구상, 간단히 말해 역사라는 새로운 시간 체험이 생겨난다.” 플루서의 이러한 관점은 뒤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맥루한은 이를 시각이 다른 감각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특권화시키는 일종의 왜곡이라고 본다. “시각 기능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알파벳은 어떤 문자문화에 있어서도 청각, 촉각, 미각과 같은 시각 이외의 감각의 역할을 줄여버린다(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맥루한은 활자매체 이후 전자매체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가 보기에 전자매체는 활자매체의 시각편향적인 왜곡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매체였다. 맥루한이 전자매체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텔레비전을 논의의 중심에 둔다. 텔레비전은 시각에 청각을 결합시킴으로써 활자매체에 의해 잠식된 청각을 복원시키는 매체이다. 즉 그에게 텔레비전은 단편적인 경험이 아닌 종합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이다. 텔레비전을 시각과 청각의 종합적인 매체로 본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맥루한이 텔레비전을 정세도definition가 낮고 참여도participation가 높은 쿨한 미디어로 본 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그의 미디어에 따른 지각방식의 변화에 대한 이론이 시대착오적인 것은 단순히 텔레비전에 대한 잘못된 분석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가 시각 편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판단 자체가 더 시대착오적이다. 앞에서 제시한 두 가지 사례는 시각과 청각의 결합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은 텔레비전과 다른 결합이다. 두 사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순수하게 청각에 의존한 예술과 매체가 시각에 의해 ‘흡수’되고 있는 현상이다.
가장 순수하게 청각에 의존하는 예술인 음악이 시각과 결합하였다. 그것은 청각이 사라질 수 없다는 점에서 보면 결합이지만 현대의 음악 중 어떤 음악들은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는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흡수이다. 얼굴과 몸으로 음악을 하는 댄스 가수들과 영화제작비와 맞먹는 물량을 투입해서 만든 화려한 뮤직비디오들을 생각해보라. 음악은 마치 영상의 배경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또한 벨벳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들으면 앤디워홀의 바나나가, 핑크플로이드의 음악을 들으면 베를린 장벽이, 야니의 음악을 들으면 자금성이 떠오른다. 패션을 생각하지 않고 그램록과 힙합을 들을 수도 없다. 음악은 이제 청각만으로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없다. 핸드폰도 마찬가지이다. 통화 기능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카메라가 없는 핸드폰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활자매체 시대를 지나 전자매체 시대에도 시각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감각 기관이다. 그렇다면 현재도 맥루한이 말한 시각편향의 구텐베르크 은하계에 속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금 시대는 활자매체 시대와 다른 시각 편향을 보이고 있다. 활자매체 시대와 다른 지금 시대의 시각편향의 특징을 포착해 내기 위해서는 레이 초우를 따라 루쉰의 사례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 사례 3. 뉴스영화와 루쉰
루쉰은 의학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인이 처형당하는 영화(슬라이드)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충격을 받은 루쉰은 사람들의 병든 몸보다 병든 마음을 개조하는게 더 시급한 일임을 인지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영화 매체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담고 있는 레이 초우의 책 <원시적 열정>은 이처럼 루쉰을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만든 (루쉰 자신이 서술한) 에피소드를 분석하면서 시작한다. 레이 초우는 루쉰의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새롭게 출현하고 있던 ‘근대성’이, 특히 시각에 기초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는 세계 곳곳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루쉰의 경험은 마르틴 하이데거와 발터 벤야민과 같은 유럽 지식인들이 근대에 대해 썻던 것을 선취했다. … 잔니 바티모는, 아주 상반된 내용의 하이데거와 벤야민의 두 논문이 같은 해인 1936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그들이 최소한 ‘방향감을 상실했다는 것에 대한 집착’이라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 루쉰이 충격 속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영화라는 미디어에 의한 확장과 증폭의 과정’이라는 것은 거의 지적된 바가 없다(레이 초우, 원시적 열정).”
루쉰의 에피소드는 영상이 근대인에게 가져온 충격과 그 영향력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서 규명되어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루쉰은 영상매체에 충격을 받았는데 ‘왜 활자매체를 병든 맘을 치유하는 수단으로 선택하게 되었는가’하는 것이다. 초우는 이를 ‘전향’-나아가 ‘물러남’과 ‘도피’라고 표현한다. “‘신체’가 아닌 글쓰기를 통해서 중국의 ‘정신’을 치유하겠다는 루쉰의 결심은 일종의 '물러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초우는 ‘루쉰의 물러남’을 통해 과거의 활자매체와 현대의 영상매체의 차이를 포착하고 있다.
“루쉰이 택한 문학으로의 전향이라는 ‘해결책’은 말의 의의를 계속해서 특권화한다는 오래된 대책이었다. … 루쉰의 이야기에는 의학에서 문학으로의 근본적인 전향말고도 또 하나의 다른 전향, 즉 ‘전통으로의 재전향’이 있다. … 루쉰이라고 하는 박학한 남성 지식인은 ‘문자텍스트로 도피’했는데, 그것은 초국적 제국주의의 한가운데서 학살당하는 중국인 남성이 야비하고 잔혹하게 전시되는 것을 은폐하는 것이 된다(레이초우, 원시적 열정).”
활자매체와 영상매체는 둘 다 시각 편향의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영상매체와 활자매체 사이에는 초우가 문자텍스트를 ‘전통’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볼 수 있는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 차이는 초우가 루쉰에게 문자 텍스트로 도피함으로써 전시되는 것을 은폐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우는 활자매체가 영상매체가 가진 날것의 느낌과 그것이 보여주는 시선, 다시 말해 영상을 통한 재현의 충격적 사실성과 제 3세계를 대상화하는 제국주의의 시선을 은폐시킨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은폐는 활자매체의 전통이 영상매체의 새로움을 억압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시각은 “억압되어도 반드시 돌아온다. 쓰기와 읽기 개념을 내부에서부터 변화시키기 위해서.” 초우에 따르면 루쉰의 소설은 과거의 소설과 상당히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과거 왕조의 전통적인 소설이 장광설이었던 데 비해, 짧은 문학형식은 압축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메시지를 전하는 언어텍스트이다.” 초우는 근대의 소설쓰기 방식의 변화를 포착하여 영상문화가 어떻게 전통문화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초우가 보기에 “그것은 그림이 텍스트가 되는 문제가 아니라 언어텍스트가 그림으로 변화하는 문제이다.”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전통과 구별되는 현대사회의 시각 편향은 사진과 영화로부터 출발한다. 벤야민은 사진과 영화를 찍는 기술적 도구인 카메라를 통해 인간의 지각 방식이 변화할 것이라 예언했다. 카메라는 클로우즈 업과 고속촬영을 통해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를 탐구할 수 있게 했고 이는 시각의 변화와 함께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영상매체는 그 기술적 잠재성을 실현하여 활자매체와는 다른 시각 편향을 가져왔다. 카메라로 대표되는 영상매체의 기술적 가능성은 바로 그 새로움에 있다. 활자매체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생각이 고정되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자기 완결성을 갖는다. 그 자기 완결성은 선형성의 외부를 사유할 수 없게 한다. 활자매체 안에서 우리는 활자매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플루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어는 ‘논리’라고 불리는 규율을 따르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언어는 방언적․상상적 그리고 모든 비언어적인 사고를 비판하는 데 막강한 도구가 되었다. … 문자언어는 탈신비화 및 탈마술화를 위한, 곧 계몽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논리적 규율을 지키는 문자언어는 서양의 사고에서 강력한 우위를 차지한 나머지, 그 규칙, 곧 논리는 모든 사고규칙과 동일해졌다. 사람들은 우리가 비언어적으로도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기 시작했다(플루서, 코드전환)."
영상매체는 활자매체가 가진 이러한 한계를 넘어선다. 영상은 자기 완결적 텍스트가 아니다. 우리는 영상을 통해 시각적 무의식을 탐구할 수 있으며,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상은 열린 텍스트이다. 그것은 언어적 사고 능력을 벗어나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영상매체는 복제의 전면성과 전복성을 가지며, 비언어적 사고(선형성을 탈피한 직물적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기존의 시각 체제를 동요시키는 영상매체의 기술적 잠재성은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했다. 영상매체의 기술적 잠재성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는 “테크놀로지 일반이 그러하듯 정치․군사적, 산업적 논리에 의해 매개되어 제도화됨으로써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기술적 잠재성이 정치경제적 논리에 의해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배태된 영상의 범람 속에서 살고 있다. 주은우가 메츠의 말을 빌어 이야기 하듯 “영화제도란 영화 산업일 뿐만 아니라 영화에 친숙해진 관객이 역사적으로 내면화해 왔고 소비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정신적 기계’이기도 하다.” 주은우의 말에서 영화를 영상매체로 바꾼다 해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다.
영상매체의 전면성과 전복성이 활자매체와 다른 현대사회 시각 편향의 내용이다. 우리는 루쉰처럼 영상을 통해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지만 엄청난 정보량을 자랑하는 영상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루쉰처럼 충격을 받지 않는 이유는 이미 영상을 소비하는 능력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영상매체의 또 다른 기술적 잠재성인 비언어적 사고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것이 가능하게 되기 위해서는 영상을 단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 사례 4. 핸드폰으로 찍은 영화
"세계 최초로,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한 장편영화가 등장했다. <버라이어티>는 남아프리카 출신 감독 아리안 카가노프가 이라는 90여분짜리 장편영화를 100%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완성했다고 보도했다. 카가노프 감독이 이 영화를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11일, 들인 제작비는 약 16만5천달러다. 감독은 소니 에릭슨 W900i 기종의 휴대폰 8대를 동원해 영화를 찍고 극장 상영이 가능한 버전으로 블로업까지 마쳤다. 카가노프 감독은 '블로업 결과도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좋았다'며 '휴대폰 카메라가 35mm카메라의 독재로부터 영화감독을 해방시켰다. 나는 기술적인 제약없이 정말 마음껏 내가 찍고 싶은 것을 찍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흥분을 감추지 않고 있다(시네21 No. 545, 순도 100% 휴대폰 카메라 영화 등장)."
영상매체의 기술적 잠재성을 포괄적으로 실현할 가능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것은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 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영상매체의 일상화를 가져왔다. 영상을 소비 하던 대중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함께 영상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핸드폰에는 디지털 카메라가 달려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들은 심지어 영화까지 찍는다.) 반드시 핸드폰이 아니더라도 휴대하기 쉽고 가격도 싼 디지털 카메라나 디지털 캠코더도 이미 널리 보급되었다. 만들 의지만 있다면 비전문가도 영상을 간편하게 찍어 컴퓨터로 편집하여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위의 사례가 핸드폰으로 장편 극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가지지만 이미 몇 해 전부터 핸드폰이나 디지털 캠코더로 찍은 다큐멘터리나 간단한 영상물들이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영상을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영상 생산 과정의 비밀이 대중에게 베일을 벗고 드러난다. 대중은 영상을 생산할 수 있게 됨으로써 비로소 영상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영상의 생산이 가능해지고 나서 비로소 대중들은 영상을 통해 비언어적(혹은 직물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직물적 사고란 창조하는 것이다. 선형적 사고가 우리를 미리 프로그램화된 해석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았다면 직물적 사고는 우리를 둘러싼 울타리를 제거하고 마음껏 활개하도록 만들어 준다. 선형적 사고에서는 현재의 원인이 되는 과거-즉 이미 있는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데서 머무른다. 하지만 직물적 사고에서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대안적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주어진 객관적인 세계의 주체가 아니라, 대안적인 세계들의 기획이다.(플루서, 디지털 가상)"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우리는 직물적으로 사고하고 있는가?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함께 누구에게나 영상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영상을 생산해 내는 것이 대안적 삶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영상을 생산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원시인들은 영상을 통해 자신들의 상상력을 펼쳤다. 그들이 영상을 통해 사유한 것은 문자와 같은 소통할 수 있는 매체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시시대의 상상력은 자연을 모방하거나 허구적 표상에 염원을 담아두는 "주술적 상상력"이다. 현대사회에서 영상은 문자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이다. 오랜기간 문자를 통한 사고와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문자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인은 문자가 내포한 사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영상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현대의 상상력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타고 넘는 "기술적 상상력"이다. "기술적 상상technoimagination은 그림들을 개념으로 만든 후 그러한 그림들을 개념의 상징으로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다(플루서, 코무니콜로기)."
# 또 하나의 사례. '된장녀' 논란의 발생 과정
몇 해 전부터 여성을 'oo녀'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개똥녀', '떨녀', '딸녀', '월드컵녀', '덮녀', '괴물녀', '귀족녀' 그리고 '된장녀' 등이 그것이다. 이 수많은 ‘oo녀’들의 탄생은 디지털 카메라와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카메라에 찍힌 여성들에게 누리꾼들이 관심을 보이며 나타나는 현상이 ‘oo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최근에 크게 논란이 되었던 '된장녀' 논란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된장녀 논란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영상매체 발달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하나의 징후로 포착되어야 한다. 2006년 여름 우리사회는 '된장녀' 논란에 휩싸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된장녀가 논란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과정이다. 사치와 허영을 여성으로 표상하는 문제적 시선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식민지 시기 '신여성(모던걸)'이나 영화 <자유부인>이 일으킨 논란이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된장녀 논란은 내용 자체로 보면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또한 '된장녀'라는 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쓰이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된장들의 저녁식사(cafe.daum.net/ihat-edwhenjang)'같은 인터넷 카페 등에서는 한국 여인들을 '된장'으로 표현, 서양 문화를 추종하고 서양 남자라면 맥을 못 추는 한국 여성들을 성토해왔다(월간 말 No. 243, 21세기 된장녀로 부활한 식민지 시대 모던걸)."
된장녀가 논란이 되기 시작한 시점은 디씨인사이드(www.dcinside.com)에 <된장녀와 사귈 때 해야 되는 9가지>라는 만화가 올라오면서 부터이다. 몇 몇 누리꾼들이 이 만화를 보고 된장녀에 관심을 보이며 널리 퍼져 나간 것이다. 특히 초기에 된장녀는 디지털 카메라에 찍힌 - 특히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외국 브랜드를 소비하는 - 여성들의 ‘사진’과 함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된장녀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쏟아진 분석과 언론의 과잉 보도로 하나의 주류 담론이 되었다.
된장녀가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이다. 첫째, 된장녀는 사치와 허영을 표상하는 (과거부터 있어왔던 문제적 시선의)언표로써만 존재할 뿐 실체가 불분명하다. 둘째, 불분명한 대상이 만화나 사진 등의 영상을 통해서 ‘구체성을 획득’함으로써 명확한 (지배규범을 만들어내는 남성들의)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영상은 대상을 확인 가능한 형태로 재현함으로써 구체성을 부여한다. 또한 영상은 충격적인 사실성과 구체성으로 사람들을 자극한다. 영상을 생산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영상을 통해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 사람들은 그 가능성을 살해한다. 사람들은 영상의 일차적인 직접성에만 천착함으로써 문자를 타고 넘는 것이 아니라 문자의 프로그램 안으로 흡수된다. 여기서 세 번째 과정이 완성된다. 사람들은 프로그램화된 구조 속으로 그림을 투여함으로써 그림을 보기 ‘전에’ 해석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프로그램을 만드는게 아니라 프로그램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된장녀 사례는 우리 사회가 머물러 있는 기술적 상상력의 단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영상은 문자가 내포한 사고의 결핍을 극복하는 기제가 아니라 그 결핍을 강화시키는 보족물로써 사용되고 있다. 이로써 디지털 카메라와 인터넷이라는 최첨단 디지털 매체는 대상에 대한 믿음이나 표피적 재현만을 수행함으로써 ‘주술적 상상력’과 조우한다. 이를 퇴행으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며, 필자만의 착각일까?
벤야민이 1913년에 쓴 ‘경험(Erfahrung)’이라는 글이다.
원문은 독일어이지만 내가 독일어를 못하는 관계로 영역본을 기초로 번역했다.
내가 참고한 영역본은 Havard University Press에서 나온 벤야민 선집이고(이 선집에서 이 글은 제일 처음 실려 있다), Lloyd Spencer와 Stefan Jost가 영역했다.
벤야민 영역본에는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이 구분되지 않고, 둘 다 Experience로 번역되어 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이 글에서도 경험(experience)이라는 단어만 나오고 있다. 아직 독어판과 비교해 보지 못한터라 Erlebnis도 Experience로 번역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경험과 체험이 이 글에서도 (표기는 경험으로 되어 있지만, 내포된 의미를 보면)명확히 구분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뒷부분에서 경험으로 번역한 몇몇 부분은 체험으로 옮겨 적어야 의미가 명확해 질 듯 하다. 이 구분은 벤야민의 사상을 연구할 때 핵심적인 내용을 가진 것이므로 개념적으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벤야민은 영상 매체가 대중에게 던지는 충격을 체험이라고 말한다. 경험에 대한 체험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상징계에 대한 실재의 침입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나는 여기서 경험=상징계, 체험=실재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벤야민에게서 이 두 개념의 구분은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떠들어도 이 글을 번역해서 올리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 글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태해지려할 때,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어떤 것이든 전환점이 필요할 때 즐겨 읽는 글이다. 내 영어(와 번역_ 실력의 미천함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읽기 싫은 사람은 안 읽으면 되니 내 책임은 아니겠지... 라고 정당화해 본다. 아직 초벌 번역이라 문장이 이상한 데가 많을테니 감안하고 읽어 보시길.
추가 : 연구소의 로아님이 벤야민 독어판 전집을 가지고 있어서 비교해 본 결과, 이 글에 나오는 경험이라는 단어는 모두 Erfahrung으로 나와 있었다고 합니다(로아님 확인 감사^^). 그리고 영어로 sprit(독어 Geist)이라고 되어 있는 용어를 제가 영혼이라고 번역했는데, 보통 독어의 Geist는 영어로 spirit로 번역되는데 한글로도 정신으로 옮기는 것이 통례라고 지적해주셨습니다. 제가 영혼이라고 번역한 것들(옆에 spirit이라고 영문표기를 달아놓았습니다)은 정신(geist)라고 생각하고 읽으시면 됩니다. 다만 제가 spirit을 영혼으로 옮긴 것은 without spirit과 같은 문구가 나와서 인데,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정신 없이'정도가 되서 어감상 오해의 여지가 있으리라 판단해서입니다. 정신없다는 말은 우리말에서는 관영어구처럼 쓰이기 때문에 벤야민이 쓰는 맥락과 조금 다르게 다가올수 있으니까요. 어쨋든 이런 점 주의해서 읽으시면 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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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Experience, Erfahrung, 1913) - 발터 벤야민
책임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가면 쓴 이들에 맞서 싸운다. 어른들의 가면은 ‘경험’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표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고 항상 동일하다. 어른은 항상 이미 모든 것을 경험했다: 젊음, 이상, 희망, 여성. 그것은 모두 환상이다. - 종종 우리는 겁먹거나 괴로워한다. 아마도 그는 옳다. 우리의 반론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다.[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가면을 벗기려 시도해 보자. 어른이 경험한 것은 무엇일까? 그가 우리에게 증명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그 역시 한 때 젊었었다는 것, 그 역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했었다는 것, 그 역시 그의 부모에 대한 믿음을 거절당했다는 것, 그러나 그들이 옳다는 것을 삶이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보자, 그는 훌륭한 방식으로 웃는다.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다. - 그는 미리 우리가 살아갈 (진지한 삶의 기나긴 엄숙함 이전에 오는)철없는 환희의 세월들을 평가 절하한다. 이렇게 선한 것, 교화된 것. 우리는 우리에게 짧은 젊음을 허용조차 하지 않는 씁쓸함(bitterness)이라는 다른 선생들을 알고 있다: 진지하고 엄한, 그들은 우리들을 삶의 고역으로 바로 밀어 넣는다. 양자의 태도는 우리의 세월들을 평가절하하고 파괴한다. 게다가 감정에 엄습 당한다: 우리의 젊음은 짧은 밤이다(환희로 채워라); 그것은, 타협의 세월들, 관념의 빈곤, 그리고 활력의 결여와 같은, 거대한 ‘경험’에 뒤따라 올 것이다. 그런 것이 인생이다. 그것이 어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경험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그들의 경험이다. 이 하나, 결코 다를 것 없는: 인생의 무의미함. 그것은 잔인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훌륭하거나 새롭거나 진취적인 어떤 것을 장려한 적이 있던가? 아니다, 명확히도 이것들은 경험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 - 진실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 - 는 그 자신 안에 지평을 수립한다. 그럼, 경험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 그리고 이 속에 비밀이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위대한 것, 의미 있는 것에 시선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속물(the philistine)은 경험을 그의 복음으로 취한다. 그것은 그에게 인생의 공통성에 관한 메시지가 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거기에 경험과는 다른,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험될 수 없는 가치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포착하지 못한다.
속물에게는 왜 삶이 의미도, 이유도 없는 것일까? 그는 (다른 것은 모른채) 경험만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sprit)의 부재와 황량함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공통적인 것 그리고 항상-이미-낡은 것 외에 다른 것과 내적 관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경험이 우리에게 줄 수도 앗아갈 수도 없는)다른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비록 지금까지의 모든 사상들이 잘못된 것이라 해도,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혹은 비록 아직까지 그 누구도 완료하지 못했다 해도 지속되어야 하는 충실함을 알고 있다. 그런 것들은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 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나이든 이들은, 피곤한 몸짓과 초연한 절망으로, 모든 것에서 옳은 것일까? 다시 말해, 우리가 경험한 것은 후회일 것이고, 초석이 되는 용기, 희망, 의미는 경험될 수 없는 것이라는게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영혼(spirit)은 자유로울 게다. 하지만 또 다시 삶은 쇠약해질 것이다. (경험의 총체인)삶은 위안 없는 것일 뿐이므로.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런 물음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혼(spirit)과 함께 그런 낯선 삶을 인도해야 하는가? 그들의 나태한 자아는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같은 삶에 의해 농락당해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 각자의 경험은 값어치가 있다. 우리 자신은 우리만의 영혼으로 그것들에 값어치를 투여한다 - 경솔한 그는 착오에 만족한다. 그는 탐색자에게 “너는 절대 진리를 찾을 수 없어”라고 외친다. “그것이 내 경험이야.” 그러나 탐색자에게 ‘착오는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스피노자). 다만 어리석은 자에게 그것은 의미와 영혼이 결여된 경험이다. 아마 맞서는 자에게 경험은 고통스럽겠지만, 그를 절망으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어째든, 그는 결코 덤덤하게 포기하지도, 속물의 리듬에 마취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은 속물에게 ‘(당신은)모든 새로운 무의미함 속에서 기쁨만 느낄 수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그는 옳음 속에 잔존한다. 그는 스스로 재-확신 한다: 영혼(spirit)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영혼’ 앞에서 위대한 경외와 가혹한 복종을 요구하는 이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비판적이 된다면, 그도 그가 만들 수 없는 것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지에 반해 그가 겪는) 영혼의 경험 조차도 그에게는 무관심한 것이 된다.
그에게 말하라
그가 한 사람의 남자/어른(a man)이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젊음의 꿈을 우러러보아야 한다는 것을.
(프리드리히 실러, 돈 카를로스 중)
속물에게는 “그의 젊음의 꿈”만큼 꺼림칙한 것이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감성적임은 그의 혐오의 보호적 위장이다. 왜냐하면 그의 꿈에서 그에게 나타난 것은 (모두에게 그렇듯이, 예전의 그를 부르는)영혼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젊음이 끊임없이 그리고 불길하게 그를 일깨우는 어떤 것이다. 그것이 그가 젊음에 적대적인 이유이다. 그는 어린 사람들에게 그런 무서움(압도적인 경험)에 대해 말하고, 그들에게 그들 자신을 비웃도록 가르친다. 특히 영혼 없이 경험하는 것이 편하다고, 만약 되찾을 수 없다면.
다시: 우리는 다른 경험을 알고 있다. 그것은 영혼에 적대적이고, 피어나는 꿈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범접할수 없고, 가장 직접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젊음을 유지하는 동안 결코 영혼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짜라투스트라가 말했듯이, 개인은 방황의 끝에서만 자신을 경험할 수 있다. 속물은 그만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속적인 영혼없음(spiritlessness) 중의 하나이다. 젊음은 영혼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가 덜 쉽게 위대함을 얻을수록, 방황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영혼과 더 많이 대면할 것이다. - 그가 남자/어른이 되었을 때, 젊음은 측은하게 될 것이다. 속물은 불관용적이다.
폭력론
-소렐, 벤야민, 데리다, 파농, 아렌트의 논의를 중심으로
박홍규 • 영남대학교 교수/ 법학
1. 폭력의 뜻
국어사전에서 폭력이란 ‘함부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힘’으로 풀이되고, ‘폭력을 써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단체’가 폭력단이라고 설명된다. 그리고 폭력주의자는 테러리스트, 폭력주의는 테러리즘이라고 한다. 즉 폭력은 테러라는 것이 국어사전의 이해이다. 그러나 국어사전에서는 폭력의 영어를 force라고 표기한다. 일반적으로 영어에서 폭력은 테러(terror)도 힘(force)도 아닌 violence를 말한다. 영어사전에서 violence란 ‘비공인의 완력이나 물리적 힘에 의한 강습’을 뜻하고, 공인된 군대나 경찰의 경우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이나 경찰력의 행사는 폭력이 아니게 된다. 이는 폭력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으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재산에 손해를 입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로 정의하는 입장과 같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폭력이 그런 것이다. 이러한 폭력 개념은 윤리나 정치 또는 법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관념이 되고 있는 것으로 폭력을 힘의 비합법적인 행사인 악으로 보는 전통적인 개념이다.
이런 입장은 ‘구체적인 행동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제한적이라고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 조희연․조현연, 「국가폭력․민주주의 투쟁․희생에 대한 총론적 이해」, 조희연 편, ꡔ국가폭력, 민주주의 투쟁, 그리고 희생ꡕ, 함께읽는책, 2002, 26쪽.
그러한 견해는 이러한 비판을 하면서도 달리 폭력을 정의하지 않고서, 억압의 폭력(기성 지배체제가 휘두르는 제도적 폭력, 공격적 폭력)과 해방의 폭력(필연적으로 불법적인 저항적 폭력, 생존의 방어를 위한 폭력)이란 개념을 사용하여 제도나 저항까지 폭력에 포함한다. 그러나 그런 개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폭력 개념을 구체적인 행동에만 집중한다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이유는 이러한 견해에서 사용되는 폭력이란 개념은 매우 특수하기 때문이다. 즉 종래의 일반적인 폭력 개념은 억압의 폭력이나 해방의 폭력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고, 폭력이란 개념은 억압과 해방이라고 하는 정치 사회적인 맥락에서 특수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위 견해는 억압의 폭력을 전쟁, 고문, 살인, 학살 등으로 상징되는 ‘국가폭력’이란 말로 이해한다. 위의 책.
그러나 그러한 국가폭력도 구체적인 행동을 뜻하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물론 위 견해는 그런 국가폭력을 낳는 근거인 유신체제와 같은 악법을 ‘제도적 폭력’이라고 보고 있으나, 법제도까지 폭력이라고 보는 경우 폭력에 대한 더욱 엄밀한 정의가 필요하다.
폭력에 대한 구조적인 정의는 빈곤을 비롯한 사회적 부정의를 말하는 더욱 광범한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예컨대 Johan Galtung, “Violence, Peace and Peace Research," The Journal of Peace Research6(2), 1969, pp. 167-91. 특히 p. 168과 p. 173. 또한 N. Garver, “What Violence Is," in J. Rachels and F. A. Tilman (eds), Philosophical Issues: A Contemporary Introduction, New York: Harper & Row, 1972, pp. 223-8. 또한 빈곤과 관련해서는 S. Lee, 'Poverty and Violence', Social Theory and Practice 22 (1) 1996, pp. 67-82.
그것은 개인이나 제도에 의해 또는 사회 자체에 의해 가해지는 물질적인 피해는 물론 심리적인 피해까지 낳는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된다. 주로 평화 연구의 영역에서 평화를 저해하는 모든 반평화적 행태나 제도를 폭력으로 보려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너무나도 광범하고 모호하다는 비판도 있다. C. A. J. Coady, “The Idea of Violence," Journal of Applied Philosophy 3 (1) 1986, pp 3-19.
이와 달리 폭력=테러라는 말은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정부가 이슬람 또는 그 일부 세력 그리고 북한 등을 비난하며 지칭하는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행사하는 힘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슬람 등은 미국 등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국제관계에서 사용되는 폭력 논의는 그 판단이 쉽지 않으나, 어느 측이든 자신을 폭력이라고 말하지 않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개념으로 사용함은 확실하다.
이처럼 폭력이란 말의 사용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적어도 법적으로 폭력은 불법이므로 그 합법성이 논의될 수 없다. 물론 법적인 차원에서도 가령 범죄의 피침해자가 자력구제를 가하는 경우라든가 또는 노동자나 노동조합의 쟁의행위와 같이 그 폭력에 대한 법적 판단이 반드시 구체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예외적이다. 그러나 그런 법적 평가와 무관하게 억압적 국가 권력 자체를 ‘합법적 폭력’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에 대한 법적인 판단은 국가 권력 자체를 폭력이 아니라 합법적인 ‘권력’이라고 보는 것을 전제로 하여, 권력의 부당한 폭력적 행사에 대해서만 법은 적어도 원칙적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여하튼 그런 부당한 권력의 폭력적 행사에 대해 비폭력을 주장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예컨대 인도의 간디처럼) 유효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대부분의 경우 더욱 큰 권력의 폭력적 행사를 초래할 수도 있고, 그런 경우에는 도리어 폭력적 저항(예컨대 알제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식민지 해방 투쟁)이 유효할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해방 전략의 차원에서 무조건적인 비폭력 주장은 반드시 유효한 것이 아니고, 폭력이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갖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여하튼 이 글은 폭력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정의에 대해서는 각종 사회과학 사전이나 문헌을 살펴볼 수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는다. 대신 이 글에서는 소렐, 벤야민, 데리다, 파농, 아렌트의 폭력 논의를 중심으로 폭력에 대한 사상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논의의 핵심은 국가폭력과 그것에 대항하는 저항폭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개념에서 사용되는 폭력은 위에서 본 일반적인 폭력의 개념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 즉 국가 권력의 부당한 폭력의 행사와 그것에 저항하는 정당한 폭력의 행사를 대립시켜 그 범주에서만 폭력을 검토하는 것이다.
원문 : http://jbreview.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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