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주는 연관성 없는 것들을 충돌시켜 제 3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제 3의 의미는 사진으로 주어진 상황 속에서가 아니라, 상황과 단절(정지)됨으로써 상황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구성적 사진술은 사진 안에서 인위적 조작을 통해 의미를 충돌시키기도 하지만, 앗제나 잔더의 사진처럼 사회적 맥락과 연동하여 의미를 구성하는 사진까지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표제 설명이 앞으로 사진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될 것이라는 벤야민의 말은 구성적 사진술의 가지는 정치적 효과와 함께 파악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벤야민이 구성적 사진술을 가능하게 한 선구자적 역할을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돌리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3.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자들은 “낡아버린 것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에너지”와 맞닥뜨린다. 그들의 서정시가 보고하는 공간은 “사건들 간의 상상도 못할 유사성들과 얽힘이 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그 공간 속에서 세속적인 것 속에서 성스러운 것을, 성스러운 것 속에서 세속적인 것을 발견한다. 혁명적 에너지는 이러한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충돌로 나타난다. 성스러운 것은 인식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저항할 수 없는 어떤 것, 너무 멀리 있어 현재화 할 수 없는 비역사적 신화이다. 성스러운 것 속에서 세속적인 것을 보는 행위는 완전하다고 생각된 신화에 균열을 내는 작업이다. 아우라가 없는 대상, 소멸되어 가는 것의 존재 자체가 성스러움 속에 있는 하나의 공백이다. 성스러움 속에서는 낡고 소멸되어가는 것의 존재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낡아버린 것에서 혁명적 에너지를 발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세속적인 것 속에서 성스러운 것을 발견하는 행위는 낡은 것의 성스러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성스러움은 영원성을 추구하지만, 낡은 것은 사라져가는 것이기에 순간적이다. 낡은 것의 성스러움을 발견한다는 것은 낡아 버리는 행위의 영원성을, 모든 것은 새로움이면서 동시에 낡은 것이 되어가는(소멸되어 가는) 과정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의 소멸, 모든 것의 순간성이라는 영원불변의 법칙을 깨닫는 것이 바로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변증법이다.
벤야민 사상의 정신적 모티브중 하나인 보들레르의 모더니티에 대한 언급을 잊어서는 안된다. 보들레르는 “모더니티는 일시적인 것, 우발적인 것, 즉흥적인 것이 예술의 절반이며, 나머지 절반은 영속적인 것과 불변적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그 일시적임만이 영속된다’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꿈을 통해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변증법을 제시했다면, 벤야민은 꿈에서 깨어남을 통해 그 변증법의 정치성을 읽어낸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꿈속에서 성스러운 것의 균열을 읽어 내고, 도취를 통해 그 균열을, 그 공백을 파고 들어간다. 앗제의 사진이 초현실주의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시는 무엇보다 인구밀도를 통해 규정된다. 그런 도시에서 앗제는 사람이 없는 도시의 풍경을 찍었다. 아우라의 대상인 사람이 제거된 사진은 하나의 추상이다. 가장 사실적 도구로 추상을 통해 도시의 균열과 인식되지 못한 삶의 흔적을 그려나가는 사진, 그것이 초현실주의자로서 앗제의 사진이다. 벤야민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꿈으로부터 깨어남으로써 새로운 정치성을 논의한다. “종교적 각성(성스러운 것)을 참되고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결코 환각제를 통해서가 아니다. 그 극복은 세속적인 각성, 유물론적이고 인류학적인 영감 속에서 이루어진다.” 세속적인 각성을 통해 꿈속에서 발견된 성스러운 것의 균열을 현재화하고 비평하는 것. 벤야민이 말하는 정치성은 그 각성, 성스러운 것에 몰입하지 않고, 그 틈을 발견하고 파고드는 (성스러운 것으로부터) 거리두기의 행위를 말한다.
4. 구성적 사진술과 표제
구성적 사진술과 표제는 이러한 정치성을 극대화 시키는 한 방식을 제공한다. 바르트는 사진이 “시각으로 채우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폭력적”이라고 말했다. 마치 설탕이 쓴맛, 매운맛, 짠맛을 배제한 채 단맛으로 미각을 채워 하나의 맛을 강요하듯이, 사진은 의미를 분석하거나 희석시키는 일 없이 단번에 강요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언어적 효과만을 연상시키는 천편일률적인 르포르타쥬”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러한 사진의 특성을 모르거나 무시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측면을 응시하며 사진의 정치성을 극대화 시키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구성적 사진술의 역할이다. 벤야민이 제시한 표제의 역할이란 천편일률적인 르포르타쥬에 언어적 연상효과를 극대화하는 설명이 아니다. 표제는 구성적 사진술의 일부이다. 사진에 표제를 부여함으로써 의미의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유익한 소격효과를 제공할 수 있다. 벤야민은 사진작가에게 “사진에 제목을 붙일 줄 아는 능력”을 요구하며, 이를 통해 사진작가가 “사진을 유행적 소비품으로부터 빼내어 그 사진에 혁명적 사용가치를 부여”하게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카메라 기술의 발달은 광범위하게 “순간적이면서도 신비스러운 영상이 불러일으키는 쇼크”를 제공할 것이며, 이 사진들은 “기계적인 연상작용을 정지상태”에 이르게 할 것이다. 표제는 이 사진들과 결합해 의미의 외연을 확장하면서 함축적 의미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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