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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2
    사진, 이미지의 정치 : '사진의 작은 역사'(벤야민, 1931) 독서노트 - 민호
    와라

사진, 이미지의 정치 : '사진의 작은 역사'(벤야민, 1931) 독서노트 - 민호

이글은 일종의 독서노트 이다.
벤야민의 '사진의 작은 역사'를 읽고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한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이미지의 정치[이 글에서는 사진이라는 장르에 한정짓는다 해도]를 「사진의 작은 역사(1931)」라는 하나의 글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글은 「사진의 작은 역사」의 흐름을 최대한 따라가되 「초현실주의(1929)」,「생산자로서의 작가(1934)」,「역사철학 테제(1940)」의 논의를 빌려 벤야민에게 이미지의 정치가 의미하는 바를 추적한다. 이 글에서 쓰인 모든 벤야민의 말은 이 네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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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야민의 매체 이론은 언제나 정치성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사진의 작은 역사」 역시 사진이 어떤 정치성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글의 핵심으로 파고들 수 있다. 여기서는 초현실주의, 소격, 구성적 사진술과 표제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사진의 정치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앗제의 사진, 소격

10.jpg  
벤야민에 따르면 앗제는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이며, 대상을 아우라로부터 해방시킨 인물이다. 그의 “소멸된 것과 못쓰게 된 물건에서 소재를”찾아서 찍은 사진은 “침몰하는 배로부터 물을 빨아들이듯이 현실로부터 아우라를 빨아들”였다. 아우라의 대상 - 인물, 거창한 광경, 상징적 기념물은 사라지고 소멸된 것과 못쓰게 된 물건이 사진에 등장할 때,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이 느끼게 되는 낯설음, 벤야민은 그것을 유익한 소격을 찾으려는 작업의 일환이다. 
이라고 불렀다. 아우라의 대상이 사진에서 사라질 때 대상 뒤에 숨어 있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보지 못했던 것들과 대면할 때 느껴지는 낯설음을 통해 우리는 낡은 것 속에 담겨 있는 역사를 응시할 수 있게 된다. 벤야민이 낡은 것 속에서 역사를 응시하는 것은 과거 속에 매몰되기 위함이 아니다. 낡은 것 속에는 “전체 역사의 진행 과정이 보존되고 지양”되고 있다. 벤야민은 낡은 것을 통해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의 표식, 달리말해 억압된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기회의 신호를 인식”하려했다. 소격은 “낯익어 보이는 모든 것이 세부적인 것의 조명을 위하여 탈락되는 그런 장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일상을 낯선 풍경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은 몰입을 방해하는 거리두기의 정치학이면서, 낡은 것 속에서 현재의 기원을 찾으려는 작업의 일환이다.
  
 여기서 잠깐 벤야민이 말하는 기원에 대해 말하고 들어가자. 기원이라는 말이 상당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에게 기원은 실증주의에서 말하는 원인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원(ursprung)은 지극히 역사적인 범주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한다는 것과는 무관하다. (…) 기원이란 이미 발생한 사태의 생성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태를 의미한다. 기원은 소용돌이치는 생성의 흐름 속에서 정지해 있다. (…) 기원의 율동은 이중적 통찰 앞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수잔 벅 모스, 『발터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재인용)

   몽타주는 연관성 없는 것들을 충돌시켜 제 3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제 3의 의미는 사진으로 주어진 상황 속에서가 아니라, 상황과 단절(정지)됨으로써 상황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구성적 사진술은 사진 안에서 인위적 조작을 통해 의미를 충돌시키기도 하지만, 앗제나 잔더의 사진처럼 사회적 맥락과 연동하여 의미를 구성하는 사진까지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표제 설명이 앞으로 사진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될 것이라는 벤야민의 말은 구성적 사진술의 가지는 정치적 효과와 함께 파악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벤야민이 구성적 사진술을 가능하게 한 선구자적 역할을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돌리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3.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자들은 “낡아버린 것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에너지”와 맞닥뜨린다. 그들의 서정시가 보고하는 공간은 “사건들 간의 상상도 못할 유사성들과 얽힘이 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그 공간 속에서 세속적인 것 속에서 성스러운 것을, 성스러운 것 속에서 세속적인 것을 발견한다. 혁명적 에너지는 이러한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충돌로 나타난다. 성스러운 것은 인식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저항할 수 없는 어떤 것, 너무 멀리 있어 현재화 할 수 없는 비역사적 신화이다. 성스러운 것 속에서 세속적인 것을 보는 행위는 완전하다고 생각된 신화에 균열을 내는 작업이다. 아우라가 없는 대상, 소멸되어 가는 것의 존재 자체가 성스러움 속에 있는 하나의 공백이다. 성스러움 속에서는 낡고 소멸되어가는 것의 존재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낡아버린 것에서 혁명적 에너지를 발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세속적인 것 속에서 성스러운 것을 발견하는 행위는 낡은 것의 성스러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성스러움은 영원성을 추구하지만, 낡은 것은 사라져가는 것이기에 순간적이다. 낡은 것의 성스러움을 발견한다는 것은 낡아 버리는 행위의 영원성을, 모든 것은 새로움이면서 동시에 낡은 것이 되어가는(소멸되어 가는) 과정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의 소멸, 모든 것의 순간성이라는 영원불변의 법칙을 깨닫는 것이 바로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변증법이다. 

   벤야민 사상의 정신적 모티브중 하나인 보들레르의 모더니티에 대한 언급을 잊어서는 안된다. 보들레르는 “모더니티는 일시적인 것, 우발적인 것, 즉흥적인 것이 예술의 절반이며, 나머지 절반은 영속적인 것과 불변적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그 일시적임만이 영속된다’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꿈을 통해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변증법을 제시했다면, 벤야민은 꿈에서 깨어남을 통해 그 변증법의 정치성을 읽어낸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꿈속에서 성스러운 것의 균열을 읽어 내고, 도취를 통해 그 균열을, 그 공백을 파고 들어간다. 앗제의 사진이 초현실주의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시는 무엇보다 인구밀도를 통해 규정된다. 그런 도시에서 앗제는 사람이 없는 도시의 풍경을 찍었다. 아우라의 대상인 사람이 제거된 사진은 하나의 추상이다. 가장 사실적 도구로 추상을 통해 도시의 균열과 인식되지 못한 삶의 흔적을 그려나가는 사진, 그것이 초현실주의자로서 앗제의 사진이다. 벤야민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꿈으로부터 깨어남으로써 새로운 정치성을 논의한다. “종교적 각성(성스러운 것)을 참되고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결코 환각제를 통해서가 아니다. 그 극복은 세속적인 각성, 유물론적이고 인류학적인 영감 속에서 이루어진다.” 세속적인 각성을 통해 꿈속에서 발견된 성스러운 것의 균열을 현재화하고 비평하는 것. 벤야민이 말하는 정치성은 그 각성, 성스러운 것에 몰입하지 않고, 그 틈을 발견하고 파고드는 (성스러운 것으로부터) 거리두기의 행위를 말한다. 

4. 구성적 사진술과 표제

  구성적 사진술과 표제는 이러한 정치성을 극대화 시키는 한 방식을 제공한다. 바르트는 사진이 “시각으로 채우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폭력적”이라고 말했다. 마치 설탕이 쓴맛, 매운맛, 짠맛을 배제한 채 단맛으로 미각을 채워 하나의 맛을 강요하듯이, 사진은 의미를 분석하거나 희석시키는 일 없이 단번에 강요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언어적 효과만을 연상시키는 천편일률적인 르포르타쥬”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러한 사진의 특성을 모르거나 무시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측면을 응시하며 사진의 정치성을 극대화 시키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구성적 사진술의 역할이다. 벤야민이 제시한 표제의 역할이란 천편일률적인 르포르타쥬에 언어적 연상효과를 극대화하는 설명이 아니다. 표제는 구성적 사진술의 일부이다. 사진에 표제를 부여함으로써 의미의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유익한 소격효과를 제공할 수 있다. 벤야민은 사진작가에게 “사진에 제목을 붙일 줄 아는 능력”을 요구하며, 이를 통해 사진작가가 “사진을 유행적 소비품으로부터 빼내어 그 사진에 혁명적 사용가치를 부여”하게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카메라 기술의 발달은 광범위하게 “순간적이면서도 신비스러운 영상이 불러일으키는 쇼크”를 제공할 것이며, 이 사진들은 “기계적인 연상작용을 정지상태”에 이르게 할 것이다. 표제는 이 사진들과 결합해 의미의 외연을 확장하면서 함축적 의미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2. 창조적 사진술과 구성적 사진술

Hurrah, the Butter is All Gone!(1935).jpg   이미지의 정치성에 대해 해명하려 할 때 소격과 함께 주목해서 봐야 하는 것은 글의 후반부에 나오는 창조적 사진술과 구성적 사진술의 대립이다. 창조적 사진술은 사진을 사회의 제반 영역으로부터 독립시켜 사진과 인간적 연관을 제거함으로써 ‘사진을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을 말한다. 사진에 창조적인 면이 있다면 그것은 변덕스럽게 변화하는 유행에 자신을 내맡길 때만 산출된다. 왜냐하면 창조적인 것은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모방하면서 모순적으로 다른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유행의 등에 업혀 산출된 창조적인 것은 (인간적 연관으로부터 벗어나있기 때문에) 표피적 상업성의 선구자 노릇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구성적 사진술은 사진과 인간적, 사회적 연관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브레히트의 말처럼 현실이 “너무 복잡해졌기 때문에 단순한 현실 재현은 현실에 대해 무엇인가를 설명해 줄 수 없”다. 따라서 “인위적인 것, 인공적인 것을 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단순한 재현이 아닌 인위적인 구성을 통해 새로운 것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몽타주이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상생활의 사소하기 짝이 없는 진실한 파편들이 회화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치 책갈피에 찍혀 있는 살인자의 피 묻은 지문이 텍스트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혁명적 내용의 많은 부분은 사진의 몽타주 속에서 구제되고 있다. 책의 커버를 정치적 수단으로 삼고 있는 죤 하트필드의 작품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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