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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표절자

이 글은 사과문이다.

지금까지 내 글을 읽고 최소한의 신뢰를 보내온 독자들이 '있다면', 그분들께 보내는 사과문이다.

그리 대단한 글쟁이는 아니기에 이런 글까지 써야할까도 싶지만, 그래도 공부하는 학생의 양심상, 그리고 몇몇 매체에 글을 써온 사람으로서 제대로 반성해야 겠기에 글을 남긴다.

뭐냐하면...

표절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표절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의 글을 인용 표시 없이 썻다.

그것이 실수인지, 의도한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내가 경솔했던 것이고, 무책임했던 것이다.

한 번이라도 내 글을 읽어 본 적이 있는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린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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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뜬금 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기도할거 같다. 

그 분들을 위해서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계속 기억하면서 곱씹어야 하는 일이기에 어딘가에 뭍혀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 두려 한다.

얼마전, 그러니까 정확히 2010년 10월 26일 한통의 메일을 받았다.

대학원 신문의 독자라는 분이었다.(현재 나는 중대 대학원 신문 서평란에 한 학기 정기 기고를 청탁받고 쓰고 있는 중이다)

그 분은 나의 인용표시 없는 인용, 즉 표절을 문제삼고 있었다.

다음은 10월 26일 받은 편지의 전문이다.(메일을 보낸 분과 실명이 거론된 다른 분의 이름을 제외한 전문이다).

허민호님, 안녕하세요.
<대학원신문> 독자의 한 사람인 000이라고 합니다.
이메일 작성 의도는 첨부된 사진을 통해 파악하실 수 있을 듯합니다.
상식이 있는 "대학원생"이라면 기고자의 표절 전력을 지적, 제보하면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줄 알았는데 현직 편집위원이 표절 작가의 기고를 중단하는 일도 없고 표절 여부에 독자에게 사과하는 일도 단연코 없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문제 당사자가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하니 직접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지요. ^^
다 른 사람도 아니고 000 선생님 지도 하에, 다른 주제도 아니고 지적재산권에 관한 논문을 쓰고 이른바 진보 운동을 하시는 대학원생의 양심과 이름 있는 대학교의 대학원신문이 표절 시비에 관해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다음 호를 내는 모습이 감탄스럽습니다. ^^
상황 파악이 안 되시는 경우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가운데 '홀로코스트' 챕터의 재독을 권합니다. ^^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한 게 다섯 군데인데 두 문장만 따옴표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많이 신기하네요.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치시길 바라며,
독자 000 드림.
 
 
이 글에는 2006년 석사 1차 때, 대학원 신문사에서 일하며 쓴 기사 하나가 캡쳐되어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연히 나의 잘못이고 해서 반성 겸 해서 그 분께 답장을 보냈다.
다음은 당일 저녁 내가 쓴 답장의 전문이다.

안녕하세요 

허민호입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지적하신데로, 제 경솔함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입니다.

앞으로 좀 더 신중하고, 책임감 있게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대학원신문에 확인해보니, 나름 논의가 있었고, 기고를 중단할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선생님께서도 한사람의 입을 가로막기 위해 이런 지적을 했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연구자이면서 학생의 입장에서 좀 더 책임감 있게 글을 써야한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앞으로도 좋은 지적 부탁드립니다.

 

허민호 드림
그리고 일주일 정도가 지난 11월 1일 다시 그 독자분께 답장이 왔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안녕하세요.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글을 쓴 의도를 곡해 없이 파악하시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해명해 주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허민호님께서는 기고 중단 건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지 공식적으로 표절 건을 해명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허민호님을 어떠한 사적 감정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표절 문제 자체의 비윤리성을 인정하더라도 표절을 하게 된 과정을 고려하면 결국 개인이 저지른 하나의 실수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당장 허민호 기고자의 기고를 중단해 달라고 요구할 생각이 없으며, 신문을 만드는 편집위원들의 논의 결과를 경시하려는 의도도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중앙대학교의 <대학원신문>의 독자적 권한은 물론 내부 필자와 외부 기고자가 글쓸 권리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원론적으로 말해서, 기고를 유지하고 중단할지의 여부는 표절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독자들이 접하고 판단한 뒤에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절차상으로 편집위원들이 외부 필자의 기고 여부를 결정할 편집권을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일과 작은 일을 비유하는 일이라 조심스럽지만, 국민 대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회가 어떤 사안을 비준한다면 법률의 절차상으로는 하자가 없으나 결코 의원들이 타당한 절차를 밟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중앙대학교에 소속된 학생이 아닙니다. 따라서 해당 언론이 학내에서 얼마나 읽히는지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 웹상으로도 얼마나 많은 독자 피드백이 진행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많지 않은 덧글과, 학생 언론의 영향력이 강력하지만은 않다는 상식에 비추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뿐입니다.
표절 건에 대한 허민호 님의 해명이 소수일지 모를 독자들에겐 그다지 큰 관심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의 기사가 2006년에 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각에서 기억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로써,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의식하든 관계 없이 학문 세계에서 용인하기 힘든 과거의 과오를 스스로 인정하는 허민호님의 글을 볼 수 있다면 저로서는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이런 바람을 전하면서 두서 없는 글을 마칩니다.
안녕히 계세요.
 
000 드림.

 

그러니까 요는 개인의 반성으로는 충분치 않고, 공적인 반성과 사과를 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원 신문의 지면에 내 사정을 봐줄만한 공간은 없어 보인다.

현재 편집위원들의 판단과 계획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대학원신문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글이 대학원 신문에 실린 글이긴 하지만, 그 글로 인해 현재의 대학원 신문을 그 책임의 주체로 내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학원 신문은 한겨레 신문이나 경향신문 혹은 동아일보 같이 하나의 지속적인 입장을 가진 신문이 아니다. 그것은 매 학기 새로운 편집위원을 선출하는 공간이다. 그것은 새로운 편집위원의 손에서 매번 새롭게 만들어지는 종류의 신문이다. 때문에 내 개인의 잘못을 대학원 신문이라는 공간을 통해 반성하지는 못할듯 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공간이다.

문제가 된 그 때의 글은 여기 올라와 있지는 않지 않고, 전부는 아니지만, 외부에 기고한 글의 대부분이 이 곳에 모여 있다. 이 공간이 내 글을 읽는 분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이 공간에서 반성과 사과를 하는 것,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공개적인 방식의 사과와 반성인듯하다.

유명한 글쟁이도, 정치인도 아니기에 내 이런 이야기를 신경쓰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그리고 이 곳에서 내 글을 읽는 분들께는)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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