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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09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환경
    와라
  2. 2009/11/06
    법치는 원래 정치다 : 용산 판결과 미디어법 판결
    와라
  3. 2009/09/12
    아이돌과 정치의 이상한 만남
    와라
  4. 2009/07/17
    저작권, 정치에 다가가기
    와라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환경

각지에서 진행되던 벚꽃축제가 끝나고도 몇주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제야 겨울이 끝난 느낌이다. 봄은 온적도 없는데, 이제 곧 여름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상할 정도로 갑작스런 기후 변화가 당황스럽다. 쓰나미에 지진에 화산폭발까지 재난의 지구화라고 할만한 현상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자연환경이 야기시킨 재난은 이제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스펙타클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다. 이 사태들의 개별적인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연환경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소위 자연환경의 오염이나 훼손의 문제가 문명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심각하게 훼손된 환경을 생각해보면, 물이나 공기도 팔겠다는 말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됐다. 환경은 이제 인간에 의해 통제되고 개발되는 대상이 된 것이다. 물론 인간은 환경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통제의 범위를 상당부분 확대해 나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개막식 때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날씨를 조정하라는 정부의 명령이 내려졌었고, 이런 날씨 조정 기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번 달 9일에는 2차대전 승전 65주년 기념행사가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열리는데, 이 행사에서도 모스크바 상공의 비구름을 인공적으로 제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 통제할수 있는 환경의 범위는 극히 협소하다. 이런 대단한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급속도로 증가하는 자연 재난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 환경은 본질적으로 지구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특정한 세력의 관할권이나 주권에 의해 통제될 수 없다. 때문에 환경훼손과 관련된 문제는 지구적 협치의 대상이 된다. 이미 UN에서는 1987년 <우리의 공유 미래>라는 발간물에서 환경에 대한 착취나 파괴를 대체할 개념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현재까지 국가간 체계 내에서 환경을 다룰 때 근간이 되는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개념이다. 우리나라 역시 이 이념에 근간을 두고 환경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지난 2008년에는 국가지속가능발전위원회가 출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여전히 발전을 위한 지속 가능성이라는 발전주의 모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발전주의 모델에서 환경은 경제적 발전에 종속되어 있다. 환경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지 않고, 언제나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어 측정되고 계산된다. 환경이 발전주의 모델에 종속변수가 되는 한, 새만금이나 4대강 개발과 같은 문제는 언제든 재발 될 수 있다.

 

방금 지적했듯, 환경 훼손의 문제는 지구적 범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한 국가의 영토적 경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환경훼손에서 이러한 경계 없음은 피해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의 문제에도 적용된다. 실제로 환경훼손의 책임이 상당부분 서구 선진국과 다른 지역의 개발 도상국의 경제 발전 전략, 농업 환경, 교통수단, 에너지 정책 등에서 기인함에도 그 책임은 완전히 측정되어 분담될 수 없다. 때문에 환경 오염이나 훼손의 책임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될 뿐, 실질적인 의무나 책임으로 강제되지 않는다. 수많은 환경 관련 국제 협정이나 회의가 열리지만, 각 국가는 자신들의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근간으로 행동한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훼손의 문제는 환경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나 경제의 문제가 된다.

 

환경훼손 문제에서 불분명한 것은 피해와 책임의 문제만은 아니다. 환경 훼손의 정확한 원인을 찾는 것도 언제나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물론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다시 피해와 책임의 불확정 문제를 소환한다). 그것이 미지의 영역에 있다는 것은 환경 오염이나 훼손의 문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정의 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포괄하는 영역이 협소하게 규정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미지의 영역을 기술할 정확한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인류는 그것에 대해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도 풍부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언어들이, 환경훼손을 다루는 담론들이 국가나 거대 기업이 지원하는 연구소, 혹은 극히 소수의 전문가들을 경유하여 생산된다는 점이다. 환경 훼손이 야기하는 위협들은 대개 정교한 기술을 통해서만 확인되며 복잡한 과학적 모델과 언어를 통해서만 인식 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그 언어를 생산할 수 없고, 단지 소비할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권력이나 전문지식을 가지지 못한 보통의 민중들은 환경오염 담론이 어떤 정치적 배경에서 만들어지는지 거의 알 수 없다.

 

나는 지금 한편으로는 당연해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뜬금없는 것일 수도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바로 환경오염이나 훼손이 정치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환경 문제중 단연 가장 많이 거론되고 결정적인 사안중 하나는 지구 온난화이다. 현재 지구온난화에 대해서는 지구적 기후변화에 대한 세밀한 조사와 연구가 진행중이다. 그것에 대해 과거보다 더욱 정교해진 과학적 담론을 생산되고 있지만 아직도 그것의 완전한 메커니즘은 밝혀지지 않았다. 기후변화가 국지적 수준에서 다양한 경로로 나타날뿐 아니라 그것이 다른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완전히 밝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최근 가장 뜨거운 환경 담론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지구온난화 이론은 거의 한 세기 전에 나타난 이론이지만, 그 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에 UN기후변화협약이나 교토의정서 등을 통해 환경 담론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는 지구 온난화나 기후변화를 이야기 하며 누구나 이산화탄소, 메탄가스, 황산화물, 프레온 가스 등의 용어를 쉽게 사용하게 되었다. 요컨대 지구온난화의 문제가 사람들의 피부로 느껴지기 전에, 이미 그것은 국가간 체계에서 일종의 ‘합의’를 통해 담론화 된 것이다. 그 합의에 필요한 증거로서의 언어들은 이미 소수 전문가나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생산되어 있었다.

 

환경 담론이 정치의 문제라면 그것은 이미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자장 안에서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정교화 되면 그것은 발화 주체의 담화가 아니라 사물의 말로 전치된다. 즉, 발화 주체의 주관적 생각이 아니라 사물의 진리가 그렇다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 사물의 질서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질서에 적응해야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특히나 환경 담론은 정치적 합의의 언어가 아니라 자연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제출된다. 환경 운동이 그렇게나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환경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탈정치의 장이 아니다. 이제 환경을 탈정치의 장으로 상상하는 순진한 짓은 그만두도록하자. 문제는 환경도 아니고, 환경 오염도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다루는 인간이며,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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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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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는 원래 정치다 : 용산 판결과 미디어법 판결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한다. 무슨 오이디푸스 신화에서처럼 신탁이라도 받았단 말인가. 이제 그 아들은 자신의 눈을 찌르고 사막으로 고행이라도 떠나야 한다는 말인가. 현대의 오이디푸스는 신탁 대신 법탁을 받고, 사막 대신 감옥으로 가야 한다. 얼추 오이디푸스 신화의 현대 버전 정도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고행을 떠나는데 반해 현대의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지만 지배 권력에 의해 고행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그래도 확실히 비극은 비극이다.

 

지난 달 28일에 있었던 용산 참사 관련 재판의 결과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재판에서 재판부는 이충연 용산4구역철대위원장 등 피고인 2명에게 6년형을 선고했고, 다른 피고인 5명에 대해서도 5년형을 선고했다. 농성 참여 정도가 가벼운 두 피고인은 각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결국 용산참사는 법적으로 모두 철거민들의 책임이 되었다. 철거민들이 같은 철거민 5명까지 모두 죽였단다. 선고 받은 9명 중에 아들이, 죽은 5명 중에 아버지가 있었다. 이 재판의 부당함이야 따로 이야기 할 필요 없겠다. 그런 이야기는 입만 아프다.

 

 

 

패륜을 양산하는 법

 

어떤 것은 숨기고, 어떤 것은 우겨서 법이 완성한 것이 바로 이 패륜의 시나리오이다. 이 나라의 법은 패륜을 양산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언젠가 대통령 ‘각하’께서 말씀하셨던 “법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발언은 이제 패륜을 양산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가 강화하고 싶다던 법규가 교통법규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 않은가. 그가 강화해온 법규들, 그러니까 국가의 안녕과 개발을 위한 법들, 이를테면 집시법, 언론법, 도시 정비법 같은 것들이 그것 아니던가. 이제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법이 패륜을 만든 것이 아니라 법 자체가 패륜이라고!

 

28일에 있었던 풍경 하나를 돌이켜보자. 재판장에 한양석 부장판사와 2명의 배석판사가 입정하며 재판이 시작된다. 그들은 피고들의 혐의를 조목조목 지적하고나서 피고인들의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법정이 시끄러워지고 피고인석에 있던 이충연, 김주환씨가 “이건 재판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대기실로 들어간다. 방청석에서는 한 방청객이 “정권의 나팔수”라고 재판장을 비난한다. 이에 재판장은 “지금부터 더 떠드는 사람은 구속”이라고 경고한다. 잠시 후 또 다른 방청객이 “이게 법치주의 국가냐”라고 외쳤고, 재판장은 방호원에게 “지금 말한 사람 구속”시키라고 지시한다. 그는 바로 감치된다.

 

그 방청객은 그냥 시끄러워서 감치된 것일까? 재판장은 왜 방청객들의 입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막으려 했을까? 혹시 방청객들의 말이 그냥 소음이 아니라 이 재판의 진실을, 법의 본질을 소름끼치도록 정확하게 꼬집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재판장은 그들의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어서 섭섭한게 아니다. 결코 표면으로 드러나서는 안되는 법의 신화적 기원을, 법의 비밀을, 그것도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발설한 것에서 그들은 모욕을 느낀다. 그래서 그것은 재판장에 대한 모욕이었으며, 사법권력에 대한 모욕이었고, 법 자체에 대한 모욕이었다.

 

반복되는 이야기이겠지만 한 가지 더 이야기 해보자. 헌법재판소가 미디어법 처리과정의 위법성을 인정하면서도, 가결된 결과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논의할 일이라며 판단을 유보했다.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권한과 자율성을 인정하고 결정적 판단을 국회에 양도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삼권분립에 입각한 결정이다. 확실히 어릴적 교과서에서 삼권분립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입법, 사법, 행정부가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어야 독재를 막고 민주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개념상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이번 판결은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치 않은 것인지 보여준 듯하다. 사소한데서 서로를 견제하되 정말 중요한 문제 앞에서는 놀라울 만큼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것이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그 세력들이 아니던가(베버가 말했듯이 전문가란 작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커다란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은 진정한 정치의 전문가들이다).

 

정치 활동은 입법, 사법, 행정부 사이이건 정당들 사이이건 그들의 견제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나 타협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로 여기에 현 정치체제의 핵심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그 갈등과 타협의 정치 행위 속에 민중은 없다. 정치란 그들만의 정치이다. 실제로 정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에 민중의 의견은 개입되지 않으며, 그들은 의미 없이 사라진다. 이런 정치체제에서 이루어지는 정치행위는 갈등과 타협을 통해 민중을 도매금으로 처리하는 일종의 거래이다. 즉, 정치는 갈등, 견제, 균형, 타협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일종의 거래인데, 문제는 민중이 없는 곳에서 (민중의 의지와 상관 없이)그들을 거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여기서 선거 제도가 그 무력함을 드러낸다. 선거를 통해 뽑힌 사람이 만들어낸 법이 나의 의사와, 민중의 의사와 무관하게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에는 민중의 의견을 대표하지 않는자를 대표자로 선출해야 하는 모순이 있다. 선거라는 것은 그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 나를 위치시키는 과정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소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은폐시키는 교묘한 장치에 불과하다.

 

 

지킬 수 없는 법이라면 대담하게 위반하라

 

용산 판결과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법의 준거점이 도덕, 윤리, 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정치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가 경제 영역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결국 법은 정치경제적 상황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용산 1심 재판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타인이 관리 중인 건물을 점거하고 경찰들에게 화염병을 던진 것은 국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동으로 법치국가에서 어떤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1) 타인이 관리 중인 건물에 대한 점거, 2) 경찰들에게 화염병을 던진 것은 법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유린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번역하면 법질서는 1) 부르주아지의 소유권과 2) 소유권을 보증하는 국가 폭력을 근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유권과 국가폭력을 부정하는 것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위인 것이다.

 

용산 판결이 현실 정치와 결탁한 법질서가 구성되는 근본원리의 내용을 드러내주는 것이라면, 미디어법 판결은 법의 일반 원리가 현실 정치를 경유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법 자체는 일반적인 것이지만, 구체적 사건은 개별적인 것이다. 일반성의 원리가 구체적 사건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재판이라는 매개 과정이 요청된다. 재판은 갈등하는 주체들이 경합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재판에서 갈등하는 주체들은 대등한 입장을 가지지 못한다. 갈등 주체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자원을 활용해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재판에서 갈등하는 주체들의 역학 관계는 이미 기존의 권력 관계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재판에는 참여 주체의 권력 관계뿐만 아니라 특수한 정치적 흐름, 즉 정세가 개입된다(물론 재판 참여 주체의 정치 권력과 정세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디어법은 10월 29일에 판결이 났다. 그 전날인 10월 28일은 재보궐선거가 있었고, 11월 1일에는 방송법 시행일이었다. 판결 자체뿐 아니라 판결이 난 날짜도 정치적인 고려가 다분해 보인다. 미디어법 판결이 29일에 남으로써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받을 정치적 타격은 최소화되고, 방송법은 차질 없이 시행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앞에서 언급한 용산 판결이 있었던 28일의 재판장 풍경으로 돌아가 피고인과 방청객들이 외쳤던 그 소리들을 들어보자. “이것은 재판이 아니다”라던 이추연 김주환씨의 외침, “이게 법치주의 국가냐”고 묻던 방청객의 외침 말이다. 정말 쿨~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재판이고, 법치주의 국가다. 내가 말하면 욕먹을 테니, 남이 한 이야기를 하나 인용하며 글을 끝맺도록 하겠다. 프로이트의 말이다.

 

“법과 규제들이 본래 신성하며, 따라서 우리가 거슬러서는 안되는 어떤 속성들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는 없으며, 종종 부족절하게 구성되어 우리의 정의감을 훼손하거나 혹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훼손시킬 것이라는 사실, 또 권위가 방만해질 때 지킬 만한 가치가 없는 법들을 교정하는 방법은 대담하게 위반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서 곧 우리를 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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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과 정치의 이상한 만남

문제라는 단어에는 비정상, 예외, 비틀어짐과 같은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은 해결해야 할 것,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는 지향을 가진다. 때문에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즉 문제의 대상을 무엇으로 설정하는가는 해결이라는 지향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적합한 문제 대상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종종 듣는 용어 중에 여성문제라는 것이 있다. 이 용어에는 문제의 대상이 여성인 것과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들을 규정해온 남성적 시선이다. 여성문제라는 용어를 썼을 때 거기에는 문제의 핵심을 굴절시키는 어떤 전도의 논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2PM의 재범 ‘문제’ 혹은 재범 사태라고 명명된 사건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도 이와 유사한 전도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문제의 대상은 2PM의 재범이 아니다. 논란을 유발한 계기는 그이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논란의 핵심은 재범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형성된 담론의 지형 그리고 그런 담론이 형성된 사회적 맥락에 있다.

 

아이돌 가수는 일반적으로 젊은 층에 인기를 얻는 가수를 말한다. 그들은 가수지만 음악만이 아닌, 젊은 층이 자신들을 동경할 수 있는 갖가지 조건들을 갖추어야 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만들어진 이미지 속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하나의 우상이 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대중들을 위한 환상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대중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이미지에 자신들을 끼워 넣기도 한다. 그들이 만들어낸 환상은 언제나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선에서 구성되어야 한다. 문제는 한국적 상황에서 아이돌이 되기 위해 혹은 아이돌로서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부합해야 하는 대중의 기대라는 것이 정치적 맥락과 강하게 밀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이돌에게 부여된 정치적 임무


10여 년 전부터 아이돌은 한류열풍의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그들은 ‘한류 열풍의 중심에 선 아시아의 스타’이면서 ‘아시아를 정복한 대한의 건아’가 되었다. HOT나 NRG를 넘어 비, 원더걸스, 보아와 같은 스타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동방신기나 천상지희 같은 아이돌 그룹은 아시아 시장을 겨냥해 팀 이름도 한자로 만들었고, 기획 단계에서는 중국 현지에서 같이 활동할 현지인 멤버까지 고려되어 있었다. 슈퍼주니어에는 중국인 멤버(한경)가 한국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다.

 

아이돌 가수들은 한류열풍 속에서 연예 산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이 해야 할 역할을 넘어 국위를 선양하고, 국부를 증진시키는 역할까지 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연예 산업을 넘어 국가의 부와 명예를 드높여야 한다는 정치적 임무가 부여되었다. 아이돌에게 부여된 정치적 임무라는 상황 속에는 미묘한 괴리가 숨어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돌 중 상당수가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교포이거나 외국국적자이고, 그들이 하는 음악 역시 한국적인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탈국적화된 정체성을 가진 아이돌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정치적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러니까 아이돌 스스로가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있든 말든, 그들에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기여를 기대하는 상황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2PM의 재범에게 가해졌던 비난은 이러한 맥락과 결코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4년 전에 썼던 글이 문제의 계기가 되었지만, 그 이후에 비난의 강도와 폭은 확장되었다. 재범의 일과 관련된 글이나 그의 사과문에 달린 댓글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사과문 개제 이후에도 반성의 시간을 갖지 않고 한동안 활동을 지속한 그의 태도를 문제삼기도 했다. 그러나 보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한국인 비하 발언을 지속적으로 문제 삼았으며, 어떤 이들은 유승준의 군 회피로 인한 연예계 퇴출과 연관지어 미국 시민권과 군대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흐름에 편승해 <해럴드 경제>의 한 대중문화전문기자는 “교포출신 연예인에 대한 정체성 교육”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비난의 지점들은 이미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 비난들은 이제 연예인의 역할과 직업 윤리를 넘어 폐쇄적인 정치적 심급으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오리지널을 완성시키는 번역들의 경합


2PM의 재범은 비난을 못 이겨서든, 그 비난을 수긍하고 반성하기 위해서든 팀을 탈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 상황은 반전되어 그를 동정하는 누리꾼의 글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의 한국 비하를 문제삼던 연예 뉴스에서도 팀 탈퇴로 이끈 일부 누리꾼들을 꾸짖으며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관점을 바꾸었다. 이러한 변화는 재범의 팀 탈퇴와 출국이라는 결과가 보여준 임팩트의 사후 효과이기도 하지만, 그 관점 변화의 근거를 제시해준 것은 팬클럽과 이 사건을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의 귀결로 규정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한 비평가들이었다. 그들은 재범에게 강한 알리바이를 제공해 주었다. 죄가 발생한 장소에 재범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강한 알리바이들 말이다. 그 알리바이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글을 새롭게 번역하는 과정에서 마련되었다.

 

재범의 소속사였던 JYP 측과 2PM의 팬들은 재범의 글이 악의적으로 번역되고, 이용당했다며 글의 전문을 번역해서 새롭게 제시했다. 실질적인 글의 의미뿐 아니라, 맥락을 보고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부 비평가들은 글 속에서 재범이 하고자 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제대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그 글이 쓰여진 시점은 재범의 ‘치기 어렸던’, ‘철없었던’ 혹은 ‘건방졌던’ 과거였을 뿐이라고(그래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표현이 상당히 거칠긴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답답한 심정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좀 더 나아가 한 비평가는 재범의 글을 “저급한 상품문화에 포섭된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쓴 소리”로 번역하기도 했다.

 

어떤 측면에서 이번 사태는 ‘악의적 번역’(재범에 대한 비난의 근거)과 ‘호의적 번역’(재범의 알리바이) 사이의 갈등 과정으로 읽힐 수도 있다. 담론 속에서 제시된 재범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악의적 번역에서 호의적 번역으로 옮겨감으로써 나타나게 된 것이다.

 

악의적 번역에서 재범은 한국을 폄하하고 한국민을 모욕한 죄인이지만, 호의적 번역에서 그는 상품화된 대중문화에 쓴 소리를 하거나 철없었던 과거를 극복하고 어른이 된 사람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두 번역 모두 너무 적거나 너무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두 입장 모두 재범의 글이라는 오리지널에 대한 번역을 수행함으로써 올바른 번역과 그렇지 못한 번역의 대립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원본과 파생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다. 두 입장은 오리지널이 의미의 기원이며, 번역된 것은 기원에서 파생된 해석에 불과한 것이라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리지널 혹은 원본으로 알려진 것이 어떤 확고한 입장이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그 원본이 충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 그 원본이 어떤 의미의 결여를 가지고 있어서 번역 과정에서 파생된 것들의 보충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진 의미를 완성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번역들의 경합이 오히려 오리지널의 의미를 보충하고 결정하는 요인이라면 어떨까?

 

여기서 원본이나 오리지널(재범의 글)의 위치는 토착적인 것 혹은 국가로 소급되는 정치성이 차지한다. 그렇다면 오리지널의 결여를 문제시 하는 것은 국가로 소급되는 토착성(nativism) 자체가 의미의 불충분함과 결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국가로 소급되는 토착성 자체가 고유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담론의 형성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2PM의 재범은 더 이상 이 사태의 핵심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재범 문제라고 명명했을 때 이미 거기에는 이러한 담론이 발생시키는 효과의 핵심을 굴절시키는 전도의 논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논란이 계속되는 과정, 즉 재범을 둘러싼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 속에는 이미 재범은 없다. 거기에는 대신 미완의 국가 정체성과 토착성을 (때때로 그것에 대한 저항 혹은 비판까지도 흡수하면서) 완성시키는 무엇인가가 공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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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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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정치에 다가가기

 
이달 23일 시행되는 개정 저작권법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번 저작권법의 핵심은 일명 ‘인터넷 삼진 아웃제’라고 불리는 제도의 도입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음악 등의 저작물을 허락 없이 대량 유포하는 업로더의 계정이나 인터넷의 게시판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3회 경고 후 최대 6개월까지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사법부의 판단 없이 행정부가 죄를 판단하고 처벌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월권을 내포한 제도이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삼권분립이라는 원칙을 직접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과 관련된 분쟁은 침해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기 어렵기 때문에 법원에서도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행정권력이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규제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권력자의 시선으로 규제할 수도 있고, 거대 기업의 경우 각종 로비를 통해 행정명령을 무력화 시킬 위험도 있다. 때문에 인터넷 삼진 아웃제는 행정권력에 의한 인터넷 사업자와 이용자에 대한 일방적 통제가 확대될 위험성을 잉태한 제도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저작권법 개정안은 더욱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논란이 발생하는 지점도 바로 이 곳인데, 그것은 바로 표현의 자유라는 영역이다. 특히 인터넷이라는 영역에서 표현의 자유는 핵심적인 동력이 되는 만큼 문제를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이제 상식을 넘어 식상하고 진부한 것이라 표현될 만큼 기본적인 권리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 정부의 통치하에서는 역대 그 어느 정권보다도 심각하게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 (이 글에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는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를 모두 이야기 하긴 힘들다. 관심이 있다면 지난달 22일 문화연대를 비롯한 진보넷, 인권운동사랑방 등이 공동으로 발표한 <이명박 정부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보고> 기자회견문을 참조하라.)

 

물론 개정 저작권법에서 추진하고 있는 ‘인터넷 삼진아웃제’가 유독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기는 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에도 인터넷 삼진 아웃제(Three strike out policy 혹은 유럽권에서는 graduated response-누진대응) 입법을 추진 중이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이미 이 제도의 입법을 추진했었지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 때문에 시민 사회 단체의 주도로 위헌소송이 제기되었고, 결국 프랑스 헌법위원회는 지난달 10일 위헌 판정을 내렸다. 프랑스 헌법위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은 인권에 관한 문제”라고 명시하고 개인의 인터넷 접근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은 법원 판사의 판결을 통해서 부여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이와 관련된 일부 내용을 수정해서 이달 8일에 안건을 재상정 했고, 상원 의결을 통과했다. 수정된 내용은 인터넷 접속을 차단할 수 있는 권한을 신설되는 정부 전담기구인 아도피(Hadopi)에 두었던 것을 판사에게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처럼 인터넷 표현의 자유와 그것을 규제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최근 중국의 청소년 보호용 인터넷 차단 프로그램인 그린댐(Green Dam)을 비롯해 호주나 뉴질랜드, 영국, 스웨덴,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다.

 

해외의 사례에서 발견된다고 그 제도가 정당화를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인터넷 규제 법규들은 해외의 사례와 차별되는 독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인터넷 규제 시도가 저작권을 이용해 정치적 맥락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외국의 사례에서 발견되는 삼진 아웃제는 저작권을 어긴 인터넷 이용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개정저작권법은 이용자 삼진아웃뿐 아니라 게시물이 올라간 게시판까지도 삼진아웃 시키겠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로써 인터넷 상에서 적극적인 정치적 발화가 이루어지던 아프리카 TV나 아고라의 게시판을 활동 정지시킬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 다시 거대 언론사나 그것의 대리 역할을 하는 법무법인들이 시민 단체 등을 상대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는 행위에 대해 저작권 침해 배상 요구를 하고 있다. 신문 기사의 제목만을 노출시켜놓고 이를 클릭했을 때 해당 신문사 사이트로 이동하도록 링크를 거는 행위는 합법이지만, 기사를 스크랩하는 행위는 저작권법 위반이기 때문이다. 스크랩은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토론을 유도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일반적 행위이지만, 그 자체를 불법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특히나 기사 스크랩에 따른 저작권 침해 배상 요구는 재정이 취약한 시민단체를 표적으로 삼아 그 단체를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악용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저작권법의 목적은 창작자에게 창작물에 대한 일정한 보상을 부여함으로써 창작 활동을 활성화 시키고 나아가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데에 있다. 창작 활동이란 표현의 자유를 기반으로 삼지 않으면 결코 활성화 될 수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시행되고 있는, 혹은 앞으로 시행될 저작권법은 창작 활동의 기반이 되는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저해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상황에서 악용될 소지를 가지고 있다. 지금 연출되고 있는 것은 법을 만든 정부가 자신이 만든 법의 원래 목적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테러범도 피해가는 저작권법의 힘


정보를 제3자가 사용한다고 해서 아이디어나 정보의 창작자 또는 보유자가 가진 지적재산은 양적으로 줄어들거나 그 효용이 감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아이디어와 정보를 이용할수록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후생과 이익은 커진다. 특히 인터넷은 정보를 유통시키는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정보의 가치를 증진시켰다. 인터넷의 힘이 가진 긍정성은 타인이 정보에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정보는 소유가 아닌 공유를 통해 가치를 증진시키며, 정보기술의 혁신은 공유 문화를 확산 시킬 수 있는 기술적 배경이 된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과 내가 사과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서로 교환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나와 당신은 각각 하나의 사과를 가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과 내가 아이디어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서로 교환 한다면 우리는 두 개의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역시 “내게서 어떤 생각을 전달받는 사람은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지만, 그로 인해 나의 지식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는 내 촛불에서 자기 초에 불을 붙여 간 사람은 빛을 얻게 되지만, 그로 인해 내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고 말한다.

 

버나드 쇼나 제퍼슨의 말은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 결코 지식 혹은 그것의 사용에 대한 독점이 아니라 공유와 나눔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저작권법은 이런 의미에서 문화 발전에 대한 기여라는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저작권법은 창작물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끊임없이 권리자에게 귀속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창작물에 대한 권리가 창작자가 아닌 그 권리를 사들이거나 양도받는 기업에 귀속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창작자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다. 창작자는 자신의 창작물을 유통시키기 위해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 기업에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의 일부 혹은 전부를 해당 기업에 (계약을 통해) 양도해야하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작권의 왜곡된 법 체계보다 더욱 위험해 보이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저작권이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영역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저작권법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잘못 악용될 경우 극도로 위험할 수 있다. 유나바머로 알려진 카진스키(Theodore John Kaczynski)의 사례에서 이러한 위험성을 확인할 수 있다.

 

유나바머는 대학과 공항을 중심으로 폭탄테러를 자행한 테러리스트이다. 유나바머는 1995년 테러를 중단하는 조건으로 유력지에 과학문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과학기술문명비판논문 게재를 요구했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지에 그의 논문이 실렸다. 이것이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제목을 가진 유나바머 선언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선언문의 각주 16번에는 “만약 저작권법이 문제가 되어 게재가 불가능하다면 주16을 다음 문장으로 바꿔주기 바란다”는 구절이 나온다. 유나바머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16차례에 걸친 폭탄테러를 행한 현대 사회의 가장 위협적인 테러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폭탄테러라는 강력한 무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저작권법 때문에 자기 글이 실리지 못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선언문에서 그는 자신의 테러를 하나의 혁명이라고 말하며 “혁명의 목표는 정부의 전복이 아니라 현존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테크놀로지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대사회를 병들게 한 것은 각종 테크놀로지라고 비판하는 극단적인 기술혐오주의자였고, 주된 테러 대상도 대학에서 테크놀로지를 연구하는 학자였다. 문제는 그의 공격 대상인 각종 테크놀로지가 자신이 존중하는 저작권이나 특허와 같은 지적재산권을 통해 보호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96년 체포 당시 그는 산골 오두막집에서 전기와 수도도 없이 살고 있었다. 그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현대문명을 등진 채 살고 있을 정도로 테크놀로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정작 그것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지적재산권을 문제 삼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처럼 저작권과 같은 지적재산권은 인간의 의식 영역에 침투해 내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유나바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 내면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저작권의 위력이다. 앞서 지적했듯 저작권법의 강화는 창조성과 같은 (협소한 의미의) 문화적 퇴보를 야기시킬뿐 아니라 특정 정치적 맥락에서 이용될 경우 법적 감시와 통제 그리고 처벌을 통해 정치적 개인들이 가진 비판의 언어를 탈각시키는 기재로도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즉 정치적 맥락에서 기능하고 있는 저작권법 집행 및 개정의 방향은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하나의 증상처럼 보인다. 이제 저작권법은 단순한 하나의 규제가 아닌 듯하다. 그것은 민중의 정치적 삶의 방식을 강제적으로, 그러나 내면 깊숙이 변화시키는 정치적 매개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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