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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06
    법치는 원래 정치다 : 용산 판결과 미디어법 판결
    와라

법치는 원래 정치다 : 용산 판결과 미디어법 판결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한다. 무슨 오이디푸스 신화에서처럼 신탁이라도 받았단 말인가. 이제 그 아들은 자신의 눈을 찌르고 사막으로 고행이라도 떠나야 한다는 말인가. 현대의 오이디푸스는 신탁 대신 법탁을 받고, 사막 대신 감옥으로 가야 한다. 얼추 오이디푸스 신화의 현대 버전 정도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고행을 떠나는데 반해 현대의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지만 지배 권력에 의해 고행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그래도 확실히 비극은 비극이다.

 

지난 달 28일에 있었던 용산 참사 관련 재판의 결과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재판에서 재판부는 이충연 용산4구역철대위원장 등 피고인 2명에게 6년형을 선고했고, 다른 피고인 5명에 대해서도 5년형을 선고했다. 농성 참여 정도가 가벼운 두 피고인은 각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결국 용산참사는 법적으로 모두 철거민들의 책임이 되었다. 철거민들이 같은 철거민 5명까지 모두 죽였단다. 선고 받은 9명 중에 아들이, 죽은 5명 중에 아버지가 있었다. 이 재판의 부당함이야 따로 이야기 할 필요 없겠다. 그런 이야기는 입만 아프다.

 

 

 

패륜을 양산하는 법

 

어떤 것은 숨기고, 어떤 것은 우겨서 법이 완성한 것이 바로 이 패륜의 시나리오이다. 이 나라의 법은 패륜을 양산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언젠가 대통령 ‘각하’께서 말씀하셨던 “법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발언은 이제 패륜을 양산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가 강화하고 싶다던 법규가 교통법규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 않은가. 그가 강화해온 법규들, 그러니까 국가의 안녕과 개발을 위한 법들, 이를테면 집시법, 언론법, 도시 정비법 같은 것들이 그것 아니던가. 이제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법이 패륜을 만든 것이 아니라 법 자체가 패륜이라고!

 

28일에 있었던 풍경 하나를 돌이켜보자. 재판장에 한양석 부장판사와 2명의 배석판사가 입정하며 재판이 시작된다. 그들은 피고들의 혐의를 조목조목 지적하고나서 피고인들의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법정이 시끄러워지고 피고인석에 있던 이충연, 김주환씨가 “이건 재판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대기실로 들어간다. 방청석에서는 한 방청객이 “정권의 나팔수”라고 재판장을 비난한다. 이에 재판장은 “지금부터 더 떠드는 사람은 구속”이라고 경고한다. 잠시 후 또 다른 방청객이 “이게 법치주의 국가냐”라고 외쳤고, 재판장은 방호원에게 “지금 말한 사람 구속”시키라고 지시한다. 그는 바로 감치된다.

 

그 방청객은 그냥 시끄러워서 감치된 것일까? 재판장은 왜 방청객들의 입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막으려 했을까? 혹시 방청객들의 말이 그냥 소음이 아니라 이 재판의 진실을, 법의 본질을 소름끼치도록 정확하게 꼬집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재판장은 그들의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어서 섭섭한게 아니다. 결코 표면으로 드러나서는 안되는 법의 신화적 기원을, 법의 비밀을, 그것도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발설한 것에서 그들은 모욕을 느낀다. 그래서 그것은 재판장에 대한 모욕이었으며, 사법권력에 대한 모욕이었고, 법 자체에 대한 모욕이었다.

 

반복되는 이야기이겠지만 한 가지 더 이야기 해보자. 헌법재판소가 미디어법 처리과정의 위법성을 인정하면서도, 가결된 결과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논의할 일이라며 판단을 유보했다.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권한과 자율성을 인정하고 결정적 판단을 국회에 양도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삼권분립에 입각한 결정이다. 확실히 어릴적 교과서에서 삼권분립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입법, 사법, 행정부가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어야 독재를 막고 민주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개념상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이번 판결은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치 않은 것인지 보여준 듯하다. 사소한데서 서로를 견제하되 정말 중요한 문제 앞에서는 놀라울 만큼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것이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그 세력들이 아니던가(베버가 말했듯이 전문가란 작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커다란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은 진정한 정치의 전문가들이다).

 

정치 활동은 입법, 사법, 행정부 사이이건 정당들 사이이건 그들의 견제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나 타협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로 여기에 현 정치체제의 핵심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그 갈등과 타협의 정치 행위 속에 민중은 없다. 정치란 그들만의 정치이다. 실제로 정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에 민중의 의견은 개입되지 않으며, 그들은 의미 없이 사라진다. 이런 정치체제에서 이루어지는 정치행위는 갈등과 타협을 통해 민중을 도매금으로 처리하는 일종의 거래이다. 즉, 정치는 갈등, 견제, 균형, 타협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일종의 거래인데, 문제는 민중이 없는 곳에서 (민중의 의지와 상관 없이)그들을 거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여기서 선거 제도가 그 무력함을 드러낸다. 선거를 통해 뽑힌 사람이 만들어낸 법이 나의 의사와, 민중의 의사와 무관하게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에는 민중의 의견을 대표하지 않는자를 대표자로 선출해야 하는 모순이 있다. 선거라는 것은 그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 나를 위치시키는 과정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소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은폐시키는 교묘한 장치에 불과하다.

 

 

지킬 수 없는 법이라면 대담하게 위반하라

 

용산 판결과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법의 준거점이 도덕, 윤리, 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정치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가 경제 영역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결국 법은 정치경제적 상황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용산 1심 재판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타인이 관리 중인 건물을 점거하고 경찰들에게 화염병을 던진 것은 국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동으로 법치국가에서 어떤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1) 타인이 관리 중인 건물에 대한 점거, 2) 경찰들에게 화염병을 던진 것은 법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유린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번역하면 법질서는 1) 부르주아지의 소유권과 2) 소유권을 보증하는 국가 폭력을 근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유권과 국가폭력을 부정하는 것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위인 것이다.

 

용산 판결이 현실 정치와 결탁한 법질서가 구성되는 근본원리의 내용을 드러내주는 것이라면, 미디어법 판결은 법의 일반 원리가 현실 정치를 경유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법 자체는 일반적인 것이지만, 구체적 사건은 개별적인 것이다. 일반성의 원리가 구체적 사건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재판이라는 매개 과정이 요청된다. 재판은 갈등하는 주체들이 경합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재판에서 갈등하는 주체들은 대등한 입장을 가지지 못한다. 갈등 주체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자원을 활용해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재판에서 갈등하는 주체들의 역학 관계는 이미 기존의 권력 관계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재판에는 참여 주체의 권력 관계뿐만 아니라 특수한 정치적 흐름, 즉 정세가 개입된다(물론 재판 참여 주체의 정치 권력과 정세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디어법은 10월 29일에 판결이 났다. 그 전날인 10월 28일은 재보궐선거가 있었고, 11월 1일에는 방송법 시행일이었다. 판결 자체뿐 아니라 판결이 난 날짜도 정치적인 고려가 다분해 보인다. 미디어법 판결이 29일에 남으로써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받을 정치적 타격은 최소화되고, 방송법은 차질 없이 시행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앞에서 언급한 용산 판결이 있었던 28일의 재판장 풍경으로 돌아가 피고인과 방청객들이 외쳤던 그 소리들을 들어보자. “이것은 재판이 아니다”라던 이추연 김주환씨의 외침, “이게 법치주의 국가냐”고 묻던 방청객의 외침 말이다. 정말 쿨~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재판이고, 법치주의 국가다. 내가 말하면 욕먹을 테니, 남이 한 이야기를 하나 인용하며 글을 끝맺도록 하겠다. 프로이트의 말이다.

 

“법과 규제들이 본래 신성하며, 따라서 우리가 거슬러서는 안되는 어떤 속성들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는 없으며, 종종 부족절하게 구성되어 우리의 정의감을 훼손하거나 혹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훼손시킬 것이라는 사실, 또 권위가 방만해질 때 지킬 만한 가치가 없는 법들을 교정하는 방법은 대담하게 위반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서 곧 우리를 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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