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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표절자

이 글은 사과문이다.

지금까지 내 글을 읽고 최소한의 신뢰를 보내온 독자들이 '있다면', 그분들께 보내는 사과문이다.

그리 대단한 글쟁이는 아니기에 이런 글까지 써야할까도 싶지만, 그래도 공부하는 학생의 양심상, 그리고 몇몇 매체에 글을 써온 사람으로서 제대로 반성해야 겠기에 글을 남긴다.

뭐냐하면...

표절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표절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의 글을 인용 표시 없이 썻다.

그것이 실수인지, 의도한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내가 경솔했던 것이고, 무책임했던 것이다.

한 번이라도 내 글을 읽어 본 적이 있는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린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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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뜬금 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기도할거 같다. 

그 분들을 위해서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계속 기억하면서 곱씹어야 하는 일이기에 어딘가에 뭍혀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 두려 한다.

얼마전, 그러니까 정확히 2010년 10월 26일 한통의 메일을 받았다.

대학원 신문의 독자라는 분이었다.(현재 나는 중대 대학원 신문 서평란에 한 학기 정기 기고를 청탁받고 쓰고 있는 중이다)

그 분은 나의 인용표시 없는 인용, 즉 표절을 문제삼고 있었다.

다음은 10월 26일 받은 편지의 전문이다.(메일을 보낸 분과 실명이 거론된 다른 분의 이름을 제외한 전문이다).

허민호님, 안녕하세요.
<대학원신문> 독자의 한 사람인 000이라고 합니다.
이메일 작성 의도는 첨부된 사진을 통해 파악하실 수 있을 듯합니다.
상식이 있는 "대학원생"이라면 기고자의 표절 전력을 지적, 제보하면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줄 알았는데 현직 편집위원이 표절 작가의 기고를 중단하는 일도 없고 표절 여부에 독자에게 사과하는 일도 단연코 없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문제 당사자가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하니 직접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지요. ^^
다 른 사람도 아니고 000 선생님 지도 하에, 다른 주제도 아니고 지적재산권에 관한 논문을 쓰고 이른바 진보 운동을 하시는 대학원생의 양심과 이름 있는 대학교의 대학원신문이 표절 시비에 관해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다음 호를 내는 모습이 감탄스럽습니다. ^^
상황 파악이 안 되시는 경우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가운데 '홀로코스트' 챕터의 재독을 권합니다. ^^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한 게 다섯 군데인데 두 문장만 따옴표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많이 신기하네요.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치시길 바라며,
독자 000 드림.
 
 
이 글에는 2006년 석사 1차 때, 대학원 신문사에서 일하며 쓴 기사 하나가 캡쳐되어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연히 나의 잘못이고 해서 반성 겸 해서 그 분께 답장을 보냈다.
다음은 당일 저녁 내가 쓴 답장의 전문이다.

안녕하세요 

허민호입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지적하신데로, 제 경솔함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입니다.

앞으로 좀 더 신중하고, 책임감 있게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대학원신문에 확인해보니, 나름 논의가 있었고, 기고를 중단할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선생님께서도 한사람의 입을 가로막기 위해 이런 지적을 했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연구자이면서 학생의 입장에서 좀 더 책임감 있게 글을 써야한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앞으로도 좋은 지적 부탁드립니다.

 

허민호 드림
그리고 일주일 정도가 지난 11월 1일 다시 그 독자분께 답장이 왔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안녕하세요.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글을 쓴 의도를 곡해 없이 파악하시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해명해 주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허민호님께서는 기고 중단 건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지 공식적으로 표절 건을 해명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허민호님을 어떠한 사적 감정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표절 문제 자체의 비윤리성을 인정하더라도 표절을 하게 된 과정을 고려하면 결국 개인이 저지른 하나의 실수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당장 허민호 기고자의 기고를 중단해 달라고 요구할 생각이 없으며, 신문을 만드는 편집위원들의 논의 결과를 경시하려는 의도도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중앙대학교의 <대학원신문>의 독자적 권한은 물론 내부 필자와 외부 기고자가 글쓸 권리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원론적으로 말해서, 기고를 유지하고 중단할지의 여부는 표절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독자들이 접하고 판단한 뒤에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절차상으로 편집위원들이 외부 필자의 기고 여부를 결정할 편집권을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일과 작은 일을 비유하는 일이라 조심스럽지만, 국민 대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회가 어떤 사안을 비준한다면 법률의 절차상으로는 하자가 없으나 결코 의원들이 타당한 절차를 밟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중앙대학교에 소속된 학생이 아닙니다. 따라서 해당 언론이 학내에서 얼마나 읽히는지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 웹상으로도 얼마나 많은 독자 피드백이 진행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많지 않은 덧글과, 학생 언론의 영향력이 강력하지만은 않다는 상식에 비추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뿐입니다.
표절 건에 대한 허민호 님의 해명이 소수일지 모를 독자들에겐 그다지 큰 관심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의 기사가 2006년에 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각에서 기억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로써,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의식하든 관계 없이 학문 세계에서 용인하기 힘든 과거의 과오를 스스로 인정하는 허민호님의 글을 볼 수 있다면 저로서는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이런 바람을 전하면서 두서 없는 글을 마칩니다.
안녕히 계세요.
 
000 드림.

 

그러니까 요는 개인의 반성으로는 충분치 않고, 공적인 반성과 사과를 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원 신문의 지면에 내 사정을 봐줄만한 공간은 없어 보인다.

현재 편집위원들의 판단과 계획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대학원신문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글이 대학원 신문에 실린 글이긴 하지만, 그 글로 인해 현재의 대학원 신문을 그 책임의 주체로 내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학원 신문은 한겨레 신문이나 경향신문 혹은 동아일보 같이 하나의 지속적인 입장을 가진 신문이 아니다. 그것은 매 학기 새로운 편집위원을 선출하는 공간이다. 그것은 새로운 편집위원의 손에서 매번 새롭게 만들어지는 종류의 신문이다. 때문에 내 개인의 잘못을 대학원 신문이라는 공간을 통해 반성하지는 못할듯 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공간이다.

문제가 된 그 때의 글은 여기 올라와 있지는 않지 않고, 전부는 아니지만, 외부에 기고한 글의 대부분이 이 곳에 모여 있다. 이 공간이 내 글을 읽는 분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이 공간에서 반성과 사과를 하는 것,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공개적인 방식의 사과와 반성인듯하다.

유명한 글쟁이도, 정치인도 아니기에 내 이런 이야기를 신경쓰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그리고 이 곳에서 내 글을 읽는 분들께는)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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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유감스런 후유증

명절 유감, 불안에 대처하는 가족의 자세

 

추석 연휴가 반갑지 않았다. 육감같은 것이 아니다. 기습 폭우로 도시가 잠겨 수많은 이재민이 생겨날 것을 미리 알게된 예지력 같은게 아니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경험을 통해 몸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역시나 정확했다. 유독 나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선후배나 동료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도 비슷한 것들이다.

 

민족 고유의 명절, 풍요롭고 아름다운 전통의 명절. 추석 앞에 붙은 수식어들이다. 그래도 사실 추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민족 대이동이라는 표현이다. 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도로로 쏟아져 나온다. 뭐 개인적으로야 대부분 고향이나 부모님을 찾아 가는 발걸음이겠지만, 그 도로의 풍경을 볼 때면 야릇하고 수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은 때로 종교적 의례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전쟁시의 피난민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체 그 풍경의 정체는 무엇일까.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전통, 근대화로 인한 핵가족화, 기형적 도시화가 야기한 탈향민의 급증 등이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명절이 되면 멀리 떨어져 거의 다른 공간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슨 변신로봇마냥 합체를 한다.

 

추석을 맞이할 때 느껴졌던 불안한 예감은 그곳에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그렇다. 나이는 찼는데 번듯한 직장도 없고, 아이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심지어 배우자가될 예비 후보마저 자신있게 거론할 수 없는 사람에게 명절은 괴로운 것이 된다. 변변한 대화한번 해본적 없는 친적(촌수가 멀건 가깝건 상관없다)이 지나가며, 갑자기 남의 직장과 연애 사정을 걱정한다. 마치 어릴적 “그래 공부는 잘 하고 있냐?”라고 묻던 어느날 문득 찾아온 삼촌(실제 촌수로는 사실 3촌도 아니다)의 느낌, 평소에 내 생각따위 한 번도 해본적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내가 공부를 잘하건 말건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던 그 삼촌의 느낌으로 말이다. 사실 그들은 내 직장이나 연애, 내 공부에는 별 관심도 없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와 다른 공간에 자신들만의 삶을 살고 있다. 그 무관심한 관심이 듣는 당사자에게는 상당한 자괴감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아는걸가 모르는 걸까.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아마 그것이 맞을 것이다. ‘실업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결혼 늦게 하는것도 트렌드로 여겨지는 세상 아닌가’라고 생각해봐야 3초짜리 위안도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그것은 내 문제인 것이다. 취직도 잘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번듯하게 사는 엄친아는 어디든 있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남들 취직하고 결혼할 나이에 대학원에 다니는 사람이나, 고시 공부 하는 사람, 대기업 직장인만큼의 월급을 받지 못하는 단체 활동가들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제대로’된 월급을 받는 ‘제대로’된 직장에 다니고 있지 않은 만큼, ‘제대로’된 삶을 살고 있지도 않은 것으로 취급된다.

 

예전에도 어느 집안에나 한두 명쯤은 ‘제대로’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그들은 그냥 그런 사람들이었다. ‘못난놈’ 취급을 받거나 기분나쁜 혓소리(쯧쯧~)를 들어야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좀 다른 듯하다. 두 번의 거대한 경제 위기를 겪고, 신자유주의가 국가 통치 전략의 기본 기조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안전망은 급속히 해체되어가고 있다. 삶의 불안, 불확실성, 불확정성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가족은 안전망의 최후 보루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적 안전망이 급속히 파괴되고, 삶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만큼 개인이 짊어져야할 삶의 무게,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증가한다.

 

이제 우리(나와 그들)는 기분나쁜 혓소리 대신 ‘고생하는 엄마’를 생각하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자기네들과는 별 상관없는 오지랖이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있는 것 같다. 혈연이라는게 그런 측면이 있다. 누구하나 잘못되면 도움을 주진 못하더라도, 부채감이나 죄의식 같은걸 만들어낸다). 이것은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넘어 전면적인 삶의 불안정에 대처하기 위해 너도 동참해야 한다는 명령처럼 들린다. 여기에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넘어 마지막 남은 안전망으로서의 가족을 재강화해야 한다는 가치관, 즉 삶의 불안정성의 유래 없는 확산에 대응해 가족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독특한 가치관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이제 취업과 결혼은 전통이나 당위가 아니라 생존이 되어가고 있다.

 

명절 주간이 되면 복권 판매량이 증가한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이지만, 거기에는 어떤 간절함이 항상 함께 하고 있다. 그 절박함이 극단화된 삶의 불안을 보여준다. 명절 후유증은 연휴로 인한 업무 부적응, 과도한 음식 섭취 때문에 불어난 뱃살, 주부들의 시집살이만 나타내는게 아니다. 그 목록에 ‘제대로’된 삶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혹은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스트레스와 삶의 공포가 추가되어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명절 때면 찾아오는 더부룩함과 소화 장애의 원인이 기름진 음식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삶의 불안과 공포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그리고 굳이 친절하게 꼬치꼬치 그것들을 드러내고, 따져주시는 그 친지분들 때문인 것도 같다. 이제 연휴도 끝났다. 남은건 후유증 뿐이다. 명절 때 남은 음식 다 먹어치울 때쯤 같이 사라지면 좋겠지만, 아마도 다음 명절 때까지 어지간히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다시 명절이 오면 혹시 우리가 잊어먹을까 걱정되 누군가 다시 확인시켜줄 것이다. 그렇게 삶도,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전통 명절도, 친척들의 오지랖도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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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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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바람에 사라져가는 교육의 공공성과 창작(물 이용)의 자유

저작권 바람에 사라져가는 교육의 공공성과 창작(물 이용)의 자유

 

얼마 전 문광부에서는 보도자료를 통해 대학에 ‘수업 목적 저작물 이용 보상금’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예고했다. 이 제도는 이미 2006년 저작권법 개정을 통해 예비되어 있었다. 문광부는 이 제도가 “저작권자들과 대학들 간의 보상금 기준에 대한 합의가 지연”되고, “대학들의 재정부담” 등의 문제를 고려하여 시행을 유보해 왔었지만, “지난 2009년 전국 4년제 및 2년제 50개 대학 실태조사를 실시, 저작물 종류별(어문, 음악, 영상 등) 보상기준을 마련”했고, “2010년부터는 전국 대학교를 대상으로 수차례 공청회 및 의견조회를 실시”하며 어느 정도 의견이 수렴되었기에 이 제도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학 측에서는 이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으며, 여전히 제도 자체가 가진 문제도 산재해 있어 논란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고려대 이대희 교수는 ‘수업 목적 보상금’제도의 도입을 찬성하며, “저작물 이용에 대한 이용료를 지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어서 이용료 지급에 대해 논란을 벌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고, 저작물에 대해 “일일이 이용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교수 행위가 위축되고 수업시간에 활용할 수 있는 저작물은 제한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제도의 시행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많은 문제을 안고 있다.

 

우선 저작권을 통해 창작물이 개인의 소유물로 전유된 것은 저작권법이라는 특수한 법이 만들어진 이후 발생한 현대적 현상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미국과의 통상 협정을 통해 기존의 유명무실했던 저작권법이 전부개정되며 효력을 발휘한 것이 불과 25전이다. 또한 대학에서 학술적 목적으로 자료를 공유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서적의 경우 한국의 출판 시장의 기형적 구조로 인해 학술 서적은 출간되거나 번역된지 몇 년만 지나도쉽게 품절되어 구할 수 없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를 보충할 수 있는 도서관의 수준도 열악할 뿐 아니라, 중고 서적 시장도 크게 활성화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교육과 학술은 사회적이고 공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영역이다. 저작권법의 목적이 “문화의 향상 발전”에 있다면, 그러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는 공정이용으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이대희 교수는 저작물의 사용에 대해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교수 행위가 위축될 것이기 때문에, 이 제도의 도입을 통해 교수 행위의 위축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교수 행위에 문제를 발생시킨 것 자체가 저작권법이기 때문이다. 없던 문제를 만들어 놓은 후에 다시 해결하겠다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용어로 따지자면) “비합리적인 것”이다. 처음부터 문제를 만들지 않으면 된다. 교육이나 학술의 영역과 같은 공적 영역에 대해서는 저작권을 제한하는 것이 더 쉬운 해결책인 것이다.

 

이 제도의 도입을 반대하는 대학 역시 문제적이다. 대학에서 이 제도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제도의 도입이 등록금 인상의 빌미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 피해를 학생들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이 제도를 시행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대학에서 저작물을 사용하는 경우는 교육의 교보재로 활용하는 것이다. 대학은 교육을 하는 곳이고, 교육을 위한 수단들은 대학에서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하나이다. 현재 한국의 대학생들은 이미 자신들이 받는 교육 서비스를 훨씬 넘는 수준의 등록금을 지불하고 있다. 학교에 지불한 금액 대비 학생들이 제공받는 교육 서비스의 수준을 고려하면, 그것은 등가 교환의 원리조차 적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제공해야할 서비스를 학생들에게 전가시키면서, 짐짓 학생들을 위하는체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 측에서 이 제도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입장에서의 반대여야 하며, 공적 영역으로서의 교육에 시장논리를 도입하려는 시도에 대한 반대여야 한다.

 

수업목적 보상금 제도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시 창작과 보상이라는 오래된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창작 노동에 대해 일정정도의 보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보상 시스템은 소수의 창작자에게 부여되는 과잉 보상 혹은 대부분의 창작자에게 부여되는 과소 보상의 형태로만 나타나고 있다. 적절한 보상이란 어느정도 수준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소위 말하는 대박 혹은 쪽박 형태로 이루어지는 현재의 보상 체계는 분명 문제가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상 체계는 보상 자체가 아니라 분배 체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이번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문광부에 따르면 대학은 문광부 고시 기준에 따라 (사)한국복사전송권협회와 개별약정을 체결해야 한다. 그런데 복사전송권협회는 대학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창작물들, 즉 영화, 음악, 도서, 공연, 방송, 미술, 사진 등 다양한 창작물들의 전체 권리자를 대표하는 단체가 아닐뿐더러, 획득된 보상금을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단체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분배 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현재 수업목적 보상금 제도는 사적 단체를 매개로 대학으로부터(정확히는 대학생들로부터) 국가가 저작물 보상금을 갈취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렇다면 분배 체계만 갖춰지면 이 제도의 타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선 하나의 사적 단체가 국가 전체의 저작권자를 대신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또한 앞에서 제시한 교육의 공공성 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현재 문화산업의 구조도 직접 창작자에게 보상이 돌아가는 체계가 아니다. 거대 문화 산업 기업은 개별 창작물의 유통 통로를 장악하고 있고, 이 유통망에 진입하기 위해서 창작자들은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의 일부 또는 전부를 기업에 양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양도 절차, 즉 거대 기업과 개별 창작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저작물 권리에 대한 양도 절차는 철저하게 창작자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창작물에 대한 보상은 개별 창작자에게 돌아가기 보다는 거대 문화 산업 기업에게 돌아간다. 요컨대 창작물에 대한 보상이 창작자에게 직접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창작자에게 적절한 보상을 보장함으로써 창작에 대한 인센티브를 부여하여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 한다는 저작권법의 목적과 배치되는 것이다. 저작권법이 최소한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수업목적 보상금 제도와 같은 것을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창작물에 대한 보상과 보상금 분배의 체계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 제도가 가진 법리적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법의 기술적 실효성에 관한 문제는 아니다. 문제적인 것은 법과 그것의 적용 사이에서 나타난다. 현재 시행예정인 이 제도는 기본적으로 모든 학생을 잠재적인 저작권법 위반자로 상정하고 있다. 또한 대학에서는 분과학문의 특성에 따라, 강의의 특성에 따라, 그리고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의 특성에 따라 강의에 활용하는 저작물의 이용 빈도와 정도가 상이하다. 일괄적으로 저작료를 학생에게 전가할 경우(문광부 산정 1년에 1인당 3580원) 어떤 학생들은 사용하지도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단순히 저작물을 사용한 사람이 그에 대한 대가를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우기 위한 말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초적인 (자유주의적) 불공정이 아니라 저작물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저작권법 앞에 세우고, 경유하게 하는 이 제도의 특수한 측면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저작권법은 (창작자가 원하지 않을 때 조차) 모든 창작물에 (경제적)권리를 부여하고(무등록주의), 모든 이용자에게 창작물 이용에 대가를 지불하게 한다. 요컨대 저작권법은 창작과 문화적 생산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창작자이든 이용자이든)을 법 앞의 개인으로 호명하고, 그들에게 권리와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심지어 창작물을 생산하지 않고, 이용하지도 않는 사람조차 이런 원칙에 포섭시켜야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법은 무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저작권법을 몰랐다는 말은 그것의 위반에 대한 핑계가 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일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제도의 경우에는 특정 집단인 대학생들을 저작권법 앞에 세우고 저작권법의 적용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이 제도의 궁극적인 효력이다. 이 제도가 시행된 후에 그들은 자유롭게 창작하고 창작물을 이용하기 보다는, 저작권법과 그것의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규제 테크닉들을 매개한 후에 창작(물의 이용)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앞으로 그 수많은 규제 테크닉들 아래에서, 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 자유롭도록 강제당해야 한다. 이제 대학에도 저작권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그 바람에 날려 학술과 교육의 공공성도, 창작(물 이용)의 자유도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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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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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기간 연장? 징병제 폐지는 어때?

군 복무기간 연장? 징병제 폐지는 어때?

 

얼마 전 EBS 수능 대비 강좌에서 언어영역 담당 강사가 강의 도중 남자는 ‘군대 가서 사람 죽이는 것’을 배운다고 말 했다가 군대비하 발언이라며 강한 질타를 받았고, 방송 출연 정지 및 공식적인 사과까지 해야 했다. 당시의 강의는 다시 보기가 중지된 상태다. 웃기는 일이다. 무엇이 군대 비하란 말인가? 군대는 전쟁을 대비하는 곳이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곳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적의 섬멸을 위한 살인 기술까지 포함되어 있다. 군대에서는 제식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 곳에서 군인들은 총검술과 사격을 배우고, 살생 무기를 다루는 방법을 갖가지 방식으로 학습한다. 최근 가장 인기 있는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의 숨겨진 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특작부대 출신의 군인이라는 것이다. 보통의 군인들이 그렇게까지 화려하고 잔혹한 전투 기술을 배우지는 않지만 군대라는 곳이 기본적으로 살인 기술을 배우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EBS 강사의 말에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군대가 사람 죽이는 것만 배우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군대는 복종을 배우는 공간이기도 하다. 망나니가 군대 다녀와서 사람 된다는 말을 (아직도!) 흔히 듣는다. 그것은 군대가 사회의 질서에 순응할 수 있는 덕목으로서의 복종을 배우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발언을 한 강사의 말이 잘못됐다면 그것은 그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절반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틀린 말이 아님에도 해당 강사가 그렇게까지 심한 질타와 과도한 처사를 받았다는 사실은 군대라는 곳이 아직도 일종의 성역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그 성역은 국가의 비밀이 감춰져 있는 공간이 아니라 군대를 다녀온 한국 남자들의 트라우마가 감춰져 있는 공간이다.

 

대체로 약 10여 년 전부터 이 성역에 도전해온 이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병역거부자들이다. 물론 한국에서 병역거부는 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10여 년 전부터 사회적인 공론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병역거부자들은 많은 곳에서 군 복무를 회피해온 이들로 매도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무엇인가를 회피해 온 것이 아니라 군대라는 공간이 지닌 정치적 진실과 그리고 지금까지 은폐되어온 한국사회(특히 남자들)의 트라우마와 대면하고 싸워온 이들이다. 한국의 남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몇 몇 예외를 제외한다면) 병역의 의무를 부여 받는다. 태어나자마자 삶은 정치적 임무와 동일시 되며, 그 임무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는 원천적으로 말소되어 있다. 여기서 그들은 단순히 하나의 자유를 억압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고유한 정치적 구조와 결부되고 있다.

 

징병제가 처음 실시된 서구 유럽에서는 과거에 병역의 의무가 정치적 시민권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투표권과 시민의 정치적 참여를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기능했다. 그것은 국가의 영토적 경계와 국민/민족(nation)을 만들어 내는 핵심적 장치였다. 그러나 현대적 정치체가 어느 정도 안착된 당대에 와서 징병제는 그 정치적 기능을 상실했으며, 점점 폐지되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징병제를 실시하던 대표적 국가 중 영국은 1963년에, 프랑스는 2001년에, 폴란드는 2008년에 그것을 폐지했다. 스웨덴 역시 지난달 공식적으로 징병제를 폐지했으며, 이달 23일에는 독일이 징병제 폐지를 포함하고 있는 국방개혁안을 마련했다. 장기적으로 이런 흐름은 계속될 전망이다. 내년에는 세르비아가, 우크라이나와 알바니아는 올해 말 징병제를 폐지할 예정이다. 국가 간 군사적 긴장이 충만한 대만 역시 2015년에 징병제를 폐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독 한국은 이런 흐름과 반대로 가고 있다. 얼마 전 대통령 직속의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에서 18개월로 단축되는 군 복무 기간을 24개월로 늘리자는 의견이 제시되어, 국방부와 의견 조율 중이라고한다. 한국에서는 왜 아직도 징병제의 유지, 나아가 확대를 주장하자는 흐름까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일까? 현재 상황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정적으로 제시되기보다는 추측될 수만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징병제의 유지가 결코 북한과의 휴전 상황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징병제의 유지 및 확대의 가장 효과적인 이데올로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북한이라는 카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나아가 미래에도 정치적 내분을 조율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할 것이다. 이때 위협적인 존재로서의 북한은 실재한다기 보다는 효과의 차원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지 않고 고려한다면 징병제의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도 검토될 필요가 있다. 좀 더 현실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징병제가 폐지된다면 군대 조직 체계의 개편과 함께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수많은 특권을 누려오던 영관급, 장성급 군인들의 축소로 이어질 것이며, 여전히 그 특권을 유지하던 이들이 몸담고 있는 군대의 위상도 지금과는 다른 수준으로 수정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군대 조직은 오랫동안 엄청난 규모의 예산을 운용해 왔다. 당연히 관련 산업의 규모도 엄청날 것이다. 때문에 징병제 폐지나 군대 조직 규모의 축소는 필연적으로 군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련 산업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과 함께 고려된다면 징병제의 폐지, 나아가 군대는 더 이상 성역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판단되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이번에 국방 개혁안을 마련한 독일의 경우 징병제 폐지안은 재정적자의 축소라는 기조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것은 이제 신성함의 영역이 아니라 현실적 조건 속에서 평가되고 판단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사실 지금까지 군대자체가 상당히 기형적으로 유지되어 온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그 ‘신성’하다는 ‘국방의 의무’를 하러 간 군인들이 방위(공익), 전투경찰, 병역특례,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하며 국방의 의무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이제는 정말로 군대에 대해, 징병제에 대해(징병제의 확대가 아니라 폐지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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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플러그와 독립영화, 혹은 독립영화는 무엇으로부터 독립했는가?

인디플러그와 독립영화, 혹은 독립영화는 무엇으로부터 독립했는가?

 

 

얼마 전 독립영화 유통을 전문으로 하는 ‘인디플러그’에서 합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독립영화를 업로드하는 웹하드나 P2P업체들을 상대로 민,형사상 고발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인디플러그는 주류 상업영화계에서 진행하고 있는 굿 다운로더 캠페인이 동참하고 있다. (소위)‘배드’ 다운로더를 양산하는 웹하드나 P2P 업체들에 대응하기 위해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법적인 조치란 저작권법 위반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인디플러그의 선언 이후 여러 언론들을 통해 “독립영화계가 불법다운로드에 강력하게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든지, 독립영화가 “불법 다운로드와 전쟁선포”를 했다는 등의 기사가 흘러나오고 있다.

 

정말인가? 정말 굿 다운로더가 아닌 이들은 모두 나쁜 다운로더들이고, 이들이 저작권법을 위반해 “문화 및 관련 산업의 향상발전”(저작권법 1조)을 가로막았으며, 이 때문에 ‘독립영화계’ 전체가 불법 다운로드와 “전쟁”을 선포했는가?

 

독립영화계에서 저작권 문제가 거론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 이미 <워낭소리>를 둘러싼 논란이 독립영화계를 한바탕 휩쓸었었다. <워낭소리>의 제작자였던 고영재는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해외 시장 진출의 통로가 막혔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저작권법을 위반한 불법 다운로드에 대해 강하게 성토했고, 이를 계기로 독립영화 진영에서 저작권과 관련된 논의가 일었었다. 그런데 그 때 이명박의 <워낭소리> 관람과 독립 영화 진흥 정책에 관련된 것으로 주제가 확산되며, 저작권과 관련된 논의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그러다 다시 고영재가 대표를 맡고 있는 인디플러그의 굿 다운로더 캠페인 동참과 불법 업로드 업체에 대한 법적 대응 선언으로 저작권 관련 문제가 독립영화계에 제기 되었다.

 

당연하지만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인디플러그가 독립영화계를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갖가지 언론들에서는 인디플러그의 사업 정책을 독립영화계로 환원해 보도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문제적인 것은 언론의 보도형태가 아니라, 독립영화계의 반응이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침묵을 통해 인디플러그의 입장에 암묵적으로 공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때로 동의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독립영화계를 하나의 실체를 가진 것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상업 영화계의 외부를 이루는 공간으로, 단일하거나 획일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획정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독특한 상황 속에서 정치적 저항성을 가진 이들이 영상을 무기로 활동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자이든, 후자이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독립영화계가 상업영화계, 즉 완전히 상품화된 방식의 생산, 유통, 소비가 이루어지는 곳과는 다른 지점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다양성이라 불러도 좋고, 저항이라 불러도 좋다. 독립영화가 상업영화와 구분된다는 점은 독립영화가 무엇으로부터 독립해 있는지를 지시하고 있다. 독립영화가 독립해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정치적 권력과 자본의 횡포이다.

 

완전히 상업화된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영화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생산, 유통, 소비 방식을 만들어 왔으며, 그 방식의 다양화를 이루어 왔다. 다시 말해, 독립영화는 획일화된 상업영화의 그것들과는 다른, 대안적인 방식들을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지고, 도입된 것이 퍼블릭 액세스이고 공동체 상영 등이다. 그것들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그러한 기본적 취지와 의도만은 아직까지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은 상업영화가 가장 전형적으로 이익을 창출해 내는 통로이다. 게다가 그것은 직접적인 생산자나 창작자에게 보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보다는 그것의 투자자들이나 거대 유통 기업들에 이익을 돌려주기 위한 장치이다. 물론 몇몇 이름난 생산자들이 저작권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얻긴하지만, 대부분의 창작자들에게 그것은 신화적인 것을 뿐이다. 상업영화게에서도 그들은 대부분 영화사에서, 방송국에서 창작 노동을 하며 착취당하는 노동자일뿐이다. 게다가 그것은 문화의 향상발전을 도모하기 보다는 그 반대로 기능하고 있다. 저작권은 디지털 네트워크 환경에서 문화적 생산물들을 확산시키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막고 있으며, (때문에) 풍부한 2차 창작물(소위 패러디나 키치 등)들이 산출될 수 있는 통로를 차단시키고 있다. 파생 창작물의 생산을 활성화 시키는 것은 문화(심지어는 산업)를 향상발전 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저작권이 가로 막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디플러그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독립영화계가 침묵하고 있는 저작권 단속은 독립영화의 기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 된다. 그것은 상업 영화의 틀에 독립영화 스스로를 구속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만약 이 상태가 더욱 진행되어 독립영화가 저작권 산업에 기대어 생명을 유지해 나가게 된다면, 독립영화는 발명되어야할 미래의 가능성들(퍼블릭 액세스를 포함한 대안적인 영상의 생산, 유통, 소비 방식들)을 미리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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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하여 정보공유연대 오병일씨의 글을 함께 읽어 보자.

독립영화와 저작권(오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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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노벨 평화상을? 환상말고 현실을 직시하자

 

 

올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인터넷이 거론되고 있다. 일단 노벨상이 가진 갖가지 추문은 제쳐둔다면 이런 흐름 자체는 상당히 흥미롭다. 지금까지 어떤 매체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적이 없다. 텔레비전도, 영화도, 라디오도 나름 여러학자들에 의해 (물론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혁명적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인터넷만한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다. 인터넷은 말 그대로 인터 네트워크(inter + network)의 준말로 상호적인 관계망을 일컫는 것이다. 노벨 평화상은 그것이 수상자든 후보자든 모두 개인이나 단체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은 그런 개인이나 단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상호 연결시키는 관계망 자체이다. 인터넷에 노벨 평화상을 주려고 하는 것은 특정한 주체가 아니라 주체들 사이의 공간, 즉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관계’를 평화의 계기로 사유하려는 행위이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지 관계라는 것은 ‘1대 1’, 혹은 ‘1대 다(多)’의 형식을 띄고 있었다. ‘1대 1’의 관계가 대면적 관계라는 점에서 직접적인 것이라면, ‘1대 다’의 관계는 기술적 매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것이었다. 특히 후자의 관계 방식은 1의 위치를 점하는 것이 대중을 상대로 일방적인 독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권력화를 예비하고 있다. 신문, 방송, 영화, 텔레비전 등의 현대사회의 매체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 형식을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은 이것들과 다른 방식의 관계를 가능케 했다. ‘다(多)대 다(多)’의 방식이 그것이다. 그곳에서 권력의 계기는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일방적 독백보다는 상호적 대화가 강화되는 듯하다. 상호적 대화를 통해 정치적 논쟁이 활성화 되어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들을 사유할 수 있다면,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주체들이 가진 폭력적 모습들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그것들의 궁극적 폐기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가 형성될 수 있다면, 그리고 인터넷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새로운 관계 유형의 도입을 가능케 한 인터넷이 평화상을 수상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은 과연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 인터넷이 도입된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떤 근본적 변화를 겪어 왔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인터넷이 도입되고 활성화된 이후 한국은 더욱 평화로워졌는가? 인터넷은 잠재적 가능성의 공간이고, 그 잠재성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끝내는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라면, 결코 도래할 수 없는 ‘미래’의 잠재성이라면, 혹은 그 잠재성들이 끊임없이 체계적으로 억압되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보여주는 환상의 미래를 걷어내고, 그것을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인터넷이 도입시킨 ‘다대 다’라는 관계 방식을 보자. 이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다대 다’의 관계에서 개입과 토론의 주체들이 능동성을 가지고 상호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소위 상호작용성, 혹은 상호능동성(inter-activity)이라 부른다. 인터넷이 불러오는 수많은 가능성들은 바로 이 능동적 상호작용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을 사용하는 주체들을 능동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능동적인 참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수많은 노이즈를 만들어내는 특정 분야에 한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권력을 가진 지배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중(그들을 민중, 군중, 다중, 피지배자 등 그 무엇으로 불러도 관계없다)을 순수한 존재라거나 혁명적 저항의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들은 어떤 측면에서 전혀 능동적이거나 저항적이지 않다. 오히려 상호수동성(inter-passivity)을 가진 이들이라 해도 좋다.

 

그들에게(자꾸 이렇게 뭉뚱그려서 ‘그들이’ 하나의 속성을 공유한 것처럼 이야기 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편의상 그들이라 불러보자. 물론 ‘그들’에는 ‘나’도 포함된다) 인터넷은 블로그와 동호회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공간이며,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거나 놓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다운받아 보고, 게임과 쇼핑을 하는 (복잡한 기능을 가진)단순한 도구이다. 물론 기업의 횡포나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 뉴스에 비판적인 댓글을 달거나, 트위터에 4대강 사업을 비난하는 강한 정치적 색채를 가진 글이 상당한 양으로 올라온다. 그런데 댓글이나 트위터의 짧은 논평이 능동성이고, 저항이며, 인터넷의 가능성인가? 조직적 힘으로 전환되기보다는 과잉된 언어를 통해 정치적 포만감을 제공하는 것,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능동성 보다는 수동성의 근거가 되는 것이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인터넷의 기능아닌가.

 

인터넷과 관련해서 결코 간과해서 안되는 또 하나의 지점은 인터넷의 형성과 유지와 관련된 정치경제적 기반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경시할 때 우리는 단순한 논리의 매체결정론에 빠지게 된다. 매체는 고유한 ‘관계 방식’을 가지지만, 그것 자체가 정치경제적 조건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인터넷의 기원인 아르파넷(ARPANET)이 미국방부의 첨단기술연구계획국(ARPA)에 의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후 미국은 1990년에 ‘정보고속도로 구상’을 발표하고 인터넷 민간화 이후의 지구적인 정보화를 예비했다. 이에 기초해 1993년 ‘국가정보하부구조(NII)구상 행동계획’과 1994년 ‘지구정보하부구조(GII) 구상’을 발표하게 된다. 현재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인터넷은 미국에 의해 주도된 구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인터넷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존 권력의 통제를 받으며, 설계되고 추진되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도 95년 이후 국가 주도의 통신 정책이 수립 되면서 권력의 통제 아래서 인터넷이 형성되게 되었다. 정부는 한국통신의 글로벌경쟁력을 갖추게 한다는 명분과 초고속 정보통신사업의 조속한 추진을 목표로 ‘정보화촉진기본법’을 제정한다. 그리하여 95년에 PC통신 서비스에 인터넷접속 서비스(일명 PPP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이때 설립된 규격화된 인터넷 구조의 기반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잘 정비된 정보통신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인터넷이 국가의 강한 통제 아래서 그것의 주도하에 형성되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인터넷 구조의 상당 부분이 경제적, 그리고 그 경제 성장의 필수적 요소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조건을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인터넷은 그것의 형성기에만 정치적 경제적 조건에 귀속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인터넷 환경을 권력자의 취향에 따라 규제하는 수많은 법규범, 예를 들어 정보통신망법, 저작권법, 통신비밀보호법 등에 둘러쌓여 있다. 우리는 인터넷이 표현의 자유에 기반을 두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매체라는 평가와는 상당히 다른 매체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과연 인터넷이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실제로 무엇일까.

 

인터넷에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는 취지의 캠페인이 한 인터넷 사이트(http://internetforpeace.org)가 개설되면서 확산되었다. 그것이 작년 11월의 이야기다. 얼마전 한국에서도 (사)인터넷기업협회를 중심으로 이 캠페인이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거대 포털 사이트가 동참하고 있다. 이들이 이 캠페인에 동참하며 낸 보도자료에는 인터넷이 “열린 의사소통과 민주주의 발전을 촉진”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포털 사잍트야말로 열린 의사사통과 민주주의 발전의 저해가 되었던 인터넷 서비스 공급자 아닌가. 아무런 저항없이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하고,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저작권 조항을 적극 홍보하고, 촛불관련 네티즌의 개인정보를 검찰에 제공하고, 불법적인 이메일 압수수색에 공모한 이들이 바로 그들 대형 포털 사이트였다. 이들이 옹호하는 인터넷은 무엇인가 의심스럽다. 인터넷,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기능과 위치를 점하는 매체다. 그럼 이제 환상에서 벗어나 좀 더 냉철하게 현재 우리에게 인터넷이 무엇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지지하는 “열린 의사소통과 민주주의 발전”말고, 좀 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의미에서 그것을 달성케 하는 것은 인터넷이 아니라 네티즌, 그리고 우리들의 적극적인 자유에의 요구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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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 사회'에서 '자유'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관련 내용이 보도된 이후 추가 사찰 관련 내용들이 밝혀지며 여러모로 시끄러워졌다. 한편으로는 경찰이나 검찰도 아니고 행정 관련 기관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그것도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사찰을 했다는 점 등이 충격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고, 이런 식의 권력형 사건이 어디 한 두 번인가 하는 생각에 놀랍기보다는 ‘또구나...’하는 푸념만 할 뿐이다.

 

사실 민간인 사찰과 같은 방식의 감시와 통제는 그리 신기하고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유사한 내용의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터지고 있다. 한 동안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됐던 이메일 압수수색은 이제 폭로의 대상도 되지 못할 정도로 식상한 일이 되어 버렸다. 작년에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국정원의 민간 사찰 의혹을 제기 했다가 대한민국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김제동이나 윤도현이 진행중이던 프로그램에서 쫓겨나며 의도치 않게 정치적 투사가 되어 갔던 것이나, 최근 방송인 김미화의 블랙리스트 발언 역시 감시와 통제라는 맥락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소위 감시의 일상화 혹은 보편화라고 부를만한 세상에 살고 있다. 특히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은 감시의 범위와 강도를 상상 이상으로 확대 및 강화 시켰다. 국가에서 특수한 업무를 맡고 있는 기관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기능을 가진 감시 프로그램(예를 들어, FBI에서 개발한 카니보어와 매직 랜턴과 같은 프로그램 등)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동사무소나 수사기관 뿐 아니라 민간 기업에서도 널리 활용하고 있는 감시 방식도 여러 가지다. 기록통합, 컴퓨터 매칭, 컴퓨터 프로필링, 신원조회, 프론트 엔딩, 프론트 엔딩 감사, 단일요인 파일분석, 시스템간 결속 등의 방식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재배열 하여 개인들을 분석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평상적인 노동 공간에서도 감시는 일상화 되어 있다. 과거에는 노동현장의 감시는 감독관에 의해 직접 시행되었다. 노동자 몰래 감시하는 것도 어려웠으며, 노동자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상황을 변화 시켰다. 감시자들은 노동자 모르게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거나 전자우편, 메신저, 인터넷 이용현황 등을 감시하기도 한다. 감시를 통해 취합된 노동자 정보는 노동자에 대한 평가로 직결된다. 나아가 노동현장에서 감시는 훨씬 강도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지는데, 벌써 도입된지 오래된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시스템과 같은 것이 대표적 사례중 하나일 것이다.

 

ERP시스템은 ‘영업, 생산, 구매, 자재, 회계, 인사 등 회사 내 모든 업무를 정보기술을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통합정보시스템’이다. 이 체제 하에서는 개별 노동자의 휴식시간, 작업시간, 생산량, 생산속도, 불량률, 작업장 내 현재 위치 등 노동과정의 모든 것이 컴퓨터에 기록된다. 이 시스템은 일상화된 전자 감시를 통해 노동자에게 엄격한 규율을 강제하지만 자본에게는 엄청난 편리와 이익을 준다. 때문에 이런 시스템은 문제적인 것이 되기보다는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노동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평가 된다.

 

이처럼 일상 공간에서 감시가 보편화 된 상황에서, 그것도 합리화와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긍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정치적 감시가 비난 받는 이유는 우리의 정치적 자유를,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넘어 육체적이고 물리적 자유마저 직접적으로 침해하고 박탈시키는 효과 때문인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치적 감시 중에서도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이나 ‘통신비밀보호법’, ‘저작권법’등은 개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상당한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입법 과정에서 논란이 일긴 했지만) 큰 문제를 야기 시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혹시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에서 사람들을 분노시킨 것은 그것이 총리실의 권한 밖에 있는 일이었다는 점은 아니었을까? 즉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적 감시와 통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총리실에서 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니었을까? 사람들의 분노는 정작 감시와 통제가 아니라 혹시 민주주의라는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사회 질서나 시스템을 유지시키는데 온힘을 쏟아야 하는 국가 권력이 그것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데 대한 분노가 아닐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계산 가능성과 예측 가능성의 확장을 통해 (그것이 재해와 같은 자연적인 것이든, 전쟁이나 범죄와 같은 문화적인 것이든) 삶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과 공포를 제거해가면서 형성되었다. 이를 통해 그것은 특정한 사회 질서를 구축해 나갔다. 사회 질서와 체계가 정교하게 구축되어 가는 만큼, 그 체계에 혹은 그 체계를 통해 거대한 이권을 획득한 이들에게 개인들은 통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대상화되었다. 만약 개인들에게 무한한 자유가 부여된다면, 사회 질서에 반하는 행위마저 용인되어야 한다. 때문에 개인들은 특정한 한계 내에서 자유를 부여받아 왔으며, 그들을 통제 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감시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는 사회 질서와 체계를 유지하는데 일정 몫을 담당해 왔다. 아무런 저항 없이 동사무소에 찾아가 지문을 날인하고, 주민번호를 부여받았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기 위해 주민번호를 제공하고, 자신이 지나간 넷상의 흔적을 쿠키로 보내 기업이나 정부에서 수집할 수 있도록 방치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감시는 개인에 대한 완전한 통제와 지배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그것을 계산가능한 영역으로 가시화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감시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어 개인들을 계산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영역으로 진입시켜 통제 가능한 것으로 전환 시키려는 전략적 행위이다. 자유는 계산을 통해 예측가능한 것이 되어야 하는 영역에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도입한다. 불확실성을 증대 시켜 불안과 공포를 확대 시킬 것인가, 혹은 사회 질서를 위해 자유를 포기해야 할 것인가? 마치 선택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이 질문이 처음부터 잘못 세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도 던져볼만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인위적으로 감소시키려는 노력이 낳은 잘못된 상황은 아닌지, 마치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듯이 우리가 소수의 특권 계층에게 그 임무를 수행 할 수 있도록 엄청난 권력을 제공하면서 그 권력에 은밀히 공모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욱 견고한 사회 체계가 아니라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함으로써 이 상황을 역전시켜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이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 체계를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과 지금 가지고 있는 조금의 기득권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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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민영화의 파괴적 합리성


최근 다시 의료 민영화와 관련된 문제들이 쟁점화 되고 있다. 얼마 전 통과한 의료법 개정안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고, 그것을 큰 틀에서 규정하는 의료 민영화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영리법인병원의 허용 문제와 민간의료보험의 문제가 깊이 연루되어 있다.

 

국민건강보험과 민간의료보험은 일종의 대립관계를 가지는데, 국민건강보험이 강화될수록 민간의료보험이 축소되며, 국민건강보험이 약화될수록 반대의 현상이 발생한다. 국가 경재에서 민간의료보험사가 가진 위치와 영향력(그들의 자본 규모뿐 아니라 로비력까지)을 고려한다면, 정부에서도 국민건강보험에 대한 재정지원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여기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제약회사 문제까지 겹쳐지면서 사태는 더 가속화 된다. 제약회사가 관여되어 있는 약값은 전체 의료비 중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약값이 급속히 증가하는데 반해 의료 보험 혜택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의료비는 증가하고 있는데 사회나 국가의 충당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그 증가분은 고스란히 개인에게 전가되고 있다.

 

가치 판단은 명확하다. 의료 민영화는 가난한 이들에게 거대한 재난이 될 것이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은 점점 낮아질 것이며, 민간의료보험은 더욱 기세등등해 질 것이다. 영리병원 도입 역시 당연히 건강보험 보장성 약화와 동시에 진행된다. 제약회사가 주도하는 약값도 마찬가지다.

 

현대 의학은 엄청난 성취를 이루고 있으며, 지불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적과 같은 혜택을 가져다 주고 있다. 반면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과 죽음 그리고 박탈감을 안겨준다. 영리병원이나 민간의료보험사들은 수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이려 노력(보험금 지급을 거부하거나 늦추는 것)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보험 가입자들은 보험금을 받아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두 입장에는 일종의 간극이 있다.

 

보험가입자에게 보험금을 받는 것은 보험금을 받을 어떤 상황, 즉 병에 걸렸거나, 병원 치료를 받아야할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보험금은 안받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들에게 보험금은 자신의 생활에 금전적인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막는 최후의 저지선 같은 것이다.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려는 보험회사의 노력과 보험금을 받으려는 가입자 사이의 갈등은 해결되거나 중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주고 받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일은 마치 어떤 흥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흥정의 대상이 생명 그 자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 갈등은 극한적 상황에서 발생한다. 보험 가입자는 별다른 힘도 권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거대 자본과의 갈등이나 대결의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다. 의료 민영화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 자본에 의한 생명의 종속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본에 의한 생명의 종속이라는 것은 단순히 밑도 끝도 없는 자본의 횡포 정도로 바라 봐서는 안된다. 그것은 단순한 비난이나 무기력한 대안만을 산출할 뿐이다. 비난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어떤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의료(를 포함한) 민영화는 고유하고 체계적인 광범위한 전략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민영화가 하나의 지배적 흐름이 되었을 때, 그것은 새로운 사회성을 만들어낸다. 국가가 제공했던 어떤 서비스들이 민영화 된다는 것은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하던 국가의 역할이 파기됨에 따라 그 안전망을 유지시키기 위한 비용을 개인이 충당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의료 민영화 경향에 반대하는 대안적인 운동으로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는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건강보험료를 현재보다 1인당 1만 1천원씩만 더 내면, 건강보험 보장성 수준을 혁신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며 운동을 진행중이다. 가입자 본인 부담금을 높이고,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확대하여 보장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의료공급을 민간이 주도하고 의료공급자에 대한 규제방안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재정확충보다 ‘의료공급 시스템의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이나 운동의 보완을 주장하는 이들 모두 사회적 안전망 파괴가 함의하는 정치적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국가나 사회는 사회적 안전망의 유형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방식에 따라 고유의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민영화는 그런 유형의 정치를 개인들의 생활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이 때 정치적인 것은 경제적인 것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의료 민영화 체계에서, 특히 민간의료보험 같은 곳에서 생명은 계산 가능한 것으로 환원되고, 특정한 회계 기준에 의해 평가 되고 측정된다. 병명에 따라 보험금이 다르게 책정될 뿐 아니라, 몸무게, 키, 나이, 병력 등에 따라 개인들의 신체를 분류하고 가격을 매긴다.

 

이런 체계 내에서 새로운 직업 윤리와 규칙도 함께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의사와 같은 전문 직업은 환자의 생명을 보호하는 전통적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여기서 무이클 무어의 영화 식코(SICKO)에 등장했던 린다 피노라는 의사를 상기해 보는 것도 좋을듯 하다. 그녀는 휴매나 사의 전 의료 고문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보험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 그 사람들이 보험에 적용되지 않는 의학적 상황에 있다는 전문 감정을 함으로써 그녀가 속한 회사의 지출을 절약하는 일을 했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녀는 매주 몇백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위치에서 백만달러의 수입을 얻는 위치까지 승진을 했다고 진술한다. 보험회사에서 그녀에게 부여한 임무는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지키는 일이었던 것이다. 린다 피노는 이윤창출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기업에 속해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전문 지식을 활용해 그 과제를 달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 기준에서 이는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의사로서 가장 반도덕적 행위는 기업에 속한 의료 고문에게 가장 합리적인 행위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의료 민영화는 새로운 사회성을 만들어내면서 자신만의 체계를 갖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적합한 유형의 정치적 활동과 회계 방식 그리고 직업윤리 등을 만들어내면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의료민영화로의 변화를 넘어서 보다 넒은 영역을 포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단순히 자본의 횡포만으로도, 그리고 자기 이익 챙기기에 바쁜 몇몇 정치인들의 고안물로도 환원될 수도 없다. 구체적으로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이나 ‘의료공급 시스템 개혁’과 같은 몇 가지 단편적인 처방만으로는 이 상황이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민영화라는 것이 가진 정치적 문제와 제약회사나 보험회사가 가진 경제적 문제, 그리고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들이 함께 사유될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처방전에 쓰일 수 있는 몇 가지 단어들이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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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잡과 기만, 음모론 그리고 천안함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음모론이 존재한다. 단순한 우연이나 재미로 치부하기에는 그 범위나 정도가 상당하다. 음모론은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과 거의 필연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예수가 결혼했다는 설이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에 영국 왕실이 개입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비롯해 중요한 역사적 사건 뒤에 프리메이슨과 같은 그림자 정부가 있다는 소문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특정 지역의 인종을 말살시키기 위해서 에이즈를 개발했다는 풍문도 있다.

 

최근에 들었던 음모론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환경오염의 심각성이 상당히 과대평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대평가된 이유는 환경 재생 관련 기술들을 가진 세력들이 그것들을 상품화하기 위해 환경과 관련된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음모론에는 대체에너지 산업은 물론 화장품, 제약, 자동차, 보험 산업 등의 영역들 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래도 수많은 음모론 중 가장 센세이셔널했던 것은 9.11테러가 미국과 알 카에다의 공모로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음모론은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그것이 영화나 소설의 수많은 소재가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기인할 것이다.

 

음모론은 확실히 가난하거나 무지한 자들의 이데올로기이다. 거기에는 추측과 상상이 넘쳐나며, 온갖 궤변과 억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음모론은 구체적인 증거나 증인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즉 상상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거짓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일말의 진실이 내포되어 있다. 때로 그것은 진실로 밝혀 지기도 하는데, 그 때문은 아니다. 음모론은 현실의 어떤 지점을 조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어떤 ‘사건’의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거나 그 원인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당했을 경우 등장한다. 사건이란 씨줄과 날줄로 정교하게 짜여진 한 사회의 체계에 균열이 발생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민주, 복지, 자유 등의 이름으로 구축된 한 사회의 체계는 그 가치들과 정합적인 관계를 가지는 도덕적 규범, 윤리적 가치 뿐 아니라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법질서를 함께 가진다. 따라서 한 사회의 체계는 인위적으로 구성된 필연적 성격을 가지는데, 사건은 우발적으로 이런 체계의 균열을 드러낸다. 따라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노쇠하고 고리타분한 언어가 아니라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음모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인식론적 공백을 능동적으로 매워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인식론적 공백이 발생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사건의 원인들이 정교한 기술과 과학적 모델을 통해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 오염이 좋은 사례일 것이다. 환경 훼손이 야기하는 위협들은 대개 정교한 기술을 통해서만 확인되며 복잡한 과학적 모델과 언어를 통해서만 인식 가능하다. 환경 훼손을 이야기 하는 언어들은 국가나 거대 기업이 지원하는 연구소, 혹은 극히 소수의 전문가들을 경유하여 생산된다. 민중들은 그 언어를 생산할 수 없고, 단지 소비할 수 있을 뿐이다. 음모론은 이와 같은 지식과 언어 위계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어떤 것의 원인이 확정될 수 없을 때, 가설, 가정 혹은 추측의 영역이 확대될 때, 거기에는 음모론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음모론이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한계는 모든 사건을 특정한 권력의 의지로 환원한다는 점이다. 음모론은 끊임없이 사건의 뒤에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쉽고 재미있는 설명이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일만한 근거나 힘은 별로 없다. 그런데 여기서 음모론의 귀결 지점으로 등장하는 권력이 어떤 권력인지는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특정 정치인이나 기업가를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지시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음모론에서 지시하는 권력은 대의제 정치나 자본주의와 같은 좀 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담론적 실체이다. 음모론이 개입하는 사건은 이 담론적 실체의 정합성이 흔들리는 지점인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천안함을 둘러싸고 엄청난 양의 음모론이 넘쳐나고 있다. 음모론이 그냥 떠도는 정도가 아니라 주요 언론에서 보도할 정도로 확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신문에서는 손수 음모론을 제작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천안함 사태는 말 그대로 의문 투성이이다. 관련된 핵심적 정보와 모든 설명언어들을 국가와 군에 의해 차단당했으며, 그 원인이 어떻게 밝혀지든 굉장한 정치적 파급력을 가질 사건이었다. 한마디로 음모론이 개입하기 위한 최고의 조건이었던 셈이다.

 

정부에서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에 의한 무력 기습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러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때로 사건을 정합적으로 기술하고 설명하는 공식적인(공인된 혹은 공적 권력에 의해 공표된) 논리보다 음모론이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처럼 보인다. 음모론은 구체적인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지는 않지만, 그것이 가진 현실적 영향력이나 사회적 효과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논리보다 통찰력 있게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부가 천안함 사건의 원인을 북한이라고 지목한 것에 대해, 하필 선거를 앞두고, 선거 운동이 시작하는날, 북한이라는 카드를... 이라는 식의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다. 구체적인 근거 없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거짓일 수 있지만, 충분한 개연성을 가질 수 있는 설명이다. 천안함의 진짜 침몰 이유와는 무관하게 그것이 선거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예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태는 사건 자체의 진상규명만큼이나 중요한 어떤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천안함 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여러 담론의 지형과 행위자들의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여기에는 안보, 국익, 분단, 외교 문제부터 정보통제, 매체 보도형태, 국가 차원의 의례 기능 까지 여러 가지 층위의 문제가 복합적 내재되어 있으며, 정부, 군, 북한, 중국과 미국, 유가족, 언론, 자식을 군대 보낸 부모, 군대 다녀온 남성과 여성, 그리고 이 과정을 지켜보며 직간접적으로 담론에 참여하는 이들까지 다양한 행위자들이 연루되어 있다. 이런 복합적 문제의 구조를 포괄적으로 드러내 준 것은 언론도 학계도 정부도 아니었다. 그것은 음모론을 만들고 유포하고 읽어내는 민중들이었다. 음모론은 진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도약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는 이들이 보지 못하는 현실의 다른 측면을 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때로는 사건의 실질적 사실보다는 이런 상상들이 더 중요해 보이기까지 한다. 음모론은 가난하거나 무지한 자들의 이데올로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에 접근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언어이며, 현실의 정치나 경제가 가진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을 매개로 그 모순을 해부하는 민중의 무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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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사건(event)은 정의에 따르자면, 정해진 과정이나 정해진 절차를 가로막으며 발생한다. 말하자면 어떠한 중요한 일도 전혀 일어나지 않는 세상에서만 미래학자들의 꿈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 기대하지 않은, 예측하지 않은,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우발 사건을 '무작위적인 사건'이나 '과거의 마지막 호흡'이라고 명명하면서, 무관한 일이거나 고명한 '역사의 쓰레기통'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정치 담합의 가장 오래된 속임수이다. 말하자면 이 속임수는 의심할 바 없이 이론을 명료화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 대가로 현실로부터 더욱더 멀어진다. 그 위험성은 그런 이론들이 실질적으로 판별가능한 현재의 경향들로부터 증거물을 수집하기 때문에 그럴듯할 뿐만 아니라, 그 내재적인 정합성 때문에 최면 효과도 갖는다는 점에 있다.  - 한나 아렌트, on vio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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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대상으로서의 환경

각지에서 진행되던 벚꽃축제가 끝나고도 몇주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제야 겨울이 끝난 느낌이다. 봄은 온적도 없는데, 이제 곧 여름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상할 정도로 갑작스런 기후 변화가 당황스럽다. 쓰나미에 지진에 화산폭발까지 재난의 지구화라고 할만한 현상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자연환경이 야기시킨 재난은 이제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스펙타클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다. 이 사태들의 개별적인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연환경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소위 자연환경의 오염이나 훼손의 문제가 문명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심각하게 훼손된 환경을 생각해보면, 물이나 공기도 팔겠다는 말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됐다. 환경은 이제 인간에 의해 통제되고 개발되는 대상이 된 것이다. 물론 인간은 환경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통제의 범위를 상당부분 확대해 나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개막식 때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날씨를 조정하라는 정부의 명령이 내려졌었고, 이런 날씨 조정 기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번 달 9일에는 2차대전 승전 65주년 기념행사가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열리는데, 이 행사에서도 모스크바 상공의 비구름을 인공적으로 제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 통제할수 있는 환경의 범위는 극히 협소하다. 이런 대단한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급속도로 증가하는 자연 재난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 환경은 본질적으로 지구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특정한 세력의 관할권이나 주권에 의해 통제될 수 없다. 때문에 환경훼손과 관련된 문제는 지구적 협치의 대상이 된다. 이미 UN에서는 1987년 <우리의 공유 미래>라는 발간물에서 환경에 대한 착취나 파괴를 대체할 개념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현재까지 국가간 체계 내에서 환경을 다룰 때 근간이 되는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개념이다. 우리나라 역시 이 이념에 근간을 두고 환경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지난 2008년에는 국가지속가능발전위원회가 출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여전히 발전을 위한 지속 가능성이라는 발전주의 모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발전주의 모델에서 환경은 경제적 발전에 종속되어 있다. 환경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지 않고, 언제나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어 측정되고 계산된다. 환경이 발전주의 모델에 종속변수가 되는 한, 새만금이나 4대강 개발과 같은 문제는 언제든 재발 될 수 있다.

 

방금 지적했듯, 환경 훼손의 문제는 지구적 범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한 국가의 영토적 경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환경훼손에서 이러한 경계 없음은 피해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의 문제에도 적용된다. 실제로 환경훼손의 책임이 상당부분 서구 선진국과 다른 지역의 개발 도상국의 경제 발전 전략, 농업 환경, 교통수단, 에너지 정책 등에서 기인함에도 그 책임은 완전히 측정되어 분담될 수 없다. 때문에 환경 오염이나 훼손의 책임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될 뿐, 실질적인 의무나 책임으로 강제되지 않는다. 수많은 환경 관련 국제 협정이나 회의가 열리지만, 각 국가는 자신들의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근간으로 행동한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훼손의 문제는 환경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나 경제의 문제가 된다.

 

환경훼손 문제에서 불분명한 것은 피해와 책임의 문제만은 아니다. 환경 훼손의 정확한 원인을 찾는 것도 언제나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물론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다시 피해와 책임의 불확정 문제를 소환한다). 그것이 미지의 영역에 있다는 것은 환경 오염이나 훼손의 문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정의 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포괄하는 영역이 협소하게 규정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미지의 영역을 기술할 정확한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인류는 그것에 대해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도 풍부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언어들이, 환경훼손을 다루는 담론들이 국가나 거대 기업이 지원하는 연구소, 혹은 극히 소수의 전문가들을 경유하여 생산된다는 점이다. 환경 훼손이 야기하는 위협들은 대개 정교한 기술을 통해서만 확인되며 복잡한 과학적 모델과 언어를 통해서만 인식 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그 언어를 생산할 수 없고, 단지 소비할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권력이나 전문지식을 가지지 못한 보통의 민중들은 환경오염 담론이 어떤 정치적 배경에서 만들어지는지 거의 알 수 없다.

 

나는 지금 한편으로는 당연해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뜬금없는 것일 수도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바로 환경오염이나 훼손이 정치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환경 문제중 단연 가장 많이 거론되고 결정적인 사안중 하나는 지구 온난화이다. 현재 지구온난화에 대해서는 지구적 기후변화에 대한 세밀한 조사와 연구가 진행중이다. 그것에 대해 과거보다 더욱 정교해진 과학적 담론을 생산되고 있지만 아직도 그것의 완전한 메커니즘은 밝혀지지 않았다. 기후변화가 국지적 수준에서 다양한 경로로 나타날뿐 아니라 그것이 다른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완전히 밝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최근 가장 뜨거운 환경 담론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지구온난화 이론은 거의 한 세기 전에 나타난 이론이지만, 그 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에 UN기후변화협약이나 교토의정서 등을 통해 환경 담론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는 지구 온난화나 기후변화를 이야기 하며 누구나 이산화탄소, 메탄가스, 황산화물, 프레온 가스 등의 용어를 쉽게 사용하게 되었다. 요컨대 지구온난화의 문제가 사람들의 피부로 느껴지기 전에, 이미 그것은 국가간 체계에서 일종의 ‘합의’를 통해 담론화 된 것이다. 그 합의에 필요한 증거로서의 언어들은 이미 소수 전문가나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생산되어 있었다.

 

환경 담론이 정치의 문제라면 그것은 이미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자장 안에서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정교화 되면 그것은 발화 주체의 담화가 아니라 사물의 말로 전치된다. 즉, 발화 주체의 주관적 생각이 아니라 사물의 진리가 그렇다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 사물의 질서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질서에 적응해야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특히나 환경 담론은 정치적 합의의 언어가 아니라 자연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제출된다. 환경 운동이 그렇게나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환경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탈정치의 장이 아니다. 이제 환경을 탈정치의 장으로 상상하는 순진한 짓은 그만두도록하자. 문제는 환경도 아니고, 환경 오염도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다루는 인간이며,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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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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