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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잡과 기만, 음모론 그리고 천안함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음모론이 존재한다. 단순한 우연이나 재미로 치부하기에는 그 범위나 정도가 상당하다. 음모론은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과 거의 필연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예수가 결혼했다는 설이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에 영국 왕실이 개입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비롯해 중요한 역사적 사건 뒤에 프리메이슨과 같은 그림자 정부가 있다는 소문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특정 지역의 인종을 말살시키기 위해서 에이즈를 개발했다는 풍문도 있다.

 

최근에 들었던 음모론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환경오염의 심각성이 상당히 과대평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대평가된 이유는 환경 재생 관련 기술들을 가진 세력들이 그것들을 상품화하기 위해 환경과 관련된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음모론에는 대체에너지 산업은 물론 화장품, 제약, 자동차, 보험 산업 등의 영역들 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래도 수많은 음모론 중 가장 센세이셔널했던 것은 9.11테러가 미국과 알 카에다의 공모로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음모론은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그것이 영화나 소설의 수많은 소재가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기인할 것이다.

 

음모론은 확실히 가난하거나 무지한 자들의 이데올로기이다. 거기에는 추측과 상상이 넘쳐나며, 온갖 궤변과 억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음모론은 구체적인 증거나 증인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즉 상상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거짓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일말의 진실이 내포되어 있다. 때로 그것은 진실로 밝혀 지기도 하는데, 그 때문은 아니다. 음모론은 현실의 어떤 지점을 조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어떤 ‘사건’의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거나 그 원인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당했을 경우 등장한다. 사건이란 씨줄과 날줄로 정교하게 짜여진 한 사회의 체계에 균열이 발생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민주, 복지, 자유 등의 이름으로 구축된 한 사회의 체계는 그 가치들과 정합적인 관계를 가지는 도덕적 규범, 윤리적 가치 뿐 아니라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법질서를 함께 가진다. 따라서 한 사회의 체계는 인위적으로 구성된 필연적 성격을 가지는데, 사건은 우발적으로 이런 체계의 균열을 드러낸다. 따라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노쇠하고 고리타분한 언어가 아니라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음모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인식론적 공백을 능동적으로 매워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인식론적 공백이 발생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사건의 원인들이 정교한 기술과 과학적 모델을 통해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 오염이 좋은 사례일 것이다. 환경 훼손이 야기하는 위협들은 대개 정교한 기술을 통해서만 확인되며 복잡한 과학적 모델과 언어를 통해서만 인식 가능하다. 환경 훼손을 이야기 하는 언어들은 국가나 거대 기업이 지원하는 연구소, 혹은 극히 소수의 전문가들을 경유하여 생산된다. 민중들은 그 언어를 생산할 수 없고, 단지 소비할 수 있을 뿐이다. 음모론은 이와 같은 지식과 언어 위계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어떤 것의 원인이 확정될 수 없을 때, 가설, 가정 혹은 추측의 영역이 확대될 때, 거기에는 음모론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음모론이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한계는 모든 사건을 특정한 권력의 의지로 환원한다는 점이다. 음모론은 끊임없이 사건의 뒤에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쉽고 재미있는 설명이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일만한 근거나 힘은 별로 없다. 그런데 여기서 음모론의 귀결 지점으로 등장하는 권력이 어떤 권력인지는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특정 정치인이나 기업가를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지시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음모론에서 지시하는 권력은 대의제 정치나 자본주의와 같은 좀 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담론적 실체이다. 음모론이 개입하는 사건은 이 담론적 실체의 정합성이 흔들리는 지점인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천안함을 둘러싸고 엄청난 양의 음모론이 넘쳐나고 있다. 음모론이 그냥 떠도는 정도가 아니라 주요 언론에서 보도할 정도로 확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신문에서는 손수 음모론을 제작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천안함 사태는 말 그대로 의문 투성이이다. 관련된 핵심적 정보와 모든 설명언어들을 국가와 군에 의해 차단당했으며, 그 원인이 어떻게 밝혀지든 굉장한 정치적 파급력을 가질 사건이었다. 한마디로 음모론이 개입하기 위한 최고의 조건이었던 셈이다.

 

정부에서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에 의한 무력 기습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러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때로 사건을 정합적으로 기술하고 설명하는 공식적인(공인된 혹은 공적 권력에 의해 공표된) 논리보다 음모론이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처럼 보인다. 음모론은 구체적인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지는 않지만, 그것이 가진 현실적 영향력이나 사회적 효과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논리보다 통찰력 있게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부가 천안함 사건의 원인을 북한이라고 지목한 것에 대해, 하필 선거를 앞두고, 선거 운동이 시작하는날, 북한이라는 카드를... 이라는 식의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다. 구체적인 근거 없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거짓일 수 있지만, 충분한 개연성을 가질 수 있는 설명이다. 천안함의 진짜 침몰 이유와는 무관하게 그것이 선거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예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태는 사건 자체의 진상규명만큼이나 중요한 어떤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천안함 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여러 담론의 지형과 행위자들의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여기에는 안보, 국익, 분단, 외교 문제부터 정보통제, 매체 보도형태, 국가 차원의 의례 기능 까지 여러 가지 층위의 문제가 복합적 내재되어 있으며, 정부, 군, 북한, 중국과 미국, 유가족, 언론, 자식을 군대 보낸 부모, 군대 다녀온 남성과 여성, 그리고 이 과정을 지켜보며 직간접적으로 담론에 참여하는 이들까지 다양한 행위자들이 연루되어 있다. 이런 복합적 문제의 구조를 포괄적으로 드러내 준 것은 언론도 학계도 정부도 아니었다. 그것은 음모론을 만들고 유포하고 읽어내는 민중들이었다. 음모론은 진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도약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는 이들이 보지 못하는 현실의 다른 측면을 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때로는 사건의 실질적 사실보다는 이런 상상들이 더 중요해 보이기까지 한다. 음모론은 가난하거나 무지한 자들의 이데올로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에 접근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언어이며, 현실의 정치나 경제가 가진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을 매개로 그 모순을 해부하는 민중의 무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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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추가 : 사건(event)은 정의에 따르자면, 정해진 과정이나 정해진 절차를 가로막으며 발생한다. 말하자면 어떠한 중요한 일도 전혀 일어나지 않는 세상에서만 미래학자들의 꿈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 기대하지 않은, 예측하지 않은,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우발 사건을 '무작위적인 사건'이나 '과거의 마지막 호흡'이라고 명명하면서, 무관한 일이거나 고명한 '역사의 쓰레기통'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정치 담합의 가장 오래된 속임수이다. 말하자면 이 속임수는 의심할 바 없이 이론을 명료화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 대가로 현실로부터 더욱더 멀어진다. 그 위험성은 그런 이론들이 실질적으로 판별가능한 현재의 경향들로부터 증거물을 수집하기 때문에 그럴듯할 뿐만 아니라, 그 내재적인 정합성 때문에 최면 효과도 갖는다는 점에 있다.  - 한나 아렌트, on vio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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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론 - 소렐, 벤야민, 데리다, 파농, 아렌트의 논의를 중심으로 - 박홍규

폭력론
-소렐, 벤야민, 데리다, 파농, 아렌트의 논의를 중심으로

박홍규 • 영남대학교 교수/ 법학


1. 폭력의 뜻

국어사전에서 폭력이란 ‘함부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힘’으로 풀이되고, ‘폭력을 써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단체’가 폭력단이라고 설명된다. 그리고 폭력주의자는 테러리스트, 폭력주의는 테러리즘이라고 한다. 즉 폭력은 테러라는 것이 국어사전의 이해이다. 그러나 국어사전에서는 폭력의 영어를 force라고 표기한다. 일반적으로 영어에서 폭력은 테러(terror)도 힘(force)도 아닌 violence를 말한다. 영어사전에서 violence란 ‘비공인의 완력이나 물리적 힘에 의한 강습’을 뜻하고, 공인된 군대나 경찰의 경우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이나 경찰력의 행사는 폭력이 아니게 된다. 이는 폭력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으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재산에 손해를 입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로 정의하는 입장과 같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폭력이 그런 것이다. 이러한 폭력 개념은 윤리나 정치 또는 법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관념이 되고 있는 것으로 폭력을 힘의 비합법적인 행사인 악으로 보는 전통적인 개념이다.
이런 입장은 ‘구체적인 행동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제한적이라고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 조희연․조현연, 「국가폭력․민주주의 투쟁․희생에 대한 총론적 이해」, 조희연 편, ꡔ국가폭력, 민주주의 투쟁, 그리고 희생ꡕ, 함께읽는책, 2002, 26쪽.
그러한 견해는 이러한 비판을 하면서도 달리 폭력을 정의하지 않고서, 억압의 폭력(기성 지배체제가 휘두르는 제도적 폭력, 공격적 폭력)과 해방의 폭력(필연적으로 불법적인 저항적 폭력, 생존의 방어를 위한 폭력)이란 개념을 사용하여 제도나 저항까지 폭력에 포함한다. 그러나 그런 개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폭력 개념을 구체적인 행동에만 집중한다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이유는 이러한 견해에서 사용되는 폭력이란 개념은 매우 특수하기 때문이다. 즉 종래의 일반적인 폭력 개념은 억압의 폭력이나 해방의 폭력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고, 폭력이란 개념은 억압과 해방이라고 하는 정치 사회적인 맥락에서 특수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위 견해는 억압의 폭력을 전쟁, 고문, 살인, 학살 등으로 상징되는 ‘국가폭력’이란 말로 이해한다. 위의 책.
그러나 그러한 국가폭력도 구체적인 행동을 뜻하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물론 위 견해는 그런 국가폭력을 낳는 근거인 유신체제와 같은 악법을 ‘제도적 폭력’이라고 보고 있으나, 법제도까지 폭력이라고 보는 경우 폭력에 대한 더욱 엄밀한 정의가 필요하다.
폭력에 대한 구조적인 정의는 빈곤을 비롯한 사회적 부정의를 말하는 더욱 광범한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예컨대 Johan Galtung, “Violence, Peace and Peace Research," The Journal of Peace Research6(2), 1969, pp. 167-91. 특히 p. 168과 p. 173. 또한 N. Garver, “What Violence Is," in J. Rachels and F. A. Tilman (eds), Philosophical Issues: A Contemporary Introduction, New York: Harper & Row, 1972, pp. 223-8. 또한 빈곤과 관련해서는 S. Lee, 'Poverty and Violence', Social Theory and Practice 22 (1) 1996, pp. 67-82.
그것은 개인이나 제도에 의해 또는 사회 자체에 의해 가해지는 물질적인 피해는 물론 심리적인 피해까지 낳는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된다. 주로 평화 연구의 영역에서 평화를 저해하는 모든 반평화적 행태나 제도를 폭력으로 보려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너무나도 광범하고 모호하다는 비판도 있다. C. A. J. Coady, “The Idea of Violence," Journal of Applied Philosophy 3 (1) 1986, pp 3-19.

이와 달리 폭력=테러라는 말은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정부가 이슬람 또는 그 일부 세력 그리고 북한 등을 비난하며 지칭하는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행사하는 힘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슬람 등은 미국 등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국제관계에서 사용되는 폭력 논의는 그 판단이 쉽지 않으나, 어느 측이든 자신을 폭력이라고 말하지 않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개념으로 사용함은 확실하다.
이처럼 폭력이란 말의 사용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적어도 법적으로 폭력은 불법이므로 그 합법성이 논의될 수 없다. 물론 법적인 차원에서도 가령 범죄의 피침해자가 자력구제를 가하는 경우라든가 또는 노동자나 노동조합의 쟁의행위와 같이 그 폭력에 대한 법적 판단이 반드시 구체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예외적이다. 그러나 그런 법적 평가와 무관하게 억압적 국가 권력 자체를 ‘합법적 폭력’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에 대한 법적인 판단은 국가 권력 자체를 폭력이 아니라 합법적인 ‘권력’이라고 보는 것을 전제로 하여, 권력의 부당한 폭력적 행사에 대해서만 법은 적어도 원칙적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여하튼 그런 부당한 권력의 폭력적 행사에 대해 비폭력을 주장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예컨대 인도의 간디처럼) 유효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대부분의 경우 더욱 큰 권력의 폭력적 행사를 초래할 수도 있고, 그런 경우에는 도리어 폭력적 저항(예컨대 알제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식민지 해방 투쟁)이 유효할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해방 전략의 차원에서 무조건적인 비폭력 주장은 반드시 유효한 것이 아니고, 폭력이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갖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여하튼 이 글은 폭력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정의에 대해서는 각종 사회과학 사전이나 문헌을 살펴볼 수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는다. 대신 이 글에서는 소렐, 벤야민, 데리다, 파농, 아렌트의 폭력 논의를 중심으로 폭력에 대한 사상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논의의 핵심은 국가폭력과 그것에 대항하는 저항폭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개념에서 사용되는 폭력은 위에서 본 일반적인 폭력의 개념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 즉 국가 권력의 부당한 폭력의 행사와 그것에 저항하는 정당한 폭력의 행사를 대립시켜 그 범주에서만 폭력을 검토하는 것이다.



2. 국가폭력과 저항폭력

사회과학에서는 흔히 근대 국가를 일정한 영토적 공간에서의 힘(force)의 합법적 독점체로 규정한다. 예컨대 앤터니 기든스, ꡔ현대사회학ꡕ, 김미숙 외 역, 을유문화사, 1992, 276쪽.
여기서 힘이라고 한 force를 우리말 번역에서는 ‘폭력’이라고 하나, 그 폭력은 당연히 위에서 말한 법적인 개념이 아니라 정치학적, 사회학적 개념으로써 힘을 말하는 것이므로 위에서 말한 법적 폭력과는 구별해야 한다. 여기서 국가의 폭력이라 함은 법적 차원에서 권력이라고 불리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적어도 합법적 폭력인 권력인 한 그것을 불법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 자체를 폭력 조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이는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한 것이리라.
문제는 근대 국가가 합법적인 힘(폭력)의 독점인 권력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경우에 따라 권력의 이름으로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이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시민에 의한 저항의 폭력이 당연히 발생한다는 점에 있다. 이처럼 국가 기관이나 국가 관련 요원이 그 부당한 폭력에 의한 직간접의 희생자인 시민들에게 공포감과 복종심을 가질 수 있도록 폭력이나 위협행동을 의도적으로 행하는 것을 ‘국가폭력’(State Terror)이라고 할 수 있고, 이에 정당하게 저항하는 ‘저항폭력’을 대치시킬 수 있다. 따라서 저항폭력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것이고 정당성을 갖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두 폭력의 대치는 흔히 위기 상황에서 나타난다. 그 하나가 1920대의 독일에서였다. 즉 1917년 러시아에서 2월혁명(부르주아 혁명)과 10월혁명(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거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고, 이어 1918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11월 혁명이 터져 제국이 무너져 각지에서 혁명적 폭력 기관으로서 병사․노동자평의회가 수립되었다. 그 후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그에 의한 스팔타카스단의 폭력 봉기가 일어났으나 실패했다. 그런 가운데 프롤레타리아의 비권력적인 폭력에의 기대가 지식인들과 민중 사이에서 높아졌다.
이 시기에 와서, 시민적 권리=시민법의 주체로서 각 시민이, 자연상태에서 행사하는 ‘폭력’을 ‘법’의 경계선 안에서 하나의 ‘권력’으로 독점시킨다는 전제에 선 근대 시민사회는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즉 국가는 그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권력의 본질인 ‘폭력’을 계속 추구하여 가장 야만적인 폭력인 제국주의 전쟁과 계급 갈등의 유지에로 나아갔고, 이에 대해 시민사회는 그것을 억제하기는커녕 도리어 국가가 주장하는 ‘이성’이나 ‘도덕’ 및 ‘법’이라는 것에 순응했다. 근대 국가의 시민법 질서 틀 안에서 ‘주체’로 자기를 형성한 ‘시민’에게는 법의 목표인 실질적인 ‘정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혁명적 에너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부르주아 국가 틀이 온존되고 시민이 그 속에 존재하는 한 법과 정의의 괴리는 극복될 수 없었다.
이 시기에 브로흐, 루카치, 그람시 같은 지식인들이 급속하게 공산당에 접근하고,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연구소에 모인 폴록이나 호르크하이머 같은 젊은 학자들이 네오 맑스주의적인 관점에서 계몽된 시민사회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게 된 배경에는, 폭력적인 국가 권력 앞에 무력한 부르주아 시민문화에 대한 절망이 있었다. 따라서 부르주아적인 권력 쟁탈과는 무관한 ‘정의’를 목표로 한 프롤레타리아 ‘폭력’의 가능성을 논의하여 ‘근대’라는 감옥을 탈출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당대 지식인의 급선무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벤야민의 폭력론이 나왔다.
3. 소렐과 벤야민의 폭력론

벤야민의 폭력론은 조르주 소렐의 ꡔ폭력론ꡕ(1908)에 근거한다. 소렐은 공포 정치로 변질된 프랑스 대혁명(1789)의 담당자인 부르주아에 의한 국가 권력의 남용과, 노동조합의 총파업을 통해 ‘법’의 지배를 타파하고자 한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을 명확히 구별한다. 즉 부르주아가 혁명적 정치 행동을 야기해도 그것은 ‘법’에 의해 기존의 국가 형태를 온존시키면서 권력을 특권자의 것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나,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은 ‘법’을 떠나 어떤 종류의 국가 권력 형태도 용인하지 않고 순수한 아나키를 지향한다고 소렐은 주장했다.
이러한 소렐의 주장 역시 20세기 초엽 프랑스의 위기 상황을 의식한 것이나, 소렐의 폭력론이 나온 지 13년 뒤에 쓰여진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은 위에서 설명한 1920년대 독일의 현실적 위기에서 소렐의 논의를 발전시킨 것이다. 소렐의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법’에 의하느냐 아니냐 하는 점이다. 이를 벤야민은 Rechtssetzung이라는 개념으로 부른다. 일본에서는 이를 법차정(法借定)이라고 번역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따르는 견해가 있으나, 차정이란 우리말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니 우리말로 삼기에는 어색하다. 여기서는 반드시 정확한 번역이라고 볼 수 없으나, 편의상 ‘법준거’라는 말로 옮기도록 하자. 벤야민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법준거에서 폭력의 기능은 아래와 같은 의미에서 이중적이다. 즉 법준거는 폭력을 수단으로 하여 법으로 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추구하나, 목적이 된 것이 법으로 제정된 순간 폭 력을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엄밀한 의미에서 게다가 직접적으로 폭력을―폭력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리고 은밀하게 폭력과 결부되어 있는 목적을 권력의 이름으로 법으로 제정함에 따라―법준거적인 폭력으로 만들게 된다. 법 준거는 권력준거이고, 그 점에서 폭력을 직접 선언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정의가 온전 히 신적인 목적준거의 원리임에 대해 권력은 온전히 신화적인 법준거의 원리이다. Walter Benjamin, Zur Kritik der Gewalt, in: Angelus Novus=Ausgewälte Schriften 2, 1966 Frankfurte a. M. (Shurkamp), S. 61.


벤야민은 자기 목적화 되지 않는 폭력의 최종 도달 목표인 ‘정의’와, 일단 준거되어 폭력적인 ‘권력’ 행사의 근거로 변한 ‘법’을 구별한다. 이는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정의를 뜻하는 justice가 라틴어의 ius에서 파생된 말인 것과 달리 독일어에서는 각각 Gerechtigkeit와 Recht가 구별되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벤야민에 의하면 법은 권력자의 ‘법 이전 특권’(Vor-recht)을 유지하기 위해 그 권력이 미치는 경계선을 정하고 고정화한다. 그리고 그 경계선을 침범하는 자를 범죄자로 보고 속죄를 요구한다. 이를 벤야민은 신화적인 법이 지배하는 세계로 본다. 그 세계에서 법=권리의 주체인 각자는 시원적인 폭력을 통해 준거된 법의 경계선 안에 머물도록 강요된다고 벤야민은 주장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법적 폭력을 법 수호적 폭력(기존의 법을 유지하기 위한 폭력)과 법 형성적 폭력(새로운 법을 제기하는 폭력)으로 구분하면서도 그 둘 모두 법에 의한 지배를 전제함으로써 지배 권력관계를 재생산하는 신화적 폭력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신화적이란 법을 변화시킴에 의해 지배 권력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법에서 흔히 실정법과 자연법으로 구분하는 것에 각각 대응된다. 즉 벤야민은 실정법과 자연법에서 폭력의 개념이 모두 정당한 목적과 수단의 관계라는 도그마를 공유한다고 비판하고, 시인된 합법적 폭력과 시인되지 않은 불법적 폭력의 구별이 법과 관련된 폭력성을 간과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반면 벤야민이 신적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법과의 연관을 부정하는 혁명적 폭력으로서, 법적 폭력-신화적 폭력을 폐기하기 위한 것이다. 즉 법의 경계선을 파괴하고 ‘법권력’ 하에서의 죄를 제거하기 위한 폭력이다. 파괴적인 작용을 결과한다는 점에서 신적 폭력도 신화적 폭력과 유사하나, 전자가 파괴적인 것은 오직 재화, 법=권리, 생활과 같은 외적 사항과 관련되고, 생명 있는 것의 영혼을 파괴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고 벤야민은 주장한다. 즉 신적인 폭력은 희생의 피를 흐르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대립을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신이 대립하듯이, 신화적 폭력에는 신적인 폭력이 대립한다. 게다가 모든 점에서 대립한다. 신화적 폭력이 법에 준거하는 것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을 파괴한다. 전자가 경계를 설정한다면 후자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자가 죄를 만들고 속죄하게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죄를 제거한다. 전자가 협박적이라면 후자는 충격적이고, 전자가 피의 냄새를 풍긴다면 후자는 피의 냄새가 없고 치명적이다. 위의 글, S. 63.


이러한 신적인 폭력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신화적 폭력과 달리 명확하지 않다. 벤야민 자신은 그런 신적인 폭력의 보기로서 「폭력비판론」의 마지막에 구약성경의 예를 들고 있다. 즉 민수기(民數記)의 전설에 나오는 신의 심판이다. 그것은 예고도 협박도 없이 특권자인 제사장(레비) 무리에게 퍼부어져 그들을 섬멸시키는 심판이다.
따라서 이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법과 결별한 정의를 긍정하기 위하여 논리적으로 요청되는 어떤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문제는 신적 폭력이 목적과 수단이라는 관계를 면제받는 순수 폭력이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이를 데리다도 ꡔꡔ법의 힘ꡕ에서 비판한다. 즉 그에 의하면 벤야민은 법을 창설하는 ‘힘의 일격’이라는 것의 근거 없음을 폭로하여 법을 탈구축하면서도 다시 탈구축할 수 없는 정의를 내세워 법과의 구분을 시도했으나, 그 정의란 것이 다른 법으로 타락하지 않을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적 폭력이라고 하는 것도 언제나 신화적 폭력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그가 말한 신화적 폭력에 의해 근대 초월을 목표로 한 나치스가 집권하여 망명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서도 프롤레타리아를 주체로 하는 비권력적인 신적 폭력에 의한 폭력혁명의 가능성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복제기술시대의 예술작품」(1936)의 마지막에서 나치즘에 의한 정치의 ‘미학-감성화’에 대해 프롤레타리아는 그와 반대로 미학의 정치화에 의해 응하리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는 반대였고, 결국 벤야민은 현실에 대한 비관 끝에 자살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벤야민이 그 의도와는 전혀 거꾸로 그가 반대한 나치스의 이데올로기에 접근했다고 하는 아이러니한 점이다. 즉 나치스에 의해 폭력에 의해 계몽화된 시민사회의 법질서를 근본으로부터 파괴하고자 하는 혁명적-메시아적 근본주의가 점증하는 가운데 벤야민의 주장은 나치스의 주장, 특히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결과적으로는 일치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가 주장한 신적 폭력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폭력 혁명도 이미 1930년대에 스탈린주의에 의해 그 허구성 역시 명백히 드러났다고 하는 사실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4. 데리다의 폭력론

1989년은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맞은 해였다. 그 해 데리다가 미국에서 행한 「법에서 정의로」라는 강연과, 이듬해 발표한 「벤야민의 이름」이라는 논문을 합쳐 발표된 책이 데리다의 ꡔ법의 힘ꡕ(1994)이었다. 1989년 프랑스는 1921년 독일의 벤야민처럼 권력으로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폭력을 논의하기에는 그 역사적 상황이 너무 달랐다. 당시 2세기에 걸친 프랑스 혁명의 성과가 요란하게 축하되었으나, 혁명이 초래한 두 가지 정치 형태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특히 사회주의가 패배한 시점이었다. 즉 벤야민이 주장한 프롤레타리아의 순수한 폭력에 의해 비권력적인 최종의 해방을 목표로 삼았어야 할 사회주의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 이상으로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킨 결과, 당시 폴란드에서 보듯이 노동조합 총파업 등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법질서가 붕괴되었다. 게다가 데리다의 첫 강연이 있고 난 직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데리다는 벤야민을 비판한다. 우선 그는 벤야민이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을 구별함은 그리스적인 것과 유태적인 것의 이분법에 대응하고, 벤야민의 관점은 유태적인 것이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그런 유태적 관점에 입각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이 그렇듯이 벤야민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했으나, 그 파괴 이후 다시금 법준거의 권력으로 타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데리다는 비판한다.
데리다는 벤야민이 말하는 폭력(Gewalt)이 독일에서는 입법권(gesetzgebende Gewalt), 영적 권위(geistische Gewalt), 국가권력(Staatsgewalt) 등과 같이 권력이나 권위를 뜻함을 지적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기성 법질서에 근거한 권력이 폐기하는 ‘신적 폭력’은 그 폐기를 선언한 그 순간부터 그것을 대신하는 새로운 권력으로 변모한다. 즉 폭력의 선언은 동시에 법준거의 선언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화적 법권력으로 변한 폭력은 역사 과정 속에서 부패하고 신적인 순수함으로부터 먼 것임을 폭로한다고 데리다는 본다. 벤야민은 법권력으로 준거된 그러한 부패를 극복하기 위해 신적 폭력을 요구하지만, ‘신적’인 것은 기성의 신화적 폭력의 폐기를 선언하는 순간 스스로 신화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고 데리다는 비판한 것이다.
여기서 데리다는 폭력이 나타나는 순간만은 순수하다는 주장을 새롭게 제기한다. 즉 벤야민이 순수한 신적 폭력에 역사적인 희망을 거는 것과 달리, 데리다는 그 순간을 특권화하지 않고 우리가 일상에서 직면하는 법 앞에서의 ‘결단’ 속에서 폭력에 의한 단절의 순간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데리다는 그 순간에 정의를 향한 일보를 딛게 되나, 동시에 그 순간은 광기를 가져 폭력을 증폭시킬 수도 있음을 경고하면서 그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데리다는 정의를 향한 발걸음에서 시간적으로는 물론 공간적으로도 무한한 타인에 대한 책임이 수반된다고 주장한다. 법을 개혁하고 혁명을 반복해도 법 자체의 근원적인 부정적 성격은 근절되지 않고 정의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가 되기 마련이라고 보면서도, 데리다는 타인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갖는 결단을 통해 다시금 정의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리다가 말하는 정의란 ‘불가능한 것에 대한 경험’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데리다의 주장은 그의 탈구축 또는 해체와 정치, 윤리, 법의 관계를 논의한 것으로 주목된다. 그러나 ‘탈구축이 정의이다’라는 그의 결론은 대단히 난해하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경험’은 어떻게 가능하고, 그것을 정의로 삼는 순수한 결단의 폭력이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의 논의가 모두 그렇듯이 논리적으로 그 내용을 확정하기란 어렵다. 이상의 주장에서도 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한 점은 그가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벤야민식의 메시아주의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논리 이전의 심정적 또는 상황적 동감을 부정할 수 없는 점은 사실이다. 특히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이 1968년 범세계적인 학생운동에서 경전처럼 읽힌 점, 또한 데리다의 폭력론 역시 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그 전후의 모든 사회적 저항에서 그들의 주장이 정당화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광주민중저항을 비롯한 저항운동에서 그들의 주장은 충분히 원용될 수 있다.
특히 데리다의 논의 중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서구 근대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비이성적인 폭력에 의해 행사되었다고 지적하는 점이다. 데리다는 이를 ‘국내 식민지주의’라고 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그것은 언어에 의해 강요된 폭력이다.

주지하듯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법이나 국가법을 수립하는 폭력은, 국가에 의해 재편성된 소수 민족 또는 소수 종족에 하나의 언어를 강제하는 것에 있다. 프랑스에서 이 사태는 적어도 두 가지 경우에 생겼다. 그 최초의 것은 1539년의 왕령이 사법과 행정 용어로 불어를 강제하고 라틴어를 금지함에 의해 군주제 국가를 통합한 것이 었다.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프랑스혁명이었다. 당시 언어의 통일은 가장 억압적인 교육상의 전환을 초래했다. Jacques Derrida, “Force of Law: The "Mystical Foundation of Authority," in Drucilla Cornell, Michael Rosenfeld, David Gray Carlson eds., 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 New York, 1992, p. 21.


데리다는 ‘법에 있어서, 그리고 법에 관한 두 종류의 폭력’을 구별한다. 즉 ‘법을 수립하는 폭력, 곧 법을 제정하고 배치하는 폭력과, 법을 유지하는 폭력, 곧 법의 영속력과 강제력을 유지하고 확정하며 보증하는 폭력’이다. 위의 책, p. 31.
이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근대성 역사의 특징이다. 제3 세계에서도 제1 유형의 폭력―수립하는 폭력―이 제2 유형의 폭력에 대한 제3 세계 민중의 관계에 의해 대부분 결정되고 있는 것은 쉽게 발견된다. 문제는 그러한 폭력이 식민 종주국에서는 ‘국내 식민지주의’로 나타나도 근대화를 뜻했으나 식민지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못했다고 하는 점이다. 예컨대 제3세계에서는 여전히 국가 기구의 법적 강제인 경찰에 의해 고문이 가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근대적 역사관은 실패한다. 따라서 유일한 방법은 피억압자로부터 배우는 것이 된다. 물론 근대적 역사관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분배에 관한 정의의 관념 그 자체가 필요하다는 것은 시민, 민주주의, 복지를 둘러싼 근대적 개념이 모든 계급―특히 피억압 계급―에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관이 진정으로 피억압자의 대화에서 생겨난 것인지는 의문이다. 대화는 목적론적이어서는 안 된다. 즉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선험적으로 옳다는 것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
극단적으로 피억압자가 혁명에 이르게 되는 경우라도 그들이 그 혁명에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람시는 그 점을 인정하고서 피억압자는 혁명적 지식인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피억압 계급은 스스로가 <국가>로 되기까지 통일되어 있지 않고 통일될 수도 없다. 그 역사는 필연적으로 단편화되고 있는 삽화풍이다. 이러한 집단의 역사적 활동에는 (적어도 어느 정도 잠정적 단계의) 통일에의 경향이 확실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 경향은 지배자 집단의 활동에 의해 끊임없이 중단된다. 실제로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피억압집단은 자신들을 방위하고자 급급하는 것에 불과하다. Antonio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of Antonio Gramsci, trans. and ed. Quintin Hoare and Geoffrey Nowell Smith, New York, 1971, pp. 52, 54-55.

우리는 국가에 의해 구조화된 사회에 살고 있고 피억압자는 그 현실과 결부된 지식 형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여기서 새로운 지식 형태는 국가나 정부, 전체와 결부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즉 계몽적 합리주의의 유산과는 결별하는 것이어야 한다. 결국 데리다의 논의는 지식인 논의로 나아간다.


5. 파농의 폭력론

이상은 서구에서의 폭력론에 대한 검토이다. 우리는 식민지 차원의 폭력론으로 파농의 그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파농은 식민지화란 어떤 땅에 대포와 기계의 힘으로 침략해온 타종족이 그 원주민을 지배하여 토지와 인간을 사유화하는 폭력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식민지 사회란 포식과 기아로 분할된 사회, 곧 그 경계가 경찰과 군대에 의해 직접 유지되는 인종차별적인 폭력 사회라고 규정한다. 그곳에서 원주민은 절대악이고, 반가치이며, 동물이나 물건에 가까운 수동적인 존재, 요컨대 비인간적인 것으로 식민자에 의해 조작된 대상이다. 이러한 식민지화 역사의 배후에, 식민지 사회 구조의 근본에는 식민자=타자의 폭력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을 해방하고 그 주체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식민지 체제를 타도해야 한다고 파농은 주장한다. 즉 비식민지화란 폭력 현상이고 인간 종족의 교대를 뜻한다. 즉 식민지화 역사를 통하여 심신이 모두 억제되고 고통당하며 동물화 되고 사물화된 원주민이 자신의 비인간성에 눈을 떠서, 내면에 저장된 폭력(내면화된 타자의 폭력)을 공격성(반대 폭력)으로 반전시키는 운동이 비식민지화 운동이라고 파농은 주장한다.
요컨대 폭력이 폭력을 낳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비식민지화 과정은 식민지화 과정 속에 이미 잠재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은 역사의 필연적인 과정이 된다고 파농은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식민지주의는 생각하는 기계도 아니고, 이성을 부여받은 육체도 아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의 폭력으로서, 그것 이상으로 ‘더욱 큰 폭력’에 의해서만 굴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더욱 큰 폭력’을 구현하고 인수하며 담당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파농은 먼저 식민지 시대에는 정당, 지식인, 상인 등이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나, 참으로 혁명적인 폭력을 구현하는 자는 농민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의 해방 투쟁기에는 도시에서 산골로 도망간 지식인과 소수의 활동가가 농민을 만남에 의해 인민의 의식이 전진한다고 본다. 이어 봉기가 폭발하면 도시 주변부에 집결하는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통하여 그것은 확대된다고 주장한다.
파농은 식민지 사회에서 도시 프롤레타리아, 기술자, 관리 등은 특권층으로서, 식민지주의와 타협하여 비폭력을 주장한다고 본다. 이에 대해 농민대중, 그리고 토지를 수탈당하여 도시주변을 방황하는 부랑자, 범죄자, 실업자들이 식민지주의의 이익으로부터 제외되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존재라고 본다. 그들만이 비타협적이고, 오직 폭력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파농은 비식민지화 운동을 단순히 인간 종족의 교대로만 본 것은 아니다. 이 운동이 동시에 ‘새로운 인간의 창조’라는 것, 존재의 ‘근본적인 변경’이라는 것, 곧 가치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어떤 이념이나 추상의 차원이 아니라 ‘대지에 저주받은 자들’이 비식민지화 운동을 통하여 형성하는 역사적인 존재라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비식민화 운동이 폭력현상인 바 그 존재는 또한 폭력적 존재이기도 하다.
파농에 의하면 실제로 ‘새로운 인간’은 먼저 ‘식민지화된 신체’로 제출된다. 바로 굶주리고 억눌린 존재로서이다. 그러한 존재는 하루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아니다. 식민지에 대한 최초의 반응은 싸움과 범죄 및 부족 항쟁으로, 또한 원시적 종교와 마술에 대한 신앙 및 집단무용으로 나타난다. 억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억압에 대한 눈뜸은 늦어지고 장기화된다.
파농과 달리 혁명 이론가들은 그러한 타락과 일탈 및 후퇴를 직시하지 않고 자각은 직선적으로 달성된다고들 했다. 그러나 파농은 종교도 주술도 ‘아편’으로 보지 않고 몽상도 광기도 부정적인 요인으로 배척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이 모든 것을 폭력의 과정으로, 반대 폭력에 대한 성숙으로 ‘새로운 인간의 창조’를 향한 최초의 단계, 곧 ‘폭력의 분위기’로 보았다. 파농에 의하면 이러한 ‘폭력의 분위기’는 차차 ‘행동화한 폭력’으로 나아간다. 그 계기는 식민지의 탄압이다. 여기서 폭력은 신체의 긴장과 이완, 집단 무용이나 축제로는 처리될 수 없다. 먹느냐 먹히느냐가 지배하는 반란의 초기 단계에 신체상 중요한 것은 노동이다. 그러나 여기서 노동이란 생산 노동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식민지체제에 협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태만이야말로 비협력이자, 저항으로 평가된다. 반대로 원주민에게 가치 있는 노동이란 식민주의를 타도하는 노동이다.
파농은 말한다. ‘새로운 인간’, 곧 ‘완전한 인간’은 근육과 두뇌를 분리시키지 않고 노동 속에서 양자를 통일하는 인간이고, 능률과 효율이 아니라 자기 신체와 두뇌의 리듬에 따라 노동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도구나 기술에 지배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목적에 따라서만 도구나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이다. 또한 일-행동의 계획으로부터 실현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타인과 함께 의식적으로 참가하고 그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인간이다. 그리고 자율적인 공동체의 자율적인 구성원으로서 타인에 대한 겸양, 배려,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동료와의 협력이나 의사소통에 가치를 두는 인간이다. 나아가 타자-타민족의 착취와 지배를 거부하고 타자-타민족과의 공생을 원리로 삼는 인간이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상이 자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에서도 불가능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자율적인 공동체와 완전한 인간의 미래는 그 어느 것도 아닌 제3 세계에서만 가능하다고 파농은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파농의 희망 역시 제3 세계에서 과연 현실적으로 구현되었는지 의심할 수 있다.
6. 아렌트의 폭력론

아렌트는 유럽과 달리 정당한 법의 근거를 폭력을 비롯한 다른 것에서 구하려는 전통이 없는 미국을 통해 위에서 지적한 소렐, 벤야민, 데리다, 파농을 비판하면서 나름의 해결을 강구하고자 한다. 따라서 언뜻 보면 아렌트는 소렐 등이 말한 저항폭력을 부정하고, 그들이 국가폭력이라고 한 권력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그녀의 ꡔ폭력론ꡕ(1970)에서 중점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나,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ꡔ인간의 조건ꡕ(1958)을 비롯한 그녀의 정치사상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먼저 ꡔ폭력론ꡕ에서 그녀는 폭력은 권력과 대립한다는 전통적인 주장을 전제한다. 그녀에 의하면 폭력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권력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토론하고 행동하여 생기는 것으로 그 자체가 정당성을 갖는다. 따라서 권력이 폭력을 사용하면 이미 권력이 아니고 정당성도 없다. 그녀에 의하면 소렐 이후 폭력론이 등장한 것은 근대 사회의 이성이나 진보라는 획일화에 의해 토론과 행동을 통한 공공권이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국을 그러한 근대적 전통에서 해방된 개인, 그 개인이 자유로운 의사를 서로 표명할 수 있는 공적 생활에 기초를 둔 공화제의 원리로 체현한 나라로 본다. 물론 그녀는 미국에도 많은 소수 인종에 대한 차별을 당연히 인정하나, 이는 자유의 영역인 정치=공공권과는 무관한 사회의 영역으로 본다.
아렌트는 ꡔ인간의 조건ꡕ에서 그런 정치의 이상을 고대 그리스에서 생긴 공공권에서 발견한다. 그녀가 말하는 공공권이란 생물적 욕구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람들이 언론과 설득에 의해 자유롭게 활동하는 공간을 뜻한다. 반면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가계가 추구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근대 국가에 와서 가계가 가정을 뛰어넘어 국가의 관심사가 되어 사회적 영역이 나타났고, 인종차별과 같은 폭력은 그런 영역에서 문제된다고 아렌트는 본다.
아렌트는 근대 시민혁명의 두 가지인 1776년의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을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본다. 그녀는 우리가 말하는 자유를 Liberation, 즉 물질적으로 결핍된 상태나 물리적으로 억압된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소극적 개념과, Freedom, 즉 자신의 정신적 활동의 단서를 스스로 만들고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스스로 형성해 가는 능동적인 개념으로 구별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Freedom이 중심이었으나, 근대 국가에서는 Liberation이 중심이 되었고, 이는 맑스를 거쳐 사회주의 혁명에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전체주의는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19-20세기 질서를 묘사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녀가 말하는 19세기 서구형 국민 국가는 자본주의를 강력히 추진하여 제국주의적 팽창을 결과했다. 그것은 또한 인종주의와 결탁하여 ‘피와 땅의 공동체’로 변질되어 반유태주의를 격화시켰고, 마찬가지로 제국 사이의 대립도 격화시켜 제1차대전을 낳았다. 그 후 20세기는 경찰 조직과 강제수용소를 통해, ‘국민’의 인종화와 전쟁에 의해 대량 생산된 무국적자=무권리자를 국민에서 배제했다.
아렌트에 의하면 프랑스 대혁명 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는 자유로운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 사이를 무시하고 개인의 마음 속 문제인 동정을 통일적 원리로 삼아 인간을 일반의지를 갖는 공동체로 조직하려고 한 시도였다. 그녀는 이러한 ‘동정에의 열광’에 근거한 정치가 폭력적 충동을 인간의 자연적 본능으로 보아 인민을 하나의 육체처럼 움직이고 하나의 의지를 갖는 것처럼 행위하는 영혼으로 변모시켰다고 본다. 어떤 이성적 제약도 받지 않는 이 육체는 스스로에게 동화할 수 없는 것을 폭력에 의해 파괴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폴리스적인 자유와는 상용될 수 없는 자연적 폭력을 해방시킨 프랑스 혁명에 반해 미국 혁명은 ‘자유의 창설’이라는 본래 목적을 잃지 않고 계속 추구했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그녀에 의하면 미국에도 빈민은 존재했으나 프랑스나 독일처럼 비참하지는 않았고, 경제적 격차는 정치가 아니라 사회 문제로 여겨져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요구에 의해 혁명의 방향이 결정되거나 변질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관심도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자유의 창설에 대한 참여였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의하면 미국에서도 인민(people)은 존재했으나, 그것은 프랑스처럼 자연적 충동에 의해 하나의 의지를 갖는 육체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성을 보증하는 자유로운 결합체를 의미했다. 이는 제퍼슨이나 매디슨 같은 초기 대통령들이 정치적 자유의 본질을 복수성에서 구한 것에 알 수 있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즉 그들은 상이한 의견을 갖는 사람들 사이의 교환이 있음으로 비로소 상대를 변론에 의해 설득하고자 하는 활동의 계기가 생긴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와 같이 일반의지가 지배하는 여론에는 다양성이 포함될 여지가 없으나, 미국 공화제에서는 처음부터 전원일치의 허구가 거부되고 서로의 논의를 통해 개인적인 이성의 잘못을 교정하면서 공공생활권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이다. 즉 상이한 의견의 당파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미국 통치형태의 특징이라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아렌트는 자신의 자유로운 활동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존재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근거되는 삶의 방식을 인간성에 반하는 것으로 거부한다. 그녀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원리에 의해 일원적으로 지배되는 세계에는 복수성에 근거한 인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따라서 종교적, 초월적 권위에 의해 외부로부터 정당화된 중세 기독교 세계의 통치체제는 인간성에 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렌트는 근대 혁명 속에서 탈형이상학적, 세속적인 정치권력 창설의 계기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러나 현실 혁명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기 통치의 근거를 자신이 창설한 자유가 아니라, 어떤 형태의 신적인 원리에서 구한 혁명 전권은 형이상학에 빠져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공간을 스스로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반의지’의 표현이라는 여론에 의해 자기 통치를 신성화하고자 한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혁명가는 좌절했다고 아렌트는 분석한다. 즉 앙시앙 레짐의 절대군주제로부터 자기를 해방하고자 한 그들은 절대군주를 대신하는 새로운 절대자를 실체적으로 창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에 의하면 식민지 미국에서는 그 지배자인 영국에서 절대군주제가 없어졌고 ‘법에 의해 제한된’ 군주제가 있었던 탓으로 미국인들은 ‘법을 초월한 절대적 지배자’라는 환상에 빠지지 않았다. 반면 더욱 강력한 권위를 갖는 절대자를 인민에게 구한 프랑스에서는 자신의 절대성과 동화될 수 없는 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정치 이전의 자연적 폭력’으로 변질되었다.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절대화된 군중의 폭력은 절대군주제를 붕괴시켰으나, 동시에 같은 폭력에 의해 혁명 정부 자체가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정치에서 절대자가 담당하는 기능을 다음 둘로 본다. 하나는 인간에 의한 법제정을 둘러싼 악순환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는 악순환이다. 첫째는 입법의 타당성과 합법성을 외부, 즉 ‘더욱 고차원의 법’에서 구하는 것으로서 인위적인 법을 언제나 다른 권위에서 구하는 악순환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불완전하므로 결국은 자신의 이름으로 둘째의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게 된다. 즉 인민의 이름으로이다. 이는 바로 앞에서 본 소렐이나 벤야민 또는 데리다까지의 ‘신화적 폭력’이라는 문제의식이었다.
아렌트는 혁명에서 절대자는, 이러한 두 가지 악순환을 회피하여 합법적인 통치체제를 수립하고자 하는 경우 논리적으로 요구된다고 본다. 즉 근대초의 절대군주제는 중세 기독교 세계의 신적인 합법성을 차단하고 세속 권력을 수립하고자 하여 생긴 것으로 중세적 권위의 잔재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프랑스 혁명에서는 절대군주제 대신 군중=인민이 절대자로 나타났다. 이는 법에 구속되지 않는 자연적 폭력을 해방시켰다.
반면 미국에서는 인민이 권력의 담당자로 여겨졌으나 법의 원천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대신 법은 풀뿌리 차원의 인민의 의지를 넘는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그 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혁명 과정과 함께 갱신되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즉 Freedom의 영역을 새로이 창설하고자 하는 혁명운동의 과정이 법의 원천이고 ‘보다 높은 법’은 언제나 생성되는 것이었다. 아렌트에 의하면 실체화되지 않고 언제나 자기생산을 계속하는 법이 ‘인민에 의한 통치’를 구속하고, ‘정치 이전의 폭력’을 봉쇄하는 메커니즘이 생김에 의해 미국 혁명은 절대자를 둘러싼 세속화된 형이상학에 빠지지 않았다. 즉 절대자가 실체적으로 표상화되지 않았기에 권력이 폭력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렌트가 말하는 역사의 새로운 시작은 역사를 초월한 절대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창설’하는 ‘행위’ 그 자체 속에 있다. 즉 행위가 절대이지 주체가 절대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에서 본 소렐-벤야민-데리다의 문제는 아렌트에 와서 자신의 창설 행위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미국 혁명에서 해답을 보이게 된다. 아렌트는 ꡔ공화국의 위기ꡕ(1972)에서 미국 헌법의 기본으로 시민적 불복종을 다루었다. 즉 그것은 위법적 폭력행위가 아니라 헌법 옹호의 행위로서 합법화된 것이었다. 여기서 폭력론은 시민적 불복종의 논의로 나아간다.


7. 맺음말

지금까지 소렐, 벤야민, 데리다, 파농의 저항적 폭력론과 그것에 비판적인 아렌트의 폭력론을 살펴보았다. 그것들은 나름대로의 현실 상황에서 생겨난 논의들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어떤 주장이 반드시 옳고 그르다고 재단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필자의 입장은 아렌트의 주장에 가깝다. 여하튼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한 두 가지를 더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하나는 국민형성의 폭력적 구조 문제이다. 근대사에서 국민형성의 폭력이란 ‘국민’이 ‘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전쟁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전쟁이 비상사태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생활과 관련된다고 하는 점이다. ‘전시동원’이란 신체의 동원으로서 생활의 규율화를 통해 가능하고, 생활 규율로부터 군사 규율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군사 규율은 생활 규율로 다시 내면화된다. 우리는 그러한 폭력적 구조를 식민지 시대와 군사독재 시대에 경험했고, 그러한 구조는 분단에 의한 냉전 의식이 여전히 팽배한 지금도 상당 부분 온존되고 있다.
이러한 생활 구조적인 폭력성은 특히 성의 측면에서 나타난다. 근대 국가가 성을 제도로써 통제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전시성 성폭력인 ‘종군위안부’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 이전부터 소위 ‘훌륭한 국민’을 재생산하기 위한 성과 생식의 통제를 가한 것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현모양처’와 ‘종군위안부’라는 여성에 대한 이중 기준이 남성에 의해 이용되어 성폭력은 모든 국민에게 작용했다. 이러한 이중 기준은 식민지 전쟁과 6.25 전쟁이 끝난 후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식민지의 경우 가해자 일본만이 아니라 피해자 조선-한국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그것은 서양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제도를 모방하여 발전시킨 것으로서, 서양에서도 식민지에서 더욱 가혹한 형태를 취했다. 그 근본인 경제의 논리와 민족 차별의 논리는 성 차별에도 그대로 관철되었으며, 일본의 그것은 서양식 성 관리 정책에 다름이 아니었고, 그 유습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성에 대한 폭력적 구조는 노동, 사상, 교육 등등 국민형성의 모든 요소 속에 동일하게 유지되어 이미 기성의 신화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한 신화적 폭력에 대항하는 저항적 폭력, 벤야민이나 데리다 또는 파농이 말하는 신적 폭력 또는 결단적 폭력 등은 우리에게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것도 다시금 신화적 폭력으로 변질되지 않고 그 순수성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또는 그 대안으로 아렌트가 말하는 폭력과 대치되는, 토론과 행동의 권력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원문 : http://jbreview.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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