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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22
    협잡과 기만, 음모론 그리고 천안함(2)
    와라
  2. 2009/05/24
    누가 그들을 루저라 부르는가
    와라

협잡과 기만, 음모론 그리고 천안함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음모론이 존재한다. 단순한 우연이나 재미로 치부하기에는 그 범위나 정도가 상당하다. 음모론은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과 거의 필연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예수가 결혼했다는 설이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에 영국 왕실이 개입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비롯해 중요한 역사적 사건 뒤에 프리메이슨과 같은 그림자 정부가 있다는 소문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특정 지역의 인종을 말살시키기 위해서 에이즈를 개발했다는 풍문도 있다.

 

최근에 들었던 음모론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환경오염의 심각성이 상당히 과대평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대평가된 이유는 환경 재생 관련 기술들을 가진 세력들이 그것들을 상품화하기 위해 환경과 관련된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음모론에는 대체에너지 산업은 물론 화장품, 제약, 자동차, 보험 산업 등의 영역들 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래도 수많은 음모론 중 가장 센세이셔널했던 것은 9.11테러가 미국과 알 카에다의 공모로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음모론은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그것이 영화나 소설의 수많은 소재가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기인할 것이다.

 

음모론은 확실히 가난하거나 무지한 자들의 이데올로기이다. 거기에는 추측과 상상이 넘쳐나며, 온갖 궤변과 억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음모론은 구체적인 증거나 증인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즉 상상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거짓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일말의 진실이 내포되어 있다. 때로 그것은 진실로 밝혀 지기도 하는데, 그 때문은 아니다. 음모론은 현실의 어떤 지점을 조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어떤 ‘사건’의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거나 그 원인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당했을 경우 등장한다. 사건이란 씨줄과 날줄로 정교하게 짜여진 한 사회의 체계에 균열이 발생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민주, 복지, 자유 등의 이름으로 구축된 한 사회의 체계는 그 가치들과 정합적인 관계를 가지는 도덕적 규범, 윤리적 가치 뿐 아니라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법질서를 함께 가진다. 따라서 한 사회의 체계는 인위적으로 구성된 필연적 성격을 가지는데, 사건은 우발적으로 이런 체계의 균열을 드러낸다. 따라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노쇠하고 고리타분한 언어가 아니라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음모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인식론적 공백을 능동적으로 매워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인식론적 공백이 발생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사건의 원인들이 정교한 기술과 과학적 모델을 통해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 오염이 좋은 사례일 것이다. 환경 훼손이 야기하는 위협들은 대개 정교한 기술을 통해서만 확인되며 복잡한 과학적 모델과 언어를 통해서만 인식 가능하다. 환경 훼손을 이야기 하는 언어들은 국가나 거대 기업이 지원하는 연구소, 혹은 극히 소수의 전문가들을 경유하여 생산된다. 민중들은 그 언어를 생산할 수 없고, 단지 소비할 수 있을 뿐이다. 음모론은 이와 같은 지식과 언어 위계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어떤 것의 원인이 확정될 수 없을 때, 가설, 가정 혹은 추측의 영역이 확대될 때, 거기에는 음모론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음모론이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한계는 모든 사건을 특정한 권력의 의지로 환원한다는 점이다. 음모론은 끊임없이 사건의 뒤에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쉽고 재미있는 설명이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일만한 근거나 힘은 별로 없다. 그런데 여기서 음모론의 귀결 지점으로 등장하는 권력이 어떤 권력인지는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특정 정치인이나 기업가를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지시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음모론에서 지시하는 권력은 대의제 정치나 자본주의와 같은 좀 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담론적 실체이다. 음모론이 개입하는 사건은 이 담론적 실체의 정합성이 흔들리는 지점인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천안함을 둘러싸고 엄청난 양의 음모론이 넘쳐나고 있다. 음모론이 그냥 떠도는 정도가 아니라 주요 언론에서 보도할 정도로 확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신문에서는 손수 음모론을 제작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천안함 사태는 말 그대로 의문 투성이이다. 관련된 핵심적 정보와 모든 설명언어들을 국가와 군에 의해 차단당했으며, 그 원인이 어떻게 밝혀지든 굉장한 정치적 파급력을 가질 사건이었다. 한마디로 음모론이 개입하기 위한 최고의 조건이었던 셈이다.

 

정부에서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에 의한 무력 기습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러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때로 사건을 정합적으로 기술하고 설명하는 공식적인(공인된 혹은 공적 권력에 의해 공표된) 논리보다 음모론이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처럼 보인다. 음모론은 구체적인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지는 않지만, 그것이 가진 현실적 영향력이나 사회적 효과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논리보다 통찰력 있게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부가 천안함 사건의 원인을 북한이라고 지목한 것에 대해, 하필 선거를 앞두고, 선거 운동이 시작하는날, 북한이라는 카드를... 이라는 식의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다. 구체적인 근거 없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거짓일 수 있지만, 충분한 개연성을 가질 수 있는 설명이다. 천안함의 진짜 침몰 이유와는 무관하게 그것이 선거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예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태는 사건 자체의 진상규명만큼이나 중요한 어떤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천안함 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여러 담론의 지형과 행위자들의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여기에는 안보, 국익, 분단, 외교 문제부터 정보통제, 매체 보도형태, 국가 차원의 의례 기능 까지 여러 가지 층위의 문제가 복합적 내재되어 있으며, 정부, 군, 북한, 중국과 미국, 유가족, 언론, 자식을 군대 보낸 부모, 군대 다녀온 남성과 여성, 그리고 이 과정을 지켜보며 직간접적으로 담론에 참여하는 이들까지 다양한 행위자들이 연루되어 있다. 이런 복합적 문제의 구조를 포괄적으로 드러내 준 것은 언론도 학계도 정부도 아니었다. 그것은 음모론을 만들고 유포하고 읽어내는 민중들이었다. 음모론은 진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도약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는 이들이 보지 못하는 현실의 다른 측면을 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때로는 사건의 실질적 사실보다는 이런 상상들이 더 중요해 보이기까지 한다. 음모론은 가난하거나 무지한 자들의 이데올로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에 접근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언어이며, 현실의 정치나 경제가 가진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을 매개로 그 모순을 해부하는 민중의 무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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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추가 : 사건(event)은 정의에 따르자면, 정해진 과정이나 정해진 절차를 가로막으며 발생한다. 말하자면 어떠한 중요한 일도 전혀 일어나지 않는 세상에서만 미래학자들의 꿈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 기대하지 않은, 예측하지 않은,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우발 사건을 '무작위적인 사건'이나 '과거의 마지막 호흡'이라고 명명하면서, 무관한 일이거나 고명한 '역사의 쓰레기통'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정치 담합의 가장 오래된 속임수이다. 말하자면 이 속임수는 의심할 바 없이 이론을 명료화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 대가로 현실로부터 더욱더 멀어진다. 그 위험성은 그런 이론들이 실질적으로 판별가능한 현재의 경향들로부터 증거물을 수집하기 때문에 그럴듯할 뿐만 아니라, 그 내재적인 정합성 때문에 최면 효과도 갖는다는 점에 있다.  - 한나 아렌트, on vio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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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들을 루저라 부르는가

요즘 루저 만큼 핫(hot)한 문화적 트렌드가 있을까? 올해 대중음악상에서는 루저문화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장기하가 빅뱅의 태양을 제치고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남자 음악인이 되었다. 예외적인 하나의 사례가 아니다. 루저는 전방위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을 비롯한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 ‘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 등의 음악, 박민규(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 김애란(침이 고인다), 임정연(스끼다시 내 인생)의 소설, ‘얼렁뚱땅 흥신소’와 ‘메리 대구 공방전’, ‘내조의 여왕’ 같은 드라마 등 문화 영역 전반에서 루저를 확인할 수 있고, ‘88만원 세대’, ‘청년 실업’과 같은 경제담론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유독 우리나라만의 현상도 아니다. 오래 전부터 잭 블랙이나 스티브 부세미 같은 배우들은 루저의 페르소나로 분류되어 왔고, 최근에는 루저를 직접적으로 다룬 <비카인드 리와인드> 같은 영화도 등장했다. 내친김에 좀 더 나열해 보면, 우리나라에도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이제 고전 문학의 하나로 꼽히는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등도 루저가 주인공이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등장하는 잭 스페로우 선장도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버는 루저 캐릭터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루저는 우리나라의 ‘루저 문화’, 일본의 ‘하류문화’, 70년대 영국의 ‘펑크문화’, 90년대 미국의 ‘그런지 문화’등의 문화 담론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넘쳐나는 루저에 관한 이야기를 단지 잠시 유행하는 루저 문화의 산물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기에는 뭔가 찝찝한 구석이 있다. 루저라는 용어도 하나의 대상만을 지칭하는 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용어들이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쓰이는 것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이 루저라는 용어는 특히 뭔가 더 수상하다. 이는 아마 루저라는 용어가 경제적, 정치적 위기라는 맥락 안에서 더욱 돋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루저는 단순히 문화적 트렌드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용어에는 총체적 위기로 진단되는 사회적 텍스트 속에서 결정되는 어떤 과잉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문화로서의 루저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흔히 말하는 루저는 현대 사회의 특징적 캐릭터가 아니다. 내가 아는 가장 오래된 루저 중 한명은 고대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다. 저 유명한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에 보면 한 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손짓을 하며 앞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들 앞에 있는 계단에 제멋대로 누워있는 한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야말로 루저답게 널부러져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디오게네스다. 디오게네스가 등장하면서 나타나는 묘한 철학적 대립의 긴장 관계가 라파엘로 그림에 매력을 더한다.

 

디오게네스는 스스로를 개라고 불렀고 그의 철학도 견유주의(犬儒主義, Kynismus)로 분류된다. 그는 여러 기행을 일삼았고, 그가 살던 시노페에서도 추방당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폴리스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인간 사회로부터 배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추방형이 자신에게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태연하게 “그럼 나는 그들에게 체류형을 내리노라”라고 말하며 당시 정치체계의 폐쇄성을 비꼬았다. 그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알렉산더 대왕과의 만남과 관련되어 있다. 길을 가던 알렉산더 대왕이 거지처럼 누워 있는 디오게네스를 발견하고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으니 말해보라고 하자 그는 “좀 비켜줘, 햇빛 좀 쬐게”라고 대답한다. 후에 알렉산더는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일화는 주목할만한데 그 이유는 문화로서의 루저가 가진 의미를 증상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는 희망은 결코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다.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와 대립축에 놓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정복자로 위치지을 수 없는 인물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정치학, 윤리학, 철학, 문학 등을 배웠고, 그리스 문화에 심취했으며, 호메로스의 시를 원정 때도 들고 다닐만큼 좋아했다. 그에 반해 디오게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스 사회를 비판했으며,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읽는 이들에게 자기 고통도 못다스리면서 왜 남의 고통을 ‘읽고’ 있냐며 호통쳤던 인물이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말할 때, 디오게네스는 한정된 의미의 표상이었다. 디오게네스가 표상하는 것은 알렉산더가 가지지 못한 자유인데, 그것은 정치적 자유라기 보다는 찌질함, 누추함, 구질구질함, 불결함 혹은 구리고 후진 것을 혐오하지 않는 (위생이나 예절과 같은 인위적 질서에 기반을 둔) 문화적 강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디오게네스는 노동도 하지 않았고, 일정한 주거가 있지도 않았다. 그는 폴리스로부터 추방당한, 즉 인간의 문화로부터 배제된 존재이다. 따라서 그가 표상하는 누추함이나 불결함은 반문화적인 것이다.

 

문화란 인위적으로 배양된(cultivated) 체계화된 질서가 반복되면서 형성된다. 여기서 대면하게 되는 것이 고상함이라는 수수께끼이다. 문화란 반문화적 불결함(부패, 치명적 고갈, 예측 불가능성 등)을 외부화 시킴으로써 정체성을 형성, 유지 하는 고상함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다. 루저는 고상함이라는 외피를 유지하도록 구상된 대상이다. 이러한 대상은 내 생활의 누추함을 대신 갖는다. 그러나 그 대상은 결코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고상한 인간이란 포용력과 관용(설사 그것이 진심이 아니더라도!!)으로 그것들을 보듬는다. 때로는 진실로 애처로워 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 방식은 누추함과 마주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누추함을 낭만화 시켜 외부화 하는 방식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이 ‘자살을 결심한 후, 옛 사랑을 강제로 범하고, 자신을 착취하던 사장을 살해한 뒤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으려고 시도 하지만, 그 마저 실패해 사지를 쓸 수 없는 인생’(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의 ‘불행이도 삶은 계속되었다’ 중)이 되길 원하지는 않는다. 그런 루저의 삶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루저의 삶은 현실에 존재하는 삶이 아니라 문화적 삶에 의해 상상된 신화적 삶의 형상을 띤다. 그 대립항 속에서 문화적 삶은 자신의정체성을 형성한다.

 

그것이 지배적인 문화 질서가 스스로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고상한 문화란 이처럼 누추한 것들을 낭만화, 외부화 시키는데, 그러한 방식이 반드시 누추한 것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화적인 것 내에 ‘외부를 가두려는’ 시도, 혹은 내부 ‘안에’ 외부를 포함시키려는 시도이다.

 

 

다른 삶을 상상하기, 루저의 정치경제

 

나는 지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려 하고 있다. 무엇이 루저를 필요로 하는가? 무엇이 루저를 규정하는가? 왜 그들은 ‘실패자’로 호명되는가? 이 질문들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정치적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경제적 지배체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루저로 호명되는 이들은 스스로를 루저로 규명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루저들은 무엇으로부터 내쳐지고, 무엇을 이루지 못한 것인가? 루저는 실체 없이 루저 아닌 이들이 그 대립항으로 규정하는 것일 뿐이다. 루저 아닌 이들은 누구인가? 초,중,고를 거쳐 무사히 대학에 진입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은 후 적당한 이성과 만나 결혼하고 아이낳고 살아가는 이들일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꾸려 나가는 이들이다. 요컨대 그들은 제도화된 교육시스템을 거쳐 부르주아 지배질서에 순조롭게 진입하고, 일부일처제의 가부장적 질서에 스스로를 귀의시킨, 대체로 무해한 이들이다. 루저 아닌 이들에 의해 상상된 루저란 제도화된 교육으로부터 이탈했으며, 지배적 경제 질서에 진입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가부장적 질서로부터도 빗겨난 이들이다. 루저들은 지배질서에 진입하는데 실패한 이들인 것이다.(타자에 의해 루저라고 규정되는 어떤 루저들은 지배질서에 진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다만 지배질서에 대한 기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어떤 루저들은 실패자라고 불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들은 자신을 루저라고 부르는 것을 듣게 될 때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어쨌든 최근에 활발하게 오가는 루저 담론에는 지배질서와 관련된 어떤 측면들이 있는데, 그것은 청년실업이나 ‘88만원 세대’와 같은 용어들 속에 깊이 기입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항상 존재했던 루저가 유독 최근에 활발하게 이야기 되는 것은 단지 매력적 루저의 등장이나 한 때 풍미하다 사라지는 유행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루저가 사회적으로 대량 양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질서로 진입하는 것에 실패한 이들이 대량으로 양산될 때 그 사회는 안정적으로 재생산 될 수 없다. 일본의 히키코모리나 프리터족들을 생각해보자. 이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력 부족 현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상품 생산, 유통, 소비의 주체가 되어야 할 이들이 스스로의 손을 멈춤으로서 사회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치명적인 균열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루저 아닌 이들이 루저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문제화 하는 현상의 이면에는 그들 자신이 ‘루저’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자본주의적 지배질서에 기생하여 안정적 삶을 유지하는 이들에게 사회적 생산과 소비의 중단은 지배질서에 대한 위협, 보다 직접적으로는 자신들의 안정적 삶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처럼 최근에 유행하는 루저 담론 자체가 정치경제적 위기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사회적 불안이 문화라는 외피를 쓰고 회귀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고상한 문화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대립항으로서 ‘상상된 신화적 삶’으로만 존재하면 되었던 것들이 필연적 이유로 구체화 되어 ‘사회적 실체’로 등장할 때 신경증적 불안이 나타난다. 상상된 삶이 사회적 실체를 가지고 나타날 때 더 이상 그것들을 낭만화, 외부화 시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낭만적 기질을 포기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면하고 싶지 않던 사회적 실재와의 마주침이라는 계기를 만드는 사건이다. 사건이란 완벽히 봉합될 수 없는 사회의 틈에서 발생한다. 루저는 그 틈에서 서식하는 이들에게 타자가 부여한 이름이다. 루저가 아닌 자들은 그들을 패배자라고 낙인 찍지만, 사실 그들은 지배질서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자유로운 삶의 아티스트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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