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누가 그들을 루저라 부르는가

요즘 루저 만큼 핫(hot)한 문화적 트렌드가 있을까? 올해 대중음악상에서는 루저문화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장기하가 빅뱅의 태양을 제치고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남자 음악인이 되었다. 예외적인 하나의 사례가 아니다. 루저는 전방위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을 비롯한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 ‘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 등의 음악, 박민규(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 김애란(침이 고인다), 임정연(스끼다시 내 인생)의 소설, ‘얼렁뚱땅 흥신소’와 ‘메리 대구 공방전’, ‘내조의 여왕’ 같은 드라마 등 문화 영역 전반에서 루저를 확인할 수 있고, ‘88만원 세대’, ‘청년 실업’과 같은 경제담론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유독 우리나라만의 현상도 아니다. 오래 전부터 잭 블랙이나 스티브 부세미 같은 배우들은 루저의 페르소나로 분류되어 왔고, 최근에는 루저를 직접적으로 다룬 <비카인드 리와인드> 같은 영화도 등장했다. 내친김에 좀 더 나열해 보면, 우리나라에도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이제 고전 문학의 하나로 꼽히는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등도 루저가 주인공이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등장하는 잭 스페로우 선장도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버는 루저 캐릭터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루저는 우리나라의 ‘루저 문화’, 일본의 ‘하류문화’, 70년대 영국의 ‘펑크문화’, 90년대 미국의 ‘그런지 문화’등의 문화 담론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넘쳐나는 루저에 관한 이야기를 단지 잠시 유행하는 루저 문화의 산물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기에는 뭔가 찝찝한 구석이 있다. 루저라는 용어도 하나의 대상만을 지칭하는 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용어들이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쓰이는 것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이 루저라는 용어는 특히 뭔가 더 수상하다. 이는 아마 루저라는 용어가 경제적, 정치적 위기라는 맥락 안에서 더욱 돋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루저는 단순히 문화적 트렌드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용어에는 총체적 위기로 진단되는 사회적 텍스트 속에서 결정되는 어떤 과잉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문화로서의 루저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흔히 말하는 루저는 현대 사회의 특징적 캐릭터가 아니다. 내가 아는 가장 오래된 루저 중 한명은 고대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다. 저 유명한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에 보면 한 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손짓을 하며 앞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들 앞에 있는 계단에 제멋대로 누워있는 한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야말로 루저답게 널부러져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디오게네스다. 디오게네스가 등장하면서 나타나는 묘한 철학적 대립의 긴장 관계가 라파엘로 그림에 매력을 더한다.

 

디오게네스는 스스로를 개라고 불렀고 그의 철학도 견유주의(犬儒主義, Kynismus)로 분류된다. 그는 여러 기행을 일삼았고, 그가 살던 시노페에서도 추방당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폴리스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인간 사회로부터 배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추방형이 자신에게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태연하게 “그럼 나는 그들에게 체류형을 내리노라”라고 말하며 당시 정치체계의 폐쇄성을 비꼬았다. 그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알렉산더 대왕과의 만남과 관련되어 있다. 길을 가던 알렉산더 대왕이 거지처럼 누워 있는 디오게네스를 발견하고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으니 말해보라고 하자 그는 “좀 비켜줘, 햇빛 좀 쬐게”라고 대답한다. 후에 알렉산더는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일화는 주목할만한데 그 이유는 문화로서의 루저가 가진 의미를 증상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는 희망은 결코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다.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와 대립축에 놓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정복자로 위치지을 수 없는 인물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정치학, 윤리학, 철학, 문학 등을 배웠고, 그리스 문화에 심취했으며, 호메로스의 시를 원정 때도 들고 다닐만큼 좋아했다. 그에 반해 디오게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스 사회를 비판했으며,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읽는 이들에게 자기 고통도 못다스리면서 왜 남의 고통을 ‘읽고’ 있냐며 호통쳤던 인물이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말할 때, 디오게네스는 한정된 의미의 표상이었다. 디오게네스가 표상하는 것은 알렉산더가 가지지 못한 자유인데, 그것은 정치적 자유라기 보다는 찌질함, 누추함, 구질구질함, 불결함 혹은 구리고 후진 것을 혐오하지 않는 (위생이나 예절과 같은 인위적 질서에 기반을 둔) 문화적 강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디오게네스는 노동도 하지 않았고, 일정한 주거가 있지도 않았다. 그는 폴리스로부터 추방당한, 즉 인간의 문화로부터 배제된 존재이다. 따라서 그가 표상하는 누추함이나 불결함은 반문화적인 것이다.

 

문화란 인위적으로 배양된(cultivated) 체계화된 질서가 반복되면서 형성된다. 여기서 대면하게 되는 것이 고상함이라는 수수께끼이다. 문화란 반문화적 불결함(부패, 치명적 고갈, 예측 불가능성 등)을 외부화 시킴으로써 정체성을 형성, 유지 하는 고상함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다. 루저는 고상함이라는 외피를 유지하도록 구상된 대상이다. 이러한 대상은 내 생활의 누추함을 대신 갖는다. 그러나 그 대상은 결코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고상한 인간이란 포용력과 관용(설사 그것이 진심이 아니더라도!!)으로 그것들을 보듬는다. 때로는 진실로 애처로워 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 방식은 누추함과 마주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누추함을 낭만화 시켜 외부화 하는 방식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이 ‘자살을 결심한 후, 옛 사랑을 강제로 범하고, 자신을 착취하던 사장을 살해한 뒤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으려고 시도 하지만, 그 마저 실패해 사지를 쓸 수 없는 인생’(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의 ‘불행이도 삶은 계속되었다’ 중)이 되길 원하지는 않는다. 그런 루저의 삶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루저의 삶은 현실에 존재하는 삶이 아니라 문화적 삶에 의해 상상된 신화적 삶의 형상을 띤다. 그 대립항 속에서 문화적 삶은 자신의정체성을 형성한다.

 

그것이 지배적인 문화 질서가 스스로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고상한 문화란 이처럼 누추한 것들을 낭만화, 외부화 시키는데, 그러한 방식이 반드시 누추한 것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화적인 것 내에 ‘외부를 가두려는’ 시도, 혹은 내부 ‘안에’ 외부를 포함시키려는 시도이다.

 

 

다른 삶을 상상하기, 루저의 정치경제

 

나는 지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려 하고 있다. 무엇이 루저를 필요로 하는가? 무엇이 루저를 규정하는가? 왜 그들은 ‘실패자’로 호명되는가? 이 질문들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정치적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경제적 지배체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루저로 호명되는 이들은 스스로를 루저로 규명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루저들은 무엇으로부터 내쳐지고, 무엇을 이루지 못한 것인가? 루저는 실체 없이 루저 아닌 이들이 그 대립항으로 규정하는 것일 뿐이다. 루저 아닌 이들은 누구인가? 초,중,고를 거쳐 무사히 대학에 진입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은 후 적당한 이성과 만나 결혼하고 아이낳고 살아가는 이들일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꾸려 나가는 이들이다. 요컨대 그들은 제도화된 교육시스템을 거쳐 부르주아 지배질서에 순조롭게 진입하고, 일부일처제의 가부장적 질서에 스스로를 귀의시킨, 대체로 무해한 이들이다. 루저 아닌 이들에 의해 상상된 루저란 제도화된 교육으로부터 이탈했으며, 지배적 경제 질서에 진입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가부장적 질서로부터도 빗겨난 이들이다. 루저들은 지배질서에 진입하는데 실패한 이들인 것이다.(타자에 의해 루저라고 규정되는 어떤 루저들은 지배질서에 진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다만 지배질서에 대한 기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어떤 루저들은 실패자라고 불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들은 자신을 루저라고 부르는 것을 듣게 될 때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어쨌든 최근에 활발하게 오가는 루저 담론에는 지배질서와 관련된 어떤 측면들이 있는데, 그것은 청년실업이나 ‘88만원 세대’와 같은 용어들 속에 깊이 기입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항상 존재했던 루저가 유독 최근에 활발하게 이야기 되는 것은 단지 매력적 루저의 등장이나 한 때 풍미하다 사라지는 유행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루저가 사회적으로 대량 양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질서로 진입하는 것에 실패한 이들이 대량으로 양산될 때 그 사회는 안정적으로 재생산 될 수 없다. 일본의 히키코모리나 프리터족들을 생각해보자. 이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력 부족 현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상품 생산, 유통, 소비의 주체가 되어야 할 이들이 스스로의 손을 멈춤으로서 사회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치명적인 균열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루저 아닌 이들이 루저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문제화 하는 현상의 이면에는 그들 자신이 ‘루저’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자본주의적 지배질서에 기생하여 안정적 삶을 유지하는 이들에게 사회적 생산과 소비의 중단은 지배질서에 대한 위협, 보다 직접적으로는 자신들의 안정적 삶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처럼 최근에 유행하는 루저 담론 자체가 정치경제적 위기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사회적 불안이 문화라는 외피를 쓰고 회귀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고상한 문화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대립항으로서 ‘상상된 신화적 삶’으로만 존재하면 되었던 것들이 필연적 이유로 구체화 되어 ‘사회적 실체’로 등장할 때 신경증적 불안이 나타난다. 상상된 삶이 사회적 실체를 가지고 나타날 때 더 이상 그것들을 낭만화, 외부화 시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낭만적 기질을 포기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면하고 싶지 않던 사회적 실재와의 마주침이라는 계기를 만드는 사건이다. 사건이란 완벽히 봉합될 수 없는 사회의 틈에서 발생한다. 루저는 그 틈에서 서식하는 이들에게 타자가 부여한 이름이다. 루저가 아닌 자들은 그들을 패배자라고 낙인 찍지만, 사실 그들은 지배질서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자유로운 삶의 아티스트들일지도 모른다.

............................................................................................................................

미디어스 기고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