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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저작권법 시행 후 첫 ‘계정정지’ 명령

우리나라 최초 3진 아웃 사례

http://korea.kr/newsWeb/pages/brief/categoryNews2/view.do?newsDataId=148701359&category_id=subject&section_id=EDS0303009&call_from=extlink&subjectName=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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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저작권법 시행 후 처음으로 헤비업로더가 ‘계정정지’ 명령을 받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저작권을 침해하는 불법복제물을 웹하드 등 3개의 온라인서비스에서 복제·전송한 11개 계정에 대해 계정정지 명령 처분을 내렸다고 3일 밝혔다.

이는 지난해 7월 23일, 개정 저작권법이 시행된 이후 첫 계정정지 명령 사례다.

이번 계정정지 대상 11개 계정은 경고 명령을 3회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정당 평균 약 200편의 불법복제물(영상, 음악, 소프트웨어, 게임 등)을 또다시 웹하드 상에 무분별하게 유통시킨 헤비업로더들이다.

이에 따라 계정정지 처분을 받은 3개의 온라인서비스제공자는 해당 헤비업로더에게 부여한 다른 계정도 포함(이메일 전용계정은 제외)하여 1개월 미만 동안 당해 계정을 정지시켜야 한다.

문화부에 따르면, 이번 행정처분은 저작권법 위반 경고 명령 3회를 받았음에도 또다시 불법복제물을 게시한 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저작권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됐다.

문화부는 이미 지난 3월부터 9월까지 한국저작권위원회의 시정권고를 불이행하거나 상습적으로 대량의 불법복제물을 복제·전송한 23개 온라인서비스제공자의 469개 계정에 대해 세 차례에 걸쳐 경고 명령 처분을 내린 바 있다.

문화부는 “웹하드·P2P 서비스 등을 통한 불법복제물 유통이 영화 부가판권 시장 규모 축소 등 문화콘텐츠 산업 성장의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며 “단속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문화부는 불법복제물을 유통하는 웹하드·피투피(P2P)서비스 사업자와 ‘헤비 업로더’에 대해 기술적 조치 불이행 과태료 처분, 특별사법경찰의 기획 수사와 범죄수익금 환수 등도 더욱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한국저작권위원회도 개정 저작권법 시행 후부터 올해 3분기까지 164개의 온라인서비스제공자를 대상으로 83,519건(경고 42,217건, 삭제 41,246건, 계정정지 56건)의 시정권고 조치를 시행한 바 있다.

이 중에는 스마트폰용 불법 어플리케이션을 유통시킨 69개 온라인서비스제공자에 대한 8,554건의 조치도 포함돼있다.

문의 : 문화체육관광부 저작권보호과 02-3704-9683

 

 | 문화체육관광부 저작권보호과 | 등록일 : 201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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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플러그와 독립영화, 혹은 독립영화는 무엇으로부터 독립했는가?

인디플러그와 독립영화, 혹은 독립영화는 무엇으로부터 독립했는가?

 

 

얼마 전 독립영화 유통을 전문으로 하는 ‘인디플러그’에서 합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독립영화를 업로드하는 웹하드나 P2P업체들을 상대로 민,형사상 고발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인디플러그는 주류 상업영화계에서 진행하고 있는 굿 다운로더 캠페인이 동참하고 있다. (소위)‘배드’ 다운로더를 양산하는 웹하드나 P2P 업체들에 대응하기 위해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법적인 조치란 저작권법 위반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인디플러그의 선언 이후 여러 언론들을 통해 “독립영화계가 불법다운로드에 강력하게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든지, 독립영화가 “불법 다운로드와 전쟁선포”를 했다는 등의 기사가 흘러나오고 있다.

 

정말인가? 정말 굿 다운로더가 아닌 이들은 모두 나쁜 다운로더들이고, 이들이 저작권법을 위반해 “문화 및 관련 산업의 향상발전”(저작권법 1조)을 가로막았으며, 이 때문에 ‘독립영화계’ 전체가 불법 다운로드와 “전쟁”을 선포했는가?

 

독립영화계에서 저작권 문제가 거론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 이미 <워낭소리>를 둘러싼 논란이 독립영화계를 한바탕 휩쓸었었다. <워낭소리>의 제작자였던 고영재는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해외 시장 진출의 통로가 막혔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저작권법을 위반한 불법 다운로드에 대해 강하게 성토했고, 이를 계기로 독립영화 진영에서 저작권과 관련된 논의가 일었었다. 그런데 그 때 이명박의 <워낭소리> 관람과 독립 영화 진흥 정책에 관련된 것으로 주제가 확산되며, 저작권과 관련된 논의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그러다 다시 고영재가 대표를 맡고 있는 인디플러그의 굿 다운로더 캠페인 동참과 불법 업로드 업체에 대한 법적 대응 선언으로 저작권 관련 문제가 독립영화계에 제기 되었다.

 

당연하지만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인디플러그가 독립영화계를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갖가지 언론들에서는 인디플러그의 사업 정책을 독립영화계로 환원해 보도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문제적인 것은 언론의 보도형태가 아니라, 독립영화계의 반응이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침묵을 통해 인디플러그의 입장에 암묵적으로 공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때로 동의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독립영화계를 하나의 실체를 가진 것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상업 영화계의 외부를 이루는 공간으로, 단일하거나 획일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획정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독특한 상황 속에서 정치적 저항성을 가진 이들이 영상을 무기로 활동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자이든, 후자이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독립영화계가 상업영화계, 즉 완전히 상품화된 방식의 생산, 유통, 소비가 이루어지는 곳과는 다른 지점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다양성이라 불러도 좋고, 저항이라 불러도 좋다. 독립영화가 상업영화와 구분된다는 점은 독립영화가 무엇으로부터 독립해 있는지를 지시하고 있다. 독립영화가 독립해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정치적 권력과 자본의 횡포이다.

 

완전히 상업화된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영화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생산, 유통, 소비 방식을 만들어 왔으며, 그 방식의 다양화를 이루어 왔다. 다시 말해, 독립영화는 획일화된 상업영화의 그것들과는 다른, 대안적인 방식들을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지고, 도입된 것이 퍼블릭 액세스이고 공동체 상영 등이다. 그것들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그러한 기본적 취지와 의도만은 아직까지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은 상업영화가 가장 전형적으로 이익을 창출해 내는 통로이다. 게다가 그것은 직접적인 생산자나 창작자에게 보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보다는 그것의 투자자들이나 거대 유통 기업들에 이익을 돌려주기 위한 장치이다. 물론 몇몇 이름난 생산자들이 저작권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얻긴하지만, 대부분의 창작자들에게 그것은 신화적인 것을 뿐이다. 상업영화게에서도 그들은 대부분 영화사에서, 방송국에서 창작 노동을 하며 착취당하는 노동자일뿐이다. 게다가 그것은 문화의 향상발전을 도모하기 보다는 그 반대로 기능하고 있다. 저작권은 디지털 네트워크 환경에서 문화적 생산물들을 확산시키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막고 있으며, (때문에) 풍부한 2차 창작물(소위 패러디나 키치 등)들이 산출될 수 있는 통로를 차단시키고 있다. 파생 창작물의 생산을 활성화 시키는 것은 문화(심지어는 산업)를 향상발전 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저작권이 가로 막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디플러그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독립영화계가 침묵하고 있는 저작권 단속은 독립영화의 기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 된다. 그것은 상업 영화의 틀에 독립영화 스스로를 구속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만약 이 상태가 더욱 진행되어 독립영화가 저작권 산업에 기대어 생명을 유지해 나가게 된다면, 독립영화는 발명되어야할 미래의 가능성들(퍼블릭 액세스를 포함한 대안적인 영상의 생산, 유통, 소비 방식들)을 미리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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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글

 

관련하여 정보공유연대 오병일씨의 글을 함께 읽어 보자.

독립영화와 저작권(오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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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재산기본법, 그 위험한 상상력

지난 16일 정부에서는 지식재산기본법(안)을 입법 예고 했다. 이 법은 특허, 상표, 저작권 등으로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관리되던 지적재산의 영역을 포괄하여 관리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법이 제정되고 나면 지적재산과 관련된 “타 법률의 재,개정시 이법에서 제시하고 있는 목적과 기본이념”에 준거해야 한다.(법안 제 6조) 정부에서 제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 법은 “지식재산 중심의 국가경쟁력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세계적 흐름을 반영함으로써 지식재산강국 실현을 위한 정책적 추동력 및 상징성을 뒷받침”하는데 의의를 둔 법이다. 즉 이것은 지식기반 경제를 체계적으로 재구조화하려는 정책적 시도의 일환인 것이다.

지식기반 경제와 관련된 담론은 이미 수도 없이 많은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 등이 자본 축적의 기반이 된다는 생각은 극히 최근에 발생한 관념 체계이다. 그럼에도 이 관념 체계는 무서운 속도로 일상의 영역까지 퍼져나갔으며, 이제 경제에 대해 말하는 누구에게나 이것은 상식이 되었다.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담론의 일상적 지평까지 확장되어 보편화 된 것이다. 이는 하나의 말의 모듬으로써의 담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경제 활동에서 주어지는 특정한 상황에 대처하고 판단하는 합리성의 준거로 기능한다. 경제적 현실이 이 담론을 매개로 재구축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담론은 김영삼 정권이 영화 <쥬라기 공원>을 현대자동차 매출과 비교할 때 이미 시작되었으며, 외환위기를 거치며 기존의 자본 축적 체계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 형태로 자리잡았다. 물론 지식기반 경제와 관련된 담론은 우리 사회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탈산업사회론이나 정보사회론과 같이 서구사회에서 시작된 학술적 논의나 미국식 구조조정 모델을 경제 개혁 모델로 제시하는 경영학의 논의를 비롯해, IMF, OECD, WTO 등의 국제 기구가 제시한 경제 행로 등을 통해 예비되고 있었다.

서동진은 이와 같은 경제적 담론의 변화는 단순히 더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으로 축소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시장의 상품 가격부터 기업의 자산과 투자가치에 대한 평가와 노동주체의 경제적인 활동을 가치화하고 보상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영역의 변동을 촉발시키며, “매우 세부적인 담론들과 그것과 연결된 테크놀로지들을 통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식기반 경제에서 유행하는 ‘기업가정신’을 둘러싼 캠페인은 이 담론이 만들어낸 경제 주체 형성의 세부 테크놀로지 중 하나이다. 그것은 ‘경영 마인드’나 ‘벤처 정신’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여기서 단적인 문제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이 기업가 정신과 같은 것이 기업과 직장 안에 존재하는 권력 관계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사와 부하, 감독자와 노동자, 경영자와 사원처럼 위계화된 형식적 구분을 초월해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업의 경영자”라는 주장인데, 이런 주장은 “기존에 노사관계라는 이름으로 자본과 노동 사이에 존재하던 대립 관계가 불가항력적으로 표현되던 것을 넘어서려는 경영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이 사례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이 새로운 경제 담론은 착취나 계급 불평등이 제거된 경제 분석을 단순한 사회적 사실로 환원해 버리고 있다. 또한 지식 기반 경제라는 경제적 가상은 그것이 유지되기 위해 요청되는 수많은 물질 노동의 사회적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다시 지식재산기본법(안)으로 돌아가보자. 이 법은 지금 지적한 것처럼 지식기반 경제라는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경제적 가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보도자료에서 이 법안의 제정이유를 직접 거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법 제정안에서도 기존의 ‘지적재산’으로 불리던 관련 법의 용어들을 모두 ‘지식재산’으로 교체할 것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부칙 2조 1항부터 20조까지) 그 동안 지적재산으로 불리던 법률 용어들을 애써 하나씩 거론하며 ‘지식’재산으로 바꾸는 것은 그 동안 논의 되어 왔던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에서 자신의 정당성의 근거를 찾고 싶어 하는 노력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추상적인 수준의 문제 이외에 다른 문제도 있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은 법 제정안에서 이 법의 목적을 제시하고 있는 1조의 내용이다. 법안에 따르면 이 법의 목적은 “관련 산업의 육성 및 문화, 예술의 진흥”에 있다. 일반적인 내용처럼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는 작년에 개정된 저작권법의 영향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저작권법에서 1986년 1차 전부 개정 이후 2009년의 17차 개정 이전까지 1조(목적)는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었다. 작년 저작권법 개정 이전에 저작권법 1조는 ‘저작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던 것이 작년 개정을 통해 1조의 ‘문화의 향상발전’이라는 문구가 ‘문화 및 관련 산업의 향상 발전’으로 바뀌었다. 이는 저작권법이 존재하는 실질적인 이유를 보여주는 증상적인 변화로 보인다.

실제로 저작권법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 개인 창작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문화는 그러한 극소수의 개인들의 창작물을 통해서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하는 수많은 창작자들과 그들의 창작물을 공유하고 향유하는 이용자들, 그리고 창작물들을 활용해서 새롭게 해석하고 발견하는 패러디 작가들(겸 이용자들)등 모두의 노력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다. 저작권법은 그나마 있는 개인 창작자에게 돌아 가야할 권리마저 ‘산업 육성’이라는 명목하에 특정 기업이나 조직으로 전환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재산기본법의 1조(목적) 역시 이러한 변화의 자장 안에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문제 삼을 수 있는 내용은 지적재산권자의 권리‘만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이 법안에는 “지식재산이 권리로서 신속, 정확하게 확정되고 효과적으로 보호될 수 있도록 필요한 시책을 수립, 추진”하고 “지식재산권 보호를 위한 집행 활동이 충실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침해행위에 대한 대응방안을 마련, 시행”하기 위해 집행을 강화하는 내용만 채워져 있다. 상식적으로 이 법안이 목적대로 문화와 예술의 진흥을 추구한다면, 즉 지적 창작물이 그 가치를 극대화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공유하고 향유하는 이용자의 권리도 함께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법안 어디에도 이용자의 권리나 향유권을 진작시키기 위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다시 이 법안이 문화와 예술의 진흥과는 관계없이, 소위 문화 ‘산업’만을 위한 법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우리 삶에서 경제적 가치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의 유일한 가치라거나, 나아가 그것만을 위해 다른 가치들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법안은 그렇게 주장하는 듯하다. 지적인 생산물에 관한 법률이 일반적인 재산권과 다른 지점은 명확하다. 법은 단순히 하나의 규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을 구조짓는 것이다. 특히 지적인 생산물과 관련된 법률은 우리의 창조적 능력과 문화적 삶을 구조짓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 가치로 완전히 환원될 수도 그렇게 되어서도 안되는 어떤 것이다. 지식재산기본법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혹은 과연 이런식으로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근본적으로 되물어야 할 시점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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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다시, ‘파랑새’와 ‘외톨이야’ : 표절과 저작권 침해


 

와이낫의 ‘파랑새’와 씨엔블루의 ‘외톨이야’ 사이의 표절 논쟁이 한창 지난 지금, 다시, 표절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당시 격한 논쟁이 오고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이제 사태는 법정으로 옮겨졌다. 1년 이상이 소요되는 긴 싸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대중적 관심이 사그라든 시점에, 정보공유연대의 주최로 4월 8일에 표절을 주제로 한 조그만 세미나(이달의 토크: 창작과 표절 그 미묘한 지점)가 진행되었다. 한물 지나간 주제로 뒷북이나 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리는 치열했던 논쟁을 차분히 되짚어 보며, 표절문제에서 핵심적이지만 정작 논쟁 속에서는 누락되었었던 어떤 것들을 드러내고 이야기 하는 자리였다.

 

지난달 와이낫은 ‘외톨이야’의 작곡가를 상대로 저작권침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하는 소송을 걸었다. 소송을 제기하며 와이낫의 리더 주몽은 소송이 최선의 수단은 아니었지만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말한바 있다. 이달의 토크에서 그는 표절을 방치하는, 혹은 어떤 측면에서는 구조적으로 그것을 조장하는 음악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문제제기의 방식에서 소송이 최선의 수단이 아니었다고 말할 때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표절과 저작권 침해가 완전히 일치 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음악계의 구조적 병폐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음악계에 여러 측면에서 경종을 울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표절을 막기 위한 해결책에 대한 논의에서는 쉽게 저작권 침해 방지 정책으로 귀결되곤 했다. 과연 저작권 침해 방지가 표절을 막는 최선의 길이고, 유일한 길일까? 사실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의 저작권이 저작권자의 권리를 강화 시키는 방식으로 개정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번 지적되어 왔다. 거기에는 이용자의 향유권은 거의 고려되어 있지 않다. 저작권의 유용성을 옹호하는 이들이 저작권법 1조를 거론하며 그것이 문화의 향상 발전(지난번 개정에서 문화와 관련 ‘산업’의 향상 발전으로 문구가 수정되었다)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여도, 그 세부 내용에서는 그 목적을 부정할만한 수 많은 악소조항으로 가득차 있다. 대중음악계의 유명작곡가들의 표절 관행에 문제제기를 하기 위한 소송이 저작권 강화로 환원된다면, 역설적으로 그 결과는 유명작곡가들(만)의 이익을 더 확실히 보장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버릴 것이다. 따라서 표절을 저작권 침해로 동일시 한다거나, 표절 방지를 저작권 강화로 환원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사실 표절과 저작권 침해는 개념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보호기간이 만료된 저작물이나 공공영역(public domain)에 있는 표현물, 그리고 공정이용에 해당하는 경우 저작권 침해는 인정되지 않는다. 반면 표절에는 그런 예외가 전혀 없다. 표절에는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의 표현물이 타인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절은 단지 타인의 창작물을 흉내내거나 도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타인의 창작물이 처음부터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때문에 표절에서는 타인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다.

 

또한 저작물이 저작권자의 동의하에 이용된다거나 이용 후에 문제가 발생할 때 저작권자의 용인이 있다면 그것의 이용이 법적으로 정당화 되는 반면, 표절에는 원 창작자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표절은 타인의 창작물에 있는 오리지널리티 자체를 부정하는 한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때문에 표절자는 원 창작물을 도용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창작자는 창작물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 말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는 침묵해야 하며,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 말할 (저항의) 언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창작은 원래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창작은 모방과 참조의 계기가 새겨져 있다. 모방과 참조를 통한 훈련과 그것들의 축적이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조금 모방하면 창작이 되고, 많이 모방하면 표절이 되는 것처럼, 즉 창조와 표절의 경계는 모호한 것이기 때문에, 창작자를 함부로 표절자로 매도해서는 안되고, 설사 그가 표절자로 판명이 난다고 해도 그를 쉽게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외톨이야’의 작곡가중 한명인 김도훈은 이러한 논리에 근거해서 자신이 표절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가 제기한 주장 중 하나는 와이낫의 ‘파랑새’가 박상민이나 컨츄리꼬꼬의 노래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외톨이야’가 표절이면 ‘파랑새’도 표절이며, ‘파랑새’가 표절이 아니라면 ‘외톨이야’도 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모방이나 유사한 음악적 요소들은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차용되거나 이용되었다고 해서 표절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표절은 단순한 모방이나 저작물 침해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표절에는 타인에 대한 부정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권력이 각인되어 있다. 표절 문제에서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또 하나! 표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작권법이 가진 문제에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저작권법은 여전히 문화의 향상 발전이나 이용자의 향유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반하는 것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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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담비 흉내 UCC 저작권 침해 불인정 판결의 허와 실

지난해 5살짜리 아이가 손담비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올린 블로그 게시물이 게시 중단 조치를 당한 사건이 있었다. 동영상을 올린 당사자는 게시 중단 조치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사)음악저작권협회와 (주)엔에이치엔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이번 달 18일 원고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이용자의 향유권을 일부 인정했다는 점 때문에 환영할만한 조치로 평가되고있다. 판결이 난 다음날 참여연대는 논평을 내어 부당한 삭제 요청에 대해 세계 최초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이라는 점과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규제들을 개선할 여지를 남겼다는 점을 들며 이번 판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을 무턱대고 환영할 수만은 없다.


이번 판결은 결과만 본다면 이용자의 향유권을 보장하는 당연한 조치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 판결을 이끌어내는 논리(과정)를 들여다보면 이 당연한 권리가 법의 영역에서는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 권리로 여겨지는지, 나아가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권리가 얼마나 누리기 힘든 것인지가 드러난다.


법원은 이번 사건을 “기본권 주체의 표현의 자유 및 문화․예술의 자유라는 기본권이 상대방 기본권 주체의 저작재산권이라는 기본권과 충돌하는 상황”, 즉 저작물에 대한 생산자의 소유권과 이용자의 향유권 사이의 충돌하는 상황으로 규정하며, 이러한 충돌이 발생할 경우 “저작자와 이용자의 권리의 균형 및 조화를 도모”하고 있는 저작권법을 통해 “조화롭게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저작권법이 “여러 조문에 걸쳐 저작재산권의 제한규정을 두어 저작물을 자유이용할 수 있는 경우를 명문화” 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같은 사건의 조화로운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 저작권법에서는 보도·비평·교육·연구를 위한 목적 하에서만 저작물에 대한 인용이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법원은 “인용저작물이 피인용저작물을 대체할 수 있어 피인용저작물의 시장가치를 훼손”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용이 이뤄져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법원은 문제가 된 게시물이 “원고의 딸의 귀엽고 깜찍한 행동에 대한 기록과 감상, 대중문화가 어린 아이에게 미친 영향 등에 대한 비평 등을 담아 이 사건 게시물을 작성하고 공개한 것으로서 이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며, “사건 저작물의 시장가치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시장수요를 대체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만한 여지가 없고, 오히려 이 사건 저작물의 인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기여한다고 볼 수도 있는 점”을 들어 원고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다시 말해, 문제의 게시물이 비평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저작물의 시장가치를 훼손하지 않기 때문에 저작권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보면 꽤나 관대한 판결처럼 보인다. 그러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 이 판결에서 핵심이 된 것은 비평과 시장가치라는 두 요소이다. 비평에 대해 살펴보자. 문제가 된 게시물에는 아이의 엄마가 가요프로그램도 보지 않는 아이가 이 노래를 어디서 보고 들은 것인지 궁금하다는 글 한 줄이 담겨 있다. 법원은 이 한 줄의 글을 인용하며 “대중문화가 어린아이에게 미친 영향 등에 대한 비평”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그것에 비평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 엄마의 의문이 간단하지만 비평이라 부를 만한 요소가 담겨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만약 그 한 줄의 글이 없었다면 이 게시물은 비평이 아닌 것이 되며, 정당한 목적에 의한 인용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게시물이 ‘비평 글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적인 효력을 가지는 보도·비평·교육·연구라는 범주의 글(혹은 다른 매체를 통한 표현물)들이 뚜렷한 척도를 가지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법원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사건의 계기가 된 게시물이 (법원이 판결문에서 강조했던) “비전문가”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는 점과 그 게시물이 가진 일상적 성격을 고려해 본다면 저작권법에서 규제하고 있는 게시물의 범위가 얼마나 자의적으로 판단될 수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비평의 기준이 자의적인 것이라면, 따라서 그것이 엄격한 법적 척도가 되지 못한다면 이번 판결의 결정적 근거가 된 것은 시장가치의 훼손 여부에 있을 것이다. 문제가 된 게시물은 손담비가 부른 노래가 발생시키리라 예상되는 수익에 결정적인 손실을 가져다 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작권법을 위반하지 않은 게시물이 된 것이다. 이처럼 판결문을 조금만 들여다본다면 이번 사건이 결코 생산자의 저작재산권과 이용자의 향유권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용자의 권리는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으며, 단지 (자본주의 사회를 성립시키고 유지케 하는 법적 근간인) ‘재산권이 침해되었는가 아닌가’가 문제의 핵심에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번 판결은 이용자의 향유권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확장하기 위한 판결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결과론일 뿐이다. 판결의 결과보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은 그 결과를 이끌어내는 법적 논리(과정)이다. 그 논리 속에는 공유되어야할 문화적 산물들을 하나의 상품으로 전유해 나가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합리성은 법의 이름으로 개개인의 사고 속에 자리잡는다. 각 개인들은 그 합리성 속에서 판단하고 행위하게 된다. 특정한 행위의 근거가 되는 합리성이 시장가치만을 척도로 삼아 형성될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 가치를 판단의 최우선 척도로 놓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변형을 가하며 풍성해지는 문화적 영토를 파괴하는 비합리적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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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법이 발병시킨 문화적 우울증

개정 저작권법이 시행된지 일주일여가 흘렀다. 막상 시행되고 나니 인터넷 3진 아웃제에 대한 논란도 잠잠해졌다. 이제 ‘창작물에 대한 이용자의 권리’와 ‘웹공간에서 표현의 자유’가 가혹하게 침해당하는 일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이에 대응해서 참여연대나 정보공유연대는 3진 아웃제의 위헌성을 문제 삼아 헌법소원을 준비 중에 있긴 하다) 물론 지금까지도 이용자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는 지나치게 많이 침해당해왔다. 개정 저작권법은 그 침해를 극대화 할 것이다. 개정 저작권법의 주 내용은 저작권을 침해하는 이들에 대한 처벌 규정을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저작권은 정보사회 혹은 지식기반경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없어서는 안될 경제적 장치로 인식되고 있다. 저작권은 창작자의 (경제적) 권리를 보장해 줌으로써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핵심 동력으로 취급된다. 우리 주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저작권을 둘러싼 논의는 창작자에 대한 경제적 보상과 그 방식에 집중되어 있다. 창작에 대한 경제적 보상은 창작의 유발동기가 되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문화를 즐기고 활성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며, 그것은 강력한 법적(처벌)장치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작권에 대한 강한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두 가지 축일 뿐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일종의 허구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은 간단하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저작권은 왜 저자의 권리(author's right)가 아니라 복제의 권리(copyright)인가?

저작물 혹은 창작물은 왜 그리고 어떻게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단속의 대상이 되었는가?

과연 특정인이 문화적 생산물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문화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가?

문화적 생산물을 함께 공유하고 향유하는 것이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저작물은 유일하고 특수한 개인의 온전한 창작물인가?

저작물의 독점적 소유권자로 상상되는 저자란 무엇인가?

저작권을 통해 실재로 경제적 이익을 얻는 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하나씩 곱씹어 본다면 저작권을 강화시켜온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물론 어떤 질문들은 쉽게 증명될 수 없고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만, 다른 어떤 질문들은 저작권의 역사나 현재의 상황에 대한 간단한 서술만으로도 쉽게 논증될 수 있다.



정보에 대한 반독점적 권리로서의 저작권


역사적으로 보면 초기의 저작권은 지식이나 정보를 배타적으로 사유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저작권은 15세기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등장했다. 그것은 1496년에 시행된 출판특허제를 그 제도적 효시로 해서 16세기 초에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저작권은 인쇄술의 발명과 연관되어 있다. 인쇄술이 발명됨에 따라 지식과 지식 창안자 사이의 분리가 이루어졌고, 지식은 창안자로부터 독립되어 남에게 양도할 수 있는 상업적 권리로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에 저작권 제도는 근대 인쇄혁명이라는 사회역사적 조건에서 생겨난 법률적 제도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저작권은 인쇄술의 발명으로 출판업이 발달하면서 넘쳐나는 출판물을 규제하기 위한 제도로 고안되었다.

 

근대적 의미의 저작권법은 1710년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이것이 앤 여왕법(Statute of Anne)이다. 앤 여왕법은 두 가지 의미에서 과거의 저작권법과 질적으로 다른 차별성을 지닌다. 하나는 저작권의 보호기간을 설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의 권리를 등장시킨 것이다. 앤 여왕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출판업자들은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사는 것은 집이나 땅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으므로 출판물에 대한 권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제한 없이 보장되었다. 따라서 출판업자들은 한 번 판매된 저작물의 권리가 아무리 오래되어도 그것을 시장에서 독점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앤 여왕법은 이러한 출판업자들의 독점적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 저작물에 대한 권리에 기간을 정했다.

 

그리고 앤 여왕법은 서문에서 ‘의심할 바 없는 재산을 가진 저자의 동의 없이는 어떤 저작물도 출판할 수 없다’고 명시함으로써 처음으로 저자의 권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저작권의 기간 한정이나 저자의 권리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출판업자들의 독점을 깨기 위한 의도적인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저자(author)라는 개념은 출판 독점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당시의 저작권은 엄밀히 말하면 ‘저자의 권리’(author-right)가 아니라 ‘복제의 권리’(copy-right 혹은 right to print)였다. 저자 개념 자체가 저자의 소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출판업자들의 독점적 복제권을 견제하기 위해 네거티브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초기의 저작권법은 반독점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의 권리를 명시함으로써 이제 타인의 소유물과 저자의 소유물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 그리고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해 졌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 진행된 ‘결정판’ 혹은 ‘전집’의 편집 열기라는 18세기의 사회적 배경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당시에 내가 쓴 글과 타인이 쓴 글을 구별하는 인용부호와 같은 문법적 규칙이 표준화되고 그것의 강제적 사용이 의무화된다. 현대사회에서 사용하는 표준화된 인용부호가 완성된 것이 바로 18세기 후반이다. 18세기 이전에도 인용부호와 같은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표현의 소유자를 규명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8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인용부호는 그 인용된 구절의 소유권이 타인에게 있다는 표시가 아니라 성서나 격언, 속담과 같이 특별히 신경을 써서 읽을 필요가 있음을 표시하는 기호에 불과했다.



저자 살리기 혹은 저자 죽이기


저자란 지식이나 정보가 특정한 개인에게 소유될 수 있다는 관념을 유지시키기 위한 (그러나 실제로는 저작권을 구조화 시키는 중심으로서 기능하는) 허구적 개념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적재산권을 통해 실질적인 이윤을 얻는 소유권자가 창작자로서의 개인에서 기업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크발(Ekbal, B)에 따르면 “지적재산권의 제도화와 함께 개인창작자의 이득은 거대 기업의 이익으로 대체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창작자는 지적재산으로부터 이익을 얻지 못한다. 독립된 발명가들은 종종 무시되거나 착취당한다. 기업이나 정부에 고용된 이들이 보호할만한 가치를 가진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해당 조직의 저작이나 특허가 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기업은 독창성과 영감을 가진 낭만적 저자라는 개념에서 자신들의 (일종의 갈취) 행위의 정당성을 찾고 있다. 정보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다면 기업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목격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업이 정보의 소유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적재산권의 성립근거가 되고 있는 ‘정보의 창작자가 생산물을 소유’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창작물이 기업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는 창작물의 자기 소유라는 이데올로기가 거부되어야 한다. 그리고 창작자가 창작물을 소유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부정되기 위해서는 창작물이 ‘생산자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창작물이 창작자로부터 분리되어야 ‘개인 생산자의 소유’라는 사실이 부정되고 소유권이 기업으로 이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 창작자의 소유가 부정되고 소유권이 기업으로 이전되는 과정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 하나는 ‘업무상 저작물(works made for hire)’이라는 형태로 기업이 개인이 생산한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통과정에서 계약을 통해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의 일부나 전부를 양도 받는 것이다.

 

먼저 업무상 저작물에 대해 살펴보자. 18세기 이후 확고하게 자리 잡은 ‘낭만적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창조적 업무에 종사하는 일개 노동자(creative worker)로 전락한다. 저작권법 내에는 ‘업무상 저작물’에 대한 규정이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작품을 창작한 사람은 개인일지라도 작품의 실질 소유자는 이들에게 임금을 지불한 기업이 된다. 이렇게 기업은 작품의 소유자, 즉 저자가 된다. 여기서 저작권자로서의 기업은 창작한 노동자들에게 일정액의 보상금을 주고 그 창작물을 양도받는 것이 아니라 고용주이기 때문에 그 권리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방송 사업자가 자신이 고용한 방송작가, 소속 배우, 소속 음악가 등 기타 인력과 설비를 투입하여 영상물을 만드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러한 경우 방송사업자는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영상저작물 작품은 물론이고 ‘사용된 어문저작물, 음악저작물, 실연 등에서의 권리’ 등 모든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게 된다. 이때 외부의 독립제작사를 활용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스스로 자체 제작한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에 방송사업자가 저작권자가 된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만들어진 영상저작물이 향후 다원적으로 활용될 때에도 개별 권리자의 권리는 주장될 수 없다. 더욱이 업무상 저작물에 대한 조항은 저작권법이 개정될수록 점차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정보의 실질적 소유권자가 개인에서 기업(법인)으로 옮겨 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유통과정에서 창작물의 소유권이 개인에서 기업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자. 상품이 유통과정에 들어가기 위해서 창작자는 판매자가 되어야 하는데 개별 창작자는 직접 판매 활동을 하는데 한계가 있다. 상품의 유통로를 거대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 창작자가 판매자가 된다 하여도 거대 기업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창작자는 자신의 생산물을 판매하기 위해서 유통로를 장악하고 있는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판매의 유통로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계약을 통해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의 일부 혹은 전부를 이전받는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창작물은 기업소유가 되고 창작물의 판매에 따른 보상은 기업으로 돌아간다. 창작자의 개성은 기업의 자본이 된다.


이처럼 앞서 제기된 질문들을 조금만 들여다본다면, 저작권을 둘러싼 논의가 얼마만큼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간단히 독점이나 보상과 같은 저작권의 경제적 측면만을 살펴보았지만, 그것의 정치적 측면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이에 대해서는 '저작권, 정치에 다가가기' 참조해도 될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 측면이든, 경제적 측면이든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저작권이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 협소한 의미의 정치 혹은 경제의 한 측면이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창조성과 같은 인간의 정신적 능력’과 ‘정신적 생산물을 공유하는 문화적 삶’ 그 자체라는 점이다. 저작권법은 우리의 문화적 삶을 치명적인 문화적 우울증에 빠뜨리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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