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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 않은 미학을 위해 희생당한 도시민의 삶 : 개발과 투기의 일상화 2

 

 

지난 칼럼(개발과 투기의 일상화 1 : 개발에 미치고 투기에 목맨 우리시대의 자화상<칼럼보기>)에서는 개발과 투기의 열풍이 단순히 토건국가와 건설자본의 결탁으로 인해 발생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 이야기 했다. 거기에는 개발을 찬양하는 투기하는 시민이 함께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사회는 소수 지배자들의 머리 속에 설계된 대로만 형성되지 않는다. 한 사회의 성격은 지배자의 의도와 함께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독특한 합리성이 만나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구성된다. 때로 그것들은 서로 반대의 지점에 위치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친화력을 발휘하여 같은 지점에 서서 같은 목표를 바라보기도 한다. 적어도 개발과 투기의 열풍은 후자의 측면이 강해 보인다.

 

재개발 논리의 미학적 정당화

 

개발과 투기에 대한 열정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경제적 이득과 관련되어 있다면, 다른 한 축은 미학적 삶과 관련되어 있다. 도시 미학은 도시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을 넘어 도시민들의 삶 자체를 재구조화 하는 기능을 한다. 브랜드 아파트의 유행은 이 지점과 관련되어 있다. 1999년 삼성중공업의 ‘쉐르빌’을 시작으로 래미안, ‘트럼프 월드’, ‘아이파크’, ‘캐슬’, ‘e편한세상’, ‘힐스테이트’, ‘더샵’, ‘푸르지오’, ‘비발디’, ‘상떼빌’ 그리고 최근의 ‘Z클래스’까지 브랜드 아파트는 그야말로 봇물터지듯 등장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직접적으로는 외환위기 직후 단행된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조치와 관련된 것이지만, 보다 폭 넓게 보자면 당대의 독특한 합리성이 발현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브랜드 아파트의 유행은 도시가 과잉유입된 인구의 수용이라는 기능에서 삶의 미학적 구성이라는 기능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징후처럼 보인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라는 광고문구, 웰빙 열풍과 맥을 같이 하는 ‘친환경 아파트’, 성에서 음악회를 여는 귀족적 삶을 보여주는 ‘캐슬’ 같은 아파트, 미래지향적인 최첨단 아파트 등 브랜드 아파트 광고가 보여주는 삶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것들은 “사람다운” 삶, “자연과 함께 하는” 삶, 기술발전이 가져올 “미래지향적” 삶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 광고들은 개인들을 ‘대신하여’ 생태와 기술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바람직하게 도래할 삶의 이상을 만들어준다. 미래는 그렇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 광고가 늘 그렇듯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혹은 아직-오지 않은, 미-래) 이미지를 주조해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바로 그 도래하지 않을 삶의 이미지를 자신의 삶 속으로 투사시킨다.

 

여기서 삶의 미학적 구성이라는 테제의 목표가 도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맞춰져 있기 보다는 개발과 투기의 새로운 시장 개척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른바 컬쳐노믹스(culturenomics)가 보여주는 것이 미학의 시장화라는 지점이다. 도시를 미학적으로 디자인 하는 것이 도시의 경쟁력이자 경제적 힘이라는 것이 컬쳐노믹스의 모토이다.

 

세운상가 철거후 녹지를 조성하고, 동대문운동장을 디자인플라자로 조성하고, 강남대로에 거대한 미디어 폴을 세우고, 인공 꽃밭과 인공분수로 꾸며진 광화문 광장을 만드는 모습 속에서 컬쳐노믹스는 그 실체를 드러낸다. 미학적 도시를 만든다면서 그 장소 고유의 문화와 생태 그리고 역사적 특수성과 지역성을 파괴하는 모습은 재개발 논리(혹은 신개발주의) 속에서 파괴된 미학적 상상력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상상력이 제거된 문화와 미학은 재개발 논리를 세련되게 정당화해주는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 전락한다.

 

브랜드 아파트의 유행 속에서도 미학화된 재개발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브랜드 아파트는 사실 원주민들의 삶을 뿌리 뽑는 강제 철거와 미학적 상상력이 배제된 막개발의 중심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도시적 삶의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주는 듯한 미래를 향한 희망과, 다른 한편으로 부동산 가격 상승이라는 현재의 희망을 동시에 제공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도시 재개발의 주역이 된다. 이 희망들의 결합은 사회적으로 정당화된 개발과 투기에 대한 열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축이 된다. 개발과 투기에 대한 사회적 용인은 재개발의 실질적 피해자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람들조차 재개발(혹은 뉴타운 건설)을 지지하게 하는 강력한 동인이 된다.

 

우리 사회가 조감도를 보는 방식
 
미학적 도시라는 세련된 개발 논리의 실질적 효과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보기에 좋은 것은 어두운 현실에 한줄기 빛이라도 던져주는듯한 제스쳐를 취하며 그것을 넘어선다. 미학과 생태를 개발 논리의 키워드로 내세우며 미학적 도시 개발의 원형을 만들어낸 것이 청계천 복원이었다. 그 청계천에서는 비가 오면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청계천을 둘러싼 인도와 도로에 쌓여 있던 온갖 도시오염물질들이 빗물에 쓸려 유입되기 때문이다. 비가 와서 물고기가 죽고 나면, 죽은 물고기는 조용히 치워지고 새로운 물고기들이 방류된다. 다음날 청계천에 나가보면 물고기는 여전히 그곳을 유영하고 있다. 도시에서 죽음은 이렇게 감춰지거나, 쉽게 잊혀진다. 바로 이것이 도시에서 보여지지 않는(혹은 보기에 좋지 않은) 개발의 어두운 측면이 감춰지는 방식이다.

 

보기에 좋은 것이나 보여지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 자체가 아니다. 보여지는 것은 대상을 ‘보는 방식’(way of seeing)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는 방식은 생물학적 시각의 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으로 공유되어 학습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상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사회적 관점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본다는 것 자체가 대상을 의미화 하는 실천인 것이다.

 

특히 근래에 들어 사회적으로 고유한 ‘보는 방식’은 더욱 중요해 지고 있다. 시각 자체가 사회적 소통의 기반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기반을 둔 텔레비전, 영화, 사진과 같은 매체나 미디어 아트, 시각 예술의 부흥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의 지위 등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알 수 있다. 나아가 전통적으로 소리에 기반을 둔 매체였던 전화와 같은 매체는 화려한 인터페이스와 함께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즐기고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각적 매체로 전환되고 있다. 좀 더 극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보여지는 대상은 이제 우리가 보는 방식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다.

 

1년 365일 공사중인 대한민국의 수많은 건설현장이나 유래없는 규모의 개발을 진행하는 뉴타운 계획을 보자. 그 공사현장이나 재개발 설명회를 가면 항상 보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조감도이다. 최근 도시민들은 바로 이 조감도를 보는 방식을 새롭게 익혀가고 있다. 조감도는 개발이 끝나고 난 이후 지역이나 건축물의 모양을 한눈에 보여주는 청사진이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아닌 새의 시점에서 그려진 것이며, 유토피아를 가시화 시킨 것이다. 그 조감도 속에는 풍요롭게 발전한 지역의 미래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새겨져 있다.

 

조감도는 공사현장과 재개발 설명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천에서 열린 세계 도시 축전에도, 서울 디자인 올림픽에도, 2010년 세계 디자인 수도로 지정된 서울시에도 있다. 조감도는 현재 있는 것을 그리지 않는다.(그것이 실제로 있다고 해도 새의 시점에서 그려진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람들이 “직접 인지할 수 없는 세상을 다양하게 전문화된 매체를 통해 보여지게끔 하는 것”이다. 조감도는 미래에 대해 그려진 것이지만, 스스로를 현재에 드러내며 현재보다 우위에 서려는 이미지이다. 조감도의 미래에 다가가기 위해 현재는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 되며,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견뎌야 하는 것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재개발은 도시민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많은 경우 원주민들의 삶을 파탄내고 있다. 그럼에도 뉴타운 재개발이 발표되면 수많은 주민들은 그것을 열렬히 지지한다. 그 지지자의 상당수는 재개발을 통해 아무런 직접적 이익도 얻지 못하고 심지어는 재개발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모순적으로만 보이는 이 상황 속에는 현대인이 가진 독특한 합리성이 발견된다. 한편으로는 눈앞에 놓인 물질적 이익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경제적 인간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높은 삶의 질을 위해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미학적 인간이 있다. 그러나 두 태도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것들은 인간의 삶은 문명 발달과 물질적 풍요 속에서만 질적으로 향상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두 태도가 공유하는 물질적 풍요라는 전제는 언제나 직접적인 물적 대상이 아니라, 추상화된 물질성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흔히 물신주의라고 이야기 하는 그것말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물신주의의 물신은 구체적인 물질이 아니라 비물질적 물질(혹은 물질의 비물질적 육체)을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를 향하도록 하는 자본의 욕망이다. 지금 소비해서 없애지 않고, 미래를 위해(혹은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다시 투자되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 아니던가. 때문에 물신의 대상으로서의 물질은 축적할 수 있되, 소비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요컨대 현대사회에서 개발에 대한 열정은 (그것이 경제적 태도이든, 미학적 태도이든) 물질적 풍요에 대한 열망을 전제로 하며, 나아가 자본의 욕망과 연결된다. 개발과 투기가 일상화된 시점에서 투기하는 시민들, 재개발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자신이 아닌 자본의 욕망을 내화한 자본화된 시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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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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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 전시 : 도시 속에서 발견한 외부적 사유의 공간

도시 속에서 발견한 외부적 사유의 공간

 

 

 

       도시는 자연스레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주조된 어떤 것이다.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낡은 것들이 파괴되고, 새로운 것들이 형성되는 공간이다. 도시는 파괴와 생성의 과정 속에 존재한다. 어떤 것들은 생성을 위해 파괴되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그냥 파괴되기만 할 뿐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며 시간 속에 축적시킨 삶의 흔적들은 종종 도시가 가진 변화의 속도 속에 함몰된다.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문제는 바로 그 변화의 속도이다. 휘황찬란한 변화의 속도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저 도시의 속도에 적응해 나갈 뿐, 자신만의 속도를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2008년 작 '도시의 섬'       정수진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녀가 주목하는 지점은 자동차가 질주하는 도로의 한 복판에 있는 ‘안전지대’이다. 자동차가 침범하지 못하는 공간, 자동차를 피해 사람들이 잠시 머무르는 공간. 그 곳은 움직임의 속도가 멈추는 공간이며, 그렇기에 도시의 속도에 함몰되지 않는 공간이다. 때문에 그 곳은 속도의 외부에 놓인 성찰의 공간처럼 보인다. 그녀는 2008년 첫 개인전부터 <도시의 섬>이라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일관되게 도시 속도의 외부, 그곳의 성찰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그녀는 2009년 또 다시 <도시의 섬>을 주제로 개인전을 마련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같은 것들의 작은 변주만이 존재하는 지난 전시의 반복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그녀의 작품들은 진화하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묻고 있다. 안전지대, 그 곳은 진정으로 멈춤의 공간이며, 성찰의 공간인가? 여전히 그곳은 도시의 속도를 관조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멈춤과 성찰의 공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속도에도 저항할 수 없는 무의미의 공간이기도하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 그곳은 도시의 속도를 만들어내는 생산지로서 기능한다. 이 정지된 공간은 도시의 속도를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환영들을 만들어낸다.

 

      

        이 환영들은 나무에 장식된 현란한 조명들을 통해, 다양한 모양을 연출해내는 토피어리를 통해 재현된다. 이 토피어리들은 때로는 화목한 가정을, 때로는 해피엔딩을 예고하는 동화의 한 장면을, 때로는 도시 진보를 형상화한 상징들로 전시된다. 도시에서 사는 이들의 속도는 자신의 속도라기보다는 가정을 위해, 아직 오지 않은(未-來)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앞으로도 오지 않을 해피엔딩을 위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족, 민족, 회사 등 허구적 공동체의 앞날을 위해 적응하고 버텨야할 삶의 속도이다.

 

 

2009 년 작 '도시의섬'        어떤 사물도 다른 사물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 않는다. 도시가 파괴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개별자들이 독특하게 지니고 있는 시간의 질적 차이이다. 도시의 속도는 개별적 시간을 하나의 균일한 시간으로 흡수해버린다. 정수진의 작품에는 개별자들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 있다. 그녀는 도시의 속도가 물결치는 도로 한 복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 한다. 속도가 멈추는 곳에서, 즉 추상화된 속도의 텅 빈 결들 속에서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안전지대에서 그녀가 찾으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시간을 구성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곳에는 이미 도시의 속도를 긍정케 하는 신화적 형상들로 가득 차 있다. 정수진은 화려한 조명과 토피어리를 통해 그 신화적 형상들을 비판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비판 대상이 안전지대 자체가 아니라 안전지대를 채우고 있는 신화적 형상들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도시의 신화를 비판하면서도, 안전지대를 여전히 도시의 공적 공간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추상적 속도가 휩쓸고 다니는 그 도로의 한쪽 편에 있는 안전지대에 조그마한 호수와 정자를 그려 넣음으로써 삶의 여유를 찾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곳에는 어김없이 시속 60Km 이상을 금지하는 도로 표지판이 놓여 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천천히 혹은 자신의 속도대로 살아가라고 이야기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속삭임이기도 하다. 도시의 속도 속에서 살아오며 자신이 느꼈던 상실, 결여, 혼돈의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정수진은 젠체하는 조언자가 되기보다는 자기 삶의 고민들을 이야기하고 공유하는 작가가 되고자 한다. 그녀의 작품들이 다른 치기어린 작가들의 작품과 달리 허황되거나 과장되지 않고,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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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 2009 개인전 '도시의 섬' , 전시 서문

 

전시 : 2009. 9. 18 - 9. 30(수), 오전 11:00 - 오후 7:00

장소 : 문화일보 갤러리(충정로, 문화일보 사옥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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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통치성: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통해 본 대도시 - 임동근

이 글은 지난 2009년 2월 20일에 있었던 '문화/과학' 집담회에서 임동근 선생님이 발표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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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노트] 도시와 통치성: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통해 본 대도시

 

 

“통치불가능한 사회들?” 2005년 11월 푸코의 통치성 강의를 되짚어 보는 『에스프리』 잡지의 권두 제목이다. 2004년 10월 푸코의 강의록 중 『치안, 영토, 인구』와 『생정치의 탄생』의 출간으로, 그 동안 푸코의 저작에서 한발 비켜가 있던 많은 이들이 푸코의 글에 관심을 갖게 된다. 68혁명과 그 이후 전개되던 소비자본주의의 만개, 1970년대 좌파이론의 붕괴와 뒤이어 온 80년대의 신자유주의 출현, 90년대의 사회주의국가의 몰락과 2000년대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푸코의 강의는 아주 원초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우리를 통치하는 ‘이성’이 있다.” 통치이성은 17세기 이후, 근대라 불리는 현 세상을 지배하며, 다양한 ‘통치 실천들’을 행한다. 이 실천이 사용하는 것이 ‘장치들’이며, 이는 ‘기구’와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순수한” 기계이다.

 

통치이성의 메커니즘은 단순하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통치가능하게 만들기. 통치이성은 통치의 정당성 문제가 아니라 통치의 방식을 따진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으며, 오직 계산할 뿐이다’라는 테오도르 슐츠(Theodore W. Schultz)의 인간관처럼 통치이성은 ‘통치’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작동하는 ‘이성’이다. 통치실천들은 이 이성에 따라 탄생된다/현실화되고, 각각 지배적인 ‘장치’들을 사용한다. 도시정책을 예로 든다면 ‘통치가능한 도시인구’를 위한 각종 ‘실천들’이 있고, 이 실천들을 작동시키는 지배적인 ‘장치들’이 있는 셈이다.

 

 

1. ‘장치’라는 개념

 

푸코가 말하는 ‘장치’(dispositif)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성적장치, 규율장치, 치안장치, 사법장치, 또 가장 일반적으로는 권력장치라는 말을 한다. 이 개념에서의 핵심은 ‘하나의 장치는 하나의 기능을 담당하고, 이를 위해 다양한 선분들이 결합된다’는 점이다. 권력의 장치들은 저마다 맡은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 법률, 이데올로기, 물리력, 지식, 기타 등등 무한한 종류의 요소들이 결합된 기계가 된다. 예를 들어 ‘치안장치’는, 경찰의 방패나 재판관의 의자 등, 치안을 위해 사용되는 모든 요소들이다. 이는 알튀세가 말한 ‘국가기구’에서의 ‘기구’와 다르다. 물리력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국가의 ‘기구’들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푸코는 이들을 횡단하는 보다 유연한 ‘장치’들이 권력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즉, ‘국가의 기구’가 아니라 ‘권력의 장치들’이 문제가 된다.

 

『말과 사물』에서 선보인 ‘에피스테메’라는 개념 또한 넓은 의미의 ‘장치’가 되고, 『감시와 처벌』의 규율 또한 ‘장치’의 일종이 된다. 푸코는 1976~78년 강의에서 세 종류의 ‘장치’를 설명한다. 사법, 규율, 치안. 각각의 장치들을 범주화하는 기준은 ‘현실’이다. 사법은 현실에 없는 것을 상상해서 처벌규정을 만들고, 규율은 현실에서 부족한 부분을 완성시키고자 하며, 치안은 현실이 있어야만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이 때 권력의 실천들이 이 장치들을 사용하는 기준은 ‘경제성’이다. 흔히 ‘권력의 일반 경제학’이라 불리는 푸코의 이 전제, 이를 통해 우리는 통치는 언제나 ‘통치비용’을 고려하며, 잘못된 통치 실천에 따른 초과 비용이 권력관계들을 뒤집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장치’ 개념은 현실 속에서 모호하다. 예를 들어 도시의 건축행위를 제한하는 법들과 실천들을 장치를 통해 해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학교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고 말하며,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들이 은폐된 권력 통치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받아들이기는 쉽다. 그러나 푸코의 장치로 학교를 설명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는 규율장치인가 아니면 치안장치인가? 푸코의 답은 학교라는 시설 혹은 제도에서 장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장치개념의 한 요소로서 학교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시설 혹은 제도에서 권력을 분석하고자 한다면, 더 나아가 이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제도의 틀을 만든 또 다른 지식-권력 안에 갇힌다. 학교가 교육기관인 것만도 아니고, 교육기관에 학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이들을 지지하는 지식은 이들 외부에서 결정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접근방식으로 인해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다른 이가 사용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어 통치실천들을 말하면서도 자신은 정부의 통치실천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푸코는 통치성을 설명하며 다양한 현실의 제도를 이야기하지만, 현실의 제도를 설명하기 위해 푸코의 통치성을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설정이다. 푸코의 전작에서 나타나는 이 난점 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푸코를 재미있게 읽지만 정작 푸코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지리학 또한 예외가 아닌데, 결국 푸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짝사랑’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리학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주권-영토, 규율-공간, 치안-환경, 푸코가 장치를 설명할 때 시도한 이 세 가지 연결을 발견한다. 주권은 영토의 위계를 생산하고 이를 토대로 주권을 뒷받침해주는 자본을 순환시킨다. 규율은 기능에 따라 공간을 건축하며, 이로 인해 차별화된 공간들이 생산된다. 치안은 다양한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을 조절하며 환경을 관리한다. 푸코는 우리가 사는 공간을 각각의 장치에 조응하는 세 개념, 영토, 공간, 환경을 설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영토의 기의는 권력장치라는 기표를 초월한다는 점, 즉 영토 속에는 사법장치, 규율장치, 치안장치 등이 혼재하며, 영토 또한 치안장치에 의해 통치화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장치들과 공간들을 조합하여 현재의 통치 실천들을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2. 계보학

 

1972년 CERFI의 토론에서 푸코는 ‘집합시설’ 프로젝트 제안서를 읽고 다음과 같은 계보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첫째, 집합시설의 전유와 소유는 다르다. 누구의 소유인가?

둘째, 집합시설의 기능은 누군가에게 서비스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왜? 사용하는 이들은 왜?

셋째, 집합시설은 생산적인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무슨 유형의 생산?

넷째, 집합시설의 존재와 기능을 뒷받침하는 권력관계는?

다섯째, 계보학적인 함의. 이로부터 어떻게 특정 효과들이 달라지기 시작하는가? 이미 있던 다리, 제분소 등 여러 시설들이 집합시설로 변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통치 실천들은 이들이 맡은 기능을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다. 도시계획을 분석하고자 할 때 도시계획에 현재 담당하는 기능들, 전체 도시체계에서 수행하는 역할들을 본다면, 우리는 이미 담당하도록 구획된 틀 안에서의 타당성, 실효성 검사만을 반복할 뿐이다. “탄생은 기능으로 환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도시계획을 만들고, 이를 따르게 억압하고, 또 이를 기꺼이 따르도록 만드는 힘들이다. 바로 이 지점이 ‘장치’가 개입하는 순간이다. 통치실천들, 특정 제도나 기구들의 탄생은 권력 장치의 (구성)변화를 의미한다. 학교라는 시설 혹은 의무교육제도 등을 보기 위해서는 그 탄생의 시점에서 달라진 장치들을 추적해야 한다. 들뢰즈는 이를 ‘현실화’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한때 유행했던 ‘탄생’, ‘발명’ 시리즈의 책들을 떠올려보자.)

 

계보학적인 접근이 가진 매력은 연구의 출발 시점 그 이전에 이미 연구의 목적이 되는 ‘의도’가 먼저 자리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막연히 제도의 탄생을 훑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탄생을 야기한 그 ‘무엇’에 대한 동인이 우선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도시 속의 통치실천들을 분석하고자 한다면, 그 출발 이전에 그것이 ‘자본주의 분석’이 되었든 아니면 ‘자유주의 분석’이 되었든, 각 실천들의 영역을 초월하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자본의 탄생을 보는 것은 ‘자본’의 외부를 보고자 함이며, 도시의 탄생을 보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때 이중의 이질적 결합이 상정된다. 실천들은 이질적인 장치를 가지고, 각각의 장치 내부 또한 이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푸코의 접근방법 때문에 통치성 개념을 ‘제도 및 시설 연구’로 한정할 때면 어려움에 처한다. 푸코의 권력 분석이라는 큰 틀에서 나타나는 ‘장치들’, 이를 사용하는 실천들은 외부와 연결을 잃어버리는 순간 실천과 장치들의 스틸사진만을 나열하는 일종의 표로 전락해버린다.

 

 

3. 대도시의 문제설정

 

푸코가 치안장치 개념을 고안한 것은 도시 인구의 통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18세기 이후 도시, 혹은 영토를 사유할 때의 강박관념은 인구와 재화의 ‘순환’이었다. 이 때 푸코의 관점에서 이동하는 인구를 통치함에 있어서 규율 메커니즘은 효율성이 떨어진다. 즉,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의 통치술과는 전혀 다른 통치이성이 출현했다. “통치는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는 것이다.” 도시의 예를 든다면, ‘도시는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토가 통치의 대상이 되는가의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룬다.) 대도시는 이러한 조절, 관리의 문제가 가장 지배적인 장이다. 대도시는 계획인구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인구가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대도시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학에서 제공하는 지식에 따라, 지대, 생산성 등의 지표들에 따라 끊임없이 반응해야만 한다.

 

치안장치가 두드러지는 대도시의 통치실천들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우선, 대도시의 계보학이 필요하다. 고대부터 거대도시들은 있었지만, 현재 우리가 메트로폴리스라 불리는 대도시는 어떻게 출현했는가? 누가 만들었는가? 등등의 질문이 뒤따를 것이다. 만일 소련의 모스코바라면 인구를 재배치시키고자 하는 국가기구들을 분석해야 할 것이고, 아나톨 콥(Anatole Kopp)의 ‘혁명도시’가 바로 그런 접근방법을 취한다. 반면 자본주의 도시라면 자본주의가 대도시를 만든 방식들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관계들을 볼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대도시가 인구를 흡입하고 난 후에야 통치이성이 작동하여, “어떻게 이 많은 도시인구를 통치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대도시 주변의 공장에 노동자들이 정착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고, 이때부터 도시의 폭동은 계급투쟁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도시인구를 통치하는가’의 질문 이전에 ‘도시인구들이 왜 정착하게 되었는가’가 앞서 제기되어야 한다. 과잉도시화가 사회의 병폐라고 언급되다가 이후 대도시가 생산기지라고 찬양되는 것에서 보듯이, 대도시라는 장치가 작동하는 효과들이 존재한다.

두 번째로, 통치 대상으로서의 ‘인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18세기 이후 통치이성이 출현하게 된 근본적인 토대는 국민국가의 안정된 영토설정이었다. 국민국가간의 외부적 안정성과 내부적 경찰국가화, 이를 통한 인구의 등록 및 생산자원화는 국가자본주의가 기능할 수 있었던 핵심이었다. 반면 대도시는 안정된 ‘인구’를 확보하지 못한다. 따라서 대도시의 통치실천들은 국민국가 영토에서 기능하는 통치실천들과는 다르다. 바로 이 점에서 세계화 이후 국가는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된다고 논의된다. 즉, 대도시의 통치는 국민국가의 통치실천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대도시권, 크고 작은 자치정부들로 구성된 대도시권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 장치’로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에 타국적자의 노동이 결합되는 대도시의 기능들이 증가하는 이유, 또 그로인해 국민국가의 통치실천이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 또한 주요 이슈들이다.

 

세 번째로, 자유로운 인적 물적 순환 그자체로 대도시 인구는 끊임없이 정상화과정을 겪음에도 ‘사회 질서’가 유지되는 방식들을 보아야 한다. 익명의 도시이지만 이 속에서, 가족과 이웃들, 더 나아가 여러 사회집단들이 통치비용을 낮추는 효과를 담당하는 ‘시민사회’를 만드는 방식은 사회학의 원초적인 질문이었다. “농촌과 다른 방식으로 도시의 사회가 기능하는 양상들은 무엇인가?” 푸코의 질문을 여기에 추가한다면 권력의 장치로서의 시민사회의 계보학이다. 아파트 단지, 교육시스템, 할인점, 자동차도로, 등등 대도시 장치를 분석하지 않으면 ‘재래시장 살리기’ 혹은 ‘재건축 반대운동’과 같은 것들은 결코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 내의 ‘4인 가족 이데올로기’는 이 장치의 한 요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또한 기존의 국가-시민사회의 대항을 설정하는 것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자본의 딱지를 붙은 아파트 단지, 삼성아파트, 여기에 국가 주도의 반상회, 이들이 거부하는 자본가 기업들과 재산증식이 될 수 있는 재건축 반대, 또 소각장 반대와 같은 국가정책에 대한 반대운동, 등등.

 

마지막으로, 대도시를 자연적인 것으로, 그 자연성을 설정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권력-지식들을 살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의 큰 주제 중 하나가 개인의 욕망이 모여 어떻게 자본의 이익이라는 ‘공익’으로 수렴되는가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를 자본-국가-개인-사회라는 네 가지 차원으로 설명한다. 정치경제학이 개인-자본-국가를 연결한다면 사회학은 개인-사회-국가를 담당했다. 정치경제학은 시장이라는 ‘진실체제’를 통해 상품의 가격 조절, 상품의 분배 양태를 정당화시켰다면, 사회학은 ‘시민사회’라는 ‘상식-문화’를 통해 개인의 행동들을 조절했다. 대도시에서는 ‘도시학’이라 부를 수 있는 지식체가 존재하며, 이들은 대도시인구를 통치하는 이성이 끊임없이 참조해야 하는 지식망들을 생산한다. 이 지식망들이 ‘삶의 질’, ‘도시경쟁력’, 등등 지금 현재의 모습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를 파악하고 통치실천들이 개입해야 하는 지점을 알려준다.

 

앞선 대도시의 문제설정을 서울에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다.

 

1) 대도시화: 서울에 인구가 정착하는 과정들에 대한 연구. 농촌인구의 정착, 이주노동자, 등.

2) 인구: 유동적 인구를 통치하는 방식. 수도권에 거주하는 서울 노동인구를 통치하는 장치들. 광역지하철, 지방자치단체선거, 거버넌스, 등등.

3) 사회운동: 주택단지 내에서의 공동체 형성. 전통적이고 친밀한 공동체가 아니라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이를 기능하게 만드는 공동체들. 만일 광우병 반대운동을 거부한 정부는 시민사회를 통한 통치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부당한’통치가 아니라 ‘실패한 통치’가 된다. 따라서 자유주의 통치이성에 대한 비판이 없는 정부에 대한 비판은 자유주의 통치를 강화할 수 있다.

4) 지식: 서울을 연구하는 학문들, 이들이 생산하는 지식들과 통치성간의 관계. 정부가 통치행위를 하지 않음에도 재조정되는 인구들을 뒷받침하는 지식들.

 

 

4. 남겨진 질문들

 

■ 인구와 계급: 통치성의 대상은 ‘인구/사물’이다. 여기에는 인구와 사물은 별 차이를 갖지 않는다. 이를 설명하며 푸코는 맑스의 ‘계급’은 인구가 형성되는 당시의 권력관계를 ‘계급’으로 치환해버렸다고 비판한다. 이를 더 연장하면 인구는 통치이성의 대상으로, 계급은 그 통치실천의 한 양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구가 계급으로 형성되는 과정은 푸코의 통치성 논의에서 주변부에 위치한다.

 

■ 자본과 통치성: 반면 통치이성의 출현은 ‘생산체제’라는 물적 토대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통치이성은 철저히 자본의 계보학과 연결되어 있다. 푸코는 이를 설명하며 통치는 결코 경제에 종속된 것도 아니고 경제를 종속하는 것도 아닌, 경제와 병렬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본과 계급, 그 이전에 자본-통치성-인구라는 계열이 제시된다. 계급은 인구를 통치하는 시민사회의 한 양상인가?

 

■ 국가와 인구: 국가의 위기, 국가주도 발전, 등등 국민국가 담론의 토대는 인구의 포획/기입이다. 통치성 개념에 따르면 국가는 자본주의 발전의 부침 속에서 최종적으로 인구를 포획하게 된다. 즉, 자본의 위기 시 국가자본주의로의 전환을 통해 과잉인구를 흡수하기도, 전쟁을 통해 제거하기도 하는 등, 자본축적을 인구의 측면에서 뒷받침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현재 유럽 연합에서의 국가 위기 담론도 더 이상 국가가 자본의 위기시 인구를 안정적으로 포획하지 못하는 상황(노동력의 자유로운 월경이 자본축적을 방해하는 상황)이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유럽이 하나의 국가가 되는 방식, 이로 인한 인구의 새로운 정착이다.

 

■ 대도시와 장치: 통치화된 국가가 존재하듯이 통치화된 대도시정부 또한 존재하는가? 혹은 대도시는 통치실천의 한 장치인가? 이는 대도시가 있기에 가능한 통치효과들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공업도시의 경우 존재하는 통치효과, 실리콘 밸리의 통치효과는 밝히기 용이한 반면, 세계 수위도시들 이외의 대도시들의 효과는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 국가 내 중소도시가 망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세계적 차원에서의 대도시들이 망하는 것을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면 적절한 규모로 감소하는 대도시들 간의 위계화가 가진 효과는 무엇인가?

 

■ 통치성과 사회운동: 앞서 광우병 반대를 언급했듯이 푸코에게 ‘시민사회’는 기본적으로 반동이다. 사회운동은 정치경제학이 물가 폭등과 같은 ‘비정상’ 신호를 내보내는 것과 같이 정치적 지지기반의 ‘비정상’ 신호를 표출하는 ‘진리체제’이다. 정치경제학이 지식을 동원해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듯이 ‘시민사회’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비정상적인 것들의 정상화라는 지식-권력이 시민사회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또한 시민사회와 사회운동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푸코 자신도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했듯이 통치이성을 전복하는 운동의 방식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새로운 통치: 푸코 말기에 집착했던 ‘자기로부터의 통치’. 자유주의 통치이성의 비판에서 더 나아가 푸코가 주장하는 통치방식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진리’라는 테제를 통해 이를 주장했고, 뒤이어 그리스 철학에서 이를 찾아보고자 했지만 현실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덧붙여 계보학적인 접근방법이 가진 효용과 한계를 논할 필요가 있다. 자본의 계보학을 연구한다는 것이 앞으로의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 통치하다 - gouverner / 통치술 art de gouverner

• 통치가능한 - gouvernable

• 통치 - gouvernement / (a) gouvernemental

• 통치성 - gouvernementalité

• 통치화하다/되다 - gouvernementaliser /gouvernementalis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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