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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사는 문제에 대한 단상 : 존엄사와 푸제온 강제실시 불허 판결

지난달 23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국내 최초로 존엄사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존엄사가 시행된 지 10여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모 할머니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로 인해 김모 할머니의 존엄사는 의학적 법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외부적 소생기술의 도움 없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학적 판단이 존엄사 시행의 중요한 법적 근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논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존엄사가 시행될 때, 인공적 소생기술이 제거된다 해도 심장박동이 멈추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미 외국에서는 인공적 소생기술이 제거된 이후에 길게는 10여년을 넘게 스스로 생명을 유지한 사례들이 수차례 보고 된 바 있다.

  

문제는 존엄사 자체가 실질적 죽음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현대 정치에서 중요한 어떤 지점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서둘러 이야기하자면 존엄사라는 개념은 생명을 가진 주체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 생명의 죽음을 타자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타자란 법적 절차에 따라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주권의 차원을 말한다.

  

법은 체계화된 의학적 지식에 준거하여 생명을 유지할 것인지 말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문제는 의학적 지식이 (과학적 객관적 진리처럼 여겨지지만) 죽음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혼수상태(코마)는 보통 ① 의식, 운동성, 감각과 같은 외부적 관계기능의 상실 ② 호흡, 혈액순환, 체온 조절과 같은 식물 상태의 생명 기능들의 중단 ③ 관계 기능들이 잔여된 각성코마 그리고 ④ 인공호흡이나 아드레날린 정맥 주사를 통한 심장 혈액 순환의 유지, 체온 조절 기술과 같은 새로운 소생기술이 중단되면 생명이 멈추는 심층코마로 분류된다고 한다.

  

여기서 네 번째로 언급된 심층코마는 1950년대 이후에 의학계에 도입된 개념으로, 심장박동의 중단과 호흡기능의 정지라는 (의학 기술의 발달 이전까지 죽음의 기준이 된) 사망 판단의 기준을 무효화 시킨다. 기존의 죽음에 이르는 신체 상태가 의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자인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이것이 단지 소생기술의 과학적 문제가 아닌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는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해짐에 따라 1968년 하버드 의과대학의 특별위원회는 뇌사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하게 되는데, 이 보고서에는 “회복 불가능한 코마를 새로운 사망 기준으로 정의”하는 것이 자신들의 “일차 목표”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뇌사는 지금까지 거의 유일한 사망판단의 기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뇌는 이식할 수 없는 유일한 장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망 판단의 기준은 죽음을 명확히 하기보다는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뇌사와 심장박동의 중단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뿐아니라, 의학 기술의 발달을 통한 뇌 이식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존엄사는 법적 판단에 기반한 권력과 그것의 준거가 되는 의학적 지식의 결합을 통해 형성되는 정치적 장의 문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논쟁거리가 된다. 특히 생명과 죽음에 대한 문제들이 의학적 지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현대 정치의 핵심에 기입되어 있다는 점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푸코(Michel Foucault)가 끊임없이 주장해 왔던 바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의 정치는 생명에 대한 관리에 기반하고 있다. 과거의 권력이 생명의 단축(죽음, 즉 생명에 대한 위협)에 기반하고 있다면, 현대의 권력은 생명의 연장(생명에 대한 관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건의학이나 사회보장제도, 도시환경 정비 등이 독특하게 현대적인 현상이라는 점은 권력의 통치 기술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생명에 대한 위협이 아닌 관리에 기반한 정치가 생명에 대한 지식을 필연적으로 요청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 좀 더 나아가 21세기 생명과학이 지닌 정치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과학이 지닌 정치성을 아직 이해할 수 없다면, 몇 년 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황우석 사태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것은 과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었다. 거기에는 의학적 발견에 대한 희구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언어들, 즉 국부, 국위선양, 출산율, 희생, 믿음, 여성, 교육과 같은 정치적 언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허는 로슈에게 무엇을 주었나?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의약품이다. 의약품을 통해 유지 및 관리되는 것은 특정한 신체 상태만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 자체를 관리하거나 연장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의약품은 의사의 처방전과 약국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구입할 수 있는 보통의 상품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특수한 과정을 거쳐 사람들에게 제공된다.

  

에이즈 치료제인 푸제온은 의약품의 생산 및 유통 과정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푸제온은 감염인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의약품이다. 그러나 이 의약품은 아직 우리나라에 공급되지 않고 있다. 푸제온을 만든 초국적 제약회사인 로슈(Roche)가 이 의약품에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책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슈에서 제시한 약가는 연간 2200만원에 이른다.)

  

이에 로슈의 횡포에 반기를 든 국내 의약품 운동 단체들은 지난해 12월 국가를 상대로 강제실시를 청구했다. 강제실시는 제약회사가 공급하지 않는 의약품을 환자들을 위해 강제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이다. 그러나 특허청은 2주전 강제실시 불허 판정을 내렸다. 현대 정치의 핵심에 자리잡은 생명과 지식이라는 관점에서, 이번 판결은 최소한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의 독점이다.

  

   

 

지난해 12월 시민단체들에 의해 강제실시가 청구되자, 지난 몇 년간 약가 협상에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던 로슈가 갑자기 푸제온을 무상공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로슈는 정상공급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때까지 푸제온을 무상공급하겠다고 먼저 제안해 온 것이다. 단편적으로 보면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나온 조처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상공급을 할 수 있을 때까지라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는 점과 제안이 나온 시점이 강제실시 청구가 들어간 직후라는 점, 그리고 자신들의 인도주의적 조치에 대한 아무런 언론 홍보를 하지 않았다는 점 등의 정황을 놓고 본다면, 로슈의 제안이 강제실시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을 쉽게 유추해 낼 수 있다. 로슈는 푸제온을 무상공급하면서까지 환자에 대한 의약품 통제권을 가지려 했던 것이다. 요컨대 로슈는 환자의 생명권을 환자로부터 박탈하고, 타인의 생명을 통제할 권리를 자신들에게 귀속시킴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사례를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태국정부가 글리벡에 대해 강제실시를 발동하자 초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는 연간 소득 5천만원 이하의 태국민에게 글리벡을 무상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바티스 역시 무상공급이라는 카드를 꺼내어 강제실시를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생명에 대한 관리를 자신들의 권력의 기반으로 삼기 위해서는 특허제도를 매개로 의약품 개발과 관련된 지식을 독점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 사실 푸제온은 로슈 자체의 연구 개발을 토대로 만들어진 의약품이 아니다. 푸제온과 관련된 기술의 최초 개발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지원을 받은 듀크대의 연구팀에 의해 이루어졌다. 듀크대 연구팀은 레이건 정부 시절 미 상원을 통과한 베이-돌 법(Bayh-Dole Law, 이 법은 공적 자금이 투여된 성과물을 사유화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에 의거해 바이오 기업인 트리메리스(Trimeris)를 설립하고 푸제온 관련 기술에 특허를 출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거대 제약회사인 로슈와의 계약을 통해 특허 기술을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남겼다. 로슈가 연구개발에 기여한 것은 2002년 7월에 발표된 제3상 임상시험-임상시험은 전임상, 제1상, 제2상, 제3상으로 이뤄진다-을 지원한 것이 전부였다. 다시 말해 푸제온은 공적 자금을 투여해 개발된 지식을 사유화하고, 다른 사람들의 지식에 대한 접근을 차단함으로써 로슈에게 독점적 권리를 안겨준 의약품인 것이다.

  

이처럼 현대의 권력은 ‘생명에 대한 관리’와 그것의 기반이 되는 ‘지식에 대한 정치적 방향성을 부여하는(혹은 은폐하는) 담론 투쟁’ 속에서 형성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행위의 규범이 되는 특정 지식을 부여함으로써 개인들을 규율하고, 건강과 수명에 대한 관리를 통해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구조적 조건들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권력의 직접적인 원천인 자본이나 폭력의 수단을 획득한다. 나아가 현대의 권력은 생명과 지식을 통제함으로써 현 사회의 지배체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 그 자체를 발명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개별자들의 신체와 생명을 관리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경제적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푸제온을 둘러싼 사건들이 보여주는 것은 현대사회의 정치경제적 권력이 준거하는 지점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그것은 로슈에게 의약품 판매를 통해 직접적 이윤을 취할 수 있도록 해줌과 동시에 지식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과 타인의 생명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조건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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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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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통치성: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통해 본 대도시 - 임동근

이 글은 지난 2009년 2월 20일에 있었던 '문화/과학' 집담회에서 임동근 선생님이 발표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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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노트] 도시와 통치성: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통해 본 대도시

 

 

“통치불가능한 사회들?” 2005년 11월 푸코의 통치성 강의를 되짚어 보는 『에스프리』 잡지의 권두 제목이다. 2004년 10월 푸코의 강의록 중 『치안, 영토, 인구』와 『생정치의 탄생』의 출간으로, 그 동안 푸코의 저작에서 한발 비켜가 있던 많은 이들이 푸코의 글에 관심을 갖게 된다. 68혁명과 그 이후 전개되던 소비자본주의의 만개, 1970년대 좌파이론의 붕괴와 뒤이어 온 80년대의 신자유주의 출현, 90년대의 사회주의국가의 몰락과 2000년대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푸코의 강의는 아주 원초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우리를 통치하는 ‘이성’이 있다.” 통치이성은 17세기 이후, 근대라 불리는 현 세상을 지배하며, 다양한 ‘통치 실천들’을 행한다. 이 실천이 사용하는 것이 ‘장치들’이며, 이는 ‘기구’와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순수한” 기계이다.

 

통치이성의 메커니즘은 단순하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통치가능하게 만들기. 통치이성은 통치의 정당성 문제가 아니라 통치의 방식을 따진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으며, 오직 계산할 뿐이다’라는 테오도르 슐츠(Theodore W. Schultz)의 인간관처럼 통치이성은 ‘통치’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작동하는 ‘이성’이다. 통치실천들은 이 이성에 따라 탄생된다/현실화되고, 각각 지배적인 ‘장치’들을 사용한다. 도시정책을 예로 든다면 ‘통치가능한 도시인구’를 위한 각종 ‘실천들’이 있고, 이 실천들을 작동시키는 지배적인 ‘장치들’이 있는 셈이다.

 

 

1. ‘장치’라는 개념

 

푸코가 말하는 ‘장치’(dispositif)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성적장치, 규율장치, 치안장치, 사법장치, 또 가장 일반적으로는 권력장치라는 말을 한다. 이 개념에서의 핵심은 ‘하나의 장치는 하나의 기능을 담당하고, 이를 위해 다양한 선분들이 결합된다’는 점이다. 권력의 장치들은 저마다 맡은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 법률, 이데올로기, 물리력, 지식, 기타 등등 무한한 종류의 요소들이 결합된 기계가 된다. 예를 들어 ‘치안장치’는, 경찰의 방패나 재판관의 의자 등, 치안을 위해 사용되는 모든 요소들이다. 이는 알튀세가 말한 ‘국가기구’에서의 ‘기구’와 다르다. 물리력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국가의 ‘기구’들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푸코는 이들을 횡단하는 보다 유연한 ‘장치’들이 권력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즉, ‘국가의 기구’가 아니라 ‘권력의 장치들’이 문제가 된다.

 

『말과 사물』에서 선보인 ‘에피스테메’라는 개념 또한 넓은 의미의 ‘장치’가 되고, 『감시와 처벌』의 규율 또한 ‘장치’의 일종이 된다. 푸코는 1976~78년 강의에서 세 종류의 ‘장치’를 설명한다. 사법, 규율, 치안. 각각의 장치들을 범주화하는 기준은 ‘현실’이다. 사법은 현실에 없는 것을 상상해서 처벌규정을 만들고, 규율은 현실에서 부족한 부분을 완성시키고자 하며, 치안은 현실이 있어야만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이 때 권력의 실천들이 이 장치들을 사용하는 기준은 ‘경제성’이다. 흔히 ‘권력의 일반 경제학’이라 불리는 푸코의 이 전제, 이를 통해 우리는 통치는 언제나 ‘통치비용’을 고려하며, 잘못된 통치 실천에 따른 초과 비용이 권력관계들을 뒤집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장치’ 개념은 현실 속에서 모호하다. 예를 들어 도시의 건축행위를 제한하는 법들과 실천들을 장치를 통해 해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학교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고 말하며,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들이 은폐된 권력 통치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받아들이기는 쉽다. 그러나 푸코의 장치로 학교를 설명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는 규율장치인가 아니면 치안장치인가? 푸코의 답은 학교라는 시설 혹은 제도에서 장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장치개념의 한 요소로서 학교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시설 혹은 제도에서 권력을 분석하고자 한다면, 더 나아가 이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제도의 틀을 만든 또 다른 지식-권력 안에 갇힌다. 학교가 교육기관인 것만도 아니고, 교육기관에 학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이들을 지지하는 지식은 이들 외부에서 결정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접근방식으로 인해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다른 이가 사용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어 통치실천들을 말하면서도 자신은 정부의 통치실천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푸코는 통치성을 설명하며 다양한 현실의 제도를 이야기하지만, 현실의 제도를 설명하기 위해 푸코의 통치성을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설정이다. 푸코의 전작에서 나타나는 이 난점 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푸코를 재미있게 읽지만 정작 푸코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지리학 또한 예외가 아닌데, 결국 푸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짝사랑’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리학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주권-영토, 규율-공간, 치안-환경, 푸코가 장치를 설명할 때 시도한 이 세 가지 연결을 발견한다. 주권은 영토의 위계를 생산하고 이를 토대로 주권을 뒷받침해주는 자본을 순환시킨다. 규율은 기능에 따라 공간을 건축하며, 이로 인해 차별화된 공간들이 생산된다. 치안은 다양한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을 조절하며 환경을 관리한다. 푸코는 우리가 사는 공간을 각각의 장치에 조응하는 세 개념, 영토, 공간, 환경을 설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영토의 기의는 권력장치라는 기표를 초월한다는 점, 즉 영토 속에는 사법장치, 규율장치, 치안장치 등이 혼재하며, 영토 또한 치안장치에 의해 통치화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장치들과 공간들을 조합하여 현재의 통치 실천들을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2. 계보학

 

1972년 CERFI의 토론에서 푸코는 ‘집합시설’ 프로젝트 제안서를 읽고 다음과 같은 계보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첫째, 집합시설의 전유와 소유는 다르다. 누구의 소유인가?

둘째, 집합시설의 기능은 누군가에게 서비스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왜? 사용하는 이들은 왜?

셋째, 집합시설은 생산적인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무슨 유형의 생산?

넷째, 집합시설의 존재와 기능을 뒷받침하는 권력관계는?

다섯째, 계보학적인 함의. 이로부터 어떻게 특정 효과들이 달라지기 시작하는가? 이미 있던 다리, 제분소 등 여러 시설들이 집합시설로 변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통치 실천들은 이들이 맡은 기능을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다. 도시계획을 분석하고자 할 때 도시계획에 현재 담당하는 기능들, 전체 도시체계에서 수행하는 역할들을 본다면, 우리는 이미 담당하도록 구획된 틀 안에서의 타당성, 실효성 검사만을 반복할 뿐이다. “탄생은 기능으로 환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도시계획을 만들고, 이를 따르게 억압하고, 또 이를 기꺼이 따르도록 만드는 힘들이다. 바로 이 지점이 ‘장치’가 개입하는 순간이다. 통치실천들, 특정 제도나 기구들의 탄생은 권력 장치의 (구성)변화를 의미한다. 학교라는 시설 혹은 의무교육제도 등을 보기 위해서는 그 탄생의 시점에서 달라진 장치들을 추적해야 한다. 들뢰즈는 이를 ‘현실화’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한때 유행했던 ‘탄생’, ‘발명’ 시리즈의 책들을 떠올려보자.)

 

계보학적인 접근이 가진 매력은 연구의 출발 시점 그 이전에 이미 연구의 목적이 되는 ‘의도’가 먼저 자리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막연히 제도의 탄생을 훑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탄생을 야기한 그 ‘무엇’에 대한 동인이 우선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도시 속의 통치실천들을 분석하고자 한다면, 그 출발 이전에 그것이 ‘자본주의 분석’이 되었든 아니면 ‘자유주의 분석’이 되었든, 각 실천들의 영역을 초월하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자본의 탄생을 보는 것은 ‘자본’의 외부를 보고자 함이며, 도시의 탄생을 보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때 이중의 이질적 결합이 상정된다. 실천들은 이질적인 장치를 가지고, 각각의 장치 내부 또한 이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푸코의 접근방법 때문에 통치성 개념을 ‘제도 및 시설 연구’로 한정할 때면 어려움에 처한다. 푸코의 권력 분석이라는 큰 틀에서 나타나는 ‘장치들’, 이를 사용하는 실천들은 외부와 연결을 잃어버리는 순간 실천과 장치들의 스틸사진만을 나열하는 일종의 표로 전락해버린다.

 

 

3. 대도시의 문제설정

 

푸코가 치안장치 개념을 고안한 것은 도시 인구의 통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18세기 이후 도시, 혹은 영토를 사유할 때의 강박관념은 인구와 재화의 ‘순환’이었다. 이 때 푸코의 관점에서 이동하는 인구를 통치함에 있어서 규율 메커니즘은 효율성이 떨어진다. 즉,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의 통치술과는 전혀 다른 통치이성이 출현했다. “통치는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는 것이다.” 도시의 예를 든다면, ‘도시는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토가 통치의 대상이 되는가의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룬다.) 대도시는 이러한 조절, 관리의 문제가 가장 지배적인 장이다. 대도시는 계획인구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인구가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대도시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학에서 제공하는 지식에 따라, 지대, 생산성 등의 지표들에 따라 끊임없이 반응해야만 한다.

 

치안장치가 두드러지는 대도시의 통치실천들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우선, 대도시의 계보학이 필요하다. 고대부터 거대도시들은 있었지만, 현재 우리가 메트로폴리스라 불리는 대도시는 어떻게 출현했는가? 누가 만들었는가? 등등의 질문이 뒤따를 것이다. 만일 소련의 모스코바라면 인구를 재배치시키고자 하는 국가기구들을 분석해야 할 것이고, 아나톨 콥(Anatole Kopp)의 ‘혁명도시’가 바로 그런 접근방법을 취한다. 반면 자본주의 도시라면 자본주의가 대도시를 만든 방식들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관계들을 볼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대도시가 인구를 흡입하고 난 후에야 통치이성이 작동하여, “어떻게 이 많은 도시인구를 통치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대도시 주변의 공장에 노동자들이 정착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고, 이때부터 도시의 폭동은 계급투쟁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도시인구를 통치하는가’의 질문 이전에 ‘도시인구들이 왜 정착하게 되었는가’가 앞서 제기되어야 한다. 과잉도시화가 사회의 병폐라고 언급되다가 이후 대도시가 생산기지라고 찬양되는 것에서 보듯이, 대도시라는 장치가 작동하는 효과들이 존재한다.

두 번째로, 통치 대상으로서의 ‘인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18세기 이후 통치이성이 출현하게 된 근본적인 토대는 국민국가의 안정된 영토설정이었다. 국민국가간의 외부적 안정성과 내부적 경찰국가화, 이를 통한 인구의 등록 및 생산자원화는 국가자본주의가 기능할 수 있었던 핵심이었다. 반면 대도시는 안정된 ‘인구’를 확보하지 못한다. 따라서 대도시의 통치실천들은 국민국가 영토에서 기능하는 통치실천들과는 다르다. 바로 이 점에서 세계화 이후 국가는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된다고 논의된다. 즉, 대도시의 통치는 국민국가의 통치실천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대도시권, 크고 작은 자치정부들로 구성된 대도시권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 장치’로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에 타국적자의 노동이 결합되는 대도시의 기능들이 증가하는 이유, 또 그로인해 국민국가의 통치실천이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 또한 주요 이슈들이다.

 

세 번째로, 자유로운 인적 물적 순환 그자체로 대도시 인구는 끊임없이 정상화과정을 겪음에도 ‘사회 질서’가 유지되는 방식들을 보아야 한다. 익명의 도시이지만 이 속에서, 가족과 이웃들, 더 나아가 여러 사회집단들이 통치비용을 낮추는 효과를 담당하는 ‘시민사회’를 만드는 방식은 사회학의 원초적인 질문이었다. “농촌과 다른 방식으로 도시의 사회가 기능하는 양상들은 무엇인가?” 푸코의 질문을 여기에 추가한다면 권력의 장치로서의 시민사회의 계보학이다. 아파트 단지, 교육시스템, 할인점, 자동차도로, 등등 대도시 장치를 분석하지 않으면 ‘재래시장 살리기’ 혹은 ‘재건축 반대운동’과 같은 것들은 결코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 내의 ‘4인 가족 이데올로기’는 이 장치의 한 요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또한 기존의 국가-시민사회의 대항을 설정하는 것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자본의 딱지를 붙은 아파트 단지, 삼성아파트, 여기에 국가 주도의 반상회, 이들이 거부하는 자본가 기업들과 재산증식이 될 수 있는 재건축 반대, 또 소각장 반대와 같은 국가정책에 대한 반대운동, 등등.

 

마지막으로, 대도시를 자연적인 것으로, 그 자연성을 설정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권력-지식들을 살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의 큰 주제 중 하나가 개인의 욕망이 모여 어떻게 자본의 이익이라는 ‘공익’으로 수렴되는가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를 자본-국가-개인-사회라는 네 가지 차원으로 설명한다. 정치경제학이 개인-자본-국가를 연결한다면 사회학은 개인-사회-국가를 담당했다. 정치경제학은 시장이라는 ‘진실체제’를 통해 상품의 가격 조절, 상품의 분배 양태를 정당화시켰다면, 사회학은 ‘시민사회’라는 ‘상식-문화’를 통해 개인의 행동들을 조절했다. 대도시에서는 ‘도시학’이라 부를 수 있는 지식체가 존재하며, 이들은 대도시인구를 통치하는 이성이 끊임없이 참조해야 하는 지식망들을 생산한다. 이 지식망들이 ‘삶의 질’, ‘도시경쟁력’, 등등 지금 현재의 모습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를 파악하고 통치실천들이 개입해야 하는 지점을 알려준다.

 

앞선 대도시의 문제설정을 서울에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다.

 

1) 대도시화: 서울에 인구가 정착하는 과정들에 대한 연구. 농촌인구의 정착, 이주노동자, 등.

2) 인구: 유동적 인구를 통치하는 방식. 수도권에 거주하는 서울 노동인구를 통치하는 장치들. 광역지하철, 지방자치단체선거, 거버넌스, 등등.

3) 사회운동: 주택단지 내에서의 공동체 형성. 전통적이고 친밀한 공동체가 아니라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이를 기능하게 만드는 공동체들. 만일 광우병 반대운동을 거부한 정부는 시민사회를 통한 통치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부당한’통치가 아니라 ‘실패한 통치’가 된다. 따라서 자유주의 통치이성에 대한 비판이 없는 정부에 대한 비판은 자유주의 통치를 강화할 수 있다.

4) 지식: 서울을 연구하는 학문들, 이들이 생산하는 지식들과 통치성간의 관계. 정부가 통치행위를 하지 않음에도 재조정되는 인구들을 뒷받침하는 지식들.

 

 

4. 남겨진 질문들

 

■ 인구와 계급: 통치성의 대상은 ‘인구/사물’이다. 여기에는 인구와 사물은 별 차이를 갖지 않는다. 이를 설명하며 푸코는 맑스의 ‘계급’은 인구가 형성되는 당시의 권력관계를 ‘계급’으로 치환해버렸다고 비판한다. 이를 더 연장하면 인구는 통치이성의 대상으로, 계급은 그 통치실천의 한 양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구가 계급으로 형성되는 과정은 푸코의 통치성 논의에서 주변부에 위치한다.

 

■ 자본과 통치성: 반면 통치이성의 출현은 ‘생산체제’라는 물적 토대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통치이성은 철저히 자본의 계보학과 연결되어 있다. 푸코는 이를 설명하며 통치는 결코 경제에 종속된 것도 아니고 경제를 종속하는 것도 아닌, 경제와 병렬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본과 계급, 그 이전에 자본-통치성-인구라는 계열이 제시된다. 계급은 인구를 통치하는 시민사회의 한 양상인가?

 

■ 국가와 인구: 국가의 위기, 국가주도 발전, 등등 국민국가 담론의 토대는 인구의 포획/기입이다. 통치성 개념에 따르면 국가는 자본주의 발전의 부침 속에서 최종적으로 인구를 포획하게 된다. 즉, 자본의 위기 시 국가자본주의로의 전환을 통해 과잉인구를 흡수하기도, 전쟁을 통해 제거하기도 하는 등, 자본축적을 인구의 측면에서 뒷받침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현재 유럽 연합에서의 국가 위기 담론도 더 이상 국가가 자본의 위기시 인구를 안정적으로 포획하지 못하는 상황(노동력의 자유로운 월경이 자본축적을 방해하는 상황)이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유럽이 하나의 국가가 되는 방식, 이로 인한 인구의 새로운 정착이다.

 

■ 대도시와 장치: 통치화된 국가가 존재하듯이 통치화된 대도시정부 또한 존재하는가? 혹은 대도시는 통치실천의 한 장치인가? 이는 대도시가 있기에 가능한 통치효과들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공업도시의 경우 존재하는 통치효과, 실리콘 밸리의 통치효과는 밝히기 용이한 반면, 세계 수위도시들 이외의 대도시들의 효과는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 국가 내 중소도시가 망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세계적 차원에서의 대도시들이 망하는 것을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면 적절한 규모로 감소하는 대도시들 간의 위계화가 가진 효과는 무엇인가?

 

■ 통치성과 사회운동: 앞서 광우병 반대를 언급했듯이 푸코에게 ‘시민사회’는 기본적으로 반동이다. 사회운동은 정치경제학이 물가 폭등과 같은 ‘비정상’ 신호를 내보내는 것과 같이 정치적 지지기반의 ‘비정상’ 신호를 표출하는 ‘진리체제’이다. 정치경제학이 지식을 동원해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듯이 ‘시민사회’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비정상적인 것들의 정상화라는 지식-권력이 시민사회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또한 시민사회와 사회운동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푸코 자신도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했듯이 통치이성을 전복하는 운동의 방식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새로운 통치: 푸코 말기에 집착했던 ‘자기로부터의 통치’. 자유주의 통치이성의 비판에서 더 나아가 푸코가 주장하는 통치방식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진리’라는 테제를 통해 이를 주장했고, 뒤이어 그리스 철학에서 이를 찾아보고자 했지만 현실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덧붙여 계보학적인 접근방법이 가진 효용과 한계를 논할 필요가 있다. 자본의 계보학을 연구한다는 것이 앞으로의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 통치하다 - gouverner / 통치술 art de gouverner

• 통치가능한 - gouvernable

• 통치 - gouvernement / (a) gouvernemental

• 통치성 - gouvernementalité

• 통치화하다/되다 - gouvernementaliser /gouvernementalis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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