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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이 떳다 : 정치적 스캔들을 넘어 해적들의 정당으로

해적이 떳다 : 정치적 스캔들을 넘어 해적들의 정당으로

 

해적이 떳다. 만화 <원피스> 이야기는 아니다. 뭐 굳이 따지자면 아주 아닌 것도 아니다. 해적이 한 나라의 국경에 얽매이지 않고, 때문에 한 국가나 정치 단체를 통해 강제된 법적 구속으로부터 탈주하려 한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해적과 <원피스>의 해적은 다르지 않다. 다만 사적 목적을 위해 타인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가 아닌가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금 내가 이야기 하려는 해적은 정보와 지식 그리고 문화 생산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활용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런 해적들이 모여 정당을 만들었다. 소위 말하는 해적당이 그것이다. 오는 17일 유럽의회 의원인 아멜리아 앤더스도터가 한국에 찾아온다. 그녀는 스웨덴 해적당의 일원이다. 그녀는 거칠게 이야기 하자면 몽키 D. 루피 보다는 몽키 D. 드래곤에 가까운 해적이다(물론 세계정부의 입장에서는 루피 같은 해적이나 드래곤같은 혁명가 모두 골치 아픈 해적일 뿐이겠지만). 법적 구속력에서 벗어나 지식과 정보의 자유를 갈구하는 이들을 위해 기존 법적 체계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역사적으로 해적은 현실 정치의 실패 지점에서 난무해 왔다. 일부의 해적들은 엄청난 사적 부를 축적하고 잔학한 살인, 강간, 방화, 약탈을 일삼았었다. 그러나 다른 부류의 해적들은 정치적 억압이나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로 인한 위협으로부터 탈피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요컨대 그들은 생존을 위해 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정치에서 정의가 사라지는 때가 되면 그에 비례해 해적들도 늘어났다. 정보와 지식이 점점 중요한 사회적 자원이 되고 있는 시점에서 해적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그런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는 테크놀로지가 급속히 발전해 가는 상황에서 그에 부합하는 정당한 규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적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지금 상황에서 정보나 문화 생산물을 공유하는 대부분의 해적들은 자신들이 해적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거나, 설사 안다고 할지라도 해적질을 중단할 수 없다. 자신들의 행동이 지극히 정당한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해적으로 호명하는 것은 악소조항이 가득한 저작권과 특허에 관한 법률들이다.

 

해적당은 이런 문제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해적당은 스웨덴에서 출현했다. 2006년 미국 정부와 거대 영화 기업의 사주 아래 스웨덴 정부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인터넷 파일 공유 업체인 ‘파이럿베이(www.thepiratebay.org)’를 탄압했고,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를 계기로 스웨덴에서는 저작권 침해를 의미하는 ‘해적’의 이름을 전면에 내건 정당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해적당은 마침내 200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7퍼센트가 넘는 득표를 기록하며 2명의 유럽의회 의원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번에 방한하는 안더스도터는 이 때 비례대표로 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해적당은 다른 나라에도 급속히 퍼져나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현재 20여 개 국가에 해적당이 있으며, 준비중인 나라까지 포함하면 40개가 넘는 국가가 해적당과 관련을 맺고 있다. 올해 4월에는 해적당 국제 모임이 개최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해적당 인터내셔널까지 만들어졌다.

 

해적당은 현재 저작권이나 특허 문제와 함께 프라이버시 침해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고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면서 발생하는 문제가 해적당이 다루고 있는 주요 정치적 이슈인 것이다. 정확히 이야기 하면 해적당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인터넷 자체가 발생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나 특정 정치 세력이 인터넷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때문에 그것들은 테크놀로지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치의 문제가 된다. 정치적 강제로부터 탈주하려던 해적들이 정당을 만든 것은 아이러니한 것이지만, 현실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그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해적당 이전에도 저작권이나 특허, 프라이버시 등과 관련된 운동의 여러 흐름들이 있어왔다. 해적당이 흥미로운 지점은 그 문제를 직접적인 (정당)정치 운동으로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근대 국가에서 정보 통제와 민중 감시는 국가 형성과 존립의 근본적 조건이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정보 통제와 민중 감시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는 지극히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을 둘러싼 문제는 정치적인 성격의 문제로 접근되어야할 필요성을 가진다. 해적당의 정치 운동이 의의를 가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 스웨덴 출신의 요한 소더버그는 해적당의 급속한 의회 진출의 배경을 파이럿베이에 대한 탄압과 함께 군사감시법안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를 들고 있다. 이 법안은 스웨덴군사정보국(우리나라의 국정원에 해당)에서 기존의 감시 대상인 전파통신과 함께 인터넷 트래픽까지 감시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다.

 

이런 맥락에서 해적당의 활동은 보다 적극적인 정치적 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해적당은 스스로의 정치성을 제한하며 활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스스로를 좌파도 우파도 아닌 것으로 규정한다. 이는 해적당이 이념적 편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테지만, 현실 정치에서 실질적 힘을 발휘하는 구체적인 정치적 지향을 가지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흐름은 스웨덴 해적당의 지침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정당이긴하지만, 직접 정권을 잡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정책을 수용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한 정당이 해적당의 정책을 수용할 때, 아무 정당도 그들의 정책을 수용하지 않을 때, 그리고 두 개의 정당이 그들의 정책을 수용할 때 등 각각의 경우에 따른 지침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해적당은 좀 더 적극적이고 급진적인 정치 활동을 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내걸고 있는 몇 가지 정책안에만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이 강력하게 문제 제기 하고 있는 의약품 특허(단적으로 말하자면, 거대 독점 제약회사의 제약 특허가 가난한 나라의 의약품 공급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는 기존 정당을 지지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폐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다국적 제약회사는 결코 특허제도의 폐지나 약화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이윤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국가의 정당은 자신들의 의료제도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자본과 권력을 가진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입장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기존 정당은 해적당이 내걸고 있는 의약품 특허 제도의 폐지 정책을 결코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유독 의약품 특허가 아니더라도, 다국적 기업과 국제 협정으로 얽혀 있는 저작권 문제나 국가 안보와 연관된 프라이버시 문제도 기존 정당을 매개로는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 때문에 해적당은 기존 정당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자신들이 문제제기 하고 있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필요한 것은 보다 적극적인 정치성이지, 그 정치성의 유보가 아니다.

 

요한 소더버그는 해적당 지도부의 정치 성향을 언급한 바 있다.(소더버그의 글은 http://www.nettime.org/Lists-Archives/nettime-l-0906/msg00038.html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간략한 한글 소개는 http://hack.jinbo.net/?p=90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해적당 지도부의 핵심 인물인 릭 폴크빈지(Rick Falkvinge)와 크리스티앙 엥스트롬(Christian Engström)은 이미 자유주의 우파 정당에 관여 했던 인물들이다. 특히 당 대표인 릭 폴크빈지의 경우 스웨덴 보수 우파 정당(Moderata Ungdomsförbundet)의 청년조직 회원이었는데, 그 당이 너무 ‘사회적 자유주의’로 경도되었다는 이유로 탈퇴한 바 있다. 물론 이는 스웨덴 해적당에 한정된 이야기 이지만, 해적당이 탈정치화된 조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보다 급진적인 정치성을 획득하기 힘든 기반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 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해적당에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를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야 겠다. 해적당이 상당히 많은 국가에서 호응을 얻고 확산되고 있다는 점은 앞에서 지적했다. 그런데 그 확산 분포가 상당한 편향을 가지고 있다. 해적당은 유럽과 남미, 북미 지역에서 상당히 활성화 되고 있는 반면, 동아시아, 인도, 서남아시아,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지역에서는 해적당 활동이 거의 없다. 그나마 네팔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도에서 논의가 진행중일 뿐이다. 여러 연구들은 이 지역들이 유럽이나 북미에 비해 해적질의 규모도 크며, 정보 통제나 민중 감시 그리고 정보 기술을 활용한 프라이버시 통제가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는 좀 더 개선될 것이겠지만, 현재 보여지고 있는 해적당 활동 유무의 극단적인 지역적 차이는 해적당의 활동 네트웍이 얼마나 서구 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그들이 의약품 특허 문제를 이야기 할 때 항상 거론되는 지역(아프리카나 남아시아 지역 등)에서는 정작 해적당 활동이 전무한 상황이다. 그 지역에 저작권이나 특허와 관련된 운동을 하는 이들이나 단체가 없기 때문만도 아니고, 활동이나 운동의 정치적 탄압이 극심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거기에는 여전히 시혜의 대상과 연대의 대상을 분할하는 어떤 인식들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적당은 광범위한 대중적 분노로부터 출발했지만, 보다 급진적인 정치성의 획득으로 나아가기보다는 기존 정치 안에 안착하면서 그 힘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직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해적당이 계속 현재 상태를 답습하며,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21세기에 발생한 하나의 정치적 스캔들로 치부되며 사라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정보 통신과 관련된 운동에서 해적당 활동은 상당한 의의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 스캔들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난관이 꽤나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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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사는 문제에 대한 단상 : 존엄사와 푸제온 강제실시 불허 판결

지난달 23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국내 최초로 존엄사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존엄사가 시행된 지 10여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모 할머니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로 인해 김모 할머니의 존엄사는 의학적 법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외부적 소생기술의 도움 없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학적 판단이 존엄사 시행의 중요한 법적 근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논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존엄사가 시행될 때, 인공적 소생기술이 제거된다 해도 심장박동이 멈추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미 외국에서는 인공적 소생기술이 제거된 이후에 길게는 10여년을 넘게 스스로 생명을 유지한 사례들이 수차례 보고 된 바 있다.

  

문제는 존엄사 자체가 실질적 죽음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현대 정치에서 중요한 어떤 지점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서둘러 이야기하자면 존엄사라는 개념은 생명을 가진 주체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 생명의 죽음을 타자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타자란 법적 절차에 따라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주권의 차원을 말한다.

  

법은 체계화된 의학적 지식에 준거하여 생명을 유지할 것인지 말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문제는 의학적 지식이 (과학적 객관적 진리처럼 여겨지지만) 죽음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혼수상태(코마)는 보통 ① 의식, 운동성, 감각과 같은 외부적 관계기능의 상실 ② 호흡, 혈액순환, 체온 조절과 같은 식물 상태의 생명 기능들의 중단 ③ 관계 기능들이 잔여된 각성코마 그리고 ④ 인공호흡이나 아드레날린 정맥 주사를 통한 심장 혈액 순환의 유지, 체온 조절 기술과 같은 새로운 소생기술이 중단되면 생명이 멈추는 심층코마로 분류된다고 한다.

  

여기서 네 번째로 언급된 심층코마는 1950년대 이후에 의학계에 도입된 개념으로, 심장박동의 중단과 호흡기능의 정지라는 (의학 기술의 발달 이전까지 죽음의 기준이 된) 사망 판단의 기준을 무효화 시킨다. 기존의 죽음에 이르는 신체 상태가 의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자인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이것이 단지 소생기술의 과학적 문제가 아닌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는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해짐에 따라 1968년 하버드 의과대학의 특별위원회는 뇌사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하게 되는데, 이 보고서에는 “회복 불가능한 코마를 새로운 사망 기준으로 정의”하는 것이 자신들의 “일차 목표”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뇌사는 지금까지 거의 유일한 사망판단의 기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뇌는 이식할 수 없는 유일한 장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망 판단의 기준은 죽음을 명확히 하기보다는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뇌사와 심장박동의 중단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뿐아니라, 의학 기술의 발달을 통한 뇌 이식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존엄사는 법적 판단에 기반한 권력과 그것의 준거가 되는 의학적 지식의 결합을 통해 형성되는 정치적 장의 문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논쟁거리가 된다. 특히 생명과 죽음에 대한 문제들이 의학적 지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현대 정치의 핵심에 기입되어 있다는 점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푸코(Michel Foucault)가 끊임없이 주장해 왔던 바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의 정치는 생명에 대한 관리에 기반하고 있다. 과거의 권력이 생명의 단축(죽음, 즉 생명에 대한 위협)에 기반하고 있다면, 현대의 권력은 생명의 연장(생명에 대한 관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건의학이나 사회보장제도, 도시환경 정비 등이 독특하게 현대적인 현상이라는 점은 권력의 통치 기술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생명에 대한 위협이 아닌 관리에 기반한 정치가 생명에 대한 지식을 필연적으로 요청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 좀 더 나아가 21세기 생명과학이 지닌 정치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과학이 지닌 정치성을 아직 이해할 수 없다면, 몇 년 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황우석 사태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것은 과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었다. 거기에는 의학적 발견에 대한 희구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언어들, 즉 국부, 국위선양, 출산율, 희생, 믿음, 여성, 교육과 같은 정치적 언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허는 로슈에게 무엇을 주었나?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의약품이다. 의약품을 통해 유지 및 관리되는 것은 특정한 신체 상태만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 자체를 관리하거나 연장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의약품은 의사의 처방전과 약국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구입할 수 있는 보통의 상품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특수한 과정을 거쳐 사람들에게 제공된다.

  

에이즈 치료제인 푸제온은 의약품의 생산 및 유통 과정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푸제온은 감염인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의약품이다. 그러나 이 의약품은 아직 우리나라에 공급되지 않고 있다. 푸제온을 만든 초국적 제약회사인 로슈(Roche)가 이 의약품에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책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슈에서 제시한 약가는 연간 2200만원에 이른다.)

  

이에 로슈의 횡포에 반기를 든 국내 의약품 운동 단체들은 지난해 12월 국가를 상대로 강제실시를 청구했다. 강제실시는 제약회사가 공급하지 않는 의약품을 환자들을 위해 강제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이다. 그러나 특허청은 2주전 강제실시 불허 판정을 내렸다. 현대 정치의 핵심에 자리잡은 생명과 지식이라는 관점에서, 이번 판결은 최소한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의 독점이다.

  

   

 

지난해 12월 시민단체들에 의해 강제실시가 청구되자, 지난 몇 년간 약가 협상에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던 로슈가 갑자기 푸제온을 무상공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로슈는 정상공급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때까지 푸제온을 무상공급하겠다고 먼저 제안해 온 것이다. 단편적으로 보면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나온 조처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상공급을 할 수 있을 때까지라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는 점과 제안이 나온 시점이 강제실시 청구가 들어간 직후라는 점, 그리고 자신들의 인도주의적 조치에 대한 아무런 언론 홍보를 하지 않았다는 점 등의 정황을 놓고 본다면, 로슈의 제안이 강제실시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을 쉽게 유추해 낼 수 있다. 로슈는 푸제온을 무상공급하면서까지 환자에 대한 의약품 통제권을 가지려 했던 것이다. 요컨대 로슈는 환자의 생명권을 환자로부터 박탈하고, 타인의 생명을 통제할 권리를 자신들에게 귀속시킴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사례를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태국정부가 글리벡에 대해 강제실시를 발동하자 초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는 연간 소득 5천만원 이하의 태국민에게 글리벡을 무상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바티스 역시 무상공급이라는 카드를 꺼내어 강제실시를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생명에 대한 관리를 자신들의 권력의 기반으로 삼기 위해서는 특허제도를 매개로 의약품 개발과 관련된 지식을 독점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 사실 푸제온은 로슈 자체의 연구 개발을 토대로 만들어진 의약품이 아니다. 푸제온과 관련된 기술의 최초 개발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지원을 받은 듀크대의 연구팀에 의해 이루어졌다. 듀크대 연구팀은 레이건 정부 시절 미 상원을 통과한 베이-돌 법(Bayh-Dole Law, 이 법은 공적 자금이 투여된 성과물을 사유화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에 의거해 바이오 기업인 트리메리스(Trimeris)를 설립하고 푸제온 관련 기술에 특허를 출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거대 제약회사인 로슈와의 계약을 통해 특허 기술을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남겼다. 로슈가 연구개발에 기여한 것은 2002년 7월에 발표된 제3상 임상시험-임상시험은 전임상, 제1상, 제2상, 제3상으로 이뤄진다-을 지원한 것이 전부였다. 다시 말해 푸제온은 공적 자금을 투여해 개발된 지식을 사유화하고, 다른 사람들의 지식에 대한 접근을 차단함으로써 로슈에게 독점적 권리를 안겨준 의약품인 것이다.

  

이처럼 현대의 권력은 ‘생명에 대한 관리’와 그것의 기반이 되는 ‘지식에 대한 정치적 방향성을 부여하는(혹은 은폐하는) 담론 투쟁’ 속에서 형성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행위의 규범이 되는 특정 지식을 부여함으로써 개인들을 규율하고, 건강과 수명에 대한 관리를 통해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구조적 조건들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권력의 직접적인 원천인 자본이나 폭력의 수단을 획득한다. 나아가 현대의 권력은 생명과 지식을 통제함으로써 현 사회의 지배체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 그 자체를 발명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개별자들의 신체와 생명을 관리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경제적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푸제온을 둘러싼 사건들이 보여주는 것은 현대사회의 정치경제적 권력이 준거하는 지점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그것은 로슈에게 의약품 판매를 통해 직접적 이윤을 취할 수 있도록 해줌과 동시에 지식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과 타인의 생명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조건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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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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