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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안의 여인(Woman in Window) - 프리츠 랑(Fritz Lang)

어떤 외로운 심리학 교수가 그의 클럽 입구 옆에 있는 가게 진열창 안에 걸려 있는 요부(female fatale)의 초상화에 매혹을 느낀다. 가족들이 휴가를 즐기러 떠나고 난 뒤에 그는 클럽에서 깜박 잠든다. 점원 하나가 11시에 그를 개우자 그는 일어나 클럽을 떠나면서 여느 때처럼 그 초상화를 힐끗 쳐다본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울에 비친 거리를 지나던 거무스름한 피부의 아름다운 여인과 진열창 속의 그림이 겹쳐지면서 초상화의 여인이 살아난다. 그 여인은 교수를 유혹한다. 그리하여 교수는 그녀와 성 관계를 갖고, 그녀의 애인과 싸우다가 그를 죽이게 되며, 그 후 이 살인사건의 조사과정에 대해 경위인 친구에게서 정보를 입수한다. 이제 곧 그를 체포하러 경찰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의자에 앉아 독약을 마시려다가 그는 깜박 잠이 든다. 그 때 점원이 11시라면서 그를 깨우고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안심한 그는 거무스름한 피부의 요부가 꾸민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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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급작스런 결말을 단순히 헐리우드적 약호에 대한 타협이나 순응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다. 즉 “그건 단지 꿈이었고 현실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야! 살인자가 아니락!”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우리의 욕망의 실재에 있어 우리는 모두 살인자들이다”가 이 영화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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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수가 계속해서 (주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그의 꿈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자신의 욕망의 실재(심리적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깨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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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상태란 “그의 꿈의 의식에 불과하다”
라캉이 참조한 것 가운데 하나인 장자와 나비의 비유를 여기에다 다시 적용하자면 우리는 한 순간 살인자이기를 꿈꾸는 조용하고 친절하며 점잖은 부르주아 교수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반대로 일상생활 속에서는 그저 점잖은 부르주아 교수이기를 꿈꾸는 살인자다.
 
- 지젝, <삐딱하게 보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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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집(Black House) -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

사건은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데, 그 곳 사람들은 해질 무렵이면 마을의 선술집에 모여서 마을 근처 언덕 위에 있는 오래된 폐가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는 향수어린 추억과 마을의 전설들 - 대개는 그들의 젊은 시절 모험담을 - 되새기곤 한다. 이 신비로운 ‘검은 집’은 어떤 저주에 걸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누구도 그 곳에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 그 곳에 들어가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라고(그 집에 유령이 나타난다든지, 침입자는 모두 죽이는 정신병자가 혼자 살고 있다든지 하는 소문이 퍼져 있다) 여겨졌지만, 동시에 이 ‘검은 집’은 그들 모두를 젊은 시절의 추억과 연결해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 곳은 그들이 최초로 저지른 범죄, 그 중에서도 성적 경험과 관련된(남자들은 몇 년 전에 마을에서 제일 예쁜 소녀와 어떻게 그 집에서 최초의 성 관계를 가졌는지, 어떻게 그 곳에서 처음 담배를 피웠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장소였던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그 마을에 이사온 지 얼마되지 않은 젊은 엔지니어다. ‘검은 집’에 대한 전설을 모두 듣고난 그는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내일 저녁 이 수수께끼에 싸인 집을 탐험해보겠다고 공표한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의 발언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했지만 암묵적으로 강한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다음 날 저녁 젊은 엔지니어는 뭔가 끔찍한 사건이, 최소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그 집을 찾아간다. 잔뜩 긴장한 채 어둡고 낡은 폐가에 접근한 그는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올라가서 방마다 모두 조사해보지만 마루 위에 있는 몇 개의 썩은 매트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곧바로 선술집으로 돌아온 그는 의기양양하게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들의 ‘검은 집’은 단지 낡고 더러운 폐가에 불과하며 신비스럽거나 매력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노라고. 그의 말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그 엔지니어가 떠나려 하자 그들 중 한 사람이 사납게 그를 공격한다. 불행하게도 젊은 엔지니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죽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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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새로 이사온 사람이 한 행동이 마을 사람들을 그토록 공포스럽게 했을까? 현실과 환상의 공간의 ‘다른 장면(other scene)’간의 차이에 주목함으로써 그들이 느꼇던 적대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은 집’은 바로 그들 자신의 향수어린 욕망과 왜곡된 추억들을 투가할 수 있는 하나의 빈 공간 구실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것이다. ‘검은 집’이 그저 낡은 폐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진술함으로써 젊은 침입자는 그들의 환상 공간을 일상적이고 흔해빠진 현실로 환원시켜버렸다. 결국 그는 현실과 환상 공간의 차이를 제거함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접합할 수 있었던 장소를 그들에게 박탈했던 것이다.
환상 공간이 갖는 생생한 내용들의 매혹적인 현존은 단지 이 텅빈 공백을 메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 지젝, <삐딱하게 보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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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들의 상점(Store of Worlds) - 로버트 쉬클리(Robert Scheckley)

  이 단편의 주인공인 웨인 씨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노인 톰킨ㅅ를 찾아간다. 그는 폐허가 되어 썩어가는 쓰레기만이 가득한 외딴 곳 오두막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톰킨스는 특수한 종류의 약을 써서 사람들을 그들의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평행차원으로 위치 이동시킬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그렇게 해주는 대가로 그 사람이 가장 귀중히 여기는 물건을 거네줄 것을 요구했다. 톰킨스를 만난 웨인은 그와 대화를 나눈다. 톰킨스는 자신의 거래자들이 대부분 자신의 위치이동 경험으로부터 아주 만족한 상태로 되돌아오며, 되돌아온 이후에도 자신이 속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웨인은 망설인다. 그러자 톰킨스는 그에게 결심하기 전에 시간을 갖고 이 문제를 잘 생각해보라고 충고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웨인에게는 내내 그 생각 뿐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아내오 k아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고, 이내 그는 가족생활의 즐거움이라든가 사소한 문제거리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거의 매일 그는 스스로 다시 톰킨스 노인을 방문할 것이며 욕망 충족의 경험을 하고야 말리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언제나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고 그의 주의를 흩어 놓으며 그로하여금 방문을 연기하도록 하는 가정사가 끊이지 않는다. 우선 그는 부부동반으로 연말 파티에 가야한다. 그러고나면 아들놈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여름 휴가 때에는 아들과 배를 타러 가기로 약속해 놓았다. 가을에는 가을대로 새로운 약속이 생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 년 내내 웨인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은 오지 않는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그가 조만간 분명히 톰킨스를 방문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 갑자기 그가 톰킨스의 오두막에서 깨어날 때까지.

 

톰킨스는 그에게 친절하게 묻는다. “그래, 지금 기분이 어떤가? 만족스러운가?” 어리둥절해진 웨인은 당황해서 “아, 예 ... 그럼요”라고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세속적인 물건들(녹슨 칼, 오래된 캔, 그 밖에 몇 가지 작은 물건들)을 톰킨스에게 건내준다. 그러고는 저녁 감자 배급에 늦지 않으려고 무너져가는 폐허를 서둘러 떠난다. 어둠이 깔리기 전에 그가 지하 은신처에 도착하자 한 떼의 쥐들이 쥐구멍에서 나와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을 뒤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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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물론 핵전쟁 - 혹은 그와 유사한 사건 - 이 우리의 문명을 붕괴시킨 이후의 일상생활을 그리고 있는 일종의 공상과학 소설에 속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측면은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가 반드시 빠지게 되는 함정이다. 이야기의 전반저인 효과는 바로 이 함정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함정 속에 욕망의 역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물 자체’인 것을 물 자체의 지연으로 혼동하며 사실상 욕망의 실현인 것을 욕망의 추구로, 욕망의 고유의 우유부단함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의 실현은 그것이 ‘충족되는’ 것, ‘충분히 만족되는’ 것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욕망의 재생산, 욕망의 순환운동과 함께 일어나는데도 말이다. 웨인은 환각 속에서 자신의 욕망충족을 무한정 지연시킬 수 있는 상태로, 즉 욕망을 구성하는 결핍을 재생산하는 상태로 자신을 위치이동시킴으로써 욕망을 실현했던 것이다.

from 지젝 <삐딱하게 보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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