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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이 떳다 : 정치적 스캔들을 넘어 해적들의 정당으로

해적이 떳다 : 정치적 스캔들을 넘어 해적들의 정당으로

 

해적이 떳다. 만화 <원피스> 이야기는 아니다. 뭐 굳이 따지자면 아주 아닌 것도 아니다. 해적이 한 나라의 국경에 얽매이지 않고, 때문에 한 국가나 정치 단체를 통해 강제된 법적 구속으로부터 탈주하려 한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해적과 <원피스>의 해적은 다르지 않다. 다만 사적 목적을 위해 타인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가 아닌가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금 내가 이야기 하려는 해적은 정보와 지식 그리고 문화 생산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활용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런 해적들이 모여 정당을 만들었다. 소위 말하는 해적당이 그것이다. 오는 17일 유럽의회 의원인 아멜리아 앤더스도터가 한국에 찾아온다. 그녀는 스웨덴 해적당의 일원이다. 그녀는 거칠게 이야기 하자면 몽키 D. 루피 보다는 몽키 D. 드래곤에 가까운 해적이다(물론 세계정부의 입장에서는 루피 같은 해적이나 드래곤같은 혁명가 모두 골치 아픈 해적일 뿐이겠지만). 법적 구속력에서 벗어나 지식과 정보의 자유를 갈구하는 이들을 위해 기존 법적 체계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역사적으로 해적은 현실 정치의 실패 지점에서 난무해 왔다. 일부의 해적들은 엄청난 사적 부를 축적하고 잔학한 살인, 강간, 방화, 약탈을 일삼았었다. 그러나 다른 부류의 해적들은 정치적 억압이나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로 인한 위협으로부터 탈피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요컨대 그들은 생존을 위해 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정치에서 정의가 사라지는 때가 되면 그에 비례해 해적들도 늘어났다. 정보와 지식이 점점 중요한 사회적 자원이 되고 있는 시점에서 해적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그런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는 테크놀로지가 급속히 발전해 가는 상황에서 그에 부합하는 정당한 규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적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지금 상황에서 정보나 문화 생산물을 공유하는 대부분의 해적들은 자신들이 해적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거나, 설사 안다고 할지라도 해적질을 중단할 수 없다. 자신들의 행동이 지극히 정당한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해적으로 호명하는 것은 악소조항이 가득한 저작권과 특허에 관한 법률들이다.

 

해적당은 이런 문제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해적당은 스웨덴에서 출현했다. 2006년 미국 정부와 거대 영화 기업의 사주 아래 스웨덴 정부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인터넷 파일 공유 업체인 ‘파이럿베이(www.thepiratebay.org)’를 탄압했고,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를 계기로 스웨덴에서는 저작권 침해를 의미하는 ‘해적’의 이름을 전면에 내건 정당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해적당은 마침내 200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7퍼센트가 넘는 득표를 기록하며 2명의 유럽의회 의원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번에 방한하는 안더스도터는 이 때 비례대표로 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해적당은 다른 나라에도 급속히 퍼져나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현재 20여 개 국가에 해적당이 있으며, 준비중인 나라까지 포함하면 40개가 넘는 국가가 해적당과 관련을 맺고 있다. 올해 4월에는 해적당 국제 모임이 개최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해적당 인터내셔널까지 만들어졌다.

 

해적당은 현재 저작권이나 특허 문제와 함께 프라이버시 침해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고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면서 발생하는 문제가 해적당이 다루고 있는 주요 정치적 이슈인 것이다. 정확히 이야기 하면 해적당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인터넷 자체가 발생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나 특정 정치 세력이 인터넷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때문에 그것들은 테크놀로지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치의 문제가 된다. 정치적 강제로부터 탈주하려던 해적들이 정당을 만든 것은 아이러니한 것이지만, 현실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그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해적당 이전에도 저작권이나 특허, 프라이버시 등과 관련된 운동의 여러 흐름들이 있어왔다. 해적당이 흥미로운 지점은 그 문제를 직접적인 (정당)정치 운동으로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근대 국가에서 정보 통제와 민중 감시는 국가 형성과 존립의 근본적 조건이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정보 통제와 민중 감시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는 지극히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을 둘러싼 문제는 정치적인 성격의 문제로 접근되어야할 필요성을 가진다. 해적당의 정치 운동이 의의를 가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 스웨덴 출신의 요한 소더버그는 해적당의 급속한 의회 진출의 배경을 파이럿베이에 대한 탄압과 함께 군사감시법안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를 들고 있다. 이 법안은 스웨덴군사정보국(우리나라의 국정원에 해당)에서 기존의 감시 대상인 전파통신과 함께 인터넷 트래픽까지 감시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다.

 

이런 맥락에서 해적당의 활동은 보다 적극적인 정치적 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해적당은 스스로의 정치성을 제한하며 활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스스로를 좌파도 우파도 아닌 것으로 규정한다. 이는 해적당이 이념적 편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테지만, 현실 정치에서 실질적 힘을 발휘하는 구체적인 정치적 지향을 가지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흐름은 스웨덴 해적당의 지침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정당이긴하지만, 직접 정권을 잡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정책을 수용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한 정당이 해적당의 정책을 수용할 때, 아무 정당도 그들의 정책을 수용하지 않을 때, 그리고 두 개의 정당이 그들의 정책을 수용할 때 등 각각의 경우에 따른 지침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해적당은 좀 더 적극적이고 급진적인 정치 활동을 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내걸고 있는 몇 가지 정책안에만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이 강력하게 문제 제기 하고 있는 의약품 특허(단적으로 말하자면, 거대 독점 제약회사의 제약 특허가 가난한 나라의 의약품 공급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는 기존 정당을 지지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폐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다국적 제약회사는 결코 특허제도의 폐지나 약화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이윤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국가의 정당은 자신들의 의료제도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자본과 권력을 가진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입장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기존 정당은 해적당이 내걸고 있는 의약품 특허 제도의 폐지 정책을 결코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유독 의약품 특허가 아니더라도, 다국적 기업과 국제 협정으로 얽혀 있는 저작권 문제나 국가 안보와 연관된 프라이버시 문제도 기존 정당을 매개로는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 때문에 해적당은 기존 정당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자신들이 문제제기 하고 있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필요한 것은 보다 적극적인 정치성이지, 그 정치성의 유보가 아니다.

 

요한 소더버그는 해적당 지도부의 정치 성향을 언급한 바 있다.(소더버그의 글은 http://www.nettime.org/Lists-Archives/nettime-l-0906/msg00038.html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간략한 한글 소개는 http://hack.jinbo.net/?p=90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해적당 지도부의 핵심 인물인 릭 폴크빈지(Rick Falkvinge)와 크리스티앙 엥스트롬(Christian Engström)은 이미 자유주의 우파 정당에 관여 했던 인물들이다. 특히 당 대표인 릭 폴크빈지의 경우 스웨덴 보수 우파 정당(Moderata Ungdomsförbundet)의 청년조직 회원이었는데, 그 당이 너무 ‘사회적 자유주의’로 경도되었다는 이유로 탈퇴한 바 있다. 물론 이는 스웨덴 해적당에 한정된 이야기 이지만, 해적당이 탈정치화된 조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보다 급진적인 정치성을 획득하기 힘든 기반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 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해적당에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를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야 겠다. 해적당이 상당히 많은 국가에서 호응을 얻고 확산되고 있다는 점은 앞에서 지적했다. 그런데 그 확산 분포가 상당한 편향을 가지고 있다. 해적당은 유럽과 남미, 북미 지역에서 상당히 활성화 되고 있는 반면, 동아시아, 인도, 서남아시아,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지역에서는 해적당 활동이 거의 없다. 그나마 네팔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도에서 논의가 진행중일 뿐이다. 여러 연구들은 이 지역들이 유럽이나 북미에 비해 해적질의 규모도 크며, 정보 통제나 민중 감시 그리고 정보 기술을 활용한 프라이버시 통제가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는 좀 더 개선될 것이겠지만, 현재 보여지고 있는 해적당 활동 유무의 극단적인 지역적 차이는 해적당의 활동 네트웍이 얼마나 서구 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그들이 의약품 특허 문제를 이야기 할 때 항상 거론되는 지역(아프리카나 남아시아 지역 등)에서는 정작 해적당 활동이 전무한 상황이다. 그 지역에 저작권이나 특허와 관련된 운동을 하는 이들이나 단체가 없기 때문만도 아니고, 활동이나 운동의 정치적 탄압이 극심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거기에는 여전히 시혜의 대상과 연대의 대상을 분할하는 어떤 인식들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적당은 광범위한 대중적 분노로부터 출발했지만, 보다 급진적인 정치성의 획득으로 나아가기보다는 기존 정치 안에 안착하면서 그 힘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직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해적당이 계속 현재 상태를 답습하며,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21세기에 발생한 하나의 정치적 스캔들로 치부되며 사라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정보 통신과 관련된 운동에서 해적당 활동은 상당한 의의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 스캔들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난관이 꽤나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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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바람에 사라져가는 교육의 공공성과 창작(물 이용)의 자유

저작권 바람에 사라져가는 교육의 공공성과 창작(물 이용)의 자유

 

얼마 전 문광부에서는 보도자료를 통해 대학에 ‘수업 목적 저작물 이용 보상금’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예고했다. 이 제도는 이미 2006년 저작권법 개정을 통해 예비되어 있었다. 문광부는 이 제도가 “저작권자들과 대학들 간의 보상금 기준에 대한 합의가 지연”되고, “대학들의 재정부담” 등의 문제를 고려하여 시행을 유보해 왔었지만, “지난 2009년 전국 4년제 및 2년제 50개 대학 실태조사를 실시, 저작물 종류별(어문, 음악, 영상 등) 보상기준을 마련”했고, “2010년부터는 전국 대학교를 대상으로 수차례 공청회 및 의견조회를 실시”하며 어느 정도 의견이 수렴되었기에 이 제도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학 측에서는 이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으며, 여전히 제도 자체가 가진 문제도 산재해 있어 논란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고려대 이대희 교수는 ‘수업 목적 보상금’제도의 도입을 찬성하며, “저작물 이용에 대한 이용료를 지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어서 이용료 지급에 대해 논란을 벌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고, 저작물에 대해 “일일이 이용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교수 행위가 위축되고 수업시간에 활용할 수 있는 저작물은 제한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제도의 시행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많은 문제을 안고 있다.

 

우선 저작권을 통해 창작물이 개인의 소유물로 전유된 것은 저작권법이라는 특수한 법이 만들어진 이후 발생한 현대적 현상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미국과의 통상 협정을 통해 기존의 유명무실했던 저작권법이 전부개정되며 효력을 발휘한 것이 불과 25전이다. 또한 대학에서 학술적 목적으로 자료를 공유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서적의 경우 한국의 출판 시장의 기형적 구조로 인해 학술 서적은 출간되거나 번역된지 몇 년만 지나도쉽게 품절되어 구할 수 없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를 보충할 수 있는 도서관의 수준도 열악할 뿐 아니라, 중고 서적 시장도 크게 활성화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교육과 학술은 사회적이고 공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영역이다. 저작권법의 목적이 “문화의 향상 발전”에 있다면, 그러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는 공정이용으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이대희 교수는 저작물의 사용에 대해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교수 행위가 위축될 것이기 때문에, 이 제도의 도입을 통해 교수 행위의 위축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교수 행위에 문제를 발생시킨 것 자체가 저작권법이기 때문이다. 없던 문제를 만들어 놓은 후에 다시 해결하겠다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용어로 따지자면) “비합리적인 것”이다. 처음부터 문제를 만들지 않으면 된다. 교육이나 학술의 영역과 같은 공적 영역에 대해서는 저작권을 제한하는 것이 더 쉬운 해결책인 것이다.

 

이 제도의 도입을 반대하는 대학 역시 문제적이다. 대학에서 이 제도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제도의 도입이 등록금 인상의 빌미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 피해를 학생들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이 제도를 시행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대학에서 저작물을 사용하는 경우는 교육의 교보재로 활용하는 것이다. 대학은 교육을 하는 곳이고, 교육을 위한 수단들은 대학에서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하나이다. 현재 한국의 대학생들은 이미 자신들이 받는 교육 서비스를 훨씬 넘는 수준의 등록금을 지불하고 있다. 학교에 지불한 금액 대비 학생들이 제공받는 교육 서비스의 수준을 고려하면, 그것은 등가 교환의 원리조차 적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제공해야할 서비스를 학생들에게 전가시키면서, 짐짓 학생들을 위하는체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 측에서 이 제도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입장에서의 반대여야 하며, 공적 영역으로서의 교육에 시장논리를 도입하려는 시도에 대한 반대여야 한다.

 

수업목적 보상금 제도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시 창작과 보상이라는 오래된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창작 노동에 대해 일정정도의 보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보상 시스템은 소수의 창작자에게 부여되는 과잉 보상 혹은 대부분의 창작자에게 부여되는 과소 보상의 형태로만 나타나고 있다. 적절한 보상이란 어느정도 수준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소위 말하는 대박 혹은 쪽박 형태로 이루어지는 현재의 보상 체계는 분명 문제가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상 체계는 보상 자체가 아니라 분배 체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이번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문광부에 따르면 대학은 문광부 고시 기준에 따라 (사)한국복사전송권협회와 개별약정을 체결해야 한다. 그런데 복사전송권협회는 대학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창작물들, 즉 영화, 음악, 도서, 공연, 방송, 미술, 사진 등 다양한 창작물들의 전체 권리자를 대표하는 단체가 아닐뿐더러, 획득된 보상금을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단체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분배 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현재 수업목적 보상금 제도는 사적 단체를 매개로 대학으로부터(정확히는 대학생들로부터) 국가가 저작물 보상금을 갈취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렇다면 분배 체계만 갖춰지면 이 제도의 타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선 하나의 사적 단체가 국가 전체의 저작권자를 대신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또한 앞에서 제시한 교육의 공공성 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현재 문화산업의 구조도 직접 창작자에게 보상이 돌아가는 체계가 아니다. 거대 문화 산업 기업은 개별 창작물의 유통 통로를 장악하고 있고, 이 유통망에 진입하기 위해서 창작자들은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의 일부 또는 전부를 기업에 양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양도 절차, 즉 거대 기업과 개별 창작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저작물 권리에 대한 양도 절차는 철저하게 창작자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창작물에 대한 보상은 개별 창작자에게 돌아가기 보다는 거대 문화 산업 기업에게 돌아간다. 요컨대 창작물에 대한 보상이 창작자에게 직접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창작자에게 적절한 보상을 보장함으로써 창작에 대한 인센티브를 부여하여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 한다는 저작권법의 목적과 배치되는 것이다. 저작권법이 최소한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수업목적 보상금 제도와 같은 것을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창작물에 대한 보상과 보상금 분배의 체계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 제도가 가진 법리적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법의 기술적 실효성에 관한 문제는 아니다. 문제적인 것은 법과 그것의 적용 사이에서 나타난다. 현재 시행예정인 이 제도는 기본적으로 모든 학생을 잠재적인 저작권법 위반자로 상정하고 있다. 또한 대학에서는 분과학문의 특성에 따라, 강의의 특성에 따라, 그리고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의 특성에 따라 강의에 활용하는 저작물의 이용 빈도와 정도가 상이하다. 일괄적으로 저작료를 학생에게 전가할 경우(문광부 산정 1년에 1인당 3580원) 어떤 학생들은 사용하지도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단순히 저작물을 사용한 사람이 그에 대한 대가를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우기 위한 말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초적인 (자유주의적) 불공정이 아니라 저작물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저작권법 앞에 세우고, 경유하게 하는 이 제도의 특수한 측면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저작권법은 (창작자가 원하지 않을 때 조차) 모든 창작물에 (경제적)권리를 부여하고(무등록주의), 모든 이용자에게 창작물 이용에 대가를 지불하게 한다. 요컨대 저작권법은 창작과 문화적 생산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창작자이든 이용자이든)을 법 앞의 개인으로 호명하고, 그들에게 권리와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심지어 창작물을 생산하지 않고, 이용하지도 않는 사람조차 이런 원칙에 포섭시켜야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법은 무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저작권법을 몰랐다는 말은 그것의 위반에 대한 핑계가 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일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제도의 경우에는 특정 집단인 대학생들을 저작권법 앞에 세우고 저작권법의 적용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이 제도의 궁극적인 효력이다. 이 제도가 시행된 후에 그들은 자유롭게 창작하고 창작물을 이용하기 보다는, 저작권법과 그것의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규제 테크닉들을 매개한 후에 창작(물의 이용)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앞으로 그 수많은 규제 테크닉들 아래에서, 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 자유롭도록 강제당해야 한다. 이제 대학에도 저작권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그 바람에 날려 학술과 교육의 공공성도, 창작(물 이용)의 자유도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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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플러그와 독립영화, 혹은 독립영화는 무엇으로부터 독립했는가?

인디플러그와 독립영화, 혹은 독립영화는 무엇으로부터 독립했는가?

 

 

얼마 전 독립영화 유통을 전문으로 하는 ‘인디플러그’에서 합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독립영화를 업로드하는 웹하드나 P2P업체들을 상대로 민,형사상 고발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인디플러그는 주류 상업영화계에서 진행하고 있는 굿 다운로더 캠페인이 동참하고 있다. (소위)‘배드’ 다운로더를 양산하는 웹하드나 P2P 업체들에 대응하기 위해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법적인 조치란 저작권법 위반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인디플러그의 선언 이후 여러 언론들을 통해 “독립영화계가 불법다운로드에 강력하게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든지, 독립영화가 “불법 다운로드와 전쟁선포”를 했다는 등의 기사가 흘러나오고 있다.

 

정말인가? 정말 굿 다운로더가 아닌 이들은 모두 나쁜 다운로더들이고, 이들이 저작권법을 위반해 “문화 및 관련 산업의 향상발전”(저작권법 1조)을 가로막았으며, 이 때문에 ‘독립영화계’ 전체가 불법 다운로드와 “전쟁”을 선포했는가?

 

독립영화계에서 저작권 문제가 거론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 이미 <워낭소리>를 둘러싼 논란이 독립영화계를 한바탕 휩쓸었었다. <워낭소리>의 제작자였던 고영재는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해외 시장 진출의 통로가 막혔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저작권법을 위반한 불법 다운로드에 대해 강하게 성토했고, 이를 계기로 독립영화 진영에서 저작권과 관련된 논의가 일었었다. 그런데 그 때 이명박의 <워낭소리> 관람과 독립 영화 진흥 정책에 관련된 것으로 주제가 확산되며, 저작권과 관련된 논의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그러다 다시 고영재가 대표를 맡고 있는 인디플러그의 굿 다운로더 캠페인 동참과 불법 업로드 업체에 대한 법적 대응 선언으로 저작권 관련 문제가 독립영화계에 제기 되었다.

 

당연하지만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인디플러그가 독립영화계를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갖가지 언론들에서는 인디플러그의 사업 정책을 독립영화계로 환원해 보도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문제적인 것은 언론의 보도형태가 아니라, 독립영화계의 반응이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침묵을 통해 인디플러그의 입장에 암묵적으로 공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때로 동의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독립영화계를 하나의 실체를 가진 것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상업 영화계의 외부를 이루는 공간으로, 단일하거나 획일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획정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독특한 상황 속에서 정치적 저항성을 가진 이들이 영상을 무기로 활동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자이든, 후자이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독립영화계가 상업영화계, 즉 완전히 상품화된 방식의 생산, 유통, 소비가 이루어지는 곳과는 다른 지점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다양성이라 불러도 좋고, 저항이라 불러도 좋다. 독립영화가 상업영화와 구분된다는 점은 독립영화가 무엇으로부터 독립해 있는지를 지시하고 있다. 독립영화가 독립해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정치적 권력과 자본의 횡포이다.

 

완전히 상업화된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영화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생산, 유통, 소비 방식을 만들어 왔으며, 그 방식의 다양화를 이루어 왔다. 다시 말해, 독립영화는 획일화된 상업영화의 그것들과는 다른, 대안적인 방식들을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지고, 도입된 것이 퍼블릭 액세스이고 공동체 상영 등이다. 그것들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그러한 기본적 취지와 의도만은 아직까지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은 상업영화가 가장 전형적으로 이익을 창출해 내는 통로이다. 게다가 그것은 직접적인 생산자나 창작자에게 보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보다는 그것의 투자자들이나 거대 유통 기업들에 이익을 돌려주기 위한 장치이다. 물론 몇몇 이름난 생산자들이 저작권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얻긴하지만, 대부분의 창작자들에게 그것은 신화적인 것을 뿐이다. 상업영화게에서도 그들은 대부분 영화사에서, 방송국에서 창작 노동을 하며 착취당하는 노동자일뿐이다. 게다가 그것은 문화의 향상발전을 도모하기 보다는 그 반대로 기능하고 있다. 저작권은 디지털 네트워크 환경에서 문화적 생산물들을 확산시키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막고 있으며, (때문에) 풍부한 2차 창작물(소위 패러디나 키치 등)들이 산출될 수 있는 통로를 차단시키고 있다. 파생 창작물의 생산을 활성화 시키는 것은 문화(심지어는 산업)를 향상발전 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저작권이 가로 막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디플러그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독립영화계가 침묵하고 있는 저작권 단속은 독립영화의 기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 된다. 그것은 상업 영화의 틀에 독립영화 스스로를 구속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만약 이 상태가 더욱 진행되어 독립영화가 저작권 산업에 기대어 생명을 유지해 나가게 된다면, 독립영화는 발명되어야할 미래의 가능성들(퍼블릭 액세스를 포함한 대안적인 영상의 생산, 유통, 소비 방식들)을 미리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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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글

 

관련하여 정보공유연대 오병일씨의 글을 함께 읽어 보자.

독립영화와 저작권(오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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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다시, ‘파랑새’와 ‘외톨이야’ : 표절과 저작권 침해


 

와이낫의 ‘파랑새’와 씨엔블루의 ‘외톨이야’ 사이의 표절 논쟁이 한창 지난 지금, 다시, 표절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당시 격한 논쟁이 오고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이제 사태는 법정으로 옮겨졌다. 1년 이상이 소요되는 긴 싸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대중적 관심이 사그라든 시점에, 정보공유연대의 주최로 4월 8일에 표절을 주제로 한 조그만 세미나(이달의 토크: 창작과 표절 그 미묘한 지점)가 진행되었다. 한물 지나간 주제로 뒷북이나 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리는 치열했던 논쟁을 차분히 되짚어 보며, 표절문제에서 핵심적이지만 정작 논쟁 속에서는 누락되었었던 어떤 것들을 드러내고 이야기 하는 자리였다.

 

지난달 와이낫은 ‘외톨이야’의 작곡가를 상대로 저작권침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하는 소송을 걸었다. 소송을 제기하며 와이낫의 리더 주몽은 소송이 최선의 수단은 아니었지만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말한바 있다. 이달의 토크에서 그는 표절을 방치하는, 혹은 어떤 측면에서는 구조적으로 그것을 조장하는 음악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문제제기의 방식에서 소송이 최선의 수단이 아니었다고 말할 때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표절과 저작권 침해가 완전히 일치 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음악계의 구조적 병폐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음악계에 여러 측면에서 경종을 울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표절을 막기 위한 해결책에 대한 논의에서는 쉽게 저작권 침해 방지 정책으로 귀결되곤 했다. 과연 저작권 침해 방지가 표절을 막는 최선의 길이고, 유일한 길일까? 사실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의 저작권이 저작권자의 권리를 강화 시키는 방식으로 개정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번 지적되어 왔다. 거기에는 이용자의 향유권은 거의 고려되어 있지 않다. 저작권의 유용성을 옹호하는 이들이 저작권법 1조를 거론하며 그것이 문화의 향상 발전(지난번 개정에서 문화와 관련 ‘산업’의 향상 발전으로 문구가 수정되었다)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여도, 그 세부 내용에서는 그 목적을 부정할만한 수 많은 악소조항으로 가득차 있다. 대중음악계의 유명작곡가들의 표절 관행에 문제제기를 하기 위한 소송이 저작권 강화로 환원된다면, 역설적으로 그 결과는 유명작곡가들(만)의 이익을 더 확실히 보장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버릴 것이다. 따라서 표절을 저작권 침해로 동일시 한다거나, 표절 방지를 저작권 강화로 환원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사실 표절과 저작권 침해는 개념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보호기간이 만료된 저작물이나 공공영역(public domain)에 있는 표현물, 그리고 공정이용에 해당하는 경우 저작권 침해는 인정되지 않는다. 반면 표절에는 그런 예외가 전혀 없다. 표절에는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의 표현물이 타인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절은 단지 타인의 창작물을 흉내내거나 도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타인의 창작물이 처음부터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때문에 표절에서는 타인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다.

 

또한 저작물이 저작권자의 동의하에 이용된다거나 이용 후에 문제가 발생할 때 저작권자의 용인이 있다면 그것의 이용이 법적으로 정당화 되는 반면, 표절에는 원 창작자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표절은 타인의 창작물에 있는 오리지널리티 자체를 부정하는 한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때문에 표절자는 원 창작물을 도용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창작자는 창작물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 말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는 침묵해야 하며,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 말할 (저항의) 언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창작은 원래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창작은 모방과 참조의 계기가 새겨져 있다. 모방과 참조를 통한 훈련과 그것들의 축적이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조금 모방하면 창작이 되고, 많이 모방하면 표절이 되는 것처럼, 즉 창조와 표절의 경계는 모호한 것이기 때문에, 창작자를 함부로 표절자로 매도해서는 안되고, 설사 그가 표절자로 판명이 난다고 해도 그를 쉽게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외톨이야’의 작곡가중 한명인 김도훈은 이러한 논리에 근거해서 자신이 표절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가 제기한 주장 중 하나는 와이낫의 ‘파랑새’가 박상민이나 컨츄리꼬꼬의 노래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외톨이야’가 표절이면 ‘파랑새’도 표절이며, ‘파랑새’가 표절이 아니라면 ‘외톨이야’도 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모방이나 유사한 음악적 요소들은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차용되거나 이용되었다고 해서 표절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표절은 단순한 모방이나 저작물 침해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표절에는 타인에 대한 부정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권력이 각인되어 있다. 표절 문제에서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또 하나! 표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작권법이 가진 문제에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저작권법은 여전히 문화의 향상 발전이나 이용자의 향유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반하는 것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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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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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담비 흉내 UCC 저작권 침해 불인정 판결의 허와 실

지난해 5살짜리 아이가 손담비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올린 블로그 게시물이 게시 중단 조치를 당한 사건이 있었다. 동영상을 올린 당사자는 게시 중단 조치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사)음악저작권협회와 (주)엔에이치엔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이번 달 18일 원고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이용자의 향유권을 일부 인정했다는 점 때문에 환영할만한 조치로 평가되고있다. 판결이 난 다음날 참여연대는 논평을 내어 부당한 삭제 요청에 대해 세계 최초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이라는 점과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규제들을 개선할 여지를 남겼다는 점을 들며 이번 판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을 무턱대고 환영할 수만은 없다.


이번 판결은 결과만 본다면 이용자의 향유권을 보장하는 당연한 조치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 판결을 이끌어내는 논리(과정)를 들여다보면 이 당연한 권리가 법의 영역에서는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 권리로 여겨지는지, 나아가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권리가 얼마나 누리기 힘든 것인지가 드러난다.


법원은 이번 사건을 “기본권 주체의 표현의 자유 및 문화․예술의 자유라는 기본권이 상대방 기본권 주체의 저작재산권이라는 기본권과 충돌하는 상황”, 즉 저작물에 대한 생산자의 소유권과 이용자의 향유권 사이의 충돌하는 상황으로 규정하며, 이러한 충돌이 발생할 경우 “저작자와 이용자의 권리의 균형 및 조화를 도모”하고 있는 저작권법을 통해 “조화롭게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저작권법이 “여러 조문에 걸쳐 저작재산권의 제한규정을 두어 저작물을 자유이용할 수 있는 경우를 명문화” 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같은 사건의 조화로운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 저작권법에서는 보도·비평·교육·연구를 위한 목적 하에서만 저작물에 대한 인용이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법원은 “인용저작물이 피인용저작물을 대체할 수 있어 피인용저작물의 시장가치를 훼손”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용이 이뤄져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법원은 문제가 된 게시물이 “원고의 딸의 귀엽고 깜찍한 행동에 대한 기록과 감상, 대중문화가 어린 아이에게 미친 영향 등에 대한 비평 등을 담아 이 사건 게시물을 작성하고 공개한 것으로서 이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며, “사건 저작물의 시장가치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시장수요를 대체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만한 여지가 없고, 오히려 이 사건 저작물의 인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기여한다고 볼 수도 있는 점”을 들어 원고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다시 말해, 문제의 게시물이 비평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저작물의 시장가치를 훼손하지 않기 때문에 저작권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보면 꽤나 관대한 판결처럼 보인다. 그러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 이 판결에서 핵심이 된 것은 비평과 시장가치라는 두 요소이다. 비평에 대해 살펴보자. 문제가 된 게시물에는 아이의 엄마가 가요프로그램도 보지 않는 아이가 이 노래를 어디서 보고 들은 것인지 궁금하다는 글 한 줄이 담겨 있다. 법원은 이 한 줄의 글을 인용하며 “대중문화가 어린아이에게 미친 영향 등에 대한 비평”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그것에 비평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 엄마의 의문이 간단하지만 비평이라 부를 만한 요소가 담겨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만약 그 한 줄의 글이 없었다면 이 게시물은 비평이 아닌 것이 되며, 정당한 목적에 의한 인용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게시물이 ‘비평 글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적인 효력을 가지는 보도·비평·교육·연구라는 범주의 글(혹은 다른 매체를 통한 표현물)들이 뚜렷한 척도를 가지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법원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사건의 계기가 된 게시물이 (법원이 판결문에서 강조했던) “비전문가”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는 점과 그 게시물이 가진 일상적 성격을 고려해 본다면 저작권법에서 규제하고 있는 게시물의 범위가 얼마나 자의적으로 판단될 수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비평의 기준이 자의적인 것이라면, 따라서 그것이 엄격한 법적 척도가 되지 못한다면 이번 판결의 결정적 근거가 된 것은 시장가치의 훼손 여부에 있을 것이다. 문제가 된 게시물은 손담비가 부른 노래가 발생시키리라 예상되는 수익에 결정적인 손실을 가져다 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작권법을 위반하지 않은 게시물이 된 것이다. 이처럼 판결문을 조금만 들여다본다면 이번 사건이 결코 생산자의 저작재산권과 이용자의 향유권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용자의 권리는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으며, 단지 (자본주의 사회를 성립시키고 유지케 하는 법적 근간인) ‘재산권이 침해되었는가 아닌가’가 문제의 핵심에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번 판결은 이용자의 향유권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확장하기 위한 판결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결과론일 뿐이다. 판결의 결과보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은 그 결과를 이끌어내는 법적 논리(과정)이다. 그 논리 속에는 공유되어야할 문화적 산물들을 하나의 상품으로 전유해 나가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합리성은 법의 이름으로 개개인의 사고 속에 자리잡는다. 각 개인들은 그 합리성 속에서 판단하고 행위하게 된다. 특정한 행위의 근거가 되는 합리성이 시장가치만을 척도로 삼아 형성될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 가치를 판단의 최우선 척도로 놓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변형을 가하며 풍성해지는 문화적 영토를 파괴하는 비합리적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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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美日 포르노업체 한국네티즌 수천명 고소(저작권)

수도권 경찰서 10곳에 고소장…"추가고소 계획"
 


(서울=연합뉴스) 강훈상 기자 = 성인용 영상물을 제작하는 미국과 일본의 대표 업체 50여곳이 자사의 영상물을 인터넷을 통해 불법으로 유통해 상업적으로 판매했다며 1만명에 가까운 한국 네티즌을 고소해 파장이 예상된다.

   13일 법조계와 경찰에 따르면 이들 미.일 업체의 저작권을 위탁받은 미국의 C사는 최근 국내 변호사를 선임, 파일 다운로드 사이트에 자사의 영상물을 올려 회원들이 내려받게 하고 돈을 받은 이른바 `헤비 업로더'의 ID 1만개에 대해 저작권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이 업체는 피고소인 수가 많은 점을 고려, 해당 사이트를 운영하는 업체의 소재지를 담당하는 서울ㆍ경기 지역 경찰서 10곳에 나눠 고소장을 냈다.

   한 네티즌이 여러 개의 ID를 사용한다는 점을 감안해도 고소된 네티즌은 수천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경찰이 `조사 대상 피고소인이 너무 많다'며 업무부담 가중을 이유로 고소장 접수를 꺼리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네티즌이 올린 영상물은 `하드코어' 수준으로 노출 수위가 매우 높다고 변호인 측은 설명했다.

   이번 `무더기 고소'에 고소인 자격으로 참여한 업체는 세계 최대의 성인 영상물 제작사인 미국의 V사 등 해외업계에서 대표적인 곳은 사실상 모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C사가 선임한 법무법인 관계자는 "상습적으로 영상물을 사이트에 올려 경제적 이득을 취한 ID 1만개를 추려 고소장을 냈다"며 "현재 확보한 불법 다운로드 건수는 10만건으로 향후 계속 고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포르노 영상물이 인터넷을 통해 청소년에게 무분별 유통되는 관행에도 제동을 건다는 의미도 있다"며 "이를 방조한 책임을 물어 다운로드 사이트를 운영하는 국내 업체 80여곳에 대해서도 민ㆍ형사상 조치를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C사는 그러나 피고소인이 미성년자로 밝혀지면 청소년 선도 차원에서 고소를 취하할 계획이다. 저작권법 위반 행위는 친고죄여서 피해자가 고소를 취소하면 `공소권 없음'으로 기소할 수 없다.

 

 

원문 =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Search/YIBW_showSearchArticle.aspx?searchpart=article&searchtext=%ed%8f%ac%eb%a5%b4%eb%85%b8%ec%97%85%ec%b2%b4%20%ed%95%9c%ea%b5%ad%eb%84%a4%ed%8b%b0%ec%a6%8c%20%ec%88%98%ec%b2%9c%eb%aa%85%20%ea%b3%a0%ec%86%8c&contents_id=AKR2009081218930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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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과 섹슈얼리티 혹은 성산업과의 만남.

 

이데올로기적 표류/은폐/교차/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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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정치에 다가가기

 
이달 23일 시행되는 개정 저작권법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번 저작권법의 핵심은 일명 ‘인터넷 삼진 아웃제’라고 불리는 제도의 도입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음악 등의 저작물을 허락 없이 대량 유포하는 업로더의 계정이나 인터넷의 게시판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3회 경고 후 최대 6개월까지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사법부의 판단 없이 행정부가 죄를 판단하고 처벌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월권을 내포한 제도이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삼권분립이라는 원칙을 직접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과 관련된 분쟁은 침해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기 어렵기 때문에 법원에서도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행정권력이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규제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권력자의 시선으로 규제할 수도 있고, 거대 기업의 경우 각종 로비를 통해 행정명령을 무력화 시킬 위험도 있다. 때문에 인터넷 삼진 아웃제는 행정권력에 의한 인터넷 사업자와 이용자에 대한 일방적 통제가 확대될 위험성을 잉태한 제도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저작권법 개정안은 더욱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논란이 발생하는 지점도 바로 이 곳인데, 그것은 바로 표현의 자유라는 영역이다. 특히 인터넷이라는 영역에서 표현의 자유는 핵심적인 동력이 되는 만큼 문제를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이제 상식을 넘어 식상하고 진부한 것이라 표현될 만큼 기본적인 권리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 정부의 통치하에서는 역대 그 어느 정권보다도 심각하게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 (이 글에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는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를 모두 이야기 하긴 힘들다. 관심이 있다면 지난달 22일 문화연대를 비롯한 진보넷, 인권운동사랑방 등이 공동으로 발표한 <이명박 정부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보고> 기자회견문을 참조하라.)

 

물론 개정 저작권법에서 추진하고 있는 ‘인터넷 삼진아웃제’가 유독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기는 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에도 인터넷 삼진 아웃제(Three strike out policy 혹은 유럽권에서는 graduated response-누진대응) 입법을 추진 중이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이미 이 제도의 입법을 추진했었지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 때문에 시민 사회 단체의 주도로 위헌소송이 제기되었고, 결국 프랑스 헌법위원회는 지난달 10일 위헌 판정을 내렸다. 프랑스 헌법위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은 인권에 관한 문제”라고 명시하고 개인의 인터넷 접근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은 법원 판사의 판결을 통해서 부여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이와 관련된 일부 내용을 수정해서 이달 8일에 안건을 재상정 했고, 상원 의결을 통과했다. 수정된 내용은 인터넷 접속을 차단할 수 있는 권한을 신설되는 정부 전담기구인 아도피(Hadopi)에 두었던 것을 판사에게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처럼 인터넷 표현의 자유와 그것을 규제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최근 중국의 청소년 보호용 인터넷 차단 프로그램인 그린댐(Green Dam)을 비롯해 호주나 뉴질랜드, 영국, 스웨덴,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다.

 

해외의 사례에서 발견된다고 그 제도가 정당화를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인터넷 규제 법규들은 해외의 사례와 차별되는 독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인터넷 규제 시도가 저작권을 이용해 정치적 맥락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외국의 사례에서 발견되는 삼진 아웃제는 저작권을 어긴 인터넷 이용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개정저작권법은 이용자 삼진아웃뿐 아니라 게시물이 올라간 게시판까지도 삼진아웃 시키겠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로써 인터넷 상에서 적극적인 정치적 발화가 이루어지던 아프리카 TV나 아고라의 게시판을 활동 정지시킬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 다시 거대 언론사나 그것의 대리 역할을 하는 법무법인들이 시민 단체 등을 상대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는 행위에 대해 저작권 침해 배상 요구를 하고 있다. 신문 기사의 제목만을 노출시켜놓고 이를 클릭했을 때 해당 신문사 사이트로 이동하도록 링크를 거는 행위는 합법이지만, 기사를 스크랩하는 행위는 저작권법 위반이기 때문이다. 스크랩은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토론을 유도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일반적 행위이지만, 그 자체를 불법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특히나 기사 스크랩에 따른 저작권 침해 배상 요구는 재정이 취약한 시민단체를 표적으로 삼아 그 단체를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악용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저작권법의 목적은 창작자에게 창작물에 대한 일정한 보상을 부여함으로써 창작 활동을 활성화 시키고 나아가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데에 있다. 창작 활동이란 표현의 자유를 기반으로 삼지 않으면 결코 활성화 될 수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시행되고 있는, 혹은 앞으로 시행될 저작권법은 창작 활동의 기반이 되는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저해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상황에서 악용될 소지를 가지고 있다. 지금 연출되고 있는 것은 법을 만든 정부가 자신이 만든 법의 원래 목적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테러범도 피해가는 저작권법의 힘


정보를 제3자가 사용한다고 해서 아이디어나 정보의 창작자 또는 보유자가 가진 지적재산은 양적으로 줄어들거나 그 효용이 감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아이디어와 정보를 이용할수록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후생과 이익은 커진다. 특히 인터넷은 정보를 유통시키는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정보의 가치를 증진시켰다. 인터넷의 힘이 가진 긍정성은 타인이 정보에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정보는 소유가 아닌 공유를 통해 가치를 증진시키며, 정보기술의 혁신은 공유 문화를 확산 시킬 수 있는 기술적 배경이 된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과 내가 사과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서로 교환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나와 당신은 각각 하나의 사과를 가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과 내가 아이디어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서로 교환 한다면 우리는 두 개의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역시 “내게서 어떤 생각을 전달받는 사람은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지만, 그로 인해 나의 지식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는 내 촛불에서 자기 초에 불을 붙여 간 사람은 빛을 얻게 되지만, 그로 인해 내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고 말한다.

 

버나드 쇼나 제퍼슨의 말은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 결코 지식 혹은 그것의 사용에 대한 독점이 아니라 공유와 나눔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저작권법은 이런 의미에서 문화 발전에 대한 기여라는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저작권법은 창작물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끊임없이 권리자에게 귀속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창작물에 대한 권리가 창작자가 아닌 그 권리를 사들이거나 양도받는 기업에 귀속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창작자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다. 창작자는 자신의 창작물을 유통시키기 위해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 기업에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의 일부 혹은 전부를 해당 기업에 (계약을 통해) 양도해야하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작권의 왜곡된 법 체계보다 더욱 위험해 보이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저작권이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영역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저작권법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잘못 악용될 경우 극도로 위험할 수 있다. 유나바머로 알려진 카진스키(Theodore John Kaczynski)의 사례에서 이러한 위험성을 확인할 수 있다.

 

유나바머는 대학과 공항을 중심으로 폭탄테러를 자행한 테러리스트이다. 유나바머는 1995년 테러를 중단하는 조건으로 유력지에 과학문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과학기술문명비판논문 게재를 요구했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지에 그의 논문이 실렸다. 이것이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제목을 가진 유나바머 선언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선언문의 각주 16번에는 “만약 저작권법이 문제가 되어 게재가 불가능하다면 주16을 다음 문장으로 바꿔주기 바란다”는 구절이 나온다. 유나바머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16차례에 걸친 폭탄테러를 행한 현대 사회의 가장 위협적인 테러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폭탄테러라는 강력한 무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저작권법 때문에 자기 글이 실리지 못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선언문에서 그는 자신의 테러를 하나의 혁명이라고 말하며 “혁명의 목표는 정부의 전복이 아니라 현존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테크놀로지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대사회를 병들게 한 것은 각종 테크놀로지라고 비판하는 극단적인 기술혐오주의자였고, 주된 테러 대상도 대학에서 테크놀로지를 연구하는 학자였다. 문제는 그의 공격 대상인 각종 테크놀로지가 자신이 존중하는 저작권이나 특허와 같은 지적재산권을 통해 보호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96년 체포 당시 그는 산골 오두막집에서 전기와 수도도 없이 살고 있었다. 그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현대문명을 등진 채 살고 있을 정도로 테크놀로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정작 그것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지적재산권을 문제 삼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처럼 저작권과 같은 지적재산권은 인간의 의식 영역에 침투해 내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유나바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 내면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저작권의 위력이다. 앞서 지적했듯 저작권법의 강화는 창조성과 같은 (협소한 의미의) 문화적 퇴보를 야기시킬뿐 아니라 특정 정치적 맥락에서 이용될 경우 법적 감시와 통제 그리고 처벌을 통해 정치적 개인들이 가진 비판의 언어를 탈각시키는 기재로도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즉 정치적 맥락에서 기능하고 있는 저작권법 집행 및 개정의 방향은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하나의 증상처럼 보인다. 이제 저작권법은 단순한 하나의 규제가 아닌 듯하다. 그것은 민중의 정치적 삶의 방식을 강제적으로, 그러나 내면 깊숙이 변화시키는 정치적 매개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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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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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을 둘러싼 쟁점들 - copyright? copywrong!!

     저작권을 둘러싼 수많은 쟁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 주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저작권을 둘러싼 논의는 창작자에 대한 경제적 보상과 그 방식에 집중되어 있다. 창작에 대한 경제적 보상은 창작의 유발동기이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문화를 즐기고 활성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며, 그것은 강력한 법적(처벌)장치를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작권에 대한 강한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두 가지 축일 뿐이다. 이제는 저작권에 대한 왜곡된 담론을 넘어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질 때가 되었다. 이렇게 물어보자.
     저작권을 통해 실재로 경제적 이익을 얻는 자는 누구인가? 저작권은 왜 저자의 권리(author's right)가 아니라 복제의 권리(copyright)인가? 저작물 혹은 창작물은 왜(그리고 어떻게)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단속의 대상이 되었는가? 과연 특정인이 문화적 생산물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문화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가? 오히려 문화적 생산물을 함께 공유하고 향유하는 것이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창작물은 풍부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 그것들을 향유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저작물은 완전히 고립된 개인만의 창작물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작물의 독점적 소유권자로 상상되는 저자란 무엇인가?
     이번 강좌는 위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 질문과 그것에 답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저작권과 그것이 놓여 있는 사회적 환경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제1강 저작권의 철학적 쟁점 : 구텐베르크의 신화, 창작자의 권리와 집합지성(01/7/수)
            신승철 / 홍익대 강사
제2강 저작권의 역사적 형성 : 자본주의의 정보적 확장(01/14/수)
             민호 / 문화사회연구소 간사
제3강 저작권을 둘러싼 현실적 쟁점 : 법적, 기술적 쟁점(01/21/수)
            오병일 / 정보공유연대 활동가
제4강 대안은 수없이 많다": 해커 공동체에서 정보공유 문화까지(01/28/수)
            조동원 / 미디어 활동가,연구자
* 4강은 저녁 6시에 시작해서 저작권과 관련된 영화를 한 편 본 후 7시에 강의를 시작합니다. (상영작 : 이 영화를 훔쳐라, 60분, 이 영화는 http://stealthisfilm.com에서 다운로드 받아 미리 보실 수 있습니다.)
 
• 일 시 : 2009년 01월 07일 ~ 01월 28일(매주 수 저녁 7시)
• 장 소 : 문화연대 강의실(지하철 5,6호선 공덕역 4번 출구)
• 문의 및 신청 : 02-745-1603 / cultures21@naver.com
• 수 강 료 : 4만원(문화연대, 정보공유연대 회원 2만원)
• 홈페이지 : http://www.kccs.or.kr(문화사회연구소)
                      http://www.ipleft.or.kr(정보공유연대)
• 입금계좌 : 하나은행 162-910007-32504(예금주: 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
• 주 관 : (사)문화사회연구소
• 공동주최 : (사) 문화사회연구소, 정보공유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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