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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20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정치적 함의
    와라
  2. 2009/07/17
    저작권, 정치에 다가가기
    와라
  3. 2009/06/07
    희생의 정치, 그리고 그 정치의 희생양
    와라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정치적 함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정치적 함의

: 미래를 향한 역사 그리고 민족과 국가의 결속

 

 

조선과 동아가 발작을 일으켰다. 친일인명사전의 발간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대한민국이 친일 청산을 못해 정통성이 북에 비해 부족하다는 좌파사관의 확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동아일보는 사전이 발간된 바로 다음날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 노린 좌파 사관 친일 사전”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조선과 동아를 제하고도 사전 발간은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만한 논란을 일으켰다.

 

조선과 동아를 비롯해 사전에 등재된 당사자의 후손은 물론이고,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네티즌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친일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자극적인 용어인듯하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정치적 올바름, 민족 정체성, 국가 정당성과 관련된 논의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조선과 동아의 발작은 이 사건이 가지는 외상적 강렬함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그런데 사전의 발간은 현재 일고 있는 논란과는 다른 층위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전을 발간한 이들도, 그것을 옹호하는 이들도, 혹은 반대하는 이들까지, 그들이 진보이건 보수이건 간에, 모두 역사가 함축한 가치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사전 발간과 관련된 논란은 그 (역사적 가치에 대한 동의라는) 기반 위에서 역사적 사실의 진위 문제, 인물 선정의 기준의 편향성 여부, 그것의 정치적 악용문제 등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좀 뜬금없긴 하지만 이러한 논란에서 한 발짝 비켜서서 이 논란이 기반을 두고 있는 ‘독특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도 논의해 볼만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 인간은 역사적 소여를 통해 언어를 습득하고, 소통하며, 그 안에서 지식을 얻고, 행위의 근거가 되는 사회적 합리성을 형성시킨다. 다시 말해 특수한 문화적 요소들의 전승 - 어떤 것들은 버려지고, 어떤 것들은 그대로 전달되며, 또 어떤 것들은 적당히 변형 된다 - 을 통해 인간은 역사적 존재가 된다.

 

이에 반해 사물 혹은 사건 그 자체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 사물 혹은 사건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스스로는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다. 사물은 인간에게 인식되고, 언어를 부여받으면서 독특한 의미 체계 속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역사적 존재인 인간의 의미망 속에 포착됨으로써 역사화 되는 것이다.

 

사물 혹은 사건이 인간의 언어 속에서 역사화된 존재가 되고 나면 기록 속에서 과거라는 시간대로 편입되고 회자되게 된다. 그리고 과거 속에 기록을 통해 역사화된 존재는 계승을 통해 현재의 정치 속에 기입된다. 버려지지 않고 계승된다는 것은 그 사물 혹은 사건이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역사화된 존재는 현재의 시간에 남아 반성의 계기가 되거나 본받아야 할 이상이 되어 미래로 투사된다. 반성의 계기로서의 역사는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계획의 지평을 마련하고, 본받아야 할 이상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한 준거가 되어 미래로 투사되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경향일보의 한 사설은 “친일사전은 과거 단죄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은 친일인명사전을 계기로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치유”해야 하며, 그것이 “역사 정의 실현의 단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 정의 실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있다는 선형적 이행의 시간이 역사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화된 존재는 과거 속에서 이미 사라진 대상이라는 점에서 상실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료라는 형태로 현재에 남는다. 이러한 태도는 상실을 상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아의 일부를 상실된 대상과 동일시함으로써 상실된 것을 자아 속에 보존한다는 점에서 우울증적 구조와 일치한다. 우울증적 태도는 이미 상실된 역사화된 존재를 상징화 이상화 시켜 현재 속에 삽입시킨다. 이렇게 역사화된 존재들은 잃어버린 정통성, 상실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명분으로 현재의 정치 속으로 회귀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역사화된 존재의 회귀가 이상화, 상징화된 민족적 표상이라는 형식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고통은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행한다. 이러한 선형적 역사의 이행은 역사의 시간 외부에 있는 존재들, 즉 역사화 되지 못한 존재들을 망각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고통의 공통성에 기반을 두고 역사적 기억으로부터 시작해 미래를 지향하는 결속체, 에르네스트 르낭은 이것을 민족(nation)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역사화된 존재를 되살려 “역사 정의를 실현”하고 “국가 정통성”을 세우려는 노력의 이면에는 민족과 국가의 결속(민족-국가)을 강화시키는 정치적 기능이 숨어 있다. 이러한 정치적 기능 속에서 망각된, 역사화 되지 못한 존재들, 역사적 시간에서 추방된 시간들, 그의 역사(history)에는 포함되지 못한 그녀들, 망명자들, 이민자들, 외국인 노동자들은 체계적이고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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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정치에 다가가기

 
이달 23일 시행되는 개정 저작권법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번 저작권법의 핵심은 일명 ‘인터넷 삼진 아웃제’라고 불리는 제도의 도입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음악 등의 저작물을 허락 없이 대량 유포하는 업로더의 계정이나 인터넷의 게시판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3회 경고 후 최대 6개월까지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사법부의 판단 없이 행정부가 죄를 판단하고 처벌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월권을 내포한 제도이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삼권분립이라는 원칙을 직접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과 관련된 분쟁은 침해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기 어렵기 때문에 법원에서도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행정권력이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규제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권력자의 시선으로 규제할 수도 있고, 거대 기업의 경우 각종 로비를 통해 행정명령을 무력화 시킬 위험도 있다. 때문에 인터넷 삼진 아웃제는 행정권력에 의한 인터넷 사업자와 이용자에 대한 일방적 통제가 확대될 위험성을 잉태한 제도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저작권법 개정안은 더욱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논란이 발생하는 지점도 바로 이 곳인데, 그것은 바로 표현의 자유라는 영역이다. 특히 인터넷이라는 영역에서 표현의 자유는 핵심적인 동력이 되는 만큼 문제를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이제 상식을 넘어 식상하고 진부한 것이라 표현될 만큼 기본적인 권리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 정부의 통치하에서는 역대 그 어느 정권보다도 심각하게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 (이 글에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는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를 모두 이야기 하긴 힘들다. 관심이 있다면 지난달 22일 문화연대를 비롯한 진보넷, 인권운동사랑방 등이 공동으로 발표한 <이명박 정부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보고> 기자회견문을 참조하라.)

 

물론 개정 저작권법에서 추진하고 있는 ‘인터넷 삼진아웃제’가 유독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기는 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에도 인터넷 삼진 아웃제(Three strike out policy 혹은 유럽권에서는 graduated response-누진대응) 입법을 추진 중이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이미 이 제도의 입법을 추진했었지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 때문에 시민 사회 단체의 주도로 위헌소송이 제기되었고, 결국 프랑스 헌법위원회는 지난달 10일 위헌 판정을 내렸다. 프랑스 헌법위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은 인권에 관한 문제”라고 명시하고 개인의 인터넷 접근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은 법원 판사의 판결을 통해서 부여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이와 관련된 일부 내용을 수정해서 이달 8일에 안건을 재상정 했고, 상원 의결을 통과했다. 수정된 내용은 인터넷 접속을 차단할 수 있는 권한을 신설되는 정부 전담기구인 아도피(Hadopi)에 두었던 것을 판사에게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처럼 인터넷 표현의 자유와 그것을 규제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최근 중국의 청소년 보호용 인터넷 차단 프로그램인 그린댐(Green Dam)을 비롯해 호주나 뉴질랜드, 영국, 스웨덴,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다.

 

해외의 사례에서 발견된다고 그 제도가 정당화를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인터넷 규제 법규들은 해외의 사례와 차별되는 독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인터넷 규제 시도가 저작권을 이용해 정치적 맥락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외국의 사례에서 발견되는 삼진 아웃제는 저작권을 어긴 인터넷 이용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개정저작권법은 이용자 삼진아웃뿐 아니라 게시물이 올라간 게시판까지도 삼진아웃 시키겠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로써 인터넷 상에서 적극적인 정치적 발화가 이루어지던 아프리카 TV나 아고라의 게시판을 활동 정지시킬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 다시 거대 언론사나 그것의 대리 역할을 하는 법무법인들이 시민 단체 등을 상대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는 행위에 대해 저작권 침해 배상 요구를 하고 있다. 신문 기사의 제목만을 노출시켜놓고 이를 클릭했을 때 해당 신문사 사이트로 이동하도록 링크를 거는 행위는 합법이지만, 기사를 스크랩하는 행위는 저작권법 위반이기 때문이다. 스크랩은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토론을 유도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일반적 행위이지만, 그 자체를 불법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특히나 기사 스크랩에 따른 저작권 침해 배상 요구는 재정이 취약한 시민단체를 표적으로 삼아 그 단체를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악용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저작권법의 목적은 창작자에게 창작물에 대한 일정한 보상을 부여함으로써 창작 활동을 활성화 시키고 나아가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데에 있다. 창작 활동이란 표현의 자유를 기반으로 삼지 않으면 결코 활성화 될 수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시행되고 있는, 혹은 앞으로 시행될 저작권법은 창작 활동의 기반이 되는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저해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상황에서 악용될 소지를 가지고 있다. 지금 연출되고 있는 것은 법을 만든 정부가 자신이 만든 법의 원래 목적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테러범도 피해가는 저작권법의 힘


정보를 제3자가 사용한다고 해서 아이디어나 정보의 창작자 또는 보유자가 가진 지적재산은 양적으로 줄어들거나 그 효용이 감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아이디어와 정보를 이용할수록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후생과 이익은 커진다. 특히 인터넷은 정보를 유통시키는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정보의 가치를 증진시켰다. 인터넷의 힘이 가진 긍정성은 타인이 정보에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정보는 소유가 아닌 공유를 통해 가치를 증진시키며, 정보기술의 혁신은 공유 문화를 확산 시킬 수 있는 기술적 배경이 된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과 내가 사과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서로 교환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나와 당신은 각각 하나의 사과를 가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과 내가 아이디어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서로 교환 한다면 우리는 두 개의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역시 “내게서 어떤 생각을 전달받는 사람은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지만, 그로 인해 나의 지식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는 내 촛불에서 자기 초에 불을 붙여 간 사람은 빛을 얻게 되지만, 그로 인해 내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고 말한다.

 

버나드 쇼나 제퍼슨의 말은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 결코 지식 혹은 그것의 사용에 대한 독점이 아니라 공유와 나눔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저작권법은 이런 의미에서 문화 발전에 대한 기여라는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저작권법은 창작물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끊임없이 권리자에게 귀속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창작물에 대한 권리가 창작자가 아닌 그 권리를 사들이거나 양도받는 기업에 귀속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창작자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다. 창작자는 자신의 창작물을 유통시키기 위해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 기업에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의 일부 혹은 전부를 해당 기업에 (계약을 통해) 양도해야하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작권의 왜곡된 법 체계보다 더욱 위험해 보이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저작권이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영역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저작권법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잘못 악용될 경우 극도로 위험할 수 있다. 유나바머로 알려진 카진스키(Theodore John Kaczynski)의 사례에서 이러한 위험성을 확인할 수 있다.

 

유나바머는 대학과 공항을 중심으로 폭탄테러를 자행한 테러리스트이다. 유나바머는 1995년 테러를 중단하는 조건으로 유력지에 과학문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과학기술문명비판논문 게재를 요구했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지에 그의 논문이 실렸다. 이것이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제목을 가진 유나바머 선언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선언문의 각주 16번에는 “만약 저작권법이 문제가 되어 게재가 불가능하다면 주16을 다음 문장으로 바꿔주기 바란다”는 구절이 나온다. 유나바머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16차례에 걸친 폭탄테러를 행한 현대 사회의 가장 위협적인 테러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폭탄테러라는 강력한 무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저작권법 때문에 자기 글이 실리지 못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선언문에서 그는 자신의 테러를 하나의 혁명이라고 말하며 “혁명의 목표는 정부의 전복이 아니라 현존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테크놀로지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대사회를 병들게 한 것은 각종 테크놀로지라고 비판하는 극단적인 기술혐오주의자였고, 주된 테러 대상도 대학에서 테크놀로지를 연구하는 학자였다. 문제는 그의 공격 대상인 각종 테크놀로지가 자신이 존중하는 저작권이나 특허와 같은 지적재산권을 통해 보호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96년 체포 당시 그는 산골 오두막집에서 전기와 수도도 없이 살고 있었다. 그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현대문명을 등진 채 살고 있을 정도로 테크놀로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정작 그것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지적재산권을 문제 삼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처럼 저작권과 같은 지적재산권은 인간의 의식 영역에 침투해 내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유나바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 내면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저작권의 위력이다. 앞서 지적했듯 저작권법의 강화는 창조성과 같은 (협소한 의미의) 문화적 퇴보를 야기시킬뿐 아니라 특정 정치적 맥락에서 이용될 경우 법적 감시와 통제 그리고 처벌을 통해 정치적 개인들이 가진 비판의 언어를 탈각시키는 기재로도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즉 정치적 맥락에서 기능하고 있는 저작권법 집행 및 개정의 방향은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하나의 증상처럼 보인다. 이제 저작권법은 단순한 하나의 규제가 아닌 듯하다. 그것은 민중의 정치적 삶의 방식을 강제적으로, 그러나 내면 깊숙이 변화시키는 정치적 매개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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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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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의 정치, 그리고 그 정치의 희생양

 

 

정치적 신체의 재현

 

1957년 에른스트 칸토로비치(Ernst Kantorowicz)는 <왕의 두 신체(The King’s Two Bodies)>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왕이 자연적 신체(body natural)와 정치적 신체(body politic)라는 두 가지 신체를 가진다고 말한다. 자연적 신체는 온갖 결함과 노화를 겪고 시간이 흐른 후에는 죽음을 맞이 할 수 밖에 없는 신체인 반면, 정치적 신체는 ‘정치형태와 정부를 구성하는, 보이거나 조정될 수 없는 신체’이다. 정치적 신체는 자연인으로서 왕의 신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무능력에 의해서도 좌절되거나 무가치해 질 수 없다. 정치적 신체는 자연적 신체를 부인함으로써 자신을 성립시킨다. 때문에 정치적 신체는 물리적 현존(presentation)이 아니라 재현(representation)된 이미지에 의존한다. 노무현의 죽음 역시 같은 방식으로 바라 볼 수 있을듯 하다. 그의 죽음은 개인의 물리적 죽음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죽음이다. 그는 죽음 이후에 재현된 이미지를 통해 정치적 신체를 제공받아 사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죽음 이후에 부여된 그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하나는 탈정치화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현정권의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이미지이다. 어딘가에서 노무현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이 보도된 이후 인터넷과 신문, 티비, 라디오 등 온갖 매체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애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에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언론 뿐 아니라 시민들도 여러 경로를 통해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신체에서 정치성을 탈각시키기 위해 노력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미 넘치는 서민의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었다. 밀집모자를 쓴 그의 사진은 ‘정치인 답지 않은 소탈함’, ‘파격적인 탈 권위주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 힘썻던 가난한 이의 대통령, ‘서민 대통령’을 대리 표상하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 노무현은 정치적 희생양의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그는 부자 대통령 이명박의 정치에 조롱당한 ‘바보 노무현’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타살당한 저질 정치의 희생양인 것이다. 여기서 노무현은 마치 타락한 현대 정치의 모든 원죄를 짊어 지고 죽은 성자처럼 재현된다. 탈 권위적 소탈함을 지닌 서민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는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지저분한 정치와 대비를 이루며 희생의 숭고함을 부각시킨다. 그의 죽음 이후 지속되고 있는 애도와 추모는 마치 종교 의례와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의 죽음 이후 재현된 이미지가 종교적 색채를 띄고 있는 것과 관계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타락한 정치적 상황이라는 맥락,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배자의 가혹한 박해 그리고 그들의 고난, 온갖 고난 이후의 죽음, 죽음 이후의 삶. 이 것들이 노무현의 죽음을 종교적으로 만드는 요소들이다.  사람들이 남긴 애도의 글 속에서 발견되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현실정치에 대한 혐오와 자기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고백이다. 희생된 노무현의 죽음이 종교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이런 타락과 무력함에 애도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점 때문이다. 마치 그리스도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음으로써 타락한 ‘우리’의 죄를 사하고 구원했듯이 말이다. 적절하게도 노무현을 추도하는 어느 한 광고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당신은 우리의 책임 회피를 죽음으로 모조리 용서하셨다. 우리는 당신을 애도하며 다시금 종에서 주인이 되었다.”(경향신문 5월 26일, 전대협동우회)

 


희생적 죽음의 정치적 효과

 

희생적 죽음은 강렬한 심리적 효과를 가진다.  희생적 죽음은 정치의 타락을 방조한-살아 남은-사람들에게 심리적 고통과 부채를 남기고, 그것들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래를 위한 계획의 지평을 열어 놓는다. 그것은 현재의 원인이며 미래로의 지향을 남긴다. 부채와 고통을 공유하는 이들은 상상적인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미래로의 지향은 이 ‘상상의 공동체’의 몫이 된다. 이 ‘상상의 공동체’는 외적으로는 확고한 경계를 가진듯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상당히 허술하다. 공동체가 내적인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는 정례화된 의례의 역사적 축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의 허술한 기반 -신화화된 정치적 초상에- 기대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민주당의 노력은 그래서 빈약해 보인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급속히 올라간 민주당의 지지율은 그 기반 만큼이나 허술한 것이다. 한나라당의 경우는 상당히 다르다. 그들은 이 ‘상상의 공동체’의 ‘우리’ 속에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 혹은 ‘우리’의 경계 자체가 한나라당에 대한 정치적 반감으로 형성된 것이기까지 하다. 한나라당은 ‘우리’의 외부에 있음에도 그 내부를 지향하는 포즈를 취한다. 그들이 취하는 포즈는 바로 화해와 통합이라는 정치적 수사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와 ‘그들’을 화해시키고 통합함으로써 자신들을 향한 적대성을 제거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나거나, 오히려 적대를 강화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화해와 통합에서 ‘쇄신’으로 국면 전환을 꾀하게된다.)

 

노무현의 죽음을 추모하는 이들과 민주당 그리고 한나라당은 대립구도 속에 있지만, 그 대립항에 기대어서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를 포함하는 구조를 이룬다. 그들은 서로 포함인 배제이며, 배제인 포함 관계에 있다. 문제는 서로를 포함하는 이러한 ‘상상의 공동체’에 배제의 형식으로조차 포함되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전 대통령의 서거와 그 이후의 추도 정국 때문에 언론과 정치에서 잠시 밀려난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밀려나 있는 존재들이다.

 

노무현은 죽음 이후 (그 자신조차도 거부했던) 국민적 영웅으로 재탄생한 반면, 그들은 살아 있을 때조차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그를 추모하는 이들이 상상적 공동체를 형성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칠 때에도 그들은 이름 없는 존재들이었다. 국가 폭력에 의해 살해당한 후 아직까지 장례도 못치르고 있는 용산의 철거민들, 유서에 자신의 상처만을 언급했던 노무현과 달리 노동자 민중의 고통을 유서에 남기고 죽어간 박종태, 추모객들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주권의 주체인 국민으로 호명하는 순간 배제되어 버린 이주 노동자들, 시청에 모여 국민장을 치를 때조차 그 곳까지 찾아갈 접근권을 박탈당한 장애인들. 그 열렬한 추도 행렬에서 이 모든 이들의 존재가 망각되어 있었다. 그들은 ‘온 국민’이 슬퍼하고, ‘우리 모두’ 책임 져야 한다는 노무현의 죽음 뒤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온 국민’에도 ‘우리 모두’에도 속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게 아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화화된 정치적 초상을 등에 업은 ‘우리’들이 ‘밀려나 있는 존재들’을 서술할 어떠한 언어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추도는 자연적 신체가 아닌 정치적 신체에 대한 추도였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분노 했던 것도 mb정권의 정치적, 경제적 실정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신체에 투사된 것이었다. 그에 대한 추도가 탈정치적 이미지를 통해 재현될 때조차 그것은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추모 열기 속에서 나타난 정치적 냉소는 mb정권을 향한 것이었지만, 그것의 효과는 ‘밀려나 있는 존재’들과의 소통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노무현을 추모하는 ‘우리’는 그 ‘존재들’과 소통을 포기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번역할 언어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저항도, 체계적인 담론이나 논쟁도 형성되지 못한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언어란 어딘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들을 통해 우리는 발언하고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냉소가 아니라 소통과 연대이다. 정치적 개입이란 하나의 사안에 매몰되어 그것을 해결하고 난 후에 다른 것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위기는 언제나 총체적인 것이며 하나의 문제는 다른 문제들과 구조적으로 얽혀 있다. 이것이 지금 소통과 연대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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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스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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