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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01
    [서평]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1)
    와라
  2. 2009/11/20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정치적 함의
    와라

[서평]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교양으로서의 역사와 정치

 

짧은 한 권의 책에 (세계)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기획이다. 역사가 과거에 대한 기록이라면, 그 과거란 획정될 수 없는 무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수많은 책들을 접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저자가 취하고 있는 독특한 관점이다. 이런 류의 책은 특수한 관점을 매개로 과거의 사건들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이 책에서 저자인 사이토 다카시는 (세계)역사를 관통하는 다섯 가지 힘을 제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 인간은 역사적 소여를 준거로 언어를 습득하고, 소통하며, 그 안에서 지식을 얻고, 행위의 근거가 되는 사회적 합리성을 형성시킨다. 다시 말해 특수한 문화적 요소들의 전승을 통해 인간은 역사적 존재가 된다. 이에 반해 사물 혹은 사건 그 자체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 사물 혹은 사건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스스로는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 존재인 인간의 의미망 속에 포착됨으로써, 인간에게 인식되고 언어를 부여받음으로써 ‘역사화’ 된다. 때문에 우리는 역사(라고 불리는 것)와 마주할 때, 그것을 소환한 주체의 의도와 입장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때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 의도와 입장의 이면에 직접적인 배후와 음모 혹은 치밀한 이데올로기적 공작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책에서 저자가 왜 (세계)역사를 다섯 가지 키워드로 엮어 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아쉽지만, 저자는 그 키워드를 고도의 정치적 계산 위에 배치시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 다섯 가지의 키워드들은 비일관적이며, 우연적인 것처럼 보인다(어떤 일관성을 찾아내기에 이 책은 너무 허술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이토 다카시가 선택한 다섯 가지 키워드 대신, 그 자리에 폭력, 시공간, 혁명, 합리성, 매체, 전쟁 등등 갖가지 키워드를 삽입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전문 학술서가 아니라, 흔한 하나의 교양서일 뿐이라고 말하며 이런 비판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학술서도 아니고 교양서가 이정도면 됐지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건 그리 중요한 변명이 되지 못한다. 교양이라는 것 자체가 근대 부르주아 사회가 만들어낸 정치적 범주이기 때문이다. 교양 있는 사람은 시민(문명)화 되고(civilized), 문화화 되고(cultured 혹은 cultivated), 교육 받은(educated) 사람이다.(civilized, cultured, educated는 모두 '교양있는'이라고 번역되는 언어이며, 이는 부르주아 시민을 구성하는 세 영역, 즉 문명, 문화, 교육을 지시하는 언어들이다.) 교양은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받아들여야 하는 미덕인 것이다. 교양은 시민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상식이며, 상식(common sense)은 시민들의 공통 감각(common sense)을 형성함으로써 그들에게 각인된다. 교양이나 상식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지평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사이토 다카시는 자신의 책이 시중에 널려 있는 “통사류의 세계사 책”과는 “차원이 다른” 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역사 기술이나 대안적 역사 인식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기 보다는 보편화된 편견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들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판했던 역사(기술)의 지점들을 반복하고 있다. 이 책은 세계사라는 이름으로 (간혹 일본사가 언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서구의 역사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있으며, 제국주의를 남성들의 정복 욕망으로 환원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인공적” 사회주의에 대한 “자연 발생적” 자본주의의 궁극적 승리가, 나아가 “자본주의의 미래가 인류 전체의 미래”가 될 것임이 선언되고 있다.

 

일관성 없는 관점이나 치밀하게 계산되지 않은 (역사적)사건들의 나열은 역사 기술에서 가치 개입이 배제되어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은 교양서의 보편성을 가능케 하는 비정치성(처럼 보이는 것)과 연루되어 있다. 그러나 서구의 역사가 세계의 역사라고 가정하고, 남/여의 성 역할과 특성을 고정시키고, 대체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것만큼 정치적인 것이 또 있을까. 이런류의 역사 교양서와 마주할 때 우리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요구되는 교양으로서의 역사, 그 역사 속에서 무엇이 계승되고, 무엇이 반복되고, 그리고 무엇이 망각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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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대학원 신문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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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발간의 정치적 함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정치적 함의

: 미래를 향한 역사 그리고 민족과 국가의 결속

 

 

조선과 동아가 발작을 일으켰다. 친일인명사전의 발간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대한민국이 친일 청산을 못해 정통성이 북에 비해 부족하다는 좌파사관의 확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동아일보는 사전이 발간된 바로 다음날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 노린 좌파 사관 친일 사전”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조선과 동아를 제하고도 사전 발간은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만한 논란을 일으켰다.

 

조선과 동아를 비롯해 사전에 등재된 당사자의 후손은 물론이고,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네티즌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친일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자극적인 용어인듯하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정치적 올바름, 민족 정체성, 국가 정당성과 관련된 논의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조선과 동아의 발작은 이 사건이 가지는 외상적 강렬함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그런데 사전의 발간은 현재 일고 있는 논란과는 다른 층위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전을 발간한 이들도, 그것을 옹호하는 이들도, 혹은 반대하는 이들까지, 그들이 진보이건 보수이건 간에, 모두 역사가 함축한 가치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사전 발간과 관련된 논란은 그 (역사적 가치에 대한 동의라는) 기반 위에서 역사적 사실의 진위 문제, 인물 선정의 기준의 편향성 여부, 그것의 정치적 악용문제 등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좀 뜬금없긴 하지만 이러한 논란에서 한 발짝 비켜서서 이 논란이 기반을 두고 있는 ‘독특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도 논의해 볼만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 인간은 역사적 소여를 통해 언어를 습득하고, 소통하며, 그 안에서 지식을 얻고, 행위의 근거가 되는 사회적 합리성을 형성시킨다. 다시 말해 특수한 문화적 요소들의 전승 - 어떤 것들은 버려지고, 어떤 것들은 그대로 전달되며, 또 어떤 것들은 적당히 변형 된다 - 을 통해 인간은 역사적 존재가 된다.

 

이에 반해 사물 혹은 사건 그 자체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 사물 혹은 사건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스스로는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다. 사물은 인간에게 인식되고, 언어를 부여받으면서 독특한 의미 체계 속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역사적 존재인 인간의 의미망 속에 포착됨으로써 역사화 되는 것이다.

 

사물 혹은 사건이 인간의 언어 속에서 역사화된 존재가 되고 나면 기록 속에서 과거라는 시간대로 편입되고 회자되게 된다. 그리고 과거 속에 기록을 통해 역사화된 존재는 계승을 통해 현재의 정치 속에 기입된다. 버려지지 않고 계승된다는 것은 그 사물 혹은 사건이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역사화된 존재는 현재의 시간에 남아 반성의 계기가 되거나 본받아야 할 이상이 되어 미래로 투사된다. 반성의 계기로서의 역사는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계획의 지평을 마련하고, 본받아야 할 이상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한 준거가 되어 미래로 투사되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경향일보의 한 사설은 “친일사전은 과거 단죄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은 친일인명사전을 계기로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치유”해야 하며, 그것이 “역사 정의 실현의 단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 정의 실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있다는 선형적 이행의 시간이 역사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화된 존재는 과거 속에서 이미 사라진 대상이라는 점에서 상실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료라는 형태로 현재에 남는다. 이러한 태도는 상실을 상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아의 일부를 상실된 대상과 동일시함으로써 상실된 것을 자아 속에 보존한다는 점에서 우울증적 구조와 일치한다. 우울증적 태도는 이미 상실된 역사화된 존재를 상징화 이상화 시켜 현재 속에 삽입시킨다. 이렇게 역사화된 존재들은 잃어버린 정통성, 상실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명분으로 현재의 정치 속으로 회귀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역사화된 존재의 회귀가 이상화, 상징화된 민족적 표상이라는 형식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고통은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행한다. 이러한 선형적 역사의 이행은 역사의 시간 외부에 있는 존재들, 즉 역사화 되지 못한 존재들을 망각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고통의 공통성에 기반을 두고 역사적 기억으로부터 시작해 미래를 지향하는 결속체, 에르네스트 르낭은 이것을 민족(nation)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역사화된 존재를 되살려 “역사 정의를 실현”하고 “국가 정통성”을 세우려는 노력의 이면에는 민족과 국가의 결속(민족-국가)을 강화시키는 정치적 기능이 숨어 있다. 이러한 정치적 기능 속에서 망각된, 역사화 되지 못한 존재들, 역사적 시간에서 추방된 시간들, 그의 역사(history)에는 포함되지 못한 그녀들, 망명자들, 이민자들, 외국인 노동자들은 체계적이고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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