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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바람에 사라져가는 교육의 공공성과 창작(물 이용)의 자유

저작권 바람에 사라져가는 교육의 공공성과 창작(물 이용)의 자유

 

얼마 전 문광부에서는 보도자료를 통해 대학에 ‘수업 목적 저작물 이용 보상금’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예고했다. 이 제도는 이미 2006년 저작권법 개정을 통해 예비되어 있었다. 문광부는 이 제도가 “저작권자들과 대학들 간의 보상금 기준에 대한 합의가 지연”되고, “대학들의 재정부담” 등의 문제를 고려하여 시행을 유보해 왔었지만, “지난 2009년 전국 4년제 및 2년제 50개 대학 실태조사를 실시, 저작물 종류별(어문, 음악, 영상 등) 보상기준을 마련”했고, “2010년부터는 전국 대학교를 대상으로 수차례 공청회 및 의견조회를 실시”하며 어느 정도 의견이 수렴되었기에 이 제도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학 측에서는 이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으며, 여전히 제도 자체가 가진 문제도 산재해 있어 논란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고려대 이대희 교수는 ‘수업 목적 보상금’제도의 도입을 찬성하며, “저작물 이용에 대한 이용료를 지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어서 이용료 지급에 대해 논란을 벌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고, 저작물에 대해 “일일이 이용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교수 행위가 위축되고 수업시간에 활용할 수 있는 저작물은 제한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제도의 시행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많은 문제을 안고 있다.

 

우선 저작권을 통해 창작물이 개인의 소유물로 전유된 것은 저작권법이라는 특수한 법이 만들어진 이후 발생한 현대적 현상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미국과의 통상 협정을 통해 기존의 유명무실했던 저작권법이 전부개정되며 효력을 발휘한 것이 불과 25전이다. 또한 대학에서 학술적 목적으로 자료를 공유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서적의 경우 한국의 출판 시장의 기형적 구조로 인해 학술 서적은 출간되거나 번역된지 몇 년만 지나도쉽게 품절되어 구할 수 없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를 보충할 수 있는 도서관의 수준도 열악할 뿐 아니라, 중고 서적 시장도 크게 활성화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교육과 학술은 사회적이고 공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영역이다. 저작권법의 목적이 “문화의 향상 발전”에 있다면, 그러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는 공정이용으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이대희 교수는 저작물의 사용에 대해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교수 행위가 위축될 것이기 때문에, 이 제도의 도입을 통해 교수 행위의 위축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교수 행위에 문제를 발생시킨 것 자체가 저작권법이기 때문이다. 없던 문제를 만들어 놓은 후에 다시 해결하겠다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용어로 따지자면) “비합리적인 것”이다. 처음부터 문제를 만들지 않으면 된다. 교육이나 학술의 영역과 같은 공적 영역에 대해서는 저작권을 제한하는 것이 더 쉬운 해결책인 것이다.

 

이 제도의 도입을 반대하는 대학 역시 문제적이다. 대학에서 이 제도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제도의 도입이 등록금 인상의 빌미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 피해를 학생들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이 제도를 시행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대학에서 저작물을 사용하는 경우는 교육의 교보재로 활용하는 것이다. 대학은 교육을 하는 곳이고, 교육을 위한 수단들은 대학에서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하나이다. 현재 한국의 대학생들은 이미 자신들이 받는 교육 서비스를 훨씬 넘는 수준의 등록금을 지불하고 있다. 학교에 지불한 금액 대비 학생들이 제공받는 교육 서비스의 수준을 고려하면, 그것은 등가 교환의 원리조차 적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제공해야할 서비스를 학생들에게 전가시키면서, 짐짓 학생들을 위하는체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 측에서 이 제도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입장에서의 반대여야 하며, 공적 영역으로서의 교육에 시장논리를 도입하려는 시도에 대한 반대여야 한다.

 

수업목적 보상금 제도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시 창작과 보상이라는 오래된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창작 노동에 대해 일정정도의 보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보상 시스템은 소수의 창작자에게 부여되는 과잉 보상 혹은 대부분의 창작자에게 부여되는 과소 보상의 형태로만 나타나고 있다. 적절한 보상이란 어느정도 수준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소위 말하는 대박 혹은 쪽박 형태로 이루어지는 현재의 보상 체계는 분명 문제가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상 체계는 보상 자체가 아니라 분배 체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이번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문광부에 따르면 대학은 문광부 고시 기준에 따라 (사)한국복사전송권협회와 개별약정을 체결해야 한다. 그런데 복사전송권협회는 대학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창작물들, 즉 영화, 음악, 도서, 공연, 방송, 미술, 사진 등 다양한 창작물들의 전체 권리자를 대표하는 단체가 아닐뿐더러, 획득된 보상금을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단체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분배 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현재 수업목적 보상금 제도는 사적 단체를 매개로 대학으로부터(정확히는 대학생들로부터) 국가가 저작물 보상금을 갈취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렇다면 분배 체계만 갖춰지면 이 제도의 타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선 하나의 사적 단체가 국가 전체의 저작권자를 대신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또한 앞에서 제시한 교육의 공공성 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현재 문화산업의 구조도 직접 창작자에게 보상이 돌아가는 체계가 아니다. 거대 문화 산업 기업은 개별 창작물의 유통 통로를 장악하고 있고, 이 유통망에 진입하기 위해서 창작자들은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의 일부 또는 전부를 기업에 양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양도 절차, 즉 거대 기업과 개별 창작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저작물 권리에 대한 양도 절차는 철저하게 창작자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창작물에 대한 보상은 개별 창작자에게 돌아가기 보다는 거대 문화 산업 기업에게 돌아간다. 요컨대 창작물에 대한 보상이 창작자에게 직접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창작자에게 적절한 보상을 보장함으로써 창작에 대한 인센티브를 부여하여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 한다는 저작권법의 목적과 배치되는 것이다. 저작권법이 최소한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수업목적 보상금 제도와 같은 것을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창작물에 대한 보상과 보상금 분배의 체계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 제도가 가진 법리적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법의 기술적 실효성에 관한 문제는 아니다. 문제적인 것은 법과 그것의 적용 사이에서 나타난다. 현재 시행예정인 이 제도는 기본적으로 모든 학생을 잠재적인 저작권법 위반자로 상정하고 있다. 또한 대학에서는 분과학문의 특성에 따라, 강의의 특성에 따라, 그리고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의 특성에 따라 강의에 활용하는 저작물의 이용 빈도와 정도가 상이하다. 일괄적으로 저작료를 학생에게 전가할 경우(문광부 산정 1년에 1인당 3580원) 어떤 학생들은 사용하지도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단순히 저작물을 사용한 사람이 그에 대한 대가를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우기 위한 말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초적인 (자유주의적) 불공정이 아니라 저작물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저작권법 앞에 세우고, 경유하게 하는 이 제도의 특수한 측면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저작권법은 (창작자가 원하지 않을 때 조차) 모든 창작물에 (경제적)권리를 부여하고(무등록주의), 모든 이용자에게 창작물 이용에 대가를 지불하게 한다. 요컨대 저작권법은 창작과 문화적 생산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창작자이든 이용자이든)을 법 앞의 개인으로 호명하고, 그들에게 권리와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심지어 창작물을 생산하지 않고, 이용하지도 않는 사람조차 이런 원칙에 포섭시켜야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법은 무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저작권법을 몰랐다는 말은 그것의 위반에 대한 핑계가 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일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제도의 경우에는 특정 집단인 대학생들을 저작권법 앞에 세우고 저작권법의 적용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이 제도의 궁극적인 효력이다. 이 제도가 시행된 후에 그들은 자유롭게 창작하고 창작물을 이용하기 보다는, 저작권법과 그것의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규제 테크닉들을 매개한 후에 창작(물의 이용)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앞으로 그 수많은 규제 테크닉들 아래에서, 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 자유롭도록 강제당해야 한다. 이제 대학에도 저작권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그 바람에 날려 학술과 교육의 공공성도, 창작(물 이용)의 자유도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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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고소가 보여주는 이명박 정권의 통치 원칙

절대군주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 박원순 고소가 보여주는 이명박 정권의 통치 원칙

  

사건의 시작은 이렇다. 지난 6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위클리 경향과 인터뷰를 가졌다. 여기서 그는 국정원의 민간 사찰 의혹을 제기했다. 올 여름을 휩쓴 중요한 사회적 이슈 중 하나는 이메일 압수수색, 인터넷 패킷 감청 등 국가 감시의 문제였다. 일정정도의 위기의식을 느낀 국가는 느닷없이 수개월이 지난 일을 들추어 박원순에게 고소장을 들이밀었다. 9월 15일 발부된 이 고소장에는 박 변호사가 “지난 6월 ‘위클리 경향’과의 인터뷰에서 ‘국정원이 민간사찰을 해 시민단체들의 사업이 무산된다’는 식의 허위발언을 해 국가 안보기관으로서의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적혀 있다. 그러니까 박원순은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고소장의 원고가 대한민국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복종하지 않는자에게 가해진 치졸한 복수

  

이명박 정권에 들어 강하게 나타난 정치적 특징 중 하나는 국가에 의한 시민사회의 지배를 공고히 하려 한다는 점이다. 지배란 기본적으로 타자를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굴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국가의 지배는 시민사회의 굴복과 짝을 이루고 있다.

 

시민사회의 복종은 자발적으로 혹은 순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배는 언제나 복종에의 혐오를 통제할 수 있는 토대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 복종에의 혐오를 통제하는 토대가 바로 폭력이다. 지배는 폭력 행사를 근본적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때로 국가의 지배는 직접적 폭력이 행사 되지 않을 때에도 무리 없이 이루어 지는듯 하지만, 사실 그 때 조차 그 지배의 저변에는 폭력이 가장 혹은 변형된 형태로 놓여 있다.

 

자발적 복종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복종이 지배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실제로 자발적 복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지배에 예속될 때 복종은 피지배자의 완전한 동의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폭력적으로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이 반복될 때 복종은 자발적인 것처럼 보여 진다.

 

문제는 그 선택조차 온전한 의미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선택이란 외부 조건의 간섭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복종으로부터의 탈피, 즉 자유를 선택한다는 것은 지배자의 폭력에 노출되어 자신의 삶을 훼손당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로 진입하는 것이다. (올해 용산에서 목격한 것, 그 잔혹함에 치를 떨며 확인한 것이 바로 이러한 사실이다.) 따라서 복종은 선택이 아니다.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그래서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자유라면, 최악의 상태로 치닫지 않기 위해 복종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자유를 선택할 수 없도록 하는 것, 어쩔 수 없이 복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치적 억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종 대신 자유를 선택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저항이라 부른다. 자유를 선택하는 저항은 폭로, 시위, 캠페인, 혁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저항은 집단적으로 행해지기도 하고, 개별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때 가해지는 폭력(억압)의 방식 또한 고문, 검열, 감시, 감금, 추방 등 다양하다. 박원순 고소 사건은 지배에 저항하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방식 중 하나이다. 이 사건은 국가라는 거대 조직이 한 개인을 상대로 행하는 가장 치졸한 방식의 폭력을 보여준다.

 

어찌보면 법적 고소라는 것은 공적 규칙을 통해 시비를 가리는 것이므로 형식적으로는 폭력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거꾸로 이야기 되어야 한다. 박원순 고소는 폭력을 원초적 법 사실로 정립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것은 국가가 (언듯 합리적인 것처럼 보여지는) 법을 매개로 한 개인의 삶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원고는 대한민국, 피고는 국민

  

사실 국가가 군대나 경찰을 동원해 수 많은 개인에게 폭력을 가해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특이한 점은 그것이 법을 매개로 했다는 점, 그리고 명예를 훼손 당한 주체가 국가 자신이라는 점이다. 고소장에 원고가 대한민국으로 되어 있다. 국가가 원고가 되어 한 개인을 민사재판으로 불러들인 일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시민단체 뿐 아니라 보수적인 법학자나 단체마저 국가를 원고로 내세운 이번 고소가 법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법적으로 국가는 추상적 실체이므로 인격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격권이 없는 실체가 어떻게 명예를 훼손당할 수 있겠는가.

 

‘추측컨대’ 국정원이나 국가는 바보가 아니다.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을 몰랐을리 없다. 그러한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번 고소를 추진했다면, 이것은 이 정권의 무지가 아니라 그들이 준거하고 있는 통치 원칙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 정권은 국가의 토대가 되는 시민사회를 보호하고 유지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지배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사회를 보호하고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과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파괴하더라도 자신들의 지배의 조건들을 마련하는 것을 정치적 목표로 두고 있는 것이다.

 

지배의 조건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 폭력이다. 현대 정치 제도는 폭력의 무차별적 사용을 제한한다. 현대 정치에서 폭력은 이미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종영이 정확히 지적했듯 공적 폭력이란 그것이 지배를 위해서 사용되는 한에서, 즉 이른바 공공성이라는 것이 사실상 지배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갖는 한에서는 궁극적으로 사적폭력으로 환원된다. 이데올로기적 외장을 벗겨내고 제도적 매개를 제거하고 나면, 지배는 적나라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용산참사에서 확인되었으며, 박원순 고소를 통해 다시 한 번 반복되었다.

 

이 정권이 고소장에서 대한민국을 원고로 내세웠을 때, 즉 대한민국을 명예훼손 당할 수 있는 인격권을 가진 존재로 상정했을 때, 그 인격권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이 정권의 지배 세력들이다. 이 정권은 대한민국이 지배 세력의 것이라는 절대군주 시대에나 있을 법한 사고 방식을 통치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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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법 : 퇴보를 향한 위험한 도발

저작권법이 개정과 함께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저작권법은 ‘창조성과 같은 인간의 정신적 능력’과 ‘창조적 생산물을 향유하는 문화적 삶’을 구성하는 법적 규제의 하나이다. 인간의 정신적 능력과 문화적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위험해 보인다. 문화는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을 거치며 풍요로워져야 하는 무엇이다. 저작권법은, 특히 이번 개정 저작권법은 그것들을 통제하고 규제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무엇이 문제인지 한 번 살펴보자.

 

이번에 개정된 저작권법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일명 ‘인터넷 3진 아웃제’의 도입에 관한 것이다. 인터넷 3진 아웃제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음악 등의 저작물을 허락 없이 대량 유포하는 업로더의 계정이나 인터넷의 게시판을 저작권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3회 경고 후 최대 6개월까지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행정 권력의 과도함이라는 문제와 표현의 자유 침해의 문제 등을 지니고 있다.


개정 저작권법의 문제들


우선 개정 저작권법에 따르면 독립된 사법 영역을 행정 권력이 침해할 소지가 있다. 저작권과 관련된 분쟁은 침해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기 어렵기 때문에 법원에서도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개정 저작권법에 따르면 그것을 행정 권력이 판단한다는 것이다. 또한 현행법의 기준에 따르자면 저작권 침해 사례는 무수히 많기 때문에 전수 조사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행정 기관은 무수히 많은 침해 사례 중 일부를 자의적으로 골라내야 한다. 누군가는 법적 책임을 면제받고, 누구는 처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형평성의 문제를 낳는다. 그리고 저작권법 위반자나 게시판을 찾아낼 때 정치적 고려가 개입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저작권법에 따른 처벌 대상은 단순한 위반자나 게시판이 아니라, 행정 권력이 위반했다고 판단하는 이용자나 게시판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저작권을 위반했다고 판단된 게시판이 이용 정지될 경우 저작권 위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 역시 그 게시판을 이용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법에 저촉되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공간을 잃게 된다. 이를테면 ‘다음의 아고라’의 특정 게시판이나 디시인사이드의 어떤 갤러리를 행정 권력이 저작권법을 근거로 이용 정지 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이용자들에게 이것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일일 수 있다.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즉 자신의 표현물이 올라간 혹은 올릴 예정인 게시판이 정지될 수 있다는 위협 때문에 인터넷 이용자의 표현 행위 자체가 위축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위와는 아무 관계없이 자신이 올린 표현물이 일정 기간 동안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정 저작권법의 주 내용인 인터넷 3진 아웃제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이미 이 제도를 입법하려는 흐름이 있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 때문에 시민 사회 단체의 주도로 위헌소송이 제기되었고, 결국 프랑스 헌법위원회는 6월 초에 위헌 판정을 내렸다. 프랑스 헌법위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은 인권에 관한 문제”라고 명시하고 개인의 인터넷 접근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은 법원 판사의 판결을 통해서만 부여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인터넷 표현의 자유와 그것을 규제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최근 중국의 청소년 보호용 인터넷 차단 프로그램인 그린댐(Green Dam)을 비롯해 호주나 뉴질랜드, 영국, 스웨덴,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인터넷에 대한 규제 시도가 해외의 사례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그 제도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 나라에서 역시 인터넷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인터넷 규제 법규들은 해외의 사례와 차별되는 독특한 방식을 띠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한 게시판 자체를 일정 기간 동안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은 해외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개정 저작권법은 ‘헤비 업로더와 불법 복제물의 유통에 이용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상업적 이익을 제공하는 게시판을 규제’하는 것이며, ‘포털 등의 카페, 블로그, 미니 홈피 등은 정지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법안에는 ‘헤비 업로더’와 같은 개념 자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블로그나 활동 카페에 타인의 글이나 신문기사 등을 옮겨 놓는 행위는 모두 저작권법 위반에 해당한다. 행정 명령을 통해 블로그나 카페 등의 게시판도 정지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에서 산업으로


이러한 사실 이외에도 개정 저작권법에서는 눈에 띠는 변화를 한 가지 더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저작권법 1조(목적)의 한 문구이다. 우리나라 저작권법에서 1986년 1차 전부 개정 이후 2009년의 17차 개정 이전까지 1조는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었다. 이번 개정 이전에 저작권법 1조는 ‘저작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번 17차 개정에서는 1조의 ‘문화의 향상발전’이라는 문구가 ‘문화 및 관련 산업의 향상 발전’으로 바뀌었다.

 

이는 저작권법이 존재하는 실질적인 이유를 보여주는 증상적인 변화로 보인다. 어찌보면 이러한 변경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저작권법은 명목상 저작자와 저작 인접권자의 권리를 보호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지만, 저작권법을 통해 실제로 이익을 얻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해 본다면 이 법의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저작권법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 개인 창작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문화는 그러한 극소수의 개인들의 창작물을 통해서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하는 수많은 창작자들과 그들의 창작물을 공유하고 향유하는 이용자들, 그리고 창작물들을 활용해서 새롭게 해석하고 발견하는 패러디 작가들(겸 이용자들)등 모두의 노력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다. 저작권법은 그나마 있는 개인 창작자에게 돌아 가야할 권리마저 특정 기업이나 조직으로 전환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저작권을 포함한 지적재산권의 제도화와 함께 개별 창작자의 이득은 거대 기업의 이익으로 대체된다. 개별 창작자들은 종종 무시되거나 착취당한다. 기업이나 정부에 고용된 이들이 보호할만한 가치를 가진 창작물을 만들어냈을 때 그것은 해당 조직의 저작물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은 창작물이 유통되는 과정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상품이 유통과정에 들어가기 위해서 창작자는 판매자가 되어야 하는데 개별 창작자는 직접 판매 활동을 하는데 한계가 있다. 상품의 유통로를 거대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 창작자는 판매자가 된다 하여도 거대 기업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창작자는 자신의 생산물을 판매하기 위해서 유통로를 장악하고 있는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판매의 유통로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계약을 통해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의 일부 혹은 전부를 이전받는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창작물은 기업소유가 되고 창작물의 판매에 따른 보상은 기업으로 돌아간다. 창작자의 개성은 기업의 자본이 된다.

 

이처럼 저작권법은 개별 창작자를 보호하기 보다는 저작물이 탄생하는 산업 구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번 개정 저작권법 1조의 문구 개정은 저작권법의 실질적 목적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저작권법의 개정은 이러한 목적을 충실히 실행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문화 산업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말 그대로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들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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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작가>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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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망명 : 억압적 국가를 거부하는 정치적 사유의 매개

 

한국판 위키 백과에 따르면 사이버 망명은 2009년 6월 “검찰의 PD수첩 수사 관련 내용”이 발표되면서 불거진 용어이다. 지난 6월 검찰에 의해 PD수첩 작가의 이메일 내용이 공개되면서, 사생활 보호 및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국가 권력에 의해 심각하게 침해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 이후에 YTN 노조원들의 이메일이 압수수색 당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러한 불안감은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사실 이와 같은 사이버 검열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지난 4월 주경복 전 서울시교육감 후보에 대한 선거법 위반 수사에서 수사 대상자 100여명의 이메일 7년치가 압수수색 당한 바 있다. 사이버 망명은 이와 같은 국가 권력에 의한 인터넷 규제에 대한 저항의 한 방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인터넷 본인확인제, 통신비밀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저작권법 등 나날이 인터넷에 대한 국가 권력의 규제는 확대되고 있으며, 사이버 망명 역시 계속 확대되고 있다.


포섭과 탈주가 경합하는 사이버 공간


망명이란 정치적 탄압이나 종교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타국으로 도피하여 보호를 요청하는 행위를 말한다. 망명을 정의하는 데는 두 가지 핵심적 요소가 필요하다. 정치적 억압과 타국의 보호가 그것이다. 사이버 망명은 정치적 발화에 대한 국가 권력의 검열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외국의 서버로 인터넷 계정을 옮긴다는 점에서 하나의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망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 망명을 일반적인 망명의 하나로 정의하려 할 때 미묘한 괴리가 발생한다.

 

망명은 하나의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의 이동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망명은 민족국가의 경계를 문제시하는 정치적 질문을 내포한 행위이다. 사이버 공간이 물리적 한계, 즉 국경이 없는 공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사이버 세계에서 망명이란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공간이 민족국가라는 정치적 경계에 포섭되어 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사이버 공간에 대한 수많은 담론 속에서 그것은 대의제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곤 한다. 그런 식의 담론들은 사이버 공간의 형성과 관련된 정치경제적 기반을 무시하는 매체 결정론에 불과하다. 사이버 공간은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경합하는 갈등의 장소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인터넷의 기원인 아르파넷(ARPANET)은 미국방부의 첨단기술연구계획국(ARPA)에 의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은 1990년대 초 ‘정보고속도로 구상’을 발표하고 인터넷 민간화 이후의 지구적인 정보화 격랑을 예고했다. 이는 1993년 발표된 ‘국가정보하부구조(NII)구상 행동계획’과 1994년 발표된 ‘지구정보하부구조(GII) 구상’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정보고속도로 구상’ 발표 이후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고속도로라는 은유에 대한 것이다. 고속도로라는 이미지는 선형적 운동, 물리적 이동, 물질적 고체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사이버 공간의 다방향적 정보통신, 가상적 상호작용을 지시하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는 반론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국가에 의한 디지털 기간망의 증진이라는 목적만큼은 분명히 보여줄 뿐 아니라 인터넷의 발달이 새로운 매체환경을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기존 권력의 통제 아래에서, 그것들을 위하여 설계 및 추진되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인터넷은 9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전유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95년 이후 국가 주도의 통신 정책이 수립 된다. 정부는 한국통신의 글로벌경쟁력을 갖추게 한다는 명분과 초고속 정보통신사업의 조속한 추진을 목표로 ‘정보화촉진기본법’을 제정한다. 그리하여 95년에 PC통신 서비스에 인터넷접속 서비스(일명 PPP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이때 설립된 규격화된 인터넷 구조의 기반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요컨대 인터넷 구조의 상당 부분이 경제적, 그리고 그 경제 성장의 필수적 요소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조건을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은 결코 기존의 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곳도, 그것이 가진 내적 가능성이 자동적으로 실현되는 곳도 아니다. 인터넷의 발전을 통해 발생한 사이버 공간은 ‘기존의 정치경제적 권력’과 그 곳에 내재된 ‘권력으로부터의 도피 가능성’이 경합하는 곳이다. 적극적 저항 없이 사이버 공간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버 망명은 억압적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그리고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향해 가는 하나의 시도로 볼 수 있다.


사이버 망명, 국가 그리고 정체성


앞서 언급했듯이 망명이란 정치적 억압을 피해 타국의 보호를 요청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정치적 억압의 외부를 사유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세계에서 망명은 타국의 보호를 요청하고 허가를 기다리는 과정 없이 진행된다. 망명은 (인터넷 계정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과정을 따라 진행된다. 그것은 타국의 존재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망명객이 속했던 국가의 억압적 정치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이다. 사이버 망명은 다른 국가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기보다는 국가라는 억압적 정치체 자체를 거부하는, 즉 국가부재를 사유하는 한 방식이다.

 

국가부재를 상상하는 힘은 국가에 의해 버려진 이들이 보이는 정치에 대한 환멸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억압적 국가를 거부하는 힘이다. 국가의 외부에 있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 억압적 국가를 거부하는 이들이 귀환하는 곳은 자연상태가 아니라 다른 정치가 상상되는 공간이다. 물론 ‘거부’ 자체가 다른 정치에 대한 ‘생성’은 아니다. 그럼에도 ‘거부’는 기존의 억압적 정치를 부정함으로써, 다른 정치를 상상할 수 있는 ‘정치적 사유의 공간’을 배태하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사이버 망명이 거부를 통해 다른 정치를 상상하는 적극적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은 파업이나 혁명과 같이 일거에 모든 것을 바꿔버리는 집단적 힘이 아니다. 때문에 그것이 가진 희망의 계기는 조심스럽게 제기되어야 한다. 새로운 정치가 이미 존재한다거나, 이미 존재하는 대안적 정치에 다가감으로써 기존의 정치를 폐기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하지 말도록 하자. ‘거부’는 정치적 사유의 공간을 개시하는 하나의 형식일 뿐이다. 그것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 어떤 것도 직접 지시하지 않는다.

 

사이버 망명이 가진 저항의 가능성은 미시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정체성 게임과 관련되어 있다. 국가는 특정한 소속양식을 제공함으로써 국민 혹은 시민이라는 봉합된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정치체이다. 국가부재를 상상한다는 것은 이러한 소속양식을 거부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새로운 정치를 상상할 수 있는 ‘정치적 사유의 공간’은 국가가 제공하는 소속양식을 거부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낡은 이야기이지만, 현대적 의미의 사이버 망명의 문제를 거의 최초로 제기한 <공각기동대>를 떠올려보자. 그곳에는 사이버 세계로부터 유발된 정체성의 문제가 강하게 기입되어 있다. 공안 9과에 들어간 ‘인형사’는 정치적 망명을 요구한다. 사이버 세계에 떠도는 하나의 프로그램에 불과한 인형사는 과연 망명할 수 있는 ‘존재’인가. 그를 존재하는 실체로 만드는 그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인형사는 고정된 정체성을 필요로 했는가. 오히려 정체성을 버림으로써 사이버 세계에 존재하는 실체가 된 것은 아닌가. 그는 결코 고정된 정체성을 획득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낡은 정체성을 회복함으로써 뻔한 결론을 맺으려 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정체성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집착은 자신을 구속한다. 그것을 돌파하라”. 정체성, “그것은 자신을 제약”하는 것이다. <공각기동대>는 거부가 개시하는 정치적 사유의 공간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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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대학원 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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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망명 : 저항의 공간을 개시하는 작은 몸짓

일단 세 가지 사건을 이야기해 보자.

1. 4월 : 주경복 전 서울시교육감 후보에 대한 선거법 위반 수사에서 수사 대상자 100여명의 이메일 7년치가 압수수색 당했다.
2. 6월 : 쇠고기 광우병 관련 보도를 조사 중이던 검찰이 PD수첩 작가의 이메일 내용을 공개했다.
3. 7월 : YTN 노조원 20여명의 이메일이 압수수색 당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널리 알려진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이 널리 알려진 예외적 사례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민주당 박영선 의원실에서 내놓은 자료를 보면 올 상반기에 다음 한메일과 네이버 메일에 대한 압수수색이 3360건이나 있었다고 한다. 다른 포털까지 합산한다면 이 수치는 엄청나게 불어날 것이다. 나랏님께서 국민의 안전과 치안을 위해 이메일 몇 개 본거가지고 무슨 큰 문제가 생길까라고 깔보면 안된다. 인터넷 본인확인제를 비롯해 통신비밀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저작권법 등 인터넷에 대한 국가 권력의 규제가 무제한적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잉된 권력이 흘러 넘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망명을 시작했다. 일명 사이버 망명이 그것이다.

 

내친김에 한 가지 사건을 더 이야기해 보자. 얼마 전 구글은 유튜브 한국 사이트에서 우리나라의 인터넷 본인확인제를 거부한다고 밝혔다. 사실 구글이 한국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본인확인제를 거부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트위터 같은 마이크로 블로그의 확산 사례(지난 1월 트위터 방문자수는 1만 4천명이었던데 비해 6월 방문자수는 58만 7천명이었다. 이는 국내 마이크로 블로그인 미투데이 6월 방문자수가 12만명인것과 비교해도 엄청난 수치이다)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에 의한 인터넷 규제의 과잉과 함께 사이버 망명이 늘어나면서 외국계 인터넷 기업에 의한 국내 시장 잠식이 점점 증대하고 있다.

 

구글과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이 거대 자본과 인터넷 시장 잠식을 통해 국내 인터넷 업체를 인수합병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국내 인터넷 기업을 수호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사이버 망명의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이버 망명이라는 것이 단지 국내 자본에서 외국계 자본으로의 시장 이동만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없다. 거기에는 흥미로운 저항의 계기들이 숨어 있다.

 

인터넷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는 표준 선점이다. 표준을 선점하면 그 소프트웨어의 독점력도 강해지고, 시장 지배력이 급격히 강화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한글이나 마이크로 소프트 오피스 같은 것이다. 이런 소프트웨어들의 독점은 시장 독점외에도, 다른 프로그램과의 호환성을 차단하기 때문에 정보 독점의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독점 소프트웨어는 프로그램 소스 정보를 활용할 수 없도록 하는 지식 독점 체계에 기반한 상품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소스 공유를 통한 소프트웨어의 혁신적 발전을 가로막고 있기도 하다. 또한 한글이나 MS오피스는 소프트웨어 독점력 때문에 잠금효과가 강해서 어떤 측면에서는 그것들보다 더 편리하고 뛰어난 기능을 가진 오픈 소스에 기반을 둔 오픈오피스(open office)와 같은 소프트웨어의 사용을 가로막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사이버 망명이 발산하는 효과 중 하나는 이와 같은 독점 소프트웨어로부터의 탈주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가장 강력한 독점 소프트웨어 중 하나가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웹 브라우저인 인터넷 익스플로러(IE)인데, 사이버 망명이 활성화 되면서 웹 브라우저의 독점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가진 정보 독점과 악용 문제의 심각성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사이버 망명이 유행처럼 번져 나가고 있는 요즘 인터넷 익스플로러 사용 비중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아일랜드 웹분석 업체인 ‘스캣카운터’에 따르면 2009년 3분기 기준 한국 웹브라우저 점유율에서 모질라 재단의 파이어폭스가 8.5%, 구글의 크롬이 1.8%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국내 이용 비중은 90% 후반에 달했었던데 비해 현재는 87%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사용 비중이 여전히 상당히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점유율이 이렇게 떨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정치적 억압의 외부를 사유하는 사이버 망명

 

사이버 망명이 가진 더욱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정치적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망명은 정치적 탄압이나 종교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타국으로 도피하여 보호를 요청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이버 망명은 정치적 발화에 대한 국가 권력의 검열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외국의 서버로 인터넷 계정을 옮긴다는 점에서 하나의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망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 망명을 일반적인 망명의 하나로 정의하려 할 때 미묘한 괴리가 발생한다.

 

망명은 하나의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의 이동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망명은 민족국가의 경계를 문제시하는 정치적 질문을 내포한 행위이다. 사이버 공간이 물리적 한계, 즉 국경이 없는 공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사이버 세계에서 망명이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공간이 민족국가라는 정치적 경계에 포섭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인터넷은 국가적 프로젝트를 통해서 물리적 기반을 확립하고 발전해왔다. 자연스레 사이버 공간은 국가의 규제와 통제 속에서 형성되었고, 그 역할이 규정되어 왔다. 올해 개정된 저작권법에서 문화부 장관의 권한으로 특정 개인 혹은 게시판을 활동 정지 시킬 수 있게 된 것은 사이버 공간에 대한 국가 통제의 적절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제시한 세 가지 사례들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은 인터넷 규제가 상당히 정치적인 사안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이버 망명은 이와 같은 국가의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기 위한 방식으로 고안되었다. 따라서 사이버 망명은 국가의 정치적 억압의 외부를 사유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정치적 억압의 외부를 사유하는 것은 정치적 자유를 향한, 즉 폭넓은 의미에서 표현의 자유를 향한 몸짓이다. 자유란 저항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사회를 통제하는 금지, 규제, 권위, 법률과 같은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지 않고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없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사이버 망명이 나타난다면, 망명 후 망명객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가진 생각들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저항의 언어를 획득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는 일이다. 때문에 사이버 망명이라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정치적 자유를 향한 적극적 실천의 일환이 된다. 뿐만 아니라 사이버 망명은 망명객이 속한 국가의 억압적 정치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이다. 때문에 그것은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의 이동을 추구한다기보다는 억압적 국가의 외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정치를 요청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이버 망명은 시장 독점과 정보 독점 그리고 억압적 정치에 대한 저항을 동시에 보여주는 다층적인 문화 현상이다. 그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사이버 공간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거부’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 거부는 곧바로 대안적 정치경제시스템을 생산해 내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그것들을 사유할 수 있는 새로운 외부의 공간을 개시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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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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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법이 발병시킨 문화적 우울증

개정 저작권법이 시행된지 일주일여가 흘렀다. 막상 시행되고 나니 인터넷 3진 아웃제에 대한 논란도 잠잠해졌다. 이제 ‘창작물에 대한 이용자의 권리’와 ‘웹공간에서 표현의 자유’가 가혹하게 침해당하는 일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이에 대응해서 참여연대나 정보공유연대는 3진 아웃제의 위헌성을 문제 삼아 헌법소원을 준비 중에 있긴 하다) 물론 지금까지도 이용자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는 지나치게 많이 침해당해왔다. 개정 저작권법은 그 침해를 극대화 할 것이다. 개정 저작권법의 주 내용은 저작권을 침해하는 이들에 대한 처벌 규정을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저작권은 정보사회 혹은 지식기반경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없어서는 안될 경제적 장치로 인식되고 있다. 저작권은 창작자의 (경제적) 권리를 보장해 줌으로써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핵심 동력으로 취급된다. 우리 주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저작권을 둘러싼 논의는 창작자에 대한 경제적 보상과 그 방식에 집중되어 있다. 창작에 대한 경제적 보상은 창작의 유발동기가 되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문화를 즐기고 활성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며, 그것은 강력한 법적(처벌)장치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작권에 대한 강한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두 가지 축일 뿐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일종의 허구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은 간단하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저작권은 왜 저자의 권리(author's right)가 아니라 복제의 권리(copyright)인가?

저작물 혹은 창작물은 왜 그리고 어떻게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단속의 대상이 되었는가?

과연 특정인이 문화적 생산물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문화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가?

문화적 생산물을 함께 공유하고 향유하는 것이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저작물은 유일하고 특수한 개인의 온전한 창작물인가?

저작물의 독점적 소유권자로 상상되는 저자란 무엇인가?

저작권을 통해 실재로 경제적 이익을 얻는 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하나씩 곱씹어 본다면 저작권을 강화시켜온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물론 어떤 질문들은 쉽게 증명될 수 없고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만, 다른 어떤 질문들은 저작권의 역사나 현재의 상황에 대한 간단한 서술만으로도 쉽게 논증될 수 있다.



정보에 대한 반독점적 권리로서의 저작권


역사적으로 보면 초기의 저작권은 지식이나 정보를 배타적으로 사유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저작권은 15세기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등장했다. 그것은 1496년에 시행된 출판특허제를 그 제도적 효시로 해서 16세기 초에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저작권은 인쇄술의 발명과 연관되어 있다. 인쇄술이 발명됨에 따라 지식과 지식 창안자 사이의 분리가 이루어졌고, 지식은 창안자로부터 독립되어 남에게 양도할 수 있는 상업적 권리로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에 저작권 제도는 근대 인쇄혁명이라는 사회역사적 조건에서 생겨난 법률적 제도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저작권은 인쇄술의 발명으로 출판업이 발달하면서 넘쳐나는 출판물을 규제하기 위한 제도로 고안되었다.

 

근대적 의미의 저작권법은 1710년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이것이 앤 여왕법(Statute of Anne)이다. 앤 여왕법은 두 가지 의미에서 과거의 저작권법과 질적으로 다른 차별성을 지닌다. 하나는 저작권의 보호기간을 설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의 권리를 등장시킨 것이다. 앤 여왕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출판업자들은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사는 것은 집이나 땅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으므로 출판물에 대한 권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제한 없이 보장되었다. 따라서 출판업자들은 한 번 판매된 저작물의 권리가 아무리 오래되어도 그것을 시장에서 독점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앤 여왕법은 이러한 출판업자들의 독점적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 저작물에 대한 권리에 기간을 정했다.

 

그리고 앤 여왕법은 서문에서 ‘의심할 바 없는 재산을 가진 저자의 동의 없이는 어떤 저작물도 출판할 수 없다’고 명시함으로써 처음으로 저자의 권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저작권의 기간 한정이나 저자의 권리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출판업자들의 독점을 깨기 위한 의도적인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저자(author)라는 개념은 출판 독점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당시의 저작권은 엄밀히 말하면 ‘저자의 권리’(author-right)가 아니라 ‘복제의 권리’(copy-right 혹은 right to print)였다. 저자 개념 자체가 저자의 소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출판업자들의 독점적 복제권을 견제하기 위해 네거티브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초기의 저작권법은 반독점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의 권리를 명시함으로써 이제 타인의 소유물과 저자의 소유물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 그리고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해 졌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 진행된 ‘결정판’ 혹은 ‘전집’의 편집 열기라는 18세기의 사회적 배경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당시에 내가 쓴 글과 타인이 쓴 글을 구별하는 인용부호와 같은 문법적 규칙이 표준화되고 그것의 강제적 사용이 의무화된다. 현대사회에서 사용하는 표준화된 인용부호가 완성된 것이 바로 18세기 후반이다. 18세기 이전에도 인용부호와 같은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표현의 소유자를 규명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8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인용부호는 그 인용된 구절의 소유권이 타인에게 있다는 표시가 아니라 성서나 격언, 속담과 같이 특별히 신경을 써서 읽을 필요가 있음을 표시하는 기호에 불과했다.



저자 살리기 혹은 저자 죽이기


저자란 지식이나 정보가 특정한 개인에게 소유될 수 있다는 관념을 유지시키기 위한 (그러나 실제로는 저작권을 구조화 시키는 중심으로서 기능하는) 허구적 개념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적재산권을 통해 실질적인 이윤을 얻는 소유권자가 창작자로서의 개인에서 기업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크발(Ekbal, B)에 따르면 “지적재산권의 제도화와 함께 개인창작자의 이득은 거대 기업의 이익으로 대체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창작자는 지적재산으로부터 이익을 얻지 못한다. 독립된 발명가들은 종종 무시되거나 착취당한다. 기업이나 정부에 고용된 이들이 보호할만한 가치를 가진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해당 조직의 저작이나 특허가 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기업은 독창성과 영감을 가진 낭만적 저자라는 개념에서 자신들의 (일종의 갈취) 행위의 정당성을 찾고 있다. 정보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다면 기업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목격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업이 정보의 소유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적재산권의 성립근거가 되고 있는 ‘정보의 창작자가 생산물을 소유’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창작물이 기업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는 창작물의 자기 소유라는 이데올로기가 거부되어야 한다. 그리고 창작자가 창작물을 소유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부정되기 위해서는 창작물이 ‘생산자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창작물이 창작자로부터 분리되어야 ‘개인 생산자의 소유’라는 사실이 부정되고 소유권이 기업으로 이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 창작자의 소유가 부정되고 소유권이 기업으로 이전되는 과정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 하나는 ‘업무상 저작물(works made for hire)’이라는 형태로 기업이 개인이 생산한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통과정에서 계약을 통해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의 일부나 전부를 양도 받는 것이다.

 

먼저 업무상 저작물에 대해 살펴보자. 18세기 이후 확고하게 자리 잡은 ‘낭만적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창조적 업무에 종사하는 일개 노동자(creative worker)로 전락한다. 저작권법 내에는 ‘업무상 저작물’에 대한 규정이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작품을 창작한 사람은 개인일지라도 작품의 실질 소유자는 이들에게 임금을 지불한 기업이 된다. 이렇게 기업은 작품의 소유자, 즉 저자가 된다. 여기서 저작권자로서의 기업은 창작한 노동자들에게 일정액의 보상금을 주고 그 창작물을 양도받는 것이 아니라 고용주이기 때문에 그 권리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방송 사업자가 자신이 고용한 방송작가, 소속 배우, 소속 음악가 등 기타 인력과 설비를 투입하여 영상물을 만드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러한 경우 방송사업자는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영상저작물 작품은 물론이고 ‘사용된 어문저작물, 음악저작물, 실연 등에서의 권리’ 등 모든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게 된다. 이때 외부의 독립제작사를 활용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스스로 자체 제작한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에 방송사업자가 저작권자가 된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만들어진 영상저작물이 향후 다원적으로 활용될 때에도 개별 권리자의 권리는 주장될 수 없다. 더욱이 업무상 저작물에 대한 조항은 저작권법이 개정될수록 점차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정보의 실질적 소유권자가 개인에서 기업(법인)으로 옮겨 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유통과정에서 창작물의 소유권이 개인에서 기업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자. 상품이 유통과정에 들어가기 위해서 창작자는 판매자가 되어야 하는데 개별 창작자는 직접 판매 활동을 하는데 한계가 있다. 상품의 유통로를 거대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 창작자가 판매자가 된다 하여도 거대 기업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창작자는 자신의 생산물을 판매하기 위해서 유통로를 장악하고 있는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판매의 유통로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계약을 통해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의 일부 혹은 전부를 이전받는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창작물은 기업소유가 되고 창작물의 판매에 따른 보상은 기업으로 돌아간다. 창작자의 개성은 기업의 자본이 된다.


이처럼 앞서 제기된 질문들을 조금만 들여다본다면, 저작권을 둘러싼 논의가 얼마만큼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간단히 독점이나 보상과 같은 저작권의 경제적 측면만을 살펴보았지만, 그것의 정치적 측면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이에 대해서는 '저작권, 정치에 다가가기' 참조해도 될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 측면이든, 경제적 측면이든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저작권이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 협소한 의미의 정치 혹은 경제의 한 측면이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창조성과 같은 인간의 정신적 능력’과 ‘정신적 생산물을 공유하는 문화적 삶’ 그 자체라는 점이다. 저작권법은 우리의 문화적 삶을 치명적인 문화적 우울증에 빠뜨리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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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정치에 다가가기

 
이달 23일 시행되는 개정 저작권법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번 저작권법의 핵심은 일명 ‘인터넷 삼진 아웃제’라고 불리는 제도의 도입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음악 등의 저작물을 허락 없이 대량 유포하는 업로더의 계정이나 인터넷의 게시판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3회 경고 후 최대 6개월까지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사법부의 판단 없이 행정부가 죄를 판단하고 처벌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월권을 내포한 제도이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삼권분립이라는 원칙을 직접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과 관련된 분쟁은 침해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기 어렵기 때문에 법원에서도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행정권력이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규제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권력자의 시선으로 규제할 수도 있고, 거대 기업의 경우 각종 로비를 통해 행정명령을 무력화 시킬 위험도 있다. 때문에 인터넷 삼진 아웃제는 행정권력에 의한 인터넷 사업자와 이용자에 대한 일방적 통제가 확대될 위험성을 잉태한 제도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저작권법 개정안은 더욱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논란이 발생하는 지점도 바로 이 곳인데, 그것은 바로 표현의 자유라는 영역이다. 특히 인터넷이라는 영역에서 표현의 자유는 핵심적인 동력이 되는 만큼 문제를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이제 상식을 넘어 식상하고 진부한 것이라 표현될 만큼 기본적인 권리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 정부의 통치하에서는 역대 그 어느 정권보다도 심각하게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 (이 글에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는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를 모두 이야기 하긴 힘들다. 관심이 있다면 지난달 22일 문화연대를 비롯한 진보넷, 인권운동사랑방 등이 공동으로 발표한 <이명박 정부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보고> 기자회견문을 참조하라.)

 

물론 개정 저작권법에서 추진하고 있는 ‘인터넷 삼진아웃제’가 유독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기는 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에도 인터넷 삼진 아웃제(Three strike out policy 혹은 유럽권에서는 graduated response-누진대응) 입법을 추진 중이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이미 이 제도의 입법을 추진했었지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 때문에 시민 사회 단체의 주도로 위헌소송이 제기되었고, 결국 프랑스 헌법위원회는 지난달 10일 위헌 판정을 내렸다. 프랑스 헌법위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은 인권에 관한 문제”라고 명시하고 개인의 인터넷 접근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은 법원 판사의 판결을 통해서 부여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이와 관련된 일부 내용을 수정해서 이달 8일에 안건을 재상정 했고, 상원 의결을 통과했다. 수정된 내용은 인터넷 접속을 차단할 수 있는 권한을 신설되는 정부 전담기구인 아도피(Hadopi)에 두었던 것을 판사에게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처럼 인터넷 표현의 자유와 그것을 규제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최근 중국의 청소년 보호용 인터넷 차단 프로그램인 그린댐(Green Dam)을 비롯해 호주나 뉴질랜드, 영국, 스웨덴,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다.

 

해외의 사례에서 발견된다고 그 제도가 정당화를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인터넷 규제 법규들은 해외의 사례와 차별되는 독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인터넷 규제 시도가 저작권을 이용해 정치적 맥락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외국의 사례에서 발견되는 삼진 아웃제는 저작권을 어긴 인터넷 이용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개정저작권법은 이용자 삼진아웃뿐 아니라 게시물이 올라간 게시판까지도 삼진아웃 시키겠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로써 인터넷 상에서 적극적인 정치적 발화가 이루어지던 아프리카 TV나 아고라의 게시판을 활동 정지시킬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 다시 거대 언론사나 그것의 대리 역할을 하는 법무법인들이 시민 단체 등을 상대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는 행위에 대해 저작권 침해 배상 요구를 하고 있다. 신문 기사의 제목만을 노출시켜놓고 이를 클릭했을 때 해당 신문사 사이트로 이동하도록 링크를 거는 행위는 합법이지만, 기사를 스크랩하는 행위는 저작권법 위반이기 때문이다. 스크랩은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토론을 유도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일반적 행위이지만, 그 자체를 불법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특히나 기사 스크랩에 따른 저작권 침해 배상 요구는 재정이 취약한 시민단체를 표적으로 삼아 그 단체를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악용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저작권법의 목적은 창작자에게 창작물에 대한 일정한 보상을 부여함으로써 창작 활동을 활성화 시키고 나아가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데에 있다. 창작 활동이란 표현의 자유를 기반으로 삼지 않으면 결코 활성화 될 수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시행되고 있는, 혹은 앞으로 시행될 저작권법은 창작 활동의 기반이 되는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저해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상황에서 악용될 소지를 가지고 있다. 지금 연출되고 있는 것은 법을 만든 정부가 자신이 만든 법의 원래 목적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테러범도 피해가는 저작권법의 힘


정보를 제3자가 사용한다고 해서 아이디어나 정보의 창작자 또는 보유자가 가진 지적재산은 양적으로 줄어들거나 그 효용이 감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아이디어와 정보를 이용할수록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후생과 이익은 커진다. 특히 인터넷은 정보를 유통시키는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정보의 가치를 증진시켰다. 인터넷의 힘이 가진 긍정성은 타인이 정보에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정보는 소유가 아닌 공유를 통해 가치를 증진시키며, 정보기술의 혁신은 공유 문화를 확산 시킬 수 있는 기술적 배경이 된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과 내가 사과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서로 교환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나와 당신은 각각 하나의 사과를 가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과 내가 아이디어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서로 교환 한다면 우리는 두 개의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역시 “내게서 어떤 생각을 전달받는 사람은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지만, 그로 인해 나의 지식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는 내 촛불에서 자기 초에 불을 붙여 간 사람은 빛을 얻게 되지만, 그로 인해 내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고 말한다.

 

버나드 쇼나 제퍼슨의 말은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 결코 지식 혹은 그것의 사용에 대한 독점이 아니라 공유와 나눔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저작권법은 이런 의미에서 문화 발전에 대한 기여라는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저작권법은 창작물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끊임없이 권리자에게 귀속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창작물에 대한 권리가 창작자가 아닌 그 권리를 사들이거나 양도받는 기업에 귀속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창작자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다. 창작자는 자신의 창작물을 유통시키기 위해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 기업에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의 일부 혹은 전부를 해당 기업에 (계약을 통해) 양도해야하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작권의 왜곡된 법 체계보다 더욱 위험해 보이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저작권이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영역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저작권법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잘못 악용될 경우 극도로 위험할 수 있다. 유나바머로 알려진 카진스키(Theodore John Kaczynski)의 사례에서 이러한 위험성을 확인할 수 있다.

 

유나바머는 대학과 공항을 중심으로 폭탄테러를 자행한 테러리스트이다. 유나바머는 1995년 테러를 중단하는 조건으로 유력지에 과학문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과학기술문명비판논문 게재를 요구했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지에 그의 논문이 실렸다. 이것이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제목을 가진 유나바머 선언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선언문의 각주 16번에는 “만약 저작권법이 문제가 되어 게재가 불가능하다면 주16을 다음 문장으로 바꿔주기 바란다”는 구절이 나온다. 유나바머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16차례에 걸친 폭탄테러를 행한 현대 사회의 가장 위협적인 테러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폭탄테러라는 강력한 무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저작권법 때문에 자기 글이 실리지 못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선언문에서 그는 자신의 테러를 하나의 혁명이라고 말하며 “혁명의 목표는 정부의 전복이 아니라 현존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테크놀로지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대사회를 병들게 한 것은 각종 테크놀로지라고 비판하는 극단적인 기술혐오주의자였고, 주된 테러 대상도 대학에서 테크놀로지를 연구하는 학자였다. 문제는 그의 공격 대상인 각종 테크놀로지가 자신이 존중하는 저작권이나 특허와 같은 지적재산권을 통해 보호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96년 체포 당시 그는 산골 오두막집에서 전기와 수도도 없이 살고 있었다. 그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현대문명을 등진 채 살고 있을 정도로 테크놀로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정작 그것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지적재산권을 문제 삼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처럼 저작권과 같은 지적재산권은 인간의 의식 영역에 침투해 내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유나바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 내면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저작권의 위력이다. 앞서 지적했듯 저작권법의 강화는 창조성과 같은 (협소한 의미의) 문화적 퇴보를 야기시킬뿐 아니라 특정 정치적 맥락에서 이용될 경우 법적 감시와 통제 그리고 처벌을 통해 정치적 개인들이 가진 비판의 언어를 탈각시키는 기재로도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즉 정치적 맥락에서 기능하고 있는 저작권법 집행 및 개정의 방향은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하나의 증상처럼 보인다. 이제 저작권법은 단순한 하나의 규제가 아닌 듯하다. 그것은 민중의 정치적 삶의 방식을 강제적으로, 그러나 내면 깊숙이 변화시키는 정치적 매개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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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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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 보고-기자회견

[기자회견] 이명박 정부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 보고

- 일시 : 2009년 6월 22일 월요일 오전 11시

- 장소 : 서울광장

-주최 : 문화연대, 미디어행동, 우리만화연대, 인권단체연석회의, 인권운동사랑방, 진보네트워크센터,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부,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작가회의, IT연맹

  

 

<이명박 정부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 보고>

 

 

집회․시위관련 실태 보고

 

1. 집회는 일단 금지하고 본다. 신고제가 허가제로 둔갑

 

사유 중 교통소통 제한과 공공질서 위협이라는 사유로 2008년 35%나 2009년 44.4%에 달하는 것에 보여지 듯 뚜렷한 금지의 이유가 없음.

(2009년 금지 사유 : 장소경합, 교통소통제한,금지장소,보완불이행,공공질서위협,군사시설주변,잔여집회금지,생활평온침해,금지시간)

(2009년 금지 사유 : 장소경합, 교통소통제한, 보완불이행, 공공질서위협, 잔여집회금지, 학교시설주변)

 

교통흐름에 방해받지 않도록 협조하는 일이 법의 목적과 경찰의 의무라면 집회 자체를 금지할 것이 아니라 교통흐름을 원활히 하기 위한 조건을 붙여 허가해야 법 취지에 맞음. 99년 유엔 자유권위원회의 권고도 있었음.

 

2. 2009년 관리지침과 집회 원천 봉쇄 일상화

 

경찰의 ‘2009년 집회시위 관리지침’에 따르면 “불법 폭력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는 집회는 신고 단계부터 적극 대응하기로 함.

 

3. 시위는 모두 불법으로 취급, 상습시위꾼 명단으로 집회시위의 권리 위축 효과

 

3월 경찰은 ‘상습시위꾼 검거 특별수사본부’ 발족. 지금까지 집시법 위반 전력이 있는 170여명을 소환 대상으로 삼아, 21일 현재 9명을 구속하고 90여명을 불구속 입건. 5월 19일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경찰이 상습 시위꾼 소탕 목록을 만들어 2500여명을 우선 검거대상에 단체 20여개 반정부 불법, 좌파단체 및 상습시위꾼 단체로 규정

 

4. ‘정부보조금 지원’ 제한으로 집회 제한

 

행정안전부는 2009년 1월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 지원사업’ 공고를 내면서 불법폭력시위관련단체에게는 지원금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발표. 5월 12일 경찰청이 ‘2008 불법폭력시위 관련단체’ 목록 작성하여통일부·여성부·환경부·노동부·낙동강유역환경청 등에 통보하여 보조금 지원 삭감자료로 활용하도록 함.

 

 

○ 공안탄압관련 실태 보고

 

- 6월 19일 황장엽에게 협박 우편물을 보낸 김○○씨, “협박 소포를 보낸 행위는 ․․․ 대한민국의 존립, 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위험성이 명백히 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유죄 징역형 선고.

 

- 6월 18일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희망제작소의 계약해지, 후원 취소 등의 배경에 국정원이 있었다며 국가정보원이 불법적인 민간사찰을 하고 있다고 주장.

 

- 6월 16일 6·25 참전국가유공자회,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가 재산 4000억원을 해외은행으로 빼돌려 북한에 제공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

 

- 6월 15일 양현수(시인, 목수)씨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북한 관련 글에 국가보안법 위반 적용 구속.

 

- 6월 15일 시내 유명서점과 인터넷 서점에 정보과 형사, 자본론 몇 권 팔렸는지 문의 전화.

 

- 6월 10일 이후 언소주 김성균대표 국가보안법 위반 집행유예 선고 결과를 빌미로 언소주 운동에 색깔론 덧칠.

 

- 4월 17일 오후2시 신해철 북한의 로켓트발사 성공 축하 글을 작성했다하여 라이트코리아에 국가보안법 위반 고발.

 

○ 정보․통신관련 실태 보고

 

인터넷은 일반 시민이 직접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이다. 이명박 정부의 인터넷 통제 정책으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일반 시민들은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몸소 깨닫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강제적 인터넷 실명제’ 의무대상 사이트를 기존 37개에서 153개로 확대하는 한편, 정보통신망법 개정을 통해 인터넷 전체로 확대하려 하고 있다.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임시조치’ 제도는 권력자가 비판의 목소리를 통제하는데 악용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 주성영 의원 등 정치인에 대한 비판, 어청수 전 경찰청장 관련 동영상이나 ‘사무라이 조’로 알려진 폭력 경찰을 비판하는 게시물 등이 명예훼손이라는 이유로 차단되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인터넷에 대한 일상적 검열을 자행하고 있다. 방통심의위는 출범직후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에 올라온 게시글에 대해 '머리용량 2MB', '간사한 사람' 등의 표현을 했다는 이유로 ‘언어 순화와 과장된 표현의 자제 권고’를 내려 검열 기구임을 선포한 이후,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 게시! 물, 김문수 경기지사에 대한 비판 게시물, 쓰레기 시멘트를 고발한 게시물 등 정부와 기업을 비판하는 게시물에 검열의 칼날을 휘둘렀다. 한편, 30년 동안 적용되지 않아 사문화되었던 전기통신기본법 상 ‘허위사실 유포죄’는 이명박 정부 들어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동맹휴업’을 주장한 청소년, 시위자의 사망 의혹을 제기한 시민,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한 미네르바 등이 허위사실 유포죄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제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사이버모욕죄’가 국회를 통과한다면, ‘쥐박이’라는 표현 하나로 철창신세를 져야할 지도 모른다.

 

○ 출판관련 실태 보고

 

 

2008년 7월 국방부에서 각 부대에 공문을 보내 23권의 불온도서 목록을 선정해 불온서적 차단 대책을 지시했다. 주된 근거로는 “장병 정신과 전력 저해요소가 될 수 있어 수거를 지시”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사상과 창작 표현의 자유를 저해하는 행태로 민주공화국에 대한 부정이었다.

 

느낌표의 선정도서이자 수십만 권이 팔린 현기영 작가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 김남주 시인의 일대기와 작품 세계를 다룬 <김남주 평전>, 고 권정생 동화작가의 <우리들의 하느님>, 조선소 여성노동자 출신인 김진숙의 산문집 <소금꽃 나무>, 지탄받는 삼성재벌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삶을 다룬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세계화의 그늘과 해법을 담은 세계적 경제학자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노엄 촘스키 교수의 역작 등을 불온도서로 지정한 처사는 집필 당사자들과, 출판사, 그리고 창작을 업으로 삼는 모든 사람들을 악의적으로 인격 살해하는 행위다. 이 책을 탐독한 수백만 명을 대상으로 사상적 선전포고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국방부가 선정한 불온서적 23권>

 

1. 북한의 미사일 전략 : 전영호 씀 / 615, 2006 (품절)

2. 북한의 우리식 문화 : 주강현 씀 / 당대, 2000

3. 지상에 숟가락 하나 : 현기영 씀 / 실천문학사, 1999

4.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허영철 씀 / 보리, 2006

5.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 박준성,안건모,이임하,정태인,하종강,홍세화 씀 / 철수와영희, 2007

6.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 : 전영호 씀 / 615, 2006 (품절)

7. 통일, 우리 민족의 마지막 블루오션 : 전상봉 씀 / 시대의창, 2007

8. 벗 : 백남룡 씀 / 살림터, 1992

9.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 노암 촘스키 씀 / 한울, 1999 (절판)

10. 대학시절 : (누가 쓴 《대학시절》인지 알 수 없음)

11. 핵과 한반도 : 최안욱 씀 / 615, 2006

12. 미군 범죄와 한미SOFA :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엮음 / 두리미디어, 2002 (절판)

13. 소금꽃나무 : 김진숙 씀 / 후마니타스, 2007

14. 꽃 속에 피가 흐른다 : 김남주 씀 / 창비, 2004

15.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 노암 촘스키 씀 / 이후, 2000 (절판)

16. 우리 역사 이야기 : 조성오 씀 / 돌베개, 1993

17.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 씀 / 부키, 2007

18. 김남주 평전 : 강대석 씀 / 한얼미디어, 2003

19. 21세기 철학 이야기 : 21세기코리아연구소 엮음 / 코리아미디어, 2004 (품절)

20. 대한민국史 : 한홍구 씀 / 한겨레출판, 2003

21. 우리들의 하느님 : 권정생 씀 / 녹색평론사, 1996

22. 세계화의 덫 : 하랄드 슈만, 한스 피터 마르틴 씀 / 영림카디널, 1997

23.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 프레시안 엮음 / 프레시안북, 2008

 

○ 영화관련 실태 보고

 

최근 자행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표현의 자유’ 침해 사례는 전방위적이다. 영화 영역 또한 예외는 아니다. 문화 교육 정책의 철학과 방향도 제출하지 않은 상황에서 표적 감사라는 압박카드를 이용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죽이기를 자행하고 있으며, 정부가 책임지지 못하는 문화적 공공 영역 지키기에 앞장 서온 시민단체, 시네마테크, 독립영화, 대안적 미디어들의 그간의 성과는 아랑곳 않고 구시대적인 색깔론을 들이대고 있다.

 

6월 25일 개봉하는 신동일 감독의 영화 <반두비>의 심의 과정 역시 위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우정을 그린 <반두비>는 제 10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12세 관람가’로 상영되어 많은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고 관객평론가상과 한국장편영화 개봉지원상을 받는 등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또한 올 7월에 예정된 제11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그러나 개봉 전 영화의 상영등급을 분류하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는 선정성, 대사, 모방위험 등을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내렸다. 이에 불복해 신청한 재심의에서는 선정성, 대사항목은 15세 관람가로 낮추면서도 청소년 모방위험 단 하나만의 이유로 다시 한 번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내렸다. 일부 몇몇 장면을 시비삼아 내려진 이 조치는 그들 스스로가 등급판정이 설득력이 없음을 자인한 것이다. 이런 대중의 시선과 정서에 어긋난 결정은 영등위 위원들이 스스로 현 정권의 코드 맞추기 내지 눈치 보기에 급급한 탓으로 심히 의심된다. 이는 창작에는 성역의 대상이 없음을 의미하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등위가 청소년들을 보호하는 미명하에 통제하려는 저의가 깔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영화를 볼 권리를 앗아가는 폭력적인 작태이다.

 

이명박 정부의 문화 정책은 문화예술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장의 물갈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시민사회 영역에 대한 탄압을 넘어 문화예술의 상상력과 표현의 자유마저 박탈하고 있다. 문화예술의 입을 틀어막아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역행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언론관련 실태 보고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지만 핵심요소이다. 이명박 정권은 과거 독재정권들이 자행했던 전방위적 언론통제를 답습하며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KBS 정연주 사장을 몰아냈다. 뒤이어 언론계 곳곳에 ‘MB낙하산’을 무더기로 투하해 언론을 장악했다. KBS와 YTN에서 낙하산사장에 맞선 언론인들이 관제사장의 ‘보복인사’로 제작현장에서 쫓겨났다. MBC은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년 넘게 검찰수사를 받고 있다. YTN노종면 위원장, MBC 의 제작진 등 비판적 언론인의 체포와 구금이 이어졌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최전선에서 언론통제를 이끌었다. ‘이명박 형님친구’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방송장악’, ‘미디어법 개악’을 주도함으로써 ‘방송통제위원장’으로 군림했다. 親정부인사가 6명을 차지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역시 청부심의기관으로 전락해 ‘언론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다.

 

이명박 정권은 미디어자본의 무제한적 ‘시장자유’를 ‘언론자유’로 둔갑시켜 ‘탈규제’를 주장한다. 이런 극단적 상업주의 언론관을 바탕으로 언론악법을 강행하고 있다. 언론악법은 수구기득권에게 유리한 언론지형을 제도화하는데 목적이 있다. 극소수 재벌과 수구족벌신문이 방송뉴스까지 진출할 수 있게 한 신문법, 방송법 개악안은 악법 중의 악법이다. 이런 내용의 언론악법이 통과되면 민주주의의 핵심가치인 ‘여론의 다양성’이 무너진다. 재벌­수구신문­보수정치권력만을 위한 뉴스가 시민들의 눈과 귀를 장악하게 된다. 언론악법이 불러올 미디어소유의 독점은 시민들의 민주적 참여와 ‘언론자유’를 침해하고 ‘표현의 자유’를 봉쇄하는 反민주적 미디어체제로 귀결될 것이다.

 

 

➊ 방송장악 실태

1) 초법적으로 이뤄진 KBS장악

: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세력은 집권실패의 이유를 공영방송의 편파적 보도에서 찾아 왔음. 이명박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불, 탈법적으로 정연주 KBS 사장을 �아냄. 그 결과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이 심각하게 훼손됨. 이병순 사장 취임 후 비판적 프로그램들이 폐지되었고, 공영방송의 관제화가 이뤄짐.

 

[KBS 장악 관련 주요 일지]

2008년 5월 12일 최시중 방통위원장 김금수 KBS 이사장에게 정연주 사장 사퇴 압박

2008년 5월 21일 김금수 이사장 사퇴

2008년 5월 21일 감사원, KBS에 대한 특별감사 결정

2008년 6월 20일 동의대, 정연주 사장 축출에 반대했던 신태섭 KBS 이사를 교수직에서 해임

2008년 7월 18일 방송통신위원회, 신태섭 이사 해임 및 보궐이사 추천(부산대 강성철 교수)

2008년 7월 4일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 “KBS 사장 해임권도 대통령에게 있다”고 발언

2008년 8월 5일 감사원, ‘부실경영’ ‘인사권 남용’ 등을 이유로 정연주 사장의 해임을 KBS이사회에 요구

2008년 8월 11일 이명박 대통령, KBS 이사회의 ‘정연주 사장 해임제청안’에 서명

2008년 8월 26일 이병순 씨를 ‘KBS 사장’으로 임명

2008년 8월 12일 검찰, 정연주 전 사장 체포

2008년 8월 17일 정정길 대통령실장·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유재천 KBS 이사장

2008년 8월 17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KBS 전·현직 임원 4명과 만나 KBS 사장 인선을 논의

2008년 8월 25일 KBS 이사회, 이병순 씨를 사장 후보로 임명제청

2008년 8월 26일 이명박 대통령, 이병순 씨를 KBS 사장으로 임명

↳ 출처: [이명박 정권 악행 1년, 우리 국민들의 절망 1년, 범시민사회단체 공동 평가서]

 

2) 언론계에 쏟아진 ‘MB낙하산’

: 이명박 정부는 대선캠프에 참여한 특보들을 각 방송사와 언론유관기관에 투하해 언론장악에 나섬. 사원들이 낙하산 반대투쟁에 나선 YTN에서는 ‘기자해직’, ‘노조위원장 구속’ 등 독재정권에서나 벌어졌던 언론탄압이 벌어짐.

 

[언론계 MB낙하산 현황]

MB대선 공보조직

방송특보단

단장

양휘부(전KBS창원총국장) →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 사장

상임특보

구본홍(전MBC보도본부장) → YTN사장

특보

이몽룡(전KBS부산총국장) → 스카이라이프 사장

정국록(전 진주MBC사장) → 아리랑TV 사장

차용규(전 울산방송사장) → OBS사장

방송전략실

실장

김인규(전KBS 이사) →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 회장

보도분석팀장

정군기(전SBS국제부장) → 한국방송광고공사 공익사업본부장(상임이사)

TV토론팀장

이성완(전KBS시사보도팀 주간) → 아리랑TV방송본부장

언론위원회

부위원장

최규철(전 동아일보 논설주간) →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상임특보

김현일(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 감사

특보

기세민(전 남도일보 정치부장) → 신문유통원 경영기획실장

서옥식(전 연합뉴스 편집국장) → 한국언론재단 사업이사

임은순(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 신문유통원장

➋ 이명박 정부 언론탄압 실태

 

◯ 경찰, 검찰 등 공권력을 동원한 언론탄압

: 이명박 정부는 촛불집회가 일어난 이유가 방송보도와 인터넷 때문이라며 비판적 언론인과 네티즌을 탄압. 미국산 쇠고기 수입정책을 비판한 에 대한 검찰수사가 진행되었고, 제작진에 대한 체포와 구금이 이뤄짐. MB낙하산 구본홍 사장 반대투쟁을 이끈 노종면 YTN노조위원장이 구속되는 등 공권력을 동원한 언론인 탄압이 지속적으로 전개됨. KBS에서는 불법적인 정연주 사장 축출에 반대하는 KBS사원들의 행동을 탄압하기 위해 경찰력이 투입됨.

◯ 심의기구의 정치도구화

민간독립기구로 출범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명박 정권과 보수세력의 ‘정치심의기구’로 변질되어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도구로 전락. MBC 에 대한 시청자사과, ‘언론악법’을 강행처리하려 한 한나라당의 행태를 보도한 <뉴스후>에 대해 시청자사과, <시사매거진2580><뉴스데스크>에는 경고와 권고를 의결. 반면, KBS가 “제야의방송”에서 이명박정부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삭제하고 손팻말을 알아볼 없도록 영상처리한 불공정방송 프로그램에는 ‘권고’를, 뉴스보도에서 ‘어청수경찰청장 사퇴’라는 글씨를 편집, 삭제(KBS)한 것에 대해서는 ‘의견제시’ 조치에 그치는 등 편향심의 양산.

 

◯ 직접적인 보도통제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시절 언론사 주요간부에 대한 성향파악을 지시해 파문을 일으킴. 2008년 2월에는 박미석 청와대 사회정책 수석 내정자의 제자 논문 표절 의혹을 보도한 국민일보에 대한 외압설이 제기됨. YTN <돌발영상>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대한 청와대의 수정요구.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국민일보 편집국장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부동산 투기 의혹 기사를 빼달라고 요청. 광우병 문제를 다룬 EBS <지식채널e>에 대해 청와대가 문의전화를 걸어 경영진에 의해 방영중단. 청와대 행정관, 용산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군포연쇄살인 사건’을 적극 활용하라고 경찰에 지시해 파문.

 

[이명박 정부 언론탄압 주요일지]

2008.01.12 대통령직 인수위 언론사 간부 성향조사 지시

2008.03.26 이명박 멘토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임명

2008.05.03 방통위 포털 다음에 이명박 비난 댓글 삭제 요청

2008.05.13 농림수산식품부 법원 소송

2008.05.14 청와대 민정수석실 광우병 관련 EBS프로그램 결방 압력

2008.06.16 검찰, 정연주 전 KBS사장에 소환통보

2008.06.27 검찰, 수사 시작

2008.07.01 조중동 광고불매운동 관련 게시글 삭제조치

2008.07.03 촛불집회 생중계한 아프리카TV대표 구속

2009.07.16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시청자에 대한 사과’ 제재 의결

2008.07.17 MB낙하산 구본홍씨 YTN사장 취임

2008.08.11 이명박 대통령 정연주 KBS사장 해임

2008.08.17 대통령실장, 국정원 간부 등 ‘KBS대책회의’

2008.10.06 낙하산 저지 투쟁 관련 YTN노조원 6명 해고 등 33명 중징계

2008.12.03 한나라당 방송법 등 언론악법 발의

2009.01.10 인터넷논객 미네르바 구속

2009.01.15 KBS 사원행동 양승동PD, 김현석 기자, 파면, 성재호 기자 해임 결정

2009.02.19 조중동 광고불매운동 관련 네티즌에 유죄선고

2009.03.02 검찰, 수사 재배당

2009.03.12 최상재 언론노조위원장 등 총파업 관련 소환조사

2009.03.16 다음 아고라 활동 네티즌 조회건수 조작혐의로 압수수색

2009.03.22 YTN노종면 위원장 등 4명 경찰에 긴급체포

2009.03.24 노종면 위원장 구속

2009.03.25 MBC 제작진 6명 체포영장 발부, 이춘근 PD체포

2009.04.08 검찰, MBC 압수수색 시도

2009.04.16 MBC 김보슬 PD체포

2009.04.22 검찰, MBC 2차 압수수색 시도

2009.04.27 검찰, 조능희 전 CP(책임프로듀서)와 송일준 PD, 김은희·이연희 작가 등 제작진 4명 체포

2009.05.14 검찰, 광우병 편 참여한 프리랜서PD 체포

2009.06.18 검찰, 제작진 불구속 기소, 작가 이메일 공개

 

➌ MB언론악법 추진

 

◯ 개요

- 대기업의 방송(뉴스) 진입허용: 모든 대기업이 지상파방송20%, 보도, 종합편성채널 49%지분 허용

- 신문사의 방송교차 소유 허용: 일간신문이 지상파방송20%, 보도, 종합편성채널 49%지분 허용

- 외국인에 대한 방송진입 허용: 종합편성, 보도채널의 20%

- 일간신문의 복수소유 제한 및 경영자료 신고 의무조항 삭제

 

◯ 문제점

- 보수정치권력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재벌과 조중동 등 수구세력에게 지상파방송과 보도, 종합편성채널 진출을 허용함으로써 공영방송 체제를 약화시키려는 정략적인 의도로 진행. 미디어소유권이 독과점 되어 여론다양성이 훼손되고, 소수 미디어그룹에 의한 정보통제 가능. 민주주의의 급격한 후퇴 우려.

 

   

 

[기자회견문]

 

우리의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안녕을 위해, 유쾌한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 “우리는 이명박 정권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모든 탄압을 반대한다!”

 

2009년 6월,“표현의 자유”는 실종되었다. 남아있는 것은 이명박 정권의 무차별적인 탄압뿐이다. 소통하기 위해 광장에 모이는 것도, 인권의 가치를 나누는 영화제도, 저널리스트의 정당한 언론활동도, 인터넷 공간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도,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도, 촛불과 풍선을 드는 것도 모두 “반정부적”이고“불온”한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이명박 정권은 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시민들의 정당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무조건 반정부적인 정치적 활동으로 규정하고,“표현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오로지 통제강화만을 말하며, 시민들을 향해 공권력을 동원하여 폭력을 가하며, 탄압하고 있다. 이것이 2009년 6월,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은 의사개진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헌법과 세계인권선언 등을 통해 보장되어 있는 인권의 영역이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가치이다. 그렇기에 정치적 의사 표현을 비롯한 각 주체들의 표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이다. 또한 다양한 표현이 표출되는 공간 역시, 그 곳이 어디이든지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한다.

 

이명박 정권 1년 반 동안 우리는 무수히 두들겨 맞고, 잡혀가고, 감시당하며, 거리에서 인터넷 공간에서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용감히 외쳐왔다.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불온”한 이명박 정권을 향해, 결코 그 누구도“안녕”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을 향해, 우리는 더 큰 상상력을 발휘하여 말하고 행동하고 표현할 것이다. 우리의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안녕을 위해, 우리의 유쾌한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이명박 정권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모든 탄압을 반대한다!”

 

2009년 6월 22일

문화연대, 미디어행동, 우리만화연대, 인권단체연석회의, 인권운동사랑방, 진보네트워크센터,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부,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작가회의, IT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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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살라는 법의 명령

이달 초 일명 ‘청담동 클럽 사진’이 나돌면서 또 다시 ‘퇴폐’나 ‘문란’ 같은 용어들이 남발되고 있다. 이 사건을 전후로 해서 대마를 접한 몇몇 연예인들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소위 말하는 문화예술 혹은 그 종사자들이 아니꼬운 시선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툭 까놓고 말해서, 남이야 클럽에 가서 뭘하고 어떻게 놀든 무슨 상관인가? 대마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누군가의 사회적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만큼 해로운 것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담배가 대마보다 중독성이 더 강하고 그 폐해도 심하다. 오랜 세월동안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했던 대마가 불법화된 것은 미국 헤게모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대마가 불법화된 것도 듀퐁과 같은 석유자본이나 인종차별주의, 메카시 열풍 등의 정치경제적 배경 때문이었지 결코 대마 자체의 유해성 때문이 아니었다.(사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대마 농장주였다. 그는 섬유나 종이의 원료로서가 아니라 해시시를 만들기 위해 대마를 키웠으며, 해시시 제조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클럽을 즐기는 일부 사람들의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과하다 싶은 놀이 문화나, 대마를 접한 연예인들의 이야기는 연일 방송에서 떠들어 대고, 인터넷을 뜨겁게 달굴 만한 대단한 소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별로 충격적이지도, 그닥 신선하지도 않다. 영화 <고고 70>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때만 되면 등장하는 퇴폐문화 논란이나, 신중현부터 시작되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연예인 대마 관련 사건은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 식상한 퇴폐 문화 담론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정치적 결과를 불러온다는 사실에 있다. 민중의 삶을 구석구석까지 촘촘하게 짓밟아오던 국가는 퇴폐문화 담론이 퍼질 때면 언제나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며 온갖 금기들을 만들어낸다. 국가는 보지 말아야 할 영화를 골라내고, 듣지 말아야 할 음악을 퇴출시키며 가지 말아야 할 곳(광장)을 지정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비판)을 규정한다.

 

지난주에는 갑자기 경찰들이 공연 중인 홍대 라이브 클럽에 들어와 단속을 시행했고, 한 클럽에서는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례적인 일이다. 단지 연예인 대마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에, 홍대나 이태원, 청담동 등의 지역에서 환각 약품이 자주 거래된다는 풍문 때문에, 음악과 춤을 즐기는 클럽들은 잠재적인 범죄 장소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점에 경찰들은 홍대지역에 있는 문신 가게에 들이닥쳐 타투이스트들을 연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사가 아닌 사람이 문신을 시술하면 불법 의료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타투이스트는 아티스트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들은 불법 의료행위 시술자가 된다. 문신은 취향의 범주에 속한 향유할 수 있는 문화이지, 규제의 대상이 아니다. 기초적인 표현의 자유와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보호가 필요한 공간에서 철수하면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공간에 침입한다. 민중은 경제적 권리를 박탈당함과 동시에 문화적 권리를 빼앗긴다. 그들은 전자를 자유라 부르며, 후자를 보호라고 부른다. 이로써 민중은 궁핍해질 자유를 획득하면서, 비판으로부터 보호당한다. 그리고 그러한 조치들은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고 있다.

 

 

법에 대한 무지 혹은 법의 무지

 

법은 끊임없이 금기를 생산한다. 그러나 법의 금기는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자명한 준거를 가지고 생산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정치경제적 맥락 안에서 교묘한 방식으로 생산된다. 국가보안법, 청소년 보호법, 영화진흥법, 통신비밀보호법, 저작권법 그리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 표현의 자유와 문화적 권리를 침해하는 법에 기입된 금기들은 수도 없이 많다.

 

만들어진 금기는 보편이 아니라 특수이다. 현대사회의 대부분의 법은 그것을 제정한 사람이나 법조계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아니면 쉽게 알 수 없다. 일반 민중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키지 못하는 법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은 ‘법에 대한 무지는 핑계가 되지 않는다’고 단정짓는다. 이것은 법치라는 명목으로 일단의 엘리트들의 ‘무지한’ 민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전제 조건이 된다. 법은 이렇게 무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민중에게 전가시킨다.

 

법은 완벽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완벽한 것이라면 역사적 변천 없이 존재했을 것이며, 특정한 정세에 따라 새로운 금기를 만들어내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 법은 스스로 자명한 준거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은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어떤 결여를 가지고 있고, 그 결여는 새로운 금기를 창출하는 원인이 된다. 법의 결여는 사회적 맥락과 그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거쳐 불필요한 규제와 의미의 과잉으로 전환되며, 이 과잉 속에서 금기가 만들어진다.

 

법은 자신이 가진 구조적 원인으로서의 결여, 즉 무지를 민중이라는 법의 적용대상에게 전가함으로써 유지된다. 주의할 점은 무지나 결여 자체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결여의 공간에서만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생산적이다. 문제는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타인의 무지를 드러냄으로써 유지되는 법의 존재조건이다. 자신의 무지를 감추면서 타인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 바로 이것을 통해 지배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지배자들이 지속적으로 민중으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박탈시킬 때 그들에게는 단순히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는 비판자들을 억압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더 깊숙이 들어가 비판의 언어를 제거함으로써 무지를 생산하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배의 조건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조건은 국가의 감시와 처벌 그리고 폭력을 정당화한다. ‘내가 너희를 때린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내 판단은 틀리지 않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 폭력은 법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들은 알고 있(다고 가정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배에 저항하는 첫 단계는 아마도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추고 싶은 춤을 추며,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혹은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가 갖는 것(나는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체력은 국력이 아니라 자력이다!), 그리고 생각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해 낼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법에 대해 무지하듯이, 법 역시 무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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