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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 사회'에서 '자유'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관련 내용이 보도된 이후 추가 사찰 관련 내용들이 밝혀지며 여러모로 시끄러워졌다. 한편으로는 경찰이나 검찰도 아니고 행정 관련 기관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그것도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사찰을 했다는 점 등이 충격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고, 이런 식의 권력형 사건이 어디 한 두 번인가 하는 생각에 놀랍기보다는 ‘또구나...’하는 푸념만 할 뿐이다.

 

사실 민간인 사찰과 같은 방식의 감시와 통제는 그리 신기하고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유사한 내용의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터지고 있다. 한 동안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됐던 이메일 압수수색은 이제 폭로의 대상도 되지 못할 정도로 식상한 일이 되어 버렸다. 작년에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국정원의 민간 사찰 의혹을 제기 했다가 대한민국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김제동이나 윤도현이 진행중이던 프로그램에서 쫓겨나며 의도치 않게 정치적 투사가 되어 갔던 것이나, 최근 방송인 김미화의 블랙리스트 발언 역시 감시와 통제라는 맥락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소위 감시의 일상화 혹은 보편화라고 부를만한 세상에 살고 있다. 특히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은 감시의 범위와 강도를 상상 이상으로 확대 및 강화 시켰다. 국가에서 특수한 업무를 맡고 있는 기관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기능을 가진 감시 프로그램(예를 들어, FBI에서 개발한 카니보어와 매직 랜턴과 같은 프로그램 등)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동사무소나 수사기관 뿐 아니라 민간 기업에서도 널리 활용하고 있는 감시 방식도 여러 가지다. 기록통합, 컴퓨터 매칭, 컴퓨터 프로필링, 신원조회, 프론트 엔딩, 프론트 엔딩 감사, 단일요인 파일분석, 시스템간 결속 등의 방식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재배열 하여 개인들을 분석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평상적인 노동 공간에서도 감시는 일상화 되어 있다. 과거에는 노동현장의 감시는 감독관에 의해 직접 시행되었다. 노동자 몰래 감시하는 것도 어려웠으며, 노동자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상황을 변화 시켰다. 감시자들은 노동자 모르게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거나 전자우편, 메신저, 인터넷 이용현황 등을 감시하기도 한다. 감시를 통해 취합된 노동자 정보는 노동자에 대한 평가로 직결된다. 나아가 노동현장에서 감시는 훨씬 강도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지는데, 벌써 도입된지 오래된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시스템과 같은 것이 대표적 사례중 하나일 것이다.

 

ERP시스템은 ‘영업, 생산, 구매, 자재, 회계, 인사 등 회사 내 모든 업무를 정보기술을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통합정보시스템’이다. 이 체제 하에서는 개별 노동자의 휴식시간, 작업시간, 생산량, 생산속도, 불량률, 작업장 내 현재 위치 등 노동과정의 모든 것이 컴퓨터에 기록된다. 이 시스템은 일상화된 전자 감시를 통해 노동자에게 엄격한 규율을 강제하지만 자본에게는 엄청난 편리와 이익을 준다. 때문에 이런 시스템은 문제적인 것이 되기보다는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노동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평가 된다.

 

이처럼 일상 공간에서 감시가 보편화 된 상황에서, 그것도 합리화와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긍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정치적 감시가 비난 받는 이유는 우리의 정치적 자유를,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넘어 육체적이고 물리적 자유마저 직접적으로 침해하고 박탈시키는 효과 때문인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치적 감시 중에서도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이나 ‘통신비밀보호법’, ‘저작권법’등은 개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상당한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입법 과정에서 논란이 일긴 했지만) 큰 문제를 야기 시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혹시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에서 사람들을 분노시킨 것은 그것이 총리실의 권한 밖에 있는 일이었다는 점은 아니었을까? 즉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적 감시와 통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총리실에서 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니었을까? 사람들의 분노는 정작 감시와 통제가 아니라 혹시 민주주의라는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사회 질서나 시스템을 유지시키는데 온힘을 쏟아야 하는 국가 권력이 그것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데 대한 분노가 아닐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계산 가능성과 예측 가능성의 확장을 통해 (그것이 재해와 같은 자연적인 것이든, 전쟁이나 범죄와 같은 문화적인 것이든) 삶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과 공포를 제거해가면서 형성되었다. 이를 통해 그것은 특정한 사회 질서를 구축해 나갔다. 사회 질서와 체계가 정교하게 구축되어 가는 만큼, 그 체계에 혹은 그 체계를 통해 거대한 이권을 획득한 이들에게 개인들은 통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대상화되었다. 만약 개인들에게 무한한 자유가 부여된다면, 사회 질서에 반하는 행위마저 용인되어야 한다. 때문에 개인들은 특정한 한계 내에서 자유를 부여받아 왔으며, 그들을 통제 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감시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는 사회 질서와 체계를 유지하는데 일정 몫을 담당해 왔다. 아무런 저항 없이 동사무소에 찾아가 지문을 날인하고, 주민번호를 부여받았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기 위해 주민번호를 제공하고, 자신이 지나간 넷상의 흔적을 쿠키로 보내 기업이나 정부에서 수집할 수 있도록 방치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감시는 개인에 대한 완전한 통제와 지배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그것을 계산가능한 영역으로 가시화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감시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어 개인들을 계산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영역으로 진입시켜 통제 가능한 것으로 전환 시키려는 전략적 행위이다. 자유는 계산을 통해 예측가능한 것이 되어야 하는 영역에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도입한다. 불확실성을 증대 시켜 불안과 공포를 확대 시킬 것인가, 혹은 사회 질서를 위해 자유를 포기해야 할 것인가? 마치 선택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이 질문이 처음부터 잘못 세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도 던져볼만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인위적으로 감소시키려는 노력이 낳은 잘못된 상황은 아닌지, 마치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듯이 우리가 소수의 특권 계층에게 그 임무를 수행 할 수 있도록 엄청난 권력을 제공하면서 그 권력에 은밀히 공모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욱 견고한 사회 체계가 아니라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함으로써 이 상황을 역전시켜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이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 체계를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과 지금 가지고 있는 조금의 기득권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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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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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고소가 보여주는 이명박 정권의 통치 원칙

절대군주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 박원순 고소가 보여주는 이명박 정권의 통치 원칙

  

사건의 시작은 이렇다. 지난 6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위클리 경향과 인터뷰를 가졌다. 여기서 그는 국정원의 민간 사찰 의혹을 제기했다. 올 여름을 휩쓴 중요한 사회적 이슈 중 하나는 이메일 압수수색, 인터넷 패킷 감청 등 국가 감시의 문제였다. 일정정도의 위기의식을 느낀 국가는 느닷없이 수개월이 지난 일을 들추어 박원순에게 고소장을 들이밀었다. 9월 15일 발부된 이 고소장에는 박 변호사가 “지난 6월 ‘위클리 경향’과의 인터뷰에서 ‘국정원이 민간사찰을 해 시민단체들의 사업이 무산된다’는 식의 허위발언을 해 국가 안보기관으로서의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적혀 있다. 그러니까 박원순은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고소장의 원고가 대한민국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복종하지 않는자에게 가해진 치졸한 복수

  

이명박 정권에 들어 강하게 나타난 정치적 특징 중 하나는 국가에 의한 시민사회의 지배를 공고히 하려 한다는 점이다. 지배란 기본적으로 타자를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굴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국가의 지배는 시민사회의 굴복과 짝을 이루고 있다.

 

시민사회의 복종은 자발적으로 혹은 순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배는 언제나 복종에의 혐오를 통제할 수 있는 토대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 복종에의 혐오를 통제하는 토대가 바로 폭력이다. 지배는 폭력 행사를 근본적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때로 국가의 지배는 직접적 폭력이 행사 되지 않을 때에도 무리 없이 이루어 지는듯 하지만, 사실 그 때 조차 그 지배의 저변에는 폭력이 가장 혹은 변형된 형태로 놓여 있다.

 

자발적 복종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복종이 지배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실제로 자발적 복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지배에 예속될 때 복종은 피지배자의 완전한 동의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폭력적으로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이 반복될 때 복종은 자발적인 것처럼 보여 진다.

 

문제는 그 선택조차 온전한 의미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선택이란 외부 조건의 간섭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복종으로부터의 탈피, 즉 자유를 선택한다는 것은 지배자의 폭력에 노출되어 자신의 삶을 훼손당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로 진입하는 것이다. (올해 용산에서 목격한 것, 그 잔혹함에 치를 떨며 확인한 것이 바로 이러한 사실이다.) 따라서 복종은 선택이 아니다.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그래서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자유라면, 최악의 상태로 치닫지 않기 위해 복종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자유를 선택할 수 없도록 하는 것, 어쩔 수 없이 복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치적 억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종 대신 자유를 선택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저항이라 부른다. 자유를 선택하는 저항은 폭로, 시위, 캠페인, 혁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저항은 집단적으로 행해지기도 하고, 개별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때 가해지는 폭력(억압)의 방식 또한 고문, 검열, 감시, 감금, 추방 등 다양하다. 박원순 고소 사건은 지배에 저항하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방식 중 하나이다. 이 사건은 국가라는 거대 조직이 한 개인을 상대로 행하는 가장 치졸한 방식의 폭력을 보여준다.

 

어찌보면 법적 고소라는 것은 공적 규칙을 통해 시비를 가리는 것이므로 형식적으로는 폭력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거꾸로 이야기 되어야 한다. 박원순 고소는 폭력을 원초적 법 사실로 정립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것은 국가가 (언듯 합리적인 것처럼 보여지는) 법을 매개로 한 개인의 삶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원고는 대한민국, 피고는 국민

  

사실 국가가 군대나 경찰을 동원해 수 많은 개인에게 폭력을 가해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특이한 점은 그것이 법을 매개로 했다는 점, 그리고 명예를 훼손 당한 주체가 국가 자신이라는 점이다. 고소장에 원고가 대한민국으로 되어 있다. 국가가 원고가 되어 한 개인을 민사재판으로 불러들인 일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시민단체 뿐 아니라 보수적인 법학자나 단체마저 국가를 원고로 내세운 이번 고소가 법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법적으로 국가는 추상적 실체이므로 인격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격권이 없는 실체가 어떻게 명예를 훼손당할 수 있겠는가.

 

‘추측컨대’ 국정원이나 국가는 바보가 아니다.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을 몰랐을리 없다. 그러한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번 고소를 추진했다면, 이것은 이 정권의 무지가 아니라 그들이 준거하고 있는 통치 원칙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 정권은 국가의 토대가 되는 시민사회를 보호하고 유지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지배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사회를 보호하고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과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파괴하더라도 자신들의 지배의 조건들을 마련하는 것을 정치적 목표로 두고 있는 것이다.

 

지배의 조건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 폭력이다. 현대 정치 제도는 폭력의 무차별적 사용을 제한한다. 현대 정치에서 폭력은 이미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종영이 정확히 지적했듯 공적 폭력이란 그것이 지배를 위해서 사용되는 한에서, 즉 이른바 공공성이라는 것이 사실상 지배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갖는 한에서는 궁극적으로 사적폭력으로 환원된다. 이데올로기적 외장을 벗겨내고 제도적 매개를 제거하고 나면, 지배는 적나라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용산참사에서 확인되었으며, 박원순 고소를 통해 다시 한 번 반복되었다.

 

이 정권이 고소장에서 대한민국을 원고로 내세웠을 때, 즉 대한민국을 명예훼손 당할 수 있는 인격권을 가진 존재로 상정했을 때, 그 인격권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이 정권의 지배 세력들이다. 이 정권은 대한민국이 지배 세력의 것이라는 절대군주 시대에나 있을 법한 사고 방식을 통치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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