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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0
    '감시 사회'에서 '자유'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와라

'감시 사회'에서 '자유'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관련 내용이 보도된 이후 추가 사찰 관련 내용들이 밝혀지며 여러모로 시끄러워졌다. 한편으로는 경찰이나 검찰도 아니고 행정 관련 기관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그것도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사찰을 했다는 점 등이 충격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고, 이런 식의 권력형 사건이 어디 한 두 번인가 하는 생각에 놀랍기보다는 ‘또구나...’하는 푸념만 할 뿐이다.

 

사실 민간인 사찰과 같은 방식의 감시와 통제는 그리 신기하고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유사한 내용의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터지고 있다. 한 동안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됐던 이메일 압수수색은 이제 폭로의 대상도 되지 못할 정도로 식상한 일이 되어 버렸다. 작년에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국정원의 민간 사찰 의혹을 제기 했다가 대한민국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김제동이나 윤도현이 진행중이던 프로그램에서 쫓겨나며 의도치 않게 정치적 투사가 되어 갔던 것이나, 최근 방송인 김미화의 블랙리스트 발언 역시 감시와 통제라는 맥락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소위 감시의 일상화 혹은 보편화라고 부를만한 세상에 살고 있다. 특히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은 감시의 범위와 강도를 상상 이상으로 확대 및 강화 시켰다. 국가에서 특수한 업무를 맡고 있는 기관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기능을 가진 감시 프로그램(예를 들어, FBI에서 개발한 카니보어와 매직 랜턴과 같은 프로그램 등)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동사무소나 수사기관 뿐 아니라 민간 기업에서도 널리 활용하고 있는 감시 방식도 여러 가지다. 기록통합, 컴퓨터 매칭, 컴퓨터 프로필링, 신원조회, 프론트 엔딩, 프론트 엔딩 감사, 단일요인 파일분석, 시스템간 결속 등의 방식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재배열 하여 개인들을 분석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평상적인 노동 공간에서도 감시는 일상화 되어 있다. 과거에는 노동현장의 감시는 감독관에 의해 직접 시행되었다. 노동자 몰래 감시하는 것도 어려웠으며, 노동자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상황을 변화 시켰다. 감시자들은 노동자 모르게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거나 전자우편, 메신저, 인터넷 이용현황 등을 감시하기도 한다. 감시를 통해 취합된 노동자 정보는 노동자에 대한 평가로 직결된다. 나아가 노동현장에서 감시는 훨씬 강도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지는데, 벌써 도입된지 오래된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시스템과 같은 것이 대표적 사례중 하나일 것이다.

 

ERP시스템은 ‘영업, 생산, 구매, 자재, 회계, 인사 등 회사 내 모든 업무를 정보기술을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통합정보시스템’이다. 이 체제 하에서는 개별 노동자의 휴식시간, 작업시간, 생산량, 생산속도, 불량률, 작업장 내 현재 위치 등 노동과정의 모든 것이 컴퓨터에 기록된다. 이 시스템은 일상화된 전자 감시를 통해 노동자에게 엄격한 규율을 강제하지만 자본에게는 엄청난 편리와 이익을 준다. 때문에 이런 시스템은 문제적인 것이 되기보다는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노동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평가 된다.

 

이처럼 일상 공간에서 감시가 보편화 된 상황에서, 그것도 합리화와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긍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정치적 감시가 비난 받는 이유는 우리의 정치적 자유를,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넘어 육체적이고 물리적 자유마저 직접적으로 침해하고 박탈시키는 효과 때문인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치적 감시 중에서도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이나 ‘통신비밀보호법’, ‘저작권법’등은 개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상당한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입법 과정에서 논란이 일긴 했지만) 큰 문제를 야기 시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혹시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에서 사람들을 분노시킨 것은 그것이 총리실의 권한 밖에 있는 일이었다는 점은 아니었을까? 즉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적 감시와 통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총리실에서 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니었을까? 사람들의 분노는 정작 감시와 통제가 아니라 혹시 민주주의라는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사회 질서나 시스템을 유지시키는데 온힘을 쏟아야 하는 국가 권력이 그것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데 대한 분노가 아닐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계산 가능성과 예측 가능성의 확장을 통해 (그것이 재해와 같은 자연적인 것이든, 전쟁이나 범죄와 같은 문화적인 것이든) 삶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과 공포를 제거해가면서 형성되었다. 이를 통해 그것은 특정한 사회 질서를 구축해 나갔다. 사회 질서와 체계가 정교하게 구축되어 가는 만큼, 그 체계에 혹은 그 체계를 통해 거대한 이권을 획득한 이들에게 개인들은 통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대상화되었다. 만약 개인들에게 무한한 자유가 부여된다면, 사회 질서에 반하는 행위마저 용인되어야 한다. 때문에 개인들은 특정한 한계 내에서 자유를 부여받아 왔으며, 그들을 통제 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감시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는 사회 질서와 체계를 유지하는데 일정 몫을 담당해 왔다. 아무런 저항 없이 동사무소에 찾아가 지문을 날인하고, 주민번호를 부여받았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기 위해 주민번호를 제공하고, 자신이 지나간 넷상의 흔적을 쿠키로 보내 기업이나 정부에서 수집할 수 있도록 방치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감시는 개인에 대한 완전한 통제와 지배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그것을 계산가능한 영역으로 가시화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감시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어 개인들을 계산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영역으로 진입시켜 통제 가능한 것으로 전환 시키려는 전략적 행위이다. 자유는 계산을 통해 예측가능한 것이 되어야 하는 영역에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도입한다. 불확실성을 증대 시켜 불안과 공포를 확대 시킬 것인가, 혹은 사회 질서를 위해 자유를 포기해야 할 것인가? 마치 선택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이 질문이 처음부터 잘못 세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도 던져볼만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인위적으로 감소시키려는 노력이 낳은 잘못된 상황은 아닌지, 마치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듯이 우리가 소수의 특권 계층에게 그 임무를 수행 할 수 있도록 엄청난 권력을 제공하면서 그 권력에 은밀히 공모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욱 견고한 사회 체계가 아니라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함으로써 이 상황을 역전시켜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이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 체계를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과 지금 가지고 있는 조금의 기득권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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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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