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

손담비 흉내 UCC 저작권 침해 불인정 판결의 허와 실

지난해 5살짜리 아이가 손담비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올린 블로그 게시물이 게시 중단 조치를 당한 사건이 있었다. 동영상을 올린 당사자는 게시 중단 조치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사)음악저작권협회와 (주)엔에이치엔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이번 달 18일 원고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이용자의 향유권을 일부 인정했다는 점 때문에 환영할만한 조치로 평가되고있다. 판결이 난 다음날 참여연대는 논평을 내어 부당한 삭제 요청에 대해 세계 최초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이라는 점과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규제들을 개선할 여지를 남겼다는 점을 들며 이번 판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을 무턱대고 환영할 수만은 없다.


이번 판결은 결과만 본다면 이용자의 향유권을 보장하는 당연한 조치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 판결을 이끌어내는 논리(과정)를 들여다보면 이 당연한 권리가 법의 영역에서는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 권리로 여겨지는지, 나아가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권리가 얼마나 누리기 힘든 것인지가 드러난다.


법원은 이번 사건을 “기본권 주체의 표현의 자유 및 문화․예술의 자유라는 기본권이 상대방 기본권 주체의 저작재산권이라는 기본권과 충돌하는 상황”, 즉 저작물에 대한 생산자의 소유권과 이용자의 향유권 사이의 충돌하는 상황으로 규정하며, 이러한 충돌이 발생할 경우 “저작자와 이용자의 권리의 균형 및 조화를 도모”하고 있는 저작권법을 통해 “조화롭게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저작권법이 “여러 조문에 걸쳐 저작재산권의 제한규정을 두어 저작물을 자유이용할 수 있는 경우를 명문화” 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같은 사건의 조화로운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 저작권법에서는 보도·비평·교육·연구를 위한 목적 하에서만 저작물에 대한 인용이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법원은 “인용저작물이 피인용저작물을 대체할 수 있어 피인용저작물의 시장가치를 훼손”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용이 이뤄져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법원은 문제가 된 게시물이 “원고의 딸의 귀엽고 깜찍한 행동에 대한 기록과 감상, 대중문화가 어린 아이에게 미친 영향 등에 대한 비평 등을 담아 이 사건 게시물을 작성하고 공개한 것으로서 이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며, “사건 저작물의 시장가치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시장수요를 대체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만한 여지가 없고, 오히려 이 사건 저작물의 인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기여한다고 볼 수도 있는 점”을 들어 원고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다시 말해, 문제의 게시물이 비평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저작물의 시장가치를 훼손하지 않기 때문에 저작권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보면 꽤나 관대한 판결처럼 보인다. 그러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 이 판결에서 핵심이 된 것은 비평과 시장가치라는 두 요소이다. 비평에 대해 살펴보자. 문제가 된 게시물에는 아이의 엄마가 가요프로그램도 보지 않는 아이가 이 노래를 어디서 보고 들은 것인지 궁금하다는 글 한 줄이 담겨 있다. 법원은 이 한 줄의 글을 인용하며 “대중문화가 어린아이에게 미친 영향 등에 대한 비평”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그것에 비평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 엄마의 의문이 간단하지만 비평이라 부를 만한 요소가 담겨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만약 그 한 줄의 글이 없었다면 이 게시물은 비평이 아닌 것이 되며, 정당한 목적에 의한 인용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게시물이 ‘비평 글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적인 효력을 가지는 보도·비평·교육·연구라는 범주의 글(혹은 다른 매체를 통한 표현물)들이 뚜렷한 척도를 가지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법원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사건의 계기가 된 게시물이 (법원이 판결문에서 강조했던) “비전문가”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는 점과 그 게시물이 가진 일상적 성격을 고려해 본다면 저작권법에서 규제하고 있는 게시물의 범위가 얼마나 자의적으로 판단될 수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비평의 기준이 자의적인 것이라면, 따라서 그것이 엄격한 법적 척도가 되지 못한다면 이번 판결의 결정적 근거가 된 것은 시장가치의 훼손 여부에 있을 것이다. 문제가 된 게시물은 손담비가 부른 노래가 발생시키리라 예상되는 수익에 결정적인 손실을 가져다 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작권법을 위반하지 않은 게시물이 된 것이다. 이처럼 판결문을 조금만 들여다본다면 이번 사건이 결코 생산자의 저작재산권과 이용자의 향유권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용자의 권리는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으며, 단지 (자본주의 사회를 성립시키고 유지케 하는 법적 근간인) ‘재산권이 침해되었는가 아닌가’가 문제의 핵심에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번 판결은 이용자의 향유권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확장하기 위한 판결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결과론일 뿐이다. 판결의 결과보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은 그 결과를 이끌어내는 법적 논리(과정)이다. 그 논리 속에는 공유되어야할 문화적 산물들을 하나의 상품으로 전유해 나가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합리성은 법의 이름으로 개개인의 사고 속에 자리잡는다. 각 개인들은 그 합리성 속에서 판단하고 행위하게 된다. 특정한 행위의 근거가 되는 합리성이 시장가치만을 척도로 삼아 형성될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 가치를 판단의 최우선 척도로 놓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변형을 가하며 풍성해지는 문화적 영토를 파괴하는 비합리적인 것이 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법치는 원래 정치다 : 용산 판결과 미디어법 판결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한다. 무슨 오이디푸스 신화에서처럼 신탁이라도 받았단 말인가. 이제 그 아들은 자신의 눈을 찌르고 사막으로 고행이라도 떠나야 한다는 말인가. 현대의 오이디푸스는 신탁 대신 법탁을 받고, 사막 대신 감옥으로 가야 한다. 얼추 오이디푸스 신화의 현대 버전 정도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고행을 떠나는데 반해 현대의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지만 지배 권력에 의해 고행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그래도 확실히 비극은 비극이다.

 

지난 달 28일에 있었던 용산 참사 관련 재판의 결과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재판에서 재판부는 이충연 용산4구역철대위원장 등 피고인 2명에게 6년형을 선고했고, 다른 피고인 5명에 대해서도 5년형을 선고했다. 농성 참여 정도가 가벼운 두 피고인은 각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결국 용산참사는 법적으로 모두 철거민들의 책임이 되었다. 철거민들이 같은 철거민 5명까지 모두 죽였단다. 선고 받은 9명 중에 아들이, 죽은 5명 중에 아버지가 있었다. 이 재판의 부당함이야 따로 이야기 할 필요 없겠다. 그런 이야기는 입만 아프다.

 

 

 

패륜을 양산하는 법

 

어떤 것은 숨기고, 어떤 것은 우겨서 법이 완성한 것이 바로 이 패륜의 시나리오이다. 이 나라의 법은 패륜을 양산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언젠가 대통령 ‘각하’께서 말씀하셨던 “법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발언은 이제 패륜을 양산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가 강화하고 싶다던 법규가 교통법규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 않은가. 그가 강화해온 법규들, 그러니까 국가의 안녕과 개발을 위한 법들, 이를테면 집시법, 언론법, 도시 정비법 같은 것들이 그것 아니던가. 이제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법이 패륜을 만든 것이 아니라 법 자체가 패륜이라고!

 

28일에 있었던 풍경 하나를 돌이켜보자. 재판장에 한양석 부장판사와 2명의 배석판사가 입정하며 재판이 시작된다. 그들은 피고들의 혐의를 조목조목 지적하고나서 피고인들의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법정이 시끄러워지고 피고인석에 있던 이충연, 김주환씨가 “이건 재판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대기실로 들어간다. 방청석에서는 한 방청객이 “정권의 나팔수”라고 재판장을 비난한다. 이에 재판장은 “지금부터 더 떠드는 사람은 구속”이라고 경고한다. 잠시 후 또 다른 방청객이 “이게 법치주의 국가냐”라고 외쳤고, 재판장은 방호원에게 “지금 말한 사람 구속”시키라고 지시한다. 그는 바로 감치된다.

 

그 방청객은 그냥 시끄러워서 감치된 것일까? 재판장은 왜 방청객들의 입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막으려 했을까? 혹시 방청객들의 말이 그냥 소음이 아니라 이 재판의 진실을, 법의 본질을 소름끼치도록 정확하게 꼬집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재판장은 그들의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어서 섭섭한게 아니다. 결코 표면으로 드러나서는 안되는 법의 신화적 기원을, 법의 비밀을, 그것도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발설한 것에서 그들은 모욕을 느낀다. 그래서 그것은 재판장에 대한 모욕이었으며, 사법권력에 대한 모욕이었고, 법 자체에 대한 모욕이었다.

 

반복되는 이야기이겠지만 한 가지 더 이야기 해보자. 헌법재판소가 미디어법 처리과정의 위법성을 인정하면서도, 가결된 결과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논의할 일이라며 판단을 유보했다.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권한과 자율성을 인정하고 결정적 판단을 국회에 양도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삼권분립에 입각한 결정이다. 확실히 어릴적 교과서에서 삼권분립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입법, 사법, 행정부가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어야 독재를 막고 민주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개념상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이번 판결은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치 않은 것인지 보여준 듯하다. 사소한데서 서로를 견제하되 정말 중요한 문제 앞에서는 놀라울 만큼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것이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그 세력들이 아니던가(베버가 말했듯이 전문가란 작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커다란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은 진정한 정치의 전문가들이다).

 

정치 활동은 입법, 사법, 행정부 사이이건 정당들 사이이건 그들의 견제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나 타협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로 여기에 현 정치체제의 핵심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그 갈등과 타협의 정치 행위 속에 민중은 없다. 정치란 그들만의 정치이다. 실제로 정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에 민중의 의견은 개입되지 않으며, 그들은 의미 없이 사라진다. 이런 정치체제에서 이루어지는 정치행위는 갈등과 타협을 통해 민중을 도매금으로 처리하는 일종의 거래이다. 즉, 정치는 갈등, 견제, 균형, 타협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일종의 거래인데, 문제는 민중이 없는 곳에서 (민중의 의지와 상관 없이)그들을 거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여기서 선거 제도가 그 무력함을 드러낸다. 선거를 통해 뽑힌 사람이 만들어낸 법이 나의 의사와, 민중의 의사와 무관하게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에는 민중의 의견을 대표하지 않는자를 대표자로 선출해야 하는 모순이 있다. 선거라는 것은 그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 나를 위치시키는 과정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소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은폐시키는 교묘한 장치에 불과하다.

 

 

지킬 수 없는 법이라면 대담하게 위반하라

 

용산 판결과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법의 준거점이 도덕, 윤리, 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정치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가 경제 영역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결국 법은 정치경제적 상황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용산 1심 재판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타인이 관리 중인 건물을 점거하고 경찰들에게 화염병을 던진 것은 국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동으로 법치국가에서 어떤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1) 타인이 관리 중인 건물에 대한 점거, 2) 경찰들에게 화염병을 던진 것은 법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유린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번역하면 법질서는 1) 부르주아지의 소유권과 2) 소유권을 보증하는 국가 폭력을 근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유권과 국가폭력을 부정하는 것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위인 것이다.

 

용산 판결이 현실 정치와 결탁한 법질서가 구성되는 근본원리의 내용을 드러내주는 것이라면, 미디어법 판결은 법의 일반 원리가 현실 정치를 경유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법 자체는 일반적인 것이지만, 구체적 사건은 개별적인 것이다. 일반성의 원리가 구체적 사건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재판이라는 매개 과정이 요청된다. 재판은 갈등하는 주체들이 경합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재판에서 갈등하는 주체들은 대등한 입장을 가지지 못한다. 갈등 주체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자원을 활용해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재판에서 갈등하는 주체들의 역학 관계는 이미 기존의 권력 관계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재판에는 참여 주체의 권력 관계뿐만 아니라 특수한 정치적 흐름, 즉 정세가 개입된다(물론 재판 참여 주체의 정치 권력과 정세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디어법은 10월 29일에 판결이 났다. 그 전날인 10월 28일은 재보궐선거가 있었고, 11월 1일에는 방송법 시행일이었다. 판결 자체뿐 아니라 판결이 난 날짜도 정치적인 고려가 다분해 보인다. 미디어법 판결이 29일에 남으로써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받을 정치적 타격은 최소화되고, 방송법은 차질 없이 시행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앞에서 언급한 용산 판결이 있었던 28일의 재판장 풍경으로 돌아가 피고인과 방청객들이 외쳤던 그 소리들을 들어보자. “이것은 재판이 아니다”라던 이추연 김주환씨의 외침, “이게 법치주의 국가냐”고 묻던 방청객의 외침 말이다. 정말 쿨~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재판이고, 법치주의 국가다. 내가 말하면 욕먹을 테니, 남이 한 이야기를 하나 인용하며 글을 끝맺도록 하겠다. 프로이트의 말이다.

 

“법과 규제들이 본래 신성하며, 따라서 우리가 거슬러서는 안되는 어떤 속성들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는 없으며, 종종 부족절하게 구성되어 우리의 정의감을 훼손하거나 혹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훼손시킬 것이라는 사실, 또 권위가 방만해질 때 지킬 만한 가치가 없는 법들을 교정하는 방법은 대담하게 위반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서 곧 우리를 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닥치고 살라는 법의 명령

이달 초 일명 ‘청담동 클럽 사진’이 나돌면서 또 다시 ‘퇴폐’나 ‘문란’ 같은 용어들이 남발되고 있다. 이 사건을 전후로 해서 대마를 접한 몇몇 연예인들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소위 말하는 문화예술 혹은 그 종사자들이 아니꼬운 시선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툭 까놓고 말해서, 남이야 클럽에 가서 뭘하고 어떻게 놀든 무슨 상관인가? 대마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누군가의 사회적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만큼 해로운 것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담배가 대마보다 중독성이 더 강하고 그 폐해도 심하다. 오랜 세월동안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했던 대마가 불법화된 것은 미국 헤게모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대마가 불법화된 것도 듀퐁과 같은 석유자본이나 인종차별주의, 메카시 열풍 등의 정치경제적 배경 때문이었지 결코 대마 자체의 유해성 때문이 아니었다.(사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대마 농장주였다. 그는 섬유나 종이의 원료로서가 아니라 해시시를 만들기 위해 대마를 키웠으며, 해시시 제조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클럽을 즐기는 일부 사람들의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과하다 싶은 놀이 문화나, 대마를 접한 연예인들의 이야기는 연일 방송에서 떠들어 대고, 인터넷을 뜨겁게 달굴 만한 대단한 소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별로 충격적이지도, 그닥 신선하지도 않다. 영화 <고고 70>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때만 되면 등장하는 퇴폐문화 논란이나, 신중현부터 시작되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연예인 대마 관련 사건은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 식상한 퇴폐 문화 담론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정치적 결과를 불러온다는 사실에 있다. 민중의 삶을 구석구석까지 촘촘하게 짓밟아오던 국가는 퇴폐문화 담론이 퍼질 때면 언제나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며 온갖 금기들을 만들어낸다. 국가는 보지 말아야 할 영화를 골라내고, 듣지 말아야 할 음악을 퇴출시키며 가지 말아야 할 곳(광장)을 지정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비판)을 규정한다.

 

지난주에는 갑자기 경찰들이 공연 중인 홍대 라이브 클럽에 들어와 단속을 시행했고, 한 클럽에서는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례적인 일이다. 단지 연예인 대마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에, 홍대나 이태원, 청담동 등의 지역에서 환각 약품이 자주 거래된다는 풍문 때문에, 음악과 춤을 즐기는 클럽들은 잠재적인 범죄 장소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점에 경찰들은 홍대지역에 있는 문신 가게에 들이닥쳐 타투이스트들을 연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사가 아닌 사람이 문신을 시술하면 불법 의료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타투이스트는 아티스트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들은 불법 의료행위 시술자가 된다. 문신은 취향의 범주에 속한 향유할 수 있는 문화이지, 규제의 대상이 아니다. 기초적인 표현의 자유와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보호가 필요한 공간에서 철수하면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공간에 침입한다. 민중은 경제적 권리를 박탈당함과 동시에 문화적 권리를 빼앗긴다. 그들은 전자를 자유라 부르며, 후자를 보호라고 부른다. 이로써 민중은 궁핍해질 자유를 획득하면서, 비판으로부터 보호당한다. 그리고 그러한 조치들은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고 있다.

 

 

법에 대한 무지 혹은 법의 무지

 

법은 끊임없이 금기를 생산한다. 그러나 법의 금기는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자명한 준거를 가지고 생산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정치경제적 맥락 안에서 교묘한 방식으로 생산된다. 국가보안법, 청소년 보호법, 영화진흥법, 통신비밀보호법, 저작권법 그리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 표현의 자유와 문화적 권리를 침해하는 법에 기입된 금기들은 수도 없이 많다.

 

만들어진 금기는 보편이 아니라 특수이다. 현대사회의 대부분의 법은 그것을 제정한 사람이나 법조계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아니면 쉽게 알 수 없다. 일반 민중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키지 못하는 법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은 ‘법에 대한 무지는 핑계가 되지 않는다’고 단정짓는다. 이것은 법치라는 명목으로 일단의 엘리트들의 ‘무지한’ 민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전제 조건이 된다. 법은 이렇게 무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민중에게 전가시킨다.

 

법은 완벽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완벽한 것이라면 역사적 변천 없이 존재했을 것이며, 특정한 정세에 따라 새로운 금기를 만들어내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 법은 스스로 자명한 준거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은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어떤 결여를 가지고 있고, 그 결여는 새로운 금기를 창출하는 원인이 된다. 법의 결여는 사회적 맥락과 그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거쳐 불필요한 규제와 의미의 과잉으로 전환되며, 이 과잉 속에서 금기가 만들어진다.

 

법은 자신이 가진 구조적 원인으로서의 결여, 즉 무지를 민중이라는 법의 적용대상에게 전가함으로써 유지된다. 주의할 점은 무지나 결여 자체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결여의 공간에서만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생산적이다. 문제는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타인의 무지를 드러냄으로써 유지되는 법의 존재조건이다. 자신의 무지를 감추면서 타인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 바로 이것을 통해 지배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지배자들이 지속적으로 민중으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박탈시킬 때 그들에게는 단순히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는 비판자들을 억압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더 깊숙이 들어가 비판의 언어를 제거함으로써 무지를 생산하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배의 조건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조건은 국가의 감시와 처벌 그리고 폭력을 정당화한다. ‘내가 너희를 때린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내 판단은 틀리지 않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 폭력은 법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들은 알고 있(다고 가정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배에 저항하는 첫 단계는 아마도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추고 싶은 춤을 추며,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혹은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가 갖는 것(나는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체력은 국력이 아니라 자력이다!), 그리고 생각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해 낼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법에 대해 무지하듯이, 법 역시 무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한다.

 

...........................................................................................

미디어스 기고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