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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20
    닥치고 살라는 법의 명령(1)
    와라

닥치고 살라는 법의 명령

이달 초 일명 ‘청담동 클럽 사진’이 나돌면서 또 다시 ‘퇴폐’나 ‘문란’ 같은 용어들이 남발되고 있다. 이 사건을 전후로 해서 대마를 접한 몇몇 연예인들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소위 말하는 문화예술 혹은 그 종사자들이 아니꼬운 시선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툭 까놓고 말해서, 남이야 클럽에 가서 뭘하고 어떻게 놀든 무슨 상관인가? 대마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누군가의 사회적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만큼 해로운 것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담배가 대마보다 중독성이 더 강하고 그 폐해도 심하다. 오랜 세월동안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했던 대마가 불법화된 것은 미국 헤게모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대마가 불법화된 것도 듀퐁과 같은 석유자본이나 인종차별주의, 메카시 열풍 등의 정치경제적 배경 때문이었지 결코 대마 자체의 유해성 때문이 아니었다.(사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대마 농장주였다. 그는 섬유나 종이의 원료로서가 아니라 해시시를 만들기 위해 대마를 키웠으며, 해시시 제조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클럽을 즐기는 일부 사람들의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과하다 싶은 놀이 문화나, 대마를 접한 연예인들의 이야기는 연일 방송에서 떠들어 대고, 인터넷을 뜨겁게 달굴 만한 대단한 소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별로 충격적이지도, 그닥 신선하지도 않다. 영화 <고고 70>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때만 되면 등장하는 퇴폐문화 논란이나, 신중현부터 시작되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연예인 대마 관련 사건은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 식상한 퇴폐 문화 담론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정치적 결과를 불러온다는 사실에 있다. 민중의 삶을 구석구석까지 촘촘하게 짓밟아오던 국가는 퇴폐문화 담론이 퍼질 때면 언제나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며 온갖 금기들을 만들어낸다. 국가는 보지 말아야 할 영화를 골라내고, 듣지 말아야 할 음악을 퇴출시키며 가지 말아야 할 곳(광장)을 지정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비판)을 규정한다.

 

지난주에는 갑자기 경찰들이 공연 중인 홍대 라이브 클럽에 들어와 단속을 시행했고, 한 클럽에서는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례적인 일이다. 단지 연예인 대마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에, 홍대나 이태원, 청담동 등의 지역에서 환각 약품이 자주 거래된다는 풍문 때문에, 음악과 춤을 즐기는 클럽들은 잠재적인 범죄 장소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점에 경찰들은 홍대지역에 있는 문신 가게에 들이닥쳐 타투이스트들을 연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사가 아닌 사람이 문신을 시술하면 불법 의료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타투이스트는 아티스트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들은 불법 의료행위 시술자가 된다. 문신은 취향의 범주에 속한 향유할 수 있는 문화이지, 규제의 대상이 아니다. 기초적인 표현의 자유와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보호가 필요한 공간에서 철수하면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공간에 침입한다. 민중은 경제적 권리를 박탈당함과 동시에 문화적 권리를 빼앗긴다. 그들은 전자를 자유라 부르며, 후자를 보호라고 부른다. 이로써 민중은 궁핍해질 자유를 획득하면서, 비판으로부터 보호당한다. 그리고 그러한 조치들은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고 있다.

 

 

법에 대한 무지 혹은 법의 무지

 

법은 끊임없이 금기를 생산한다. 그러나 법의 금기는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자명한 준거를 가지고 생산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정치경제적 맥락 안에서 교묘한 방식으로 생산된다. 국가보안법, 청소년 보호법, 영화진흥법, 통신비밀보호법, 저작권법 그리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 표현의 자유와 문화적 권리를 침해하는 법에 기입된 금기들은 수도 없이 많다.

 

만들어진 금기는 보편이 아니라 특수이다. 현대사회의 대부분의 법은 그것을 제정한 사람이나 법조계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아니면 쉽게 알 수 없다. 일반 민중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키지 못하는 법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은 ‘법에 대한 무지는 핑계가 되지 않는다’고 단정짓는다. 이것은 법치라는 명목으로 일단의 엘리트들의 ‘무지한’ 민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전제 조건이 된다. 법은 이렇게 무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민중에게 전가시킨다.

 

법은 완벽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완벽한 것이라면 역사적 변천 없이 존재했을 것이며, 특정한 정세에 따라 새로운 금기를 만들어내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 법은 스스로 자명한 준거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은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어떤 결여를 가지고 있고, 그 결여는 새로운 금기를 창출하는 원인이 된다. 법의 결여는 사회적 맥락과 그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거쳐 불필요한 규제와 의미의 과잉으로 전환되며, 이 과잉 속에서 금기가 만들어진다.

 

법은 자신이 가진 구조적 원인으로서의 결여, 즉 무지를 민중이라는 법의 적용대상에게 전가함으로써 유지된다. 주의할 점은 무지나 결여 자체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결여의 공간에서만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생산적이다. 문제는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타인의 무지를 드러냄으로써 유지되는 법의 존재조건이다. 자신의 무지를 감추면서 타인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 바로 이것을 통해 지배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지배자들이 지속적으로 민중으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박탈시킬 때 그들에게는 단순히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는 비판자들을 억압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더 깊숙이 들어가 비판의 언어를 제거함으로써 무지를 생산하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배의 조건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조건은 국가의 감시와 처벌 그리고 폭력을 정당화한다. ‘내가 너희를 때린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내 판단은 틀리지 않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 폭력은 법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들은 알고 있(다고 가정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배에 저항하는 첫 단계는 아마도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추고 싶은 춤을 추며,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혹은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가 갖는 것(나는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체력은 국력이 아니라 자력이다!), 그리고 생각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해 낼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법에 대해 무지하듯이, 법 역시 무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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