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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노벨 평화상을? 환상말고 현실을 직시하자

 

 

올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인터넷이 거론되고 있다. 일단 노벨상이 가진 갖가지 추문은 제쳐둔다면 이런 흐름 자체는 상당히 흥미롭다. 지금까지 어떤 매체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적이 없다. 텔레비전도, 영화도, 라디오도 나름 여러학자들에 의해 (물론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혁명적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인터넷만한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다. 인터넷은 말 그대로 인터 네트워크(inter + network)의 준말로 상호적인 관계망을 일컫는 것이다. 노벨 평화상은 그것이 수상자든 후보자든 모두 개인이나 단체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은 그런 개인이나 단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상호 연결시키는 관계망 자체이다. 인터넷에 노벨 평화상을 주려고 하는 것은 특정한 주체가 아니라 주체들 사이의 공간, 즉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관계’를 평화의 계기로 사유하려는 행위이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지 관계라는 것은 ‘1대 1’, 혹은 ‘1대 다(多)’의 형식을 띄고 있었다. ‘1대 1’의 관계가 대면적 관계라는 점에서 직접적인 것이라면, ‘1대 다’의 관계는 기술적 매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것이었다. 특히 후자의 관계 방식은 1의 위치를 점하는 것이 대중을 상대로 일방적인 독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권력화를 예비하고 있다. 신문, 방송, 영화, 텔레비전 등의 현대사회의 매체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 형식을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은 이것들과 다른 방식의 관계를 가능케 했다. ‘다(多)대 다(多)’의 방식이 그것이다. 그곳에서 권력의 계기는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일방적 독백보다는 상호적 대화가 강화되는 듯하다. 상호적 대화를 통해 정치적 논쟁이 활성화 되어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들을 사유할 수 있다면,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주체들이 가진 폭력적 모습들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그것들의 궁극적 폐기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가 형성될 수 있다면, 그리고 인터넷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새로운 관계 유형의 도입을 가능케 한 인터넷이 평화상을 수상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은 과연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 인터넷이 도입된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떤 근본적 변화를 겪어 왔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인터넷이 도입되고 활성화된 이후 한국은 더욱 평화로워졌는가? 인터넷은 잠재적 가능성의 공간이고, 그 잠재성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끝내는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라면, 결코 도래할 수 없는 ‘미래’의 잠재성이라면, 혹은 그 잠재성들이 끊임없이 체계적으로 억압되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보여주는 환상의 미래를 걷어내고, 그것을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인터넷이 도입시킨 ‘다대 다’라는 관계 방식을 보자. 이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다대 다’의 관계에서 개입과 토론의 주체들이 능동성을 가지고 상호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소위 상호작용성, 혹은 상호능동성(inter-activity)이라 부른다. 인터넷이 불러오는 수많은 가능성들은 바로 이 능동적 상호작용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을 사용하는 주체들을 능동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능동적인 참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수많은 노이즈를 만들어내는 특정 분야에 한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권력을 가진 지배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중(그들을 민중, 군중, 다중, 피지배자 등 그 무엇으로 불러도 관계없다)을 순수한 존재라거나 혁명적 저항의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들은 어떤 측면에서 전혀 능동적이거나 저항적이지 않다. 오히려 상호수동성(inter-passivity)을 가진 이들이라 해도 좋다.

 

그들에게(자꾸 이렇게 뭉뚱그려서 ‘그들이’ 하나의 속성을 공유한 것처럼 이야기 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편의상 그들이라 불러보자. 물론 ‘그들’에는 ‘나’도 포함된다) 인터넷은 블로그와 동호회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공간이며,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거나 놓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다운받아 보고, 게임과 쇼핑을 하는 (복잡한 기능을 가진)단순한 도구이다. 물론 기업의 횡포나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 뉴스에 비판적인 댓글을 달거나, 트위터에 4대강 사업을 비난하는 강한 정치적 색채를 가진 글이 상당한 양으로 올라온다. 그런데 댓글이나 트위터의 짧은 논평이 능동성이고, 저항이며, 인터넷의 가능성인가? 조직적 힘으로 전환되기보다는 과잉된 언어를 통해 정치적 포만감을 제공하는 것,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능동성 보다는 수동성의 근거가 되는 것이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인터넷의 기능아닌가.

 

인터넷과 관련해서 결코 간과해서 안되는 또 하나의 지점은 인터넷의 형성과 유지와 관련된 정치경제적 기반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경시할 때 우리는 단순한 논리의 매체결정론에 빠지게 된다. 매체는 고유한 ‘관계 방식’을 가지지만, 그것 자체가 정치경제적 조건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인터넷의 기원인 아르파넷(ARPANET)이 미국방부의 첨단기술연구계획국(ARPA)에 의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후 미국은 1990년에 ‘정보고속도로 구상’을 발표하고 인터넷 민간화 이후의 지구적인 정보화를 예비했다. 이에 기초해 1993년 ‘국가정보하부구조(NII)구상 행동계획’과 1994년 ‘지구정보하부구조(GII) 구상’을 발표하게 된다. 현재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인터넷은 미국에 의해 주도된 구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인터넷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존 권력의 통제를 받으며, 설계되고 추진되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도 95년 이후 국가 주도의 통신 정책이 수립 되면서 권력의 통제 아래서 인터넷이 형성되게 되었다. 정부는 한국통신의 글로벌경쟁력을 갖추게 한다는 명분과 초고속 정보통신사업의 조속한 추진을 목표로 ‘정보화촉진기본법’을 제정한다. 그리하여 95년에 PC통신 서비스에 인터넷접속 서비스(일명 PPP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이때 설립된 규격화된 인터넷 구조의 기반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잘 정비된 정보통신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인터넷이 국가의 강한 통제 아래서 그것의 주도하에 형성되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인터넷 구조의 상당 부분이 경제적, 그리고 그 경제 성장의 필수적 요소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조건을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인터넷은 그것의 형성기에만 정치적 경제적 조건에 귀속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인터넷 환경을 권력자의 취향에 따라 규제하는 수많은 법규범, 예를 들어 정보통신망법, 저작권법, 통신비밀보호법 등에 둘러쌓여 있다. 우리는 인터넷이 표현의 자유에 기반을 두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매체라는 평가와는 상당히 다른 매체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과연 인터넷이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실제로 무엇일까.

 

인터넷에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는 취지의 캠페인이 한 인터넷 사이트(http://internetforpeace.org)가 개설되면서 확산되었다. 그것이 작년 11월의 이야기다. 얼마전 한국에서도 (사)인터넷기업협회를 중심으로 이 캠페인이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거대 포털 사이트가 동참하고 있다. 이들이 이 캠페인에 동참하며 낸 보도자료에는 인터넷이 “열린 의사소통과 민주주의 발전을 촉진”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포털 사잍트야말로 열린 의사사통과 민주주의 발전의 저해가 되었던 인터넷 서비스 공급자 아닌가. 아무런 저항없이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하고,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저작권 조항을 적극 홍보하고, 촛불관련 네티즌의 개인정보를 검찰에 제공하고, 불법적인 이메일 압수수색에 공모한 이들이 바로 그들 대형 포털 사이트였다. 이들이 옹호하는 인터넷은 무엇인가 의심스럽다. 인터넷,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기능과 위치를 점하는 매체다. 그럼 이제 환상에서 벗어나 좀 더 냉철하게 현재 우리에게 인터넷이 무엇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지지하는 “열린 의사소통과 민주주의 발전”말고, 좀 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의미에서 그것을 달성케 하는 것은 인터넷이 아니라 네티즌, 그리고 우리들의 적극적인 자유에의 요구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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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발간의 정치적 함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정치적 함의

: 미래를 향한 역사 그리고 민족과 국가의 결속

 

 

조선과 동아가 발작을 일으켰다. 친일인명사전의 발간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대한민국이 친일 청산을 못해 정통성이 북에 비해 부족하다는 좌파사관의 확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동아일보는 사전이 발간된 바로 다음날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 노린 좌파 사관 친일 사전”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조선과 동아를 제하고도 사전 발간은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만한 논란을 일으켰다.

 

조선과 동아를 비롯해 사전에 등재된 당사자의 후손은 물론이고,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네티즌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친일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자극적인 용어인듯하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정치적 올바름, 민족 정체성, 국가 정당성과 관련된 논의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조선과 동아의 발작은 이 사건이 가지는 외상적 강렬함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그런데 사전의 발간은 현재 일고 있는 논란과는 다른 층위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전을 발간한 이들도, 그것을 옹호하는 이들도, 혹은 반대하는 이들까지, 그들이 진보이건 보수이건 간에, 모두 역사가 함축한 가치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사전 발간과 관련된 논란은 그 (역사적 가치에 대한 동의라는) 기반 위에서 역사적 사실의 진위 문제, 인물 선정의 기준의 편향성 여부, 그것의 정치적 악용문제 등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좀 뜬금없긴 하지만 이러한 논란에서 한 발짝 비켜서서 이 논란이 기반을 두고 있는 ‘독특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도 논의해 볼만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 인간은 역사적 소여를 통해 언어를 습득하고, 소통하며, 그 안에서 지식을 얻고, 행위의 근거가 되는 사회적 합리성을 형성시킨다. 다시 말해 특수한 문화적 요소들의 전승 - 어떤 것들은 버려지고, 어떤 것들은 그대로 전달되며, 또 어떤 것들은 적당히 변형 된다 - 을 통해 인간은 역사적 존재가 된다.

 

이에 반해 사물 혹은 사건 그 자체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 사물 혹은 사건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스스로는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다. 사물은 인간에게 인식되고, 언어를 부여받으면서 독특한 의미 체계 속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역사적 존재인 인간의 의미망 속에 포착됨으로써 역사화 되는 것이다.

 

사물 혹은 사건이 인간의 언어 속에서 역사화된 존재가 되고 나면 기록 속에서 과거라는 시간대로 편입되고 회자되게 된다. 그리고 과거 속에 기록을 통해 역사화된 존재는 계승을 통해 현재의 정치 속에 기입된다. 버려지지 않고 계승된다는 것은 그 사물 혹은 사건이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역사화된 존재는 현재의 시간에 남아 반성의 계기가 되거나 본받아야 할 이상이 되어 미래로 투사된다. 반성의 계기로서의 역사는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계획의 지평을 마련하고, 본받아야 할 이상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한 준거가 되어 미래로 투사되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경향일보의 한 사설은 “친일사전은 과거 단죄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은 친일인명사전을 계기로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치유”해야 하며, 그것이 “역사 정의 실현의 단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 정의 실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있다는 선형적 이행의 시간이 역사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화된 존재는 과거 속에서 이미 사라진 대상이라는 점에서 상실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료라는 형태로 현재에 남는다. 이러한 태도는 상실을 상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아의 일부를 상실된 대상과 동일시함으로써 상실된 것을 자아 속에 보존한다는 점에서 우울증적 구조와 일치한다. 우울증적 태도는 이미 상실된 역사화된 존재를 상징화 이상화 시켜 현재 속에 삽입시킨다. 이렇게 역사화된 존재들은 잃어버린 정통성, 상실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명분으로 현재의 정치 속으로 회귀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역사화된 존재의 회귀가 이상화, 상징화된 민족적 표상이라는 형식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고통은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행한다. 이러한 선형적 역사의 이행은 역사의 시간 외부에 있는 존재들, 즉 역사화 되지 못한 존재들을 망각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고통의 공통성에 기반을 두고 역사적 기억으로부터 시작해 미래를 지향하는 결속체, 에르네스트 르낭은 이것을 민족(nation)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역사화된 존재를 되살려 “역사 정의를 실현”하고 “국가 정통성”을 세우려는 노력의 이면에는 민족과 국가의 결속(민족-국가)을 강화시키는 정치적 기능이 숨어 있다. 이러한 정치적 기능 속에서 망각된, 역사화 되지 못한 존재들, 역사적 시간에서 추방된 시간들, 그의 역사(history)에는 포함되지 못한 그녀들, 망명자들, 이민자들, 외국인 노동자들은 체계적이고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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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고소가 보여주는 이명박 정권의 통치 원칙

절대군주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 박원순 고소가 보여주는 이명박 정권의 통치 원칙

  

사건의 시작은 이렇다. 지난 6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위클리 경향과 인터뷰를 가졌다. 여기서 그는 국정원의 민간 사찰 의혹을 제기했다. 올 여름을 휩쓴 중요한 사회적 이슈 중 하나는 이메일 압수수색, 인터넷 패킷 감청 등 국가 감시의 문제였다. 일정정도의 위기의식을 느낀 국가는 느닷없이 수개월이 지난 일을 들추어 박원순에게 고소장을 들이밀었다. 9월 15일 발부된 이 고소장에는 박 변호사가 “지난 6월 ‘위클리 경향’과의 인터뷰에서 ‘국정원이 민간사찰을 해 시민단체들의 사업이 무산된다’는 식의 허위발언을 해 국가 안보기관으로서의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적혀 있다. 그러니까 박원순은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고소장의 원고가 대한민국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복종하지 않는자에게 가해진 치졸한 복수

  

이명박 정권에 들어 강하게 나타난 정치적 특징 중 하나는 국가에 의한 시민사회의 지배를 공고히 하려 한다는 점이다. 지배란 기본적으로 타자를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굴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국가의 지배는 시민사회의 굴복과 짝을 이루고 있다.

 

시민사회의 복종은 자발적으로 혹은 순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배는 언제나 복종에의 혐오를 통제할 수 있는 토대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 복종에의 혐오를 통제하는 토대가 바로 폭력이다. 지배는 폭력 행사를 근본적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때로 국가의 지배는 직접적 폭력이 행사 되지 않을 때에도 무리 없이 이루어 지는듯 하지만, 사실 그 때 조차 그 지배의 저변에는 폭력이 가장 혹은 변형된 형태로 놓여 있다.

 

자발적 복종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복종이 지배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실제로 자발적 복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지배에 예속될 때 복종은 피지배자의 완전한 동의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폭력적으로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이 반복될 때 복종은 자발적인 것처럼 보여 진다.

 

문제는 그 선택조차 온전한 의미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선택이란 외부 조건의 간섭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복종으로부터의 탈피, 즉 자유를 선택한다는 것은 지배자의 폭력에 노출되어 자신의 삶을 훼손당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로 진입하는 것이다. (올해 용산에서 목격한 것, 그 잔혹함에 치를 떨며 확인한 것이 바로 이러한 사실이다.) 따라서 복종은 선택이 아니다.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그래서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자유라면, 최악의 상태로 치닫지 않기 위해 복종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자유를 선택할 수 없도록 하는 것, 어쩔 수 없이 복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치적 억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종 대신 자유를 선택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저항이라 부른다. 자유를 선택하는 저항은 폭로, 시위, 캠페인, 혁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저항은 집단적으로 행해지기도 하고, 개별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때 가해지는 폭력(억압)의 방식 또한 고문, 검열, 감시, 감금, 추방 등 다양하다. 박원순 고소 사건은 지배에 저항하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방식 중 하나이다. 이 사건은 국가라는 거대 조직이 한 개인을 상대로 행하는 가장 치졸한 방식의 폭력을 보여준다.

 

어찌보면 법적 고소라는 것은 공적 규칙을 통해 시비를 가리는 것이므로 형식적으로는 폭력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거꾸로 이야기 되어야 한다. 박원순 고소는 폭력을 원초적 법 사실로 정립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것은 국가가 (언듯 합리적인 것처럼 보여지는) 법을 매개로 한 개인의 삶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원고는 대한민국, 피고는 국민

  

사실 국가가 군대나 경찰을 동원해 수 많은 개인에게 폭력을 가해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특이한 점은 그것이 법을 매개로 했다는 점, 그리고 명예를 훼손 당한 주체가 국가 자신이라는 점이다. 고소장에 원고가 대한민국으로 되어 있다. 국가가 원고가 되어 한 개인을 민사재판으로 불러들인 일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시민단체 뿐 아니라 보수적인 법학자나 단체마저 국가를 원고로 내세운 이번 고소가 법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법적으로 국가는 추상적 실체이므로 인격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격권이 없는 실체가 어떻게 명예를 훼손당할 수 있겠는가.

 

‘추측컨대’ 국정원이나 국가는 바보가 아니다.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을 몰랐을리 없다. 그러한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번 고소를 추진했다면, 이것은 이 정권의 무지가 아니라 그들이 준거하고 있는 통치 원칙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 정권은 국가의 토대가 되는 시민사회를 보호하고 유지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지배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사회를 보호하고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과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파괴하더라도 자신들의 지배의 조건들을 마련하는 것을 정치적 목표로 두고 있는 것이다.

 

지배의 조건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 폭력이다. 현대 정치 제도는 폭력의 무차별적 사용을 제한한다. 현대 정치에서 폭력은 이미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종영이 정확히 지적했듯 공적 폭력이란 그것이 지배를 위해서 사용되는 한에서, 즉 이른바 공공성이라는 것이 사실상 지배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갖는 한에서는 궁극적으로 사적폭력으로 환원된다. 이데올로기적 외장을 벗겨내고 제도적 매개를 제거하고 나면, 지배는 적나라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용산참사에서 확인되었으며, 박원순 고소를 통해 다시 한 번 반복되었다.

 

이 정권이 고소장에서 대한민국을 원고로 내세웠을 때, 즉 대한민국을 명예훼손 당할 수 있는 인격권을 가진 존재로 상정했을 때, 그 인격권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이 정권의 지배 세력들이다. 이 정권은 대한민국이 지배 세력의 것이라는 절대군주 시대에나 있을 법한 사고 방식을 통치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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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히스테리 : 조중동 광고 중단 운동 유죄 판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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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광우병 사태를 계기로 조,중,동 광고 게제 중단 운동을 벌인 네티즌 24명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2009년 2월 19일의 일이다. 이 날짜가 놀라운 것은 아직도 기초적인 언론 소비자 운동조차 거부당하고 있는 현재 우리 사회의 지랄 맞은 정치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날짜는 별로 놀라운 것이 아니기도 하다.


판결의 핵심 근거는 '업무방해’이다. 자본과 국가의 자기 유지 활동을 방해했으니 당연히 업무방해죄 성립이다. 잉여가치 창출과 그를 위한 경제외적 강제 행위는 자본과 국가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활동이다. 때문에 국가 정책 선동자 역할을 해왔던 언론사의 근간을 흔드는 운동들에 대한 그들의 히스테리적인 반응은 당연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그들은 이런 반응 자체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히스테리적이다) 이러한 반응은 평상시에 잠재되어 있지만, 위기라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는 그 존재론적 근원을 드러내고 만다. 그 근원은 바로 자본과 국가의 생존이 시민에 대한 착취와 약탈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히스테리적 판결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착취와 약탈이라는 정치적 실재이다.


그러나 자본과 국가의 히스테리적 반응이 어떤 특정한 위기 상황에서 발현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임기응변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기는 활용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조작될 수도 있)는 상태(state)이다.


언론과 교육은 이 정부가 취임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영역이다. 그것들에 대한 지배는 장악 과정에서의 직접적인(그래서 단기적일수밖에 없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권력 재생산의 자원이 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직접’ 착취하지 않고 그들을 노동자의 자리에 배치함으로써 착취하며, 정치가들은 개별적인 주체들을 민족이나 국가에 소속된 것으로 호명함으로써 지배한다. 즉 그들은 각 개인들이 타자의 그늘 아래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정치적 주체임을 명확히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조건들은 억압적 국가장치(구속, 수배, 구타 등의 물리적 폭력)에 기반해서 마련되고 유지되는 것이지만, 그것들을 은폐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이데올로기적 과정을 통해 자체 재생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이번 판결처럼 유치한(이건 논리나 상식 보다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싸움처럼 보인다) 사건조차도 단순히 ‘이 정권이 정말 후지다’고 욕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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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교과서에서 삼권분립이라는 것을 본적이 있다. 입법, 사법, 행정이 나뉘어져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독재가 불가능하고 민주적인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까지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소한데서 서로를 견제하되 정말 중요한 문제 앞에서는 놀라울 만큼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이었던 것이다.(그들은 정말로 정치의 전문가들이다. 베버가 말했듯이 전문가란 작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커다란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입,사,행간이건 정당간이건 그들의 견제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나 타협을 통해 정치 활동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여기에 현 정치체제의 핵심적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현 정치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갈등, 견제, 균형, 타협은 개별적 정치 주체들의 외부에서 일어난다. 그러니까 실제로 정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구속된 24인은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정치 시스템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정치적 사안들에 대한 거래는, 실은 소위 신성한 권리를 가졌다고 상정되는 개별적인 정치 주체들을 도매금으로 처리하는 거래이다. 즉, 정치는 갈등, 견제, 균형, 타협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일종의 거래인데, 문제는 그것이 내가 없는 곳에서 (내 의지와 상관 없이)나를 거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선거라는 것은 그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 나를 위치시키는 과정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은폐시키는 교묘한 장치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 있으면 다시 포스팅 하도록 하겠다)


나는 지금 현 정치의 문제를 단순히 대중 참여의 문제로 환원하기 위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가들의 정치, 그러니까 정치가(주체)의 진실은 정치가(주체)가 주인의 입장에 있을 때조차 주체 자신이 아니라 대상(구속된 24인 혹은 나 혹은 정치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정치의 영역에서 소외되어, 대상화되어 있는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의 영역에서 주체(정치가) 역시 스스로 존립할 수 없음을, 즉 대상(우리들) 없이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쌩뚱맞게도 오늘은 여기서 끝. 뒷이야기를 하려면  책 좀 더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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