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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를 다루는 사회, 에이즈를 다루는 정치

일반적으로 질병에 걸린 이들은 그들이 놓인 위치나 상황 때문에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할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회적 편견과 힘겹게 싸워나가야 하며, 때로는 자존감이 훼손될 정도로 타인으로부터 멸시 당하기도 한다. 특히 몇몇의 질병들은 동정이나 시혜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성 생활, 위생 그리고 심리적 불안정과 관련된 질병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것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 문란한 성생활, 지저분함 그리고 성격 이상 등의 개인적 잘못을 통해 야기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개인 책임이라는 문제는 특정 질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낳는 중요한 원인이다. 자기 관리가 인생의 과제로 여겨지는 당대에는 과거에는 비난받지 않던 심장계통의 질환에 대해서도 지나친 다이어트나 약물 복용과 같은 이유가 거론되며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된다. 폭식이나 거식증 등이 비난 받거나 희화화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에 대한 논의는 아마도 질병을 대하는 사회적 태도을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대상일 것이다. 에이즈가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감염되는 것이라는 오해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에이즈 감염인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죽음과 함께 사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에이즈가 아주 특별한 경로를 통해서만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 조차 그런 생각은 일상적이다.


그러나 에이즈는 다른 질병과 다른 위치를 차지하는 독특한 것이기도 하다. 우선 에이즈는 아주 치명적이고 심각한 질병으로 취급되지만, 그것은 질병의 이름이 아니다. 에이즈는 질병이 발생할 수 있는 특정한 의학적 조건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인체의 면역 기능이 망가진 면역 결핍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 상태, 즉 면역 결핍 상태로 인해 이후에 치명적인 감염에 이를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요컨대 에이즈는 질병의 획득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결여 상태인 것이다.

 

다음으로 에이즈는 암과 같이 신체 내부의 변형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내부로 감염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에이즈는 신체 내부에 “침투”함으로써 신체를 “오염”시키는 어떤 것이다.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공포에 기반한 것인데, 그 공포는 그것이 가진 치명성과 신체 내부의 정상성, 순수성을 외부에서 위협하는 형식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 에이즈는 나와 타자의 ‘관계‘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치명적 상태이다.

 

수잔 손탁(Susan Sontag)은 ‘에이즈와 그 은유’라는 글에서 암 환자는 “왜, 하필 나야?”라고 비통하게 절규하는 반면, 그런 것을 궁금해 하는 에이즈 환자는 없다고 말한다. 에이즈는 감염인에게 궁금함이 아니라 정체성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정체성(identity)이란 타자와의 동일시(identity)를 통해 형성된다.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에이즈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치명적 상태라면, 그것은 관계맺음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계기이다. 감염인, 비감염인 모두에게 에이즈는 그 자체가 관계 맺기를 방해하는 치명적 장벽이 된다. 그리고 비감염인에게 감염인은 자신의 정상성, 순수성을 위협하는 어떤 것이 된다.


에이즈를 다루는 사회, 에이즈를 다루는 정치

 

과거에 질병을 다루는 이는 의사들이었지만, 이제 그것을 다루는 것은 사회의 임무가 되었다. 특히 에이즈는 더욱 그러하다. 질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질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보호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와 달리 우리 사회가 질병을 다루는 방식은 배제와 퇴출이다. 한국은 에이즈에 대한 강도 높은 국가 통제를 시행하는 나라이다. 그동안 한국은 에이즈 감염인에 대해 비자 발급을 제한하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에이즈 감염여부를 강제조사해 왔다. 이에 더해 체류기간에 감염사실이 드러난 외국인에 대해서는 강제출국 조치를 취해왔다.

 

이달 초 법무부는 에이즈 감염 외국인의 입국규제를 완화한다고 발표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이 조치를 시행한 이명박 정부를 격찬했다. 그러나 법무부의 발표는 출입국 규제의 완전 폐지가 아닐뿐더러, 공개되지 않은 일부 지침의 변경에 불과하다. 법무부와 반기문 총장의 어이 없는 ‘오바’ 이외에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국가 통제는 변한 것이 없다.

 

에이즈, 유독 에이즈에 걸린 외국인은 우리 사회의, 국가의, 민족의 정상성과 순수성을 위협하는 오염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들)은 “침투”하여 “오염”시키는 “바이러스”가 된다. 이쯤 되면 에이즈에 대한 논의에서 왜 그토록 군사적 은유가 사용되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에이즈는 내부와 외부를 나누고, 외부를 적으로 간주하며,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전쟁상태로 규정하고, 외부를 격퇴하지 못하면 내부는 치명적인 죽음에 이른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침략자”이자 “적”이고, 그것은 신체에 “침투”하여 우리 몸을 “점령”한다. 그리고 에이즈를 연구하거나 극복하려는 노력은 에이즈와의 “전쟁”이 되며, 전쟁에서 패한 자들은 생명을 위협받는다. 에이즈와 전쟁은 이제 은유가 아니라 실질적인 생명 위협에 반한 정상성과 순수성에 대한 강박이 만들어낸 하나의 사건이 된다. 전쟁이 그러하듯 에이즈 역시 거대한 오해와 소모적 조치들이 만들어낸 적대의 산물인 것이다.

 

다시 한국의 에이즈 통제로 돌아가보자. 그것은 국가에 의한 사회 보호 조치가 아니다. 우선 우리 사회 내부에도 에이즈 감염인이 존재한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구성된 새로운 외부로 격리되거나 배제당한다. 다음으로 강제 출국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가진 이주노동자의 경우 에이즈 감염 치료는 물론이고 검사조차 꺼려한다. 에이즈를 예방하기 위한 법이 오히려 그들을 에이즈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은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 정책이나 조치가 보호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공간이다. 사회 보호 조치라는 명분을 통해 민족국가의 정상성이나 순수성이 강조된다. 그리고 이 조치들은 공포에 대한 위협을 통해 (특정한 명분에 위배될 때) 언제든, 누구든 배제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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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망명 : 억압적 국가를 거부하는 정치적 사유의 매개

 

한국판 위키 백과에 따르면 사이버 망명은 2009년 6월 “검찰의 PD수첩 수사 관련 내용”이 발표되면서 불거진 용어이다. 지난 6월 검찰에 의해 PD수첩 작가의 이메일 내용이 공개되면서, 사생활 보호 및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국가 권력에 의해 심각하게 침해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 이후에 YTN 노조원들의 이메일이 압수수색 당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러한 불안감은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사실 이와 같은 사이버 검열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지난 4월 주경복 전 서울시교육감 후보에 대한 선거법 위반 수사에서 수사 대상자 100여명의 이메일 7년치가 압수수색 당한 바 있다. 사이버 망명은 이와 같은 국가 권력에 의한 인터넷 규제에 대한 저항의 한 방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인터넷 본인확인제, 통신비밀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저작권법 등 나날이 인터넷에 대한 국가 권력의 규제는 확대되고 있으며, 사이버 망명 역시 계속 확대되고 있다.


포섭과 탈주가 경합하는 사이버 공간


망명이란 정치적 탄압이나 종교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타국으로 도피하여 보호를 요청하는 행위를 말한다. 망명을 정의하는 데는 두 가지 핵심적 요소가 필요하다. 정치적 억압과 타국의 보호가 그것이다. 사이버 망명은 정치적 발화에 대한 국가 권력의 검열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외국의 서버로 인터넷 계정을 옮긴다는 점에서 하나의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망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 망명을 일반적인 망명의 하나로 정의하려 할 때 미묘한 괴리가 발생한다.

 

망명은 하나의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의 이동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망명은 민족국가의 경계를 문제시하는 정치적 질문을 내포한 행위이다. 사이버 공간이 물리적 한계, 즉 국경이 없는 공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사이버 세계에서 망명이란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공간이 민족국가라는 정치적 경계에 포섭되어 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사이버 공간에 대한 수많은 담론 속에서 그것은 대의제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곤 한다. 그런 식의 담론들은 사이버 공간의 형성과 관련된 정치경제적 기반을 무시하는 매체 결정론에 불과하다. 사이버 공간은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경합하는 갈등의 장소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인터넷의 기원인 아르파넷(ARPANET)은 미국방부의 첨단기술연구계획국(ARPA)에 의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은 1990년대 초 ‘정보고속도로 구상’을 발표하고 인터넷 민간화 이후의 지구적인 정보화 격랑을 예고했다. 이는 1993년 발표된 ‘국가정보하부구조(NII)구상 행동계획’과 1994년 발표된 ‘지구정보하부구조(GII) 구상’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정보고속도로 구상’ 발표 이후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고속도로라는 은유에 대한 것이다. 고속도로라는 이미지는 선형적 운동, 물리적 이동, 물질적 고체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사이버 공간의 다방향적 정보통신, 가상적 상호작용을 지시하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는 반론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국가에 의한 디지털 기간망의 증진이라는 목적만큼은 분명히 보여줄 뿐 아니라 인터넷의 발달이 새로운 매체환경을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기존 권력의 통제 아래에서, 그것들을 위하여 설계 및 추진되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인터넷은 9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전유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95년 이후 국가 주도의 통신 정책이 수립 된다. 정부는 한국통신의 글로벌경쟁력을 갖추게 한다는 명분과 초고속 정보통신사업의 조속한 추진을 목표로 ‘정보화촉진기본법’을 제정한다. 그리하여 95년에 PC통신 서비스에 인터넷접속 서비스(일명 PPP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이때 설립된 규격화된 인터넷 구조의 기반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요컨대 인터넷 구조의 상당 부분이 경제적, 그리고 그 경제 성장의 필수적 요소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조건을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은 결코 기존의 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곳도, 그것이 가진 내적 가능성이 자동적으로 실현되는 곳도 아니다. 인터넷의 발전을 통해 발생한 사이버 공간은 ‘기존의 정치경제적 권력’과 그 곳에 내재된 ‘권력으로부터의 도피 가능성’이 경합하는 곳이다. 적극적 저항 없이 사이버 공간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버 망명은 억압적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그리고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향해 가는 하나의 시도로 볼 수 있다.


사이버 망명, 국가 그리고 정체성


앞서 언급했듯이 망명이란 정치적 억압을 피해 타국의 보호를 요청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정치적 억압의 외부를 사유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세계에서 망명은 타국의 보호를 요청하고 허가를 기다리는 과정 없이 진행된다. 망명은 (인터넷 계정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과정을 따라 진행된다. 그것은 타국의 존재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망명객이 속했던 국가의 억압적 정치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이다. 사이버 망명은 다른 국가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기보다는 국가라는 억압적 정치체 자체를 거부하는, 즉 국가부재를 사유하는 한 방식이다.

 

국가부재를 상상하는 힘은 국가에 의해 버려진 이들이 보이는 정치에 대한 환멸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억압적 국가를 거부하는 힘이다. 국가의 외부에 있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 억압적 국가를 거부하는 이들이 귀환하는 곳은 자연상태가 아니라 다른 정치가 상상되는 공간이다. 물론 ‘거부’ 자체가 다른 정치에 대한 ‘생성’은 아니다. 그럼에도 ‘거부’는 기존의 억압적 정치를 부정함으로써, 다른 정치를 상상할 수 있는 ‘정치적 사유의 공간’을 배태하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사이버 망명이 거부를 통해 다른 정치를 상상하는 적극적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은 파업이나 혁명과 같이 일거에 모든 것을 바꿔버리는 집단적 힘이 아니다. 때문에 그것이 가진 희망의 계기는 조심스럽게 제기되어야 한다. 새로운 정치가 이미 존재한다거나, 이미 존재하는 대안적 정치에 다가감으로써 기존의 정치를 폐기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하지 말도록 하자. ‘거부’는 정치적 사유의 공간을 개시하는 하나의 형식일 뿐이다. 그것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 어떤 것도 직접 지시하지 않는다.

 

사이버 망명이 가진 저항의 가능성은 미시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정체성 게임과 관련되어 있다. 국가는 특정한 소속양식을 제공함으로써 국민 혹은 시민이라는 봉합된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정치체이다. 국가부재를 상상한다는 것은 이러한 소속양식을 거부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새로운 정치를 상상할 수 있는 ‘정치적 사유의 공간’은 국가가 제공하는 소속양식을 거부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낡은 이야기이지만, 현대적 의미의 사이버 망명의 문제를 거의 최초로 제기한 <공각기동대>를 떠올려보자. 그곳에는 사이버 세계로부터 유발된 정체성의 문제가 강하게 기입되어 있다. 공안 9과에 들어간 ‘인형사’는 정치적 망명을 요구한다. 사이버 세계에 떠도는 하나의 프로그램에 불과한 인형사는 과연 망명할 수 있는 ‘존재’인가. 그를 존재하는 실체로 만드는 그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인형사는 고정된 정체성을 필요로 했는가. 오히려 정체성을 버림으로써 사이버 세계에 존재하는 실체가 된 것은 아닌가. 그는 결코 고정된 정체성을 획득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낡은 정체성을 회복함으로써 뻔한 결론을 맺으려 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정체성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집착은 자신을 구속한다. 그것을 돌파하라”. 정체성, “그것은 자신을 제약”하는 것이다. <공각기동대>는 거부가 개시하는 정치적 사유의 공간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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