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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28
    명절, 유감스런 후유증
    와라
  2. 2010/01/25
    에이즈를 다루는 사회, 에이즈를 다루는 정치
    와라

명절, 유감스런 후유증

명절 유감, 불안에 대처하는 가족의 자세

 

추석 연휴가 반갑지 않았다. 육감같은 것이 아니다. 기습 폭우로 도시가 잠겨 수많은 이재민이 생겨날 것을 미리 알게된 예지력 같은게 아니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경험을 통해 몸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역시나 정확했다. 유독 나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선후배나 동료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도 비슷한 것들이다.

 

민족 고유의 명절, 풍요롭고 아름다운 전통의 명절. 추석 앞에 붙은 수식어들이다. 그래도 사실 추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민족 대이동이라는 표현이다. 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도로로 쏟아져 나온다. 뭐 개인적으로야 대부분 고향이나 부모님을 찾아 가는 발걸음이겠지만, 그 도로의 풍경을 볼 때면 야릇하고 수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은 때로 종교적 의례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전쟁시의 피난민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체 그 풍경의 정체는 무엇일까.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전통, 근대화로 인한 핵가족화, 기형적 도시화가 야기한 탈향민의 급증 등이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명절이 되면 멀리 떨어져 거의 다른 공간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슨 변신로봇마냥 합체를 한다.

 

추석을 맞이할 때 느껴졌던 불안한 예감은 그곳에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그렇다. 나이는 찼는데 번듯한 직장도 없고, 아이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심지어 배우자가될 예비 후보마저 자신있게 거론할 수 없는 사람에게 명절은 괴로운 것이 된다. 변변한 대화한번 해본적 없는 친적(촌수가 멀건 가깝건 상관없다)이 지나가며, 갑자기 남의 직장과 연애 사정을 걱정한다. 마치 어릴적 “그래 공부는 잘 하고 있냐?”라고 묻던 어느날 문득 찾아온 삼촌(실제 촌수로는 사실 3촌도 아니다)의 느낌, 평소에 내 생각따위 한 번도 해본적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내가 공부를 잘하건 말건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던 그 삼촌의 느낌으로 말이다. 사실 그들은 내 직장이나 연애, 내 공부에는 별 관심도 없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와 다른 공간에 자신들만의 삶을 살고 있다. 그 무관심한 관심이 듣는 당사자에게는 상당한 자괴감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아는걸가 모르는 걸까.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아마 그것이 맞을 것이다. ‘실업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결혼 늦게 하는것도 트렌드로 여겨지는 세상 아닌가’라고 생각해봐야 3초짜리 위안도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그것은 내 문제인 것이다. 취직도 잘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번듯하게 사는 엄친아는 어디든 있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남들 취직하고 결혼할 나이에 대학원에 다니는 사람이나, 고시 공부 하는 사람, 대기업 직장인만큼의 월급을 받지 못하는 단체 활동가들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제대로’된 월급을 받는 ‘제대로’된 직장에 다니고 있지 않은 만큼, ‘제대로’된 삶을 살고 있지도 않은 것으로 취급된다.

 

예전에도 어느 집안에나 한두 명쯤은 ‘제대로’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그들은 그냥 그런 사람들이었다. ‘못난놈’ 취급을 받거나 기분나쁜 혓소리(쯧쯧~)를 들어야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좀 다른 듯하다. 두 번의 거대한 경제 위기를 겪고, 신자유주의가 국가 통치 전략의 기본 기조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안전망은 급속히 해체되어가고 있다. 삶의 불안, 불확실성, 불확정성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가족은 안전망의 최후 보루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적 안전망이 급속히 파괴되고, 삶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만큼 개인이 짊어져야할 삶의 무게,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증가한다.

 

이제 우리(나와 그들)는 기분나쁜 혓소리 대신 ‘고생하는 엄마’를 생각하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자기네들과는 별 상관없는 오지랖이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있는 것 같다. 혈연이라는게 그런 측면이 있다. 누구하나 잘못되면 도움을 주진 못하더라도, 부채감이나 죄의식 같은걸 만들어낸다). 이것은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넘어 전면적인 삶의 불안정에 대처하기 위해 너도 동참해야 한다는 명령처럼 들린다. 여기에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넘어 마지막 남은 안전망으로서의 가족을 재강화해야 한다는 가치관, 즉 삶의 불안정성의 유래 없는 확산에 대응해 가족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독특한 가치관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이제 취업과 결혼은 전통이나 당위가 아니라 생존이 되어가고 있다.

 

명절 주간이 되면 복권 판매량이 증가한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이지만, 거기에는 어떤 간절함이 항상 함께 하고 있다. 그 절박함이 극단화된 삶의 불안을 보여준다. 명절 후유증은 연휴로 인한 업무 부적응, 과도한 음식 섭취 때문에 불어난 뱃살, 주부들의 시집살이만 나타내는게 아니다. 그 목록에 ‘제대로’된 삶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혹은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스트레스와 삶의 공포가 추가되어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명절 때면 찾아오는 더부룩함과 소화 장애의 원인이 기름진 음식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삶의 불안과 공포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그리고 굳이 친절하게 꼬치꼬치 그것들을 드러내고, 따져주시는 그 친지분들 때문인 것도 같다. 이제 연휴도 끝났다. 남은건 후유증 뿐이다. 명절 때 남은 음식 다 먹어치울 때쯤 같이 사라지면 좋겠지만, 아마도 다음 명절 때까지 어지간히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다시 명절이 오면 혹시 우리가 잊어먹을까 걱정되 누군가 다시 확인시켜줄 것이다. 그렇게 삶도,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전통 명절도, 친척들의 오지랖도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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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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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를 다루는 사회, 에이즈를 다루는 정치

일반적으로 질병에 걸린 이들은 그들이 놓인 위치나 상황 때문에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할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회적 편견과 힘겹게 싸워나가야 하며, 때로는 자존감이 훼손될 정도로 타인으로부터 멸시 당하기도 한다. 특히 몇몇의 질병들은 동정이나 시혜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성 생활, 위생 그리고 심리적 불안정과 관련된 질병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것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 문란한 성생활, 지저분함 그리고 성격 이상 등의 개인적 잘못을 통해 야기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개인 책임이라는 문제는 특정 질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낳는 중요한 원인이다. 자기 관리가 인생의 과제로 여겨지는 당대에는 과거에는 비난받지 않던 심장계통의 질환에 대해서도 지나친 다이어트나 약물 복용과 같은 이유가 거론되며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된다. 폭식이나 거식증 등이 비난 받거나 희화화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에 대한 논의는 아마도 질병을 대하는 사회적 태도을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대상일 것이다. 에이즈가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감염되는 것이라는 오해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에이즈 감염인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죽음과 함께 사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에이즈가 아주 특별한 경로를 통해서만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 조차 그런 생각은 일상적이다.


그러나 에이즈는 다른 질병과 다른 위치를 차지하는 독특한 것이기도 하다. 우선 에이즈는 아주 치명적이고 심각한 질병으로 취급되지만, 그것은 질병의 이름이 아니다. 에이즈는 질병이 발생할 수 있는 특정한 의학적 조건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인체의 면역 기능이 망가진 면역 결핍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 상태, 즉 면역 결핍 상태로 인해 이후에 치명적인 감염에 이를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요컨대 에이즈는 질병의 획득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결여 상태인 것이다.

 

다음으로 에이즈는 암과 같이 신체 내부의 변형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내부로 감염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에이즈는 신체 내부에 “침투”함으로써 신체를 “오염”시키는 어떤 것이다.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공포에 기반한 것인데, 그 공포는 그것이 가진 치명성과 신체 내부의 정상성, 순수성을 외부에서 위협하는 형식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 에이즈는 나와 타자의 ‘관계‘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치명적 상태이다.

 

수잔 손탁(Susan Sontag)은 ‘에이즈와 그 은유’라는 글에서 암 환자는 “왜, 하필 나야?”라고 비통하게 절규하는 반면, 그런 것을 궁금해 하는 에이즈 환자는 없다고 말한다. 에이즈는 감염인에게 궁금함이 아니라 정체성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정체성(identity)이란 타자와의 동일시(identity)를 통해 형성된다.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에이즈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치명적 상태라면, 그것은 관계맺음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계기이다. 감염인, 비감염인 모두에게 에이즈는 그 자체가 관계 맺기를 방해하는 치명적 장벽이 된다. 그리고 비감염인에게 감염인은 자신의 정상성, 순수성을 위협하는 어떤 것이 된다.


에이즈를 다루는 사회, 에이즈를 다루는 정치

 

과거에 질병을 다루는 이는 의사들이었지만, 이제 그것을 다루는 것은 사회의 임무가 되었다. 특히 에이즈는 더욱 그러하다. 질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질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보호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와 달리 우리 사회가 질병을 다루는 방식은 배제와 퇴출이다. 한국은 에이즈에 대한 강도 높은 국가 통제를 시행하는 나라이다. 그동안 한국은 에이즈 감염인에 대해 비자 발급을 제한하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에이즈 감염여부를 강제조사해 왔다. 이에 더해 체류기간에 감염사실이 드러난 외국인에 대해서는 강제출국 조치를 취해왔다.

 

이달 초 법무부는 에이즈 감염 외국인의 입국규제를 완화한다고 발표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이 조치를 시행한 이명박 정부를 격찬했다. 그러나 법무부의 발표는 출입국 규제의 완전 폐지가 아닐뿐더러, 공개되지 않은 일부 지침의 변경에 불과하다. 법무부와 반기문 총장의 어이 없는 ‘오바’ 이외에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국가 통제는 변한 것이 없다.

 

에이즈, 유독 에이즈에 걸린 외국인은 우리 사회의, 국가의, 민족의 정상성과 순수성을 위협하는 오염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들)은 “침투”하여 “오염”시키는 “바이러스”가 된다. 이쯤 되면 에이즈에 대한 논의에서 왜 그토록 군사적 은유가 사용되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에이즈는 내부와 외부를 나누고, 외부를 적으로 간주하며,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전쟁상태로 규정하고, 외부를 격퇴하지 못하면 내부는 치명적인 죽음에 이른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침략자”이자 “적”이고, 그것은 신체에 “침투”하여 우리 몸을 “점령”한다. 그리고 에이즈를 연구하거나 극복하려는 노력은 에이즈와의 “전쟁”이 되며, 전쟁에서 패한 자들은 생명을 위협받는다. 에이즈와 전쟁은 이제 은유가 아니라 실질적인 생명 위협에 반한 정상성과 순수성에 대한 강박이 만들어낸 하나의 사건이 된다. 전쟁이 그러하듯 에이즈 역시 거대한 오해와 소모적 조치들이 만들어낸 적대의 산물인 것이다.

 

다시 한국의 에이즈 통제로 돌아가보자. 그것은 국가에 의한 사회 보호 조치가 아니다. 우선 우리 사회 내부에도 에이즈 감염인이 존재한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구성된 새로운 외부로 격리되거나 배제당한다. 다음으로 강제 출국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가진 이주노동자의 경우 에이즈 감염 치료는 물론이고 검사조차 꺼려한다. 에이즈를 예방하기 위한 법이 오히려 그들을 에이즈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은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 정책이나 조치가 보호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공간이다. 사회 보호 조치라는 명분을 통해 민족국가의 정상성이나 순수성이 강조된다. 그리고 이 조치들은 공포에 대한 위협을 통해 (특정한 명분에 위배될 때) 언제든, 누구든 배제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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