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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28
    명절, 유감스런 후유증
    와라
  2. 2009/10/09
    전기자동차 양산 계획, 청계천의 반복이 되지 않기를(2)
    와라

명절, 유감스런 후유증

명절 유감, 불안에 대처하는 가족의 자세

 

추석 연휴가 반갑지 않았다. 육감같은 것이 아니다. 기습 폭우로 도시가 잠겨 수많은 이재민이 생겨날 것을 미리 알게된 예지력 같은게 아니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경험을 통해 몸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역시나 정확했다. 유독 나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선후배나 동료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도 비슷한 것들이다.

 

민족 고유의 명절, 풍요롭고 아름다운 전통의 명절. 추석 앞에 붙은 수식어들이다. 그래도 사실 추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민족 대이동이라는 표현이다. 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도로로 쏟아져 나온다. 뭐 개인적으로야 대부분 고향이나 부모님을 찾아 가는 발걸음이겠지만, 그 도로의 풍경을 볼 때면 야릇하고 수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은 때로 종교적 의례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전쟁시의 피난민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체 그 풍경의 정체는 무엇일까.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전통, 근대화로 인한 핵가족화, 기형적 도시화가 야기한 탈향민의 급증 등이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명절이 되면 멀리 떨어져 거의 다른 공간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슨 변신로봇마냥 합체를 한다.

 

추석을 맞이할 때 느껴졌던 불안한 예감은 그곳에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그렇다. 나이는 찼는데 번듯한 직장도 없고, 아이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심지어 배우자가될 예비 후보마저 자신있게 거론할 수 없는 사람에게 명절은 괴로운 것이 된다. 변변한 대화한번 해본적 없는 친적(촌수가 멀건 가깝건 상관없다)이 지나가며, 갑자기 남의 직장과 연애 사정을 걱정한다. 마치 어릴적 “그래 공부는 잘 하고 있냐?”라고 묻던 어느날 문득 찾아온 삼촌(실제 촌수로는 사실 3촌도 아니다)의 느낌, 평소에 내 생각따위 한 번도 해본적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내가 공부를 잘하건 말건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던 그 삼촌의 느낌으로 말이다. 사실 그들은 내 직장이나 연애, 내 공부에는 별 관심도 없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와 다른 공간에 자신들만의 삶을 살고 있다. 그 무관심한 관심이 듣는 당사자에게는 상당한 자괴감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아는걸가 모르는 걸까.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아마 그것이 맞을 것이다. ‘실업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결혼 늦게 하는것도 트렌드로 여겨지는 세상 아닌가’라고 생각해봐야 3초짜리 위안도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그것은 내 문제인 것이다. 취직도 잘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번듯하게 사는 엄친아는 어디든 있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남들 취직하고 결혼할 나이에 대학원에 다니는 사람이나, 고시 공부 하는 사람, 대기업 직장인만큼의 월급을 받지 못하는 단체 활동가들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제대로’된 월급을 받는 ‘제대로’된 직장에 다니고 있지 않은 만큼, ‘제대로’된 삶을 살고 있지도 않은 것으로 취급된다.

 

예전에도 어느 집안에나 한두 명쯤은 ‘제대로’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그들은 그냥 그런 사람들이었다. ‘못난놈’ 취급을 받거나 기분나쁜 혓소리(쯧쯧~)를 들어야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좀 다른 듯하다. 두 번의 거대한 경제 위기를 겪고, 신자유주의가 국가 통치 전략의 기본 기조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안전망은 급속히 해체되어가고 있다. 삶의 불안, 불확실성, 불확정성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가족은 안전망의 최후 보루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적 안전망이 급속히 파괴되고, 삶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만큼 개인이 짊어져야할 삶의 무게,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증가한다.

 

이제 우리(나와 그들)는 기분나쁜 혓소리 대신 ‘고생하는 엄마’를 생각하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자기네들과는 별 상관없는 오지랖이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있는 것 같다. 혈연이라는게 그런 측면이 있다. 누구하나 잘못되면 도움을 주진 못하더라도, 부채감이나 죄의식 같은걸 만들어낸다). 이것은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넘어 전면적인 삶의 불안정에 대처하기 위해 너도 동참해야 한다는 명령처럼 들린다. 여기에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넘어 마지막 남은 안전망으로서의 가족을 재강화해야 한다는 가치관, 즉 삶의 불안정성의 유래 없는 확산에 대응해 가족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독특한 가치관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이제 취업과 결혼은 전통이나 당위가 아니라 생존이 되어가고 있다.

 

명절 주간이 되면 복권 판매량이 증가한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이지만, 거기에는 어떤 간절함이 항상 함께 하고 있다. 그 절박함이 극단화된 삶의 불안을 보여준다. 명절 후유증은 연휴로 인한 업무 부적응, 과도한 음식 섭취 때문에 불어난 뱃살, 주부들의 시집살이만 나타내는게 아니다. 그 목록에 ‘제대로’된 삶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혹은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스트레스와 삶의 공포가 추가되어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명절 때면 찾아오는 더부룩함과 소화 장애의 원인이 기름진 음식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삶의 불안과 공포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그리고 굳이 친절하게 꼬치꼬치 그것들을 드러내고, 따져주시는 그 친지분들 때문인 것도 같다. 이제 연휴도 끝났다. 남은건 후유증 뿐이다. 명절 때 남은 음식 다 먹어치울 때쯤 같이 사라지면 좋겠지만, 아마도 다음 명절 때까지 어지간히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다시 명절이 오면 혹시 우리가 잊어먹을까 걱정되 누군가 다시 확인시켜줄 것이다. 그렇게 삶도,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전통 명절도, 친척들의 오지랖도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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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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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자동차 양산 계획, 청계천의 반복이 되지 않기를

전기자동차 양산 계획, 청계천의 반복이 되지 않기를

 

 

근대화의 경험은 인간의 감성에 일대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 특히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인간이 시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에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그러한 변화에는 전화, 영화, 기차, 엑스 레이(X-ray), 자전거 등과 함께 자동차의 발명이 크게 일조하였다. 무엇보다 그것은 속도를 추구했다. 1900년에 프랑스에는 약 3천대의 자동차가 있었고, 1913년에는 10만 대에 이르렀다. 1896년과 1900년 사이에 최소한 10종의 자동차 잡지가 발행되었으며, 1906년에 이미 시속 200Km를 넘어서는 자동차가 발명되었다.

 

 

얼마 후 미래파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된 마리네티의 선언이 이어졌다. 그는 새로운 과학기술에 미쳐 있었고, 그것만을 찬양했다. 그는 “우리는 기계와 협력하려 한다”고 강조하며, ‘새로운 속도의 미학’을 포고한다. “우리는 선언하노라, 새로운 미, 속도라는 미가 세계의 장려함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고. 보닛에 탄환처럼 질주하는 거대한 배기관을 장식한 경주용 자동차는 ‘사모트라키의 니케’보다 아름답다.”

 

 

그것은 근대화에 대한 찬양이었으며, 모든 속도 혹은 속도를 향한 열망에 대한 찬양이었다. 속도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결국 인간이 속도를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극대화된 속도에 속에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없게 되고, 급기야 속도는 인간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교통사고는 바로 이러한 속도에 대한 열망이 야기시킨 근대화의 산물이다. 교통사고는 지금 우리의 삶에서 더 이상 예외가 아닌 일상으로 존재한다. 어린아이를 등교시키는 부모의 입에서 나오는 “차 조심”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속도가 위협하는 삶의 일상화된 측면이다.

 

 

그럼에도 속도는 이미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으며, 거부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로 기능한다. 그것은 개별적 인간의 삶의 속도를 하나의 추상적 속도로 흡수한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나 직장으로 나갈 때, 지인과의 약속 장소로 향할 때, 명절이 되어 고향으로 가야할 때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자동차의 속도이다.

 

 

근대화를 통해 추동된 인간의 시공간적 경험의 변화, 그 중추에 각인된 속도에 대한 열망은 이제 익숙한 삶의 양식이 되어 버렸다. 그 변화의 계기이자, 속도에 대한 강박의 표상이 바로 자동차이다. 이 거대한 변환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자동차는 물질적 진보와 편의를 인간에게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 물질적 진보와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괄호 안에 넣어 버렸다. 괄호 안에 들어가 고려되지 않았던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환경이다.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는가?

 

1990년대 이후 근대화의 폐해로 환경오염과 파괴가 수 없이 언급되어 왔다. 자동차와 환경파괴의 관계는 이미 지겨울 정도로 논의되어 왔다. 서울의 경우 자동차로 인한 대기오염이 전체의 66.9%에 이를 정도이며,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10조원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지난달 22일 세계 1300여개 도시와 함께 서울에서도 열렸던 ‘차 없는 날’ 행사도 자동차와 환경오염의 연관성에 대한 고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같은 배경에서 전기자동차에 관련된 논의도 다양한 방식으로 활성화 되고 있다. 전기자동차는 기존 자동차가 가지고 있던 석유 에너지를 쓰지 않기 때문에, 극심한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 고갈이라는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 개발이 필요한 분야이다. 전기자동차는 기존 자동차가 가지고 있던 석유 에너지를 쓰지 않기 때문에, 극심한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 고갈이라는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 개발이 필요한 분야이다.

 

 

8일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지식경제부는 전기자동차산업 활성화 방안을 보고했다. 이 회의에서 당초 예상되어 있던 전기자동차 양산 시기를 2년 앞당기기로 했다고 한다. 여러 측면에서 실정을 서슴치 않는 정권이기에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기는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전기자동차는 디젤 엔진, 가솔린 엔진을 사용하는 오토사이클(등용사이클)방식의 자동차보다 먼저 고안 되었고,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상당히 상용화 되어 있었다. 자동차의 발전 초기부터 전기 자동차는 이미 널리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휘발유의 가격은 떨어지고, 내연기관의 대량생산체제가 구축되면서 휘발유 자동차가 전기자동차에 비해 싼 가격으로 보급되면서 휘발유자동차의 사용이 보편화 되게 된다.

1990년대 후반에도 전기자동차는 상용화 단계에 이르렀었다. 환경 오염문제의 대두와 기술발전에 기반해 제너럴 모터스(GM)사에서 전기자동차인 'EV1'을 개발해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 임대 형식으로 보급했었다. 이용자들은 ‘EV1’의 상용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며, 몇 가지 점만 보완한다면 지금 당장 쓰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EV1은 얼마후 GM에 의해 수거되어 폐기 처분되어 버렸다.

 

 

2006년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는가?(Who Killed the electric cars?)>는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상용화될 수 있을 정도로 개발된 전기자동차가 왜 갑자기 폐기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여러 전문가들의 인터뷰와 자료를 통해 'EV1'의 폐기에는 휘발유자동차의 수요를 유지해 석유를 지속적으로 판매하기 위한 거대 석유자본과, 내연기관 산업을 기간으로 하는 자동차 산업 자본 그리고 그들과 밀접하게 유착된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강하게 관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전기자동차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아직 소망에 불과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적 상황 때문에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자동차의 발전 초기부터 현재까지 전기자동차가 보편화되지 못했던 이유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상황 때문이라면, 이명박 정권의 전기자동차 양산 계획은 더욱 걱정스럽다.

 

 

8일 이명박 대통령은 “온 세계가 지금 자동차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앞으로 어떤 차들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치열한 경쟁체제에 들어섰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하며, “전기자동차 분야는 특히 원천기술을 만들어 가면서 변화되는 상황에 대응해야 하는 만큼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에 “정부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R&D 예산의 효과적인 배분을 통해 집중적인 지원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정권에게 전기 자동차 양산 계획은 에너지의 대안적 사용이나 환경오염 문제와는 관련 없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경쟁”과 “투자”의 대상일 뿐이라는 점이다. 단지 회의에서 한 말을 가지고 청계천을 다시 떠올리는 건 그저 나만의 오해일 뿐일까. ‘자연친화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환경’을 파괴하고 개발 자본에게 엄청난 이득을 안겨줬던 그 청계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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