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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유감, 불안에 대처하는 가족의 자세
추석 연휴가 반갑지 않았다. 육감같은 것이 아니다. 기습 폭우로 도시가 잠겨 수많은 이재민이 생겨날 것을 미리 알게된 예지력 같은게 아니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경험을 통해 몸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역시나 정확했다. 유독 나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선후배나 동료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도 비슷한 것들이다.
민족 고유의 명절, 풍요롭고 아름다운 전통의 명절. 추석 앞에 붙은 수식어들이다. 그래도 사실 추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민족 대이동이라는 표현이다. 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도로로 쏟아져 나온다. 뭐 개인적으로야 대부분 고향이나 부모님을 찾아 가는 발걸음이겠지만, 그 도로의 풍경을 볼 때면 야릇하고 수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은 때로 종교적 의례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전쟁시의 피난민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체 그 풍경의 정체는 무엇일까.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전통, 근대화로 인한 핵가족화, 기형적 도시화가 야기한 탈향민의 급증 등이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명절이 되면 멀리 떨어져 거의 다른 공간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슨 변신로봇마냥 합체를 한다.
추석을 맞이할 때 느껴졌던 불안한 예감은 그곳에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그렇다. 나이는 찼는데 번듯한 직장도 없고, 아이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심지어 배우자가될 예비 후보마저 자신있게 거론할 수 없는 사람에게 명절은 괴로운 것이 된다. 변변한 대화한번 해본적 없는 친적(촌수가 멀건 가깝건 상관없다)이 지나가며, 갑자기 남의 직장과 연애 사정을 걱정한다. 마치 어릴적 “그래 공부는 잘 하고 있냐?”라고 묻던 어느날 문득 찾아온 삼촌(실제 촌수로는 사실 3촌도 아니다)의 느낌, 평소에 내 생각따위 한 번도 해본적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내가 공부를 잘하건 말건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던 그 삼촌의 느낌으로 말이다. 사실 그들은 내 직장이나 연애, 내 공부에는 별 관심도 없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와 다른 공간에 자신들만의 삶을 살고 있다. 그 무관심한 관심이 듣는 당사자에게는 상당한 자괴감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아는걸가 모르는 걸까.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아마 그것이 맞을 것이다. ‘실업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결혼 늦게 하는것도 트렌드로 여겨지는 세상 아닌가’라고 생각해봐야 3초짜리 위안도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그것은 내 문제인 것이다. 취직도 잘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번듯하게 사는 엄친아는 어디든 있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남들 취직하고 결혼할 나이에 대학원에 다니는 사람이나, 고시 공부 하는 사람, 대기업 직장인만큼의 월급을 받지 못하는 단체 활동가들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제대로’된 월급을 받는 ‘제대로’된 직장에 다니고 있지 않은 만큼, ‘제대로’된 삶을 살고 있지도 않은 것으로 취급된다.
예전에도 어느 집안에나 한두 명쯤은 ‘제대로’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그들은 그냥 그런 사람들이었다. ‘못난놈’ 취급을 받거나 기분나쁜 혓소리(쯧쯧~)를 들어야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좀 다른 듯하다. 두 번의 거대한 경제 위기를 겪고, 신자유주의가 국가 통치 전략의 기본 기조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안전망은 급속히 해체되어가고 있다. 삶의 불안, 불확실성, 불확정성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가족은 안전망의 최후 보루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적 안전망이 급속히 파괴되고, 삶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만큼 개인이 짊어져야할 삶의 무게,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증가한다.
이제 우리(나와 그들)는 기분나쁜 혓소리 대신 ‘고생하는 엄마’를 생각하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자기네들과는 별 상관없는 오지랖이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있는 것 같다. 혈연이라는게 그런 측면이 있다. 누구하나 잘못되면 도움을 주진 못하더라도, 부채감이나 죄의식 같은걸 만들어낸다). 이것은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넘어 전면적인 삶의 불안정에 대처하기 위해 너도 동참해야 한다는 명령처럼 들린다. 여기에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넘어 마지막 남은 안전망으로서의 가족을 재강화해야 한다는 가치관, 즉 삶의 불안정성의 유래 없는 확산에 대응해 가족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독특한 가치관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이제 취업과 결혼은 전통이나 당위가 아니라 생존이 되어가고 있다.
명절 주간이 되면 복권 판매량이 증가한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이지만, 거기에는 어떤 간절함이 항상 함께 하고 있다. 그 절박함이 극단화된 삶의 불안을 보여준다. 명절 후유증은 연휴로 인한 업무 부적응, 과도한 음식 섭취 때문에 불어난 뱃살, 주부들의 시집살이만 나타내는게 아니다. 그 목록에 ‘제대로’된 삶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혹은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스트레스와 삶의 공포가 추가되어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명절 때면 찾아오는 더부룩함과 소화 장애의 원인이 기름진 음식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삶의 불안과 공포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그리고 굳이 친절하게 꼬치꼬치 그것들을 드러내고, 따져주시는 그 친지분들 때문인 것도 같다. 이제 연휴도 끝났다. 남은건 후유증 뿐이다. 명절 때 남은 음식 다 먹어치울 때쯤 같이 사라지면 좋겠지만, 아마도 다음 명절 때까지 어지간히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다시 명절이 오면 혹시 우리가 잊어먹을까 걱정되 누군가 다시 확인시켜줄 것이다. 그렇게 삶도,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전통 명절도, 친척들의 오지랖도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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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각지에서 진행되던 벚꽃축제가 끝나고도 몇주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제야 겨울이 끝난 느낌이다. 봄은 온적도 없는데, 이제 곧 여름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상할 정도로 갑작스런 기후 변화가 당황스럽다. 쓰나미에 지진에 화산폭발까지 재난의 지구화라고 할만한 현상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자연환경이 야기시킨 재난은 이제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스펙타클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다. 이 사태들의 개별적인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연환경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소위 자연환경의 오염이나 훼손의 문제가 문명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심각하게 훼손된 환경을 생각해보면, 물이나 공기도 팔겠다는 말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됐다. 환경은 이제 인간에 의해 통제되고 개발되는 대상이 된 것이다. 물론 인간은 환경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통제의 범위를 상당부분 확대해 나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개막식 때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날씨를 조정하라는 정부의 명령이 내려졌었고, 이런 날씨 조정 기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번 달 9일에는 2차대전 승전 65주년 기념행사가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열리는데, 이 행사에서도 모스크바 상공의 비구름을 인공적으로 제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 통제할수 있는 환경의 범위는 극히 협소하다. 이런 대단한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급속도로 증가하는 자연 재난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 환경은 본질적으로 지구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특정한 세력의 관할권이나 주권에 의해 통제될 수 없다. 때문에 환경훼손과 관련된 문제는 지구적 협치의 대상이 된다. 이미 UN에서는 1987년 <우리의 공유 미래>라는 발간물에서 환경에 대한 착취나 파괴를 대체할 개념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현재까지 국가간 체계 내에서 환경을 다룰 때 근간이 되는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개념이다. 우리나라 역시 이 이념에 근간을 두고 환경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지난 2008년에는 국가지속가능발전위원회가 출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여전히 발전을 위한 지속 가능성이라는 발전주의 모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발전주의 모델에서 환경은 경제적 발전에 종속되어 있다. 환경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지 않고, 언제나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어 측정되고 계산된다. 환경이 발전주의 모델에 종속변수가 되는 한, 새만금이나 4대강 개발과 같은 문제는 언제든 재발 될 수 있다.
방금 지적했듯, 환경 훼손의 문제는 지구적 범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한 국가의 영토적 경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환경훼손에서 이러한 경계 없음은 피해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의 문제에도 적용된다. 실제로 환경훼손의 책임이 상당부분 서구 선진국과 다른 지역의 개발 도상국의 경제 발전 전략, 농업 환경, 교통수단, 에너지 정책 등에서 기인함에도 그 책임은 완전히 측정되어 분담될 수 없다. 때문에 환경 오염이나 훼손의 책임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될 뿐, 실질적인 의무나 책임으로 강제되지 않는다. 수많은 환경 관련 국제 협정이나 회의가 열리지만, 각 국가는 자신들의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근간으로 행동한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훼손의 문제는 환경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나 경제의 문제가 된다.
환경훼손 문제에서 불분명한 것은 피해와 책임의 문제만은 아니다. 환경 훼손의 정확한 원인을 찾는 것도 언제나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물론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다시 피해와 책임의 불확정 문제를 소환한다). 그것이 미지의 영역에 있다는 것은 환경 오염이나 훼손의 문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정의 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포괄하는 영역이 협소하게 규정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미지의 영역을 기술할 정확한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인류는 그것에 대해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도 풍부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언어들이, 환경훼손을 다루는 담론들이 국가나 거대 기업이 지원하는 연구소, 혹은 극히 소수의 전문가들을 경유하여 생산된다는 점이다. 환경 훼손이 야기하는 위협들은 대개 정교한 기술을 통해서만 확인되며 복잡한 과학적 모델과 언어를 통해서만 인식 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그 언어를 생산할 수 없고, 단지 소비할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권력이나 전문지식을 가지지 못한 보통의 민중들은 환경오염 담론이 어떤 정치적 배경에서 만들어지는지 거의 알 수 없다.
나는 지금 한편으로는 당연해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뜬금없는 것일 수도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바로 환경오염이나 훼손이 정치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환경 문제중 단연 가장 많이 거론되고 결정적인 사안중 하나는 지구 온난화이다. 현재 지구온난화에 대해서는 지구적 기후변화에 대한 세밀한 조사와 연구가 진행중이다. 그것에 대해 과거보다 더욱 정교해진 과학적 담론을 생산되고 있지만 아직도 그것의 완전한 메커니즘은 밝혀지지 않았다. 기후변화가 국지적 수준에서 다양한 경로로 나타날뿐 아니라 그것이 다른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완전히 밝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최근 가장 뜨거운 환경 담론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지구온난화 이론은 거의 한 세기 전에 나타난 이론이지만, 그 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에 UN기후변화협약이나 교토의정서 등을 통해 환경 담론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는 지구 온난화나 기후변화를 이야기 하며 누구나 이산화탄소, 메탄가스, 황산화물, 프레온 가스 등의 용어를 쉽게 사용하게 되었다. 요컨대 지구온난화의 문제가 사람들의 피부로 느껴지기 전에, 이미 그것은 국가간 체계에서 일종의 ‘합의’를 통해 담론화 된 것이다. 그 합의에 필요한 증거로서의 언어들은 이미 소수 전문가나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생산되어 있었다.
환경 담론이 정치의 문제라면 그것은 이미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자장 안에서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정교화 되면 그것은 발화 주체의 담화가 아니라 사물의 말로 전치된다. 즉, 발화 주체의 주관적 생각이 아니라 사물의 진리가 그렇다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 사물의 질서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질서에 적응해야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특히나 환경 담론은 정치적 합의의 언어가 아니라 자연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제출된다. 환경 운동이 그렇게나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환경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탈정치의 장이 아니다. 이제 환경을 탈정치의 장으로 상상하는 순진한 짓은 그만두도록하자. 문제는 환경도 아니고, 환경 오염도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다루는 인간이며,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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