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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09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환경
    와라
  2. 2009/10/09
    전기자동차 양산 계획, 청계천의 반복이 되지 않기를(2)
    와라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환경

각지에서 진행되던 벚꽃축제가 끝나고도 몇주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제야 겨울이 끝난 느낌이다. 봄은 온적도 없는데, 이제 곧 여름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상할 정도로 갑작스런 기후 변화가 당황스럽다. 쓰나미에 지진에 화산폭발까지 재난의 지구화라고 할만한 현상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자연환경이 야기시킨 재난은 이제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스펙타클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다. 이 사태들의 개별적인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연환경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소위 자연환경의 오염이나 훼손의 문제가 문명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심각하게 훼손된 환경을 생각해보면, 물이나 공기도 팔겠다는 말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됐다. 환경은 이제 인간에 의해 통제되고 개발되는 대상이 된 것이다. 물론 인간은 환경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통제의 범위를 상당부분 확대해 나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개막식 때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날씨를 조정하라는 정부의 명령이 내려졌었고, 이런 날씨 조정 기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번 달 9일에는 2차대전 승전 65주년 기념행사가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열리는데, 이 행사에서도 모스크바 상공의 비구름을 인공적으로 제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 통제할수 있는 환경의 범위는 극히 협소하다. 이런 대단한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급속도로 증가하는 자연 재난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 환경은 본질적으로 지구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특정한 세력의 관할권이나 주권에 의해 통제될 수 없다. 때문에 환경훼손과 관련된 문제는 지구적 협치의 대상이 된다. 이미 UN에서는 1987년 <우리의 공유 미래>라는 발간물에서 환경에 대한 착취나 파괴를 대체할 개념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현재까지 국가간 체계 내에서 환경을 다룰 때 근간이 되는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개념이다. 우리나라 역시 이 이념에 근간을 두고 환경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지난 2008년에는 국가지속가능발전위원회가 출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여전히 발전을 위한 지속 가능성이라는 발전주의 모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발전주의 모델에서 환경은 경제적 발전에 종속되어 있다. 환경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지 않고, 언제나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어 측정되고 계산된다. 환경이 발전주의 모델에 종속변수가 되는 한, 새만금이나 4대강 개발과 같은 문제는 언제든 재발 될 수 있다.

 

방금 지적했듯, 환경 훼손의 문제는 지구적 범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한 국가의 영토적 경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환경훼손에서 이러한 경계 없음은 피해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의 문제에도 적용된다. 실제로 환경훼손의 책임이 상당부분 서구 선진국과 다른 지역의 개발 도상국의 경제 발전 전략, 농업 환경, 교통수단, 에너지 정책 등에서 기인함에도 그 책임은 완전히 측정되어 분담될 수 없다. 때문에 환경 오염이나 훼손의 책임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될 뿐, 실질적인 의무나 책임으로 강제되지 않는다. 수많은 환경 관련 국제 협정이나 회의가 열리지만, 각 국가는 자신들의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근간으로 행동한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훼손의 문제는 환경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나 경제의 문제가 된다.

 

환경훼손 문제에서 불분명한 것은 피해와 책임의 문제만은 아니다. 환경 훼손의 정확한 원인을 찾는 것도 언제나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물론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다시 피해와 책임의 불확정 문제를 소환한다). 그것이 미지의 영역에 있다는 것은 환경 오염이나 훼손의 문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정의 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포괄하는 영역이 협소하게 규정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미지의 영역을 기술할 정확한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인류는 그것에 대해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도 풍부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언어들이, 환경훼손을 다루는 담론들이 국가나 거대 기업이 지원하는 연구소, 혹은 극히 소수의 전문가들을 경유하여 생산된다는 점이다. 환경 훼손이 야기하는 위협들은 대개 정교한 기술을 통해서만 확인되며 복잡한 과학적 모델과 언어를 통해서만 인식 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그 언어를 생산할 수 없고, 단지 소비할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권력이나 전문지식을 가지지 못한 보통의 민중들은 환경오염 담론이 어떤 정치적 배경에서 만들어지는지 거의 알 수 없다.

 

나는 지금 한편으로는 당연해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뜬금없는 것일 수도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바로 환경오염이나 훼손이 정치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환경 문제중 단연 가장 많이 거론되고 결정적인 사안중 하나는 지구 온난화이다. 현재 지구온난화에 대해서는 지구적 기후변화에 대한 세밀한 조사와 연구가 진행중이다. 그것에 대해 과거보다 더욱 정교해진 과학적 담론을 생산되고 있지만 아직도 그것의 완전한 메커니즘은 밝혀지지 않았다. 기후변화가 국지적 수준에서 다양한 경로로 나타날뿐 아니라 그것이 다른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완전히 밝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최근 가장 뜨거운 환경 담론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지구온난화 이론은 거의 한 세기 전에 나타난 이론이지만, 그 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에 UN기후변화협약이나 교토의정서 등을 통해 환경 담론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는 지구 온난화나 기후변화를 이야기 하며 누구나 이산화탄소, 메탄가스, 황산화물, 프레온 가스 등의 용어를 쉽게 사용하게 되었다. 요컨대 지구온난화의 문제가 사람들의 피부로 느껴지기 전에, 이미 그것은 국가간 체계에서 일종의 ‘합의’를 통해 담론화 된 것이다. 그 합의에 필요한 증거로서의 언어들은 이미 소수 전문가나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생산되어 있었다.

 

환경 담론이 정치의 문제라면 그것은 이미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자장 안에서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정교화 되면 그것은 발화 주체의 담화가 아니라 사물의 말로 전치된다. 즉, 발화 주체의 주관적 생각이 아니라 사물의 진리가 그렇다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 사물의 질서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질서에 적응해야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특히나 환경 담론은 정치적 합의의 언어가 아니라 자연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제출된다. 환경 운동이 그렇게나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환경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탈정치의 장이 아니다. 이제 환경을 탈정치의 장으로 상상하는 순진한 짓은 그만두도록하자. 문제는 환경도 아니고, 환경 오염도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다루는 인간이며,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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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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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자동차 양산 계획, 청계천의 반복이 되지 않기를

전기자동차 양산 계획, 청계천의 반복이 되지 않기를

 

 

근대화의 경험은 인간의 감성에 일대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 특히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인간이 시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에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그러한 변화에는 전화, 영화, 기차, 엑스 레이(X-ray), 자전거 등과 함께 자동차의 발명이 크게 일조하였다. 무엇보다 그것은 속도를 추구했다. 1900년에 프랑스에는 약 3천대의 자동차가 있었고, 1913년에는 10만 대에 이르렀다. 1896년과 1900년 사이에 최소한 10종의 자동차 잡지가 발행되었으며, 1906년에 이미 시속 200Km를 넘어서는 자동차가 발명되었다.

 

 

얼마 후 미래파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된 마리네티의 선언이 이어졌다. 그는 새로운 과학기술에 미쳐 있었고, 그것만을 찬양했다. 그는 “우리는 기계와 협력하려 한다”고 강조하며, ‘새로운 속도의 미학’을 포고한다. “우리는 선언하노라, 새로운 미, 속도라는 미가 세계의 장려함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고. 보닛에 탄환처럼 질주하는 거대한 배기관을 장식한 경주용 자동차는 ‘사모트라키의 니케’보다 아름답다.”

 

 

그것은 근대화에 대한 찬양이었으며, 모든 속도 혹은 속도를 향한 열망에 대한 찬양이었다. 속도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결국 인간이 속도를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극대화된 속도에 속에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없게 되고, 급기야 속도는 인간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교통사고는 바로 이러한 속도에 대한 열망이 야기시킨 근대화의 산물이다. 교통사고는 지금 우리의 삶에서 더 이상 예외가 아닌 일상으로 존재한다. 어린아이를 등교시키는 부모의 입에서 나오는 “차 조심”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속도가 위협하는 삶의 일상화된 측면이다.

 

 

그럼에도 속도는 이미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으며, 거부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로 기능한다. 그것은 개별적 인간의 삶의 속도를 하나의 추상적 속도로 흡수한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나 직장으로 나갈 때, 지인과의 약속 장소로 향할 때, 명절이 되어 고향으로 가야할 때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자동차의 속도이다.

 

 

근대화를 통해 추동된 인간의 시공간적 경험의 변화, 그 중추에 각인된 속도에 대한 열망은 이제 익숙한 삶의 양식이 되어 버렸다. 그 변화의 계기이자, 속도에 대한 강박의 표상이 바로 자동차이다. 이 거대한 변환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자동차는 물질적 진보와 편의를 인간에게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 물질적 진보와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괄호 안에 넣어 버렸다. 괄호 안에 들어가 고려되지 않았던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환경이다.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는가?

 

1990년대 이후 근대화의 폐해로 환경오염과 파괴가 수 없이 언급되어 왔다. 자동차와 환경파괴의 관계는 이미 지겨울 정도로 논의되어 왔다. 서울의 경우 자동차로 인한 대기오염이 전체의 66.9%에 이를 정도이며,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10조원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지난달 22일 세계 1300여개 도시와 함께 서울에서도 열렸던 ‘차 없는 날’ 행사도 자동차와 환경오염의 연관성에 대한 고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같은 배경에서 전기자동차에 관련된 논의도 다양한 방식으로 활성화 되고 있다. 전기자동차는 기존 자동차가 가지고 있던 석유 에너지를 쓰지 않기 때문에, 극심한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 고갈이라는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 개발이 필요한 분야이다. 전기자동차는 기존 자동차가 가지고 있던 석유 에너지를 쓰지 않기 때문에, 극심한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 고갈이라는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 개발이 필요한 분야이다.

 

 

8일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지식경제부는 전기자동차산업 활성화 방안을 보고했다. 이 회의에서 당초 예상되어 있던 전기자동차 양산 시기를 2년 앞당기기로 했다고 한다. 여러 측면에서 실정을 서슴치 않는 정권이기에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기는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전기자동차는 디젤 엔진, 가솔린 엔진을 사용하는 오토사이클(등용사이클)방식의 자동차보다 먼저 고안 되었고,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상당히 상용화 되어 있었다. 자동차의 발전 초기부터 전기 자동차는 이미 널리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휘발유의 가격은 떨어지고, 내연기관의 대량생산체제가 구축되면서 휘발유 자동차가 전기자동차에 비해 싼 가격으로 보급되면서 휘발유자동차의 사용이 보편화 되게 된다.

1990년대 후반에도 전기자동차는 상용화 단계에 이르렀었다. 환경 오염문제의 대두와 기술발전에 기반해 제너럴 모터스(GM)사에서 전기자동차인 'EV1'을 개발해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 임대 형식으로 보급했었다. 이용자들은 ‘EV1’의 상용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며, 몇 가지 점만 보완한다면 지금 당장 쓰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EV1은 얼마후 GM에 의해 수거되어 폐기 처분되어 버렸다.

 

 

2006년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는가?(Who Killed the electric cars?)>는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상용화될 수 있을 정도로 개발된 전기자동차가 왜 갑자기 폐기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여러 전문가들의 인터뷰와 자료를 통해 'EV1'의 폐기에는 휘발유자동차의 수요를 유지해 석유를 지속적으로 판매하기 위한 거대 석유자본과, 내연기관 산업을 기간으로 하는 자동차 산업 자본 그리고 그들과 밀접하게 유착된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강하게 관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전기자동차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아직 소망에 불과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적 상황 때문에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자동차의 발전 초기부터 현재까지 전기자동차가 보편화되지 못했던 이유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상황 때문이라면, 이명박 정권의 전기자동차 양산 계획은 더욱 걱정스럽다.

 

 

8일 이명박 대통령은 “온 세계가 지금 자동차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앞으로 어떤 차들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치열한 경쟁체제에 들어섰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하며, “전기자동차 분야는 특히 원천기술을 만들어 가면서 변화되는 상황에 대응해야 하는 만큼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에 “정부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R&D 예산의 효과적인 배분을 통해 집중적인 지원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정권에게 전기 자동차 양산 계획은 에너지의 대안적 사용이나 환경오염 문제와는 관련 없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경쟁”과 “투자”의 대상일 뿐이라는 점이다. 단지 회의에서 한 말을 가지고 청계천을 다시 떠올리는 건 그저 나만의 오해일 뿐일까. ‘자연친화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환경’을 파괴하고 개발 자본에게 엄청난 이득을 안겨줬던 그 청계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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