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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자동차 양산 계획, 청계천의 반복이 되지 않기를

전기자동차 양산 계획, 청계천의 반복이 되지 않기를

 

 

근대화의 경험은 인간의 감성에 일대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 특히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인간이 시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에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그러한 변화에는 전화, 영화, 기차, 엑스 레이(X-ray), 자전거 등과 함께 자동차의 발명이 크게 일조하였다. 무엇보다 그것은 속도를 추구했다. 1900년에 프랑스에는 약 3천대의 자동차가 있었고, 1913년에는 10만 대에 이르렀다. 1896년과 1900년 사이에 최소한 10종의 자동차 잡지가 발행되었으며, 1906년에 이미 시속 200Km를 넘어서는 자동차가 발명되었다.

 

 

얼마 후 미래파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된 마리네티의 선언이 이어졌다. 그는 새로운 과학기술에 미쳐 있었고, 그것만을 찬양했다. 그는 “우리는 기계와 협력하려 한다”고 강조하며, ‘새로운 속도의 미학’을 포고한다. “우리는 선언하노라, 새로운 미, 속도라는 미가 세계의 장려함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고. 보닛에 탄환처럼 질주하는 거대한 배기관을 장식한 경주용 자동차는 ‘사모트라키의 니케’보다 아름답다.”

 

 

그것은 근대화에 대한 찬양이었으며, 모든 속도 혹은 속도를 향한 열망에 대한 찬양이었다. 속도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결국 인간이 속도를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극대화된 속도에 속에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없게 되고, 급기야 속도는 인간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교통사고는 바로 이러한 속도에 대한 열망이 야기시킨 근대화의 산물이다. 교통사고는 지금 우리의 삶에서 더 이상 예외가 아닌 일상으로 존재한다. 어린아이를 등교시키는 부모의 입에서 나오는 “차 조심”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속도가 위협하는 삶의 일상화된 측면이다.

 

 

그럼에도 속도는 이미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으며, 거부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로 기능한다. 그것은 개별적 인간의 삶의 속도를 하나의 추상적 속도로 흡수한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나 직장으로 나갈 때, 지인과의 약속 장소로 향할 때, 명절이 되어 고향으로 가야할 때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자동차의 속도이다.

 

 

근대화를 통해 추동된 인간의 시공간적 경험의 변화, 그 중추에 각인된 속도에 대한 열망은 이제 익숙한 삶의 양식이 되어 버렸다. 그 변화의 계기이자, 속도에 대한 강박의 표상이 바로 자동차이다. 이 거대한 변환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자동차는 물질적 진보와 편의를 인간에게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 물질적 진보와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괄호 안에 넣어 버렸다. 괄호 안에 들어가 고려되지 않았던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환경이다.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는가?

 

1990년대 이후 근대화의 폐해로 환경오염과 파괴가 수 없이 언급되어 왔다. 자동차와 환경파괴의 관계는 이미 지겨울 정도로 논의되어 왔다. 서울의 경우 자동차로 인한 대기오염이 전체의 66.9%에 이를 정도이며,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10조원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지난달 22일 세계 1300여개 도시와 함께 서울에서도 열렸던 ‘차 없는 날’ 행사도 자동차와 환경오염의 연관성에 대한 고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같은 배경에서 전기자동차에 관련된 논의도 다양한 방식으로 활성화 되고 있다. 전기자동차는 기존 자동차가 가지고 있던 석유 에너지를 쓰지 않기 때문에, 극심한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 고갈이라는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 개발이 필요한 분야이다. 전기자동차는 기존 자동차가 가지고 있던 석유 에너지를 쓰지 않기 때문에, 극심한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 고갈이라는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 개발이 필요한 분야이다.

 

 

8일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지식경제부는 전기자동차산업 활성화 방안을 보고했다. 이 회의에서 당초 예상되어 있던 전기자동차 양산 시기를 2년 앞당기기로 했다고 한다. 여러 측면에서 실정을 서슴치 않는 정권이기에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기는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전기자동차는 디젤 엔진, 가솔린 엔진을 사용하는 오토사이클(등용사이클)방식의 자동차보다 먼저 고안 되었고,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상당히 상용화 되어 있었다. 자동차의 발전 초기부터 전기 자동차는 이미 널리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휘발유의 가격은 떨어지고, 내연기관의 대량생산체제가 구축되면서 휘발유 자동차가 전기자동차에 비해 싼 가격으로 보급되면서 휘발유자동차의 사용이 보편화 되게 된다.

1990년대 후반에도 전기자동차는 상용화 단계에 이르렀었다. 환경 오염문제의 대두와 기술발전에 기반해 제너럴 모터스(GM)사에서 전기자동차인 'EV1'을 개발해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 임대 형식으로 보급했었다. 이용자들은 ‘EV1’의 상용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며, 몇 가지 점만 보완한다면 지금 당장 쓰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EV1은 얼마후 GM에 의해 수거되어 폐기 처분되어 버렸다.

 

 

2006년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는가?(Who Killed the electric cars?)>는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상용화될 수 있을 정도로 개발된 전기자동차가 왜 갑자기 폐기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여러 전문가들의 인터뷰와 자료를 통해 'EV1'의 폐기에는 휘발유자동차의 수요를 유지해 석유를 지속적으로 판매하기 위한 거대 석유자본과, 내연기관 산업을 기간으로 하는 자동차 산업 자본 그리고 그들과 밀접하게 유착된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강하게 관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전기자동차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아직 소망에 불과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적 상황 때문에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자동차의 발전 초기부터 현재까지 전기자동차가 보편화되지 못했던 이유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상황 때문이라면, 이명박 정권의 전기자동차 양산 계획은 더욱 걱정스럽다.

 

 

8일 이명박 대통령은 “온 세계가 지금 자동차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앞으로 어떤 차들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치열한 경쟁체제에 들어섰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하며, “전기자동차 분야는 특히 원천기술을 만들어 가면서 변화되는 상황에 대응해야 하는 만큼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에 “정부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R&D 예산의 효과적인 배분을 통해 집중적인 지원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정권에게 전기 자동차 양산 계획은 에너지의 대안적 사용이나 환경오염 문제와는 관련 없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경쟁”과 “투자”의 대상일 뿐이라는 점이다. 단지 회의에서 한 말을 가지고 청계천을 다시 떠올리는 건 그저 나만의 오해일 뿐일까. ‘자연친화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환경’을 파괴하고 개발 자본에게 엄청난 이득을 안겨줬던 그 청계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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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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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 전시 : 도시 속에서 발견한 외부적 사유의 공간

도시 속에서 발견한 외부적 사유의 공간

 

 

 

       도시는 자연스레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주조된 어떤 것이다.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낡은 것들이 파괴되고, 새로운 것들이 형성되는 공간이다. 도시는 파괴와 생성의 과정 속에 존재한다. 어떤 것들은 생성을 위해 파괴되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그냥 파괴되기만 할 뿐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며 시간 속에 축적시킨 삶의 흔적들은 종종 도시가 가진 변화의 속도 속에 함몰된다.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문제는 바로 그 변화의 속도이다. 휘황찬란한 변화의 속도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저 도시의 속도에 적응해 나갈 뿐, 자신만의 속도를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2008년 작 '도시의 섬'       정수진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녀가 주목하는 지점은 자동차가 질주하는 도로의 한 복판에 있는 ‘안전지대’이다. 자동차가 침범하지 못하는 공간, 자동차를 피해 사람들이 잠시 머무르는 공간. 그 곳은 움직임의 속도가 멈추는 공간이며, 그렇기에 도시의 속도에 함몰되지 않는 공간이다. 때문에 그 곳은 속도의 외부에 놓인 성찰의 공간처럼 보인다. 그녀는 2008년 첫 개인전부터 <도시의 섬>이라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일관되게 도시 속도의 외부, 그곳의 성찰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그녀는 2009년 또 다시 <도시의 섬>을 주제로 개인전을 마련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같은 것들의 작은 변주만이 존재하는 지난 전시의 반복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그녀의 작품들은 진화하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묻고 있다. 안전지대, 그 곳은 진정으로 멈춤의 공간이며, 성찰의 공간인가? 여전히 그곳은 도시의 속도를 관조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멈춤과 성찰의 공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속도에도 저항할 수 없는 무의미의 공간이기도하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 그곳은 도시의 속도를 만들어내는 생산지로서 기능한다. 이 정지된 공간은 도시의 속도를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환영들을 만들어낸다.

 

      

        이 환영들은 나무에 장식된 현란한 조명들을 통해, 다양한 모양을 연출해내는 토피어리를 통해 재현된다. 이 토피어리들은 때로는 화목한 가정을, 때로는 해피엔딩을 예고하는 동화의 한 장면을, 때로는 도시 진보를 형상화한 상징들로 전시된다. 도시에서 사는 이들의 속도는 자신의 속도라기보다는 가정을 위해, 아직 오지 않은(未-來)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앞으로도 오지 않을 해피엔딩을 위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족, 민족, 회사 등 허구적 공동체의 앞날을 위해 적응하고 버텨야할 삶의 속도이다.

 

 

2009 년 작 '도시의섬'        어떤 사물도 다른 사물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 않는다. 도시가 파괴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개별자들이 독특하게 지니고 있는 시간의 질적 차이이다. 도시의 속도는 개별적 시간을 하나의 균일한 시간으로 흡수해버린다. 정수진의 작품에는 개별자들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 있다. 그녀는 도시의 속도가 물결치는 도로 한 복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 한다. 속도가 멈추는 곳에서, 즉 추상화된 속도의 텅 빈 결들 속에서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안전지대에서 그녀가 찾으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시간을 구성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곳에는 이미 도시의 속도를 긍정케 하는 신화적 형상들로 가득 차 있다. 정수진은 화려한 조명과 토피어리를 통해 그 신화적 형상들을 비판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비판 대상이 안전지대 자체가 아니라 안전지대를 채우고 있는 신화적 형상들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도시의 신화를 비판하면서도, 안전지대를 여전히 도시의 공적 공간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추상적 속도가 휩쓸고 다니는 그 도로의 한쪽 편에 있는 안전지대에 조그마한 호수와 정자를 그려 넣음으로써 삶의 여유를 찾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곳에는 어김없이 시속 60Km 이상을 금지하는 도로 표지판이 놓여 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천천히 혹은 자신의 속도대로 살아가라고 이야기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속삭임이기도 하다. 도시의 속도 속에서 살아오며 자신이 느꼈던 상실, 결여, 혼돈의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정수진은 젠체하는 조언자가 되기보다는 자기 삶의 고민들을 이야기하고 공유하는 작가가 되고자 한다. 그녀의 작품들이 다른 치기어린 작가들의 작품과 달리 허황되거나 과장되지 않고,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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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 2009 개인전 '도시의 섬' , 전시 서문

 

전시 : 2009. 9. 18 - 9. 30(수), 오전 11:00 - 오후 7:00

장소 : 문화일보 갤러리(충정로, 문화일보 사옥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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