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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09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환경
    와라
  2. 2009/12/04
    2009년, 이제 빈대떡 신사에게 돌아갈 집은 없다
    와라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환경

각지에서 진행되던 벚꽃축제가 끝나고도 몇주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제야 겨울이 끝난 느낌이다. 봄은 온적도 없는데, 이제 곧 여름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상할 정도로 갑작스런 기후 변화가 당황스럽다. 쓰나미에 지진에 화산폭발까지 재난의 지구화라고 할만한 현상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자연환경이 야기시킨 재난은 이제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스펙타클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다. 이 사태들의 개별적인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연환경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소위 자연환경의 오염이나 훼손의 문제가 문명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심각하게 훼손된 환경을 생각해보면, 물이나 공기도 팔겠다는 말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됐다. 환경은 이제 인간에 의해 통제되고 개발되는 대상이 된 것이다. 물론 인간은 환경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통제의 범위를 상당부분 확대해 나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개막식 때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날씨를 조정하라는 정부의 명령이 내려졌었고, 이런 날씨 조정 기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번 달 9일에는 2차대전 승전 65주년 기념행사가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열리는데, 이 행사에서도 모스크바 상공의 비구름을 인공적으로 제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 통제할수 있는 환경의 범위는 극히 협소하다. 이런 대단한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급속도로 증가하는 자연 재난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 환경은 본질적으로 지구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특정한 세력의 관할권이나 주권에 의해 통제될 수 없다. 때문에 환경훼손과 관련된 문제는 지구적 협치의 대상이 된다. 이미 UN에서는 1987년 <우리의 공유 미래>라는 발간물에서 환경에 대한 착취나 파괴를 대체할 개념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현재까지 국가간 체계 내에서 환경을 다룰 때 근간이 되는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개념이다. 우리나라 역시 이 이념에 근간을 두고 환경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지난 2008년에는 국가지속가능발전위원회가 출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여전히 발전을 위한 지속 가능성이라는 발전주의 모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발전주의 모델에서 환경은 경제적 발전에 종속되어 있다. 환경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지 않고, 언제나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어 측정되고 계산된다. 환경이 발전주의 모델에 종속변수가 되는 한, 새만금이나 4대강 개발과 같은 문제는 언제든 재발 될 수 있다.

 

방금 지적했듯, 환경 훼손의 문제는 지구적 범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한 국가의 영토적 경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환경훼손에서 이러한 경계 없음은 피해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의 문제에도 적용된다. 실제로 환경훼손의 책임이 상당부분 서구 선진국과 다른 지역의 개발 도상국의 경제 발전 전략, 농업 환경, 교통수단, 에너지 정책 등에서 기인함에도 그 책임은 완전히 측정되어 분담될 수 없다. 때문에 환경 오염이나 훼손의 책임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될 뿐, 실질적인 의무나 책임으로 강제되지 않는다. 수많은 환경 관련 국제 협정이나 회의가 열리지만, 각 국가는 자신들의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근간으로 행동한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훼손의 문제는 환경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나 경제의 문제가 된다.

 

환경훼손 문제에서 불분명한 것은 피해와 책임의 문제만은 아니다. 환경 훼손의 정확한 원인을 찾는 것도 언제나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물론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다시 피해와 책임의 불확정 문제를 소환한다). 그것이 미지의 영역에 있다는 것은 환경 오염이나 훼손의 문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정의 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포괄하는 영역이 협소하게 규정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미지의 영역을 기술할 정확한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인류는 그것에 대해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도 풍부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언어들이, 환경훼손을 다루는 담론들이 국가나 거대 기업이 지원하는 연구소, 혹은 극히 소수의 전문가들을 경유하여 생산된다는 점이다. 환경 훼손이 야기하는 위협들은 대개 정교한 기술을 통해서만 확인되며 복잡한 과학적 모델과 언어를 통해서만 인식 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그 언어를 생산할 수 없고, 단지 소비할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권력이나 전문지식을 가지지 못한 보통의 민중들은 환경오염 담론이 어떤 정치적 배경에서 만들어지는지 거의 알 수 없다.

 

나는 지금 한편으로는 당연해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뜬금없는 것일 수도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바로 환경오염이나 훼손이 정치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환경 문제중 단연 가장 많이 거론되고 결정적인 사안중 하나는 지구 온난화이다. 현재 지구온난화에 대해서는 지구적 기후변화에 대한 세밀한 조사와 연구가 진행중이다. 그것에 대해 과거보다 더욱 정교해진 과학적 담론을 생산되고 있지만 아직도 그것의 완전한 메커니즘은 밝혀지지 않았다. 기후변화가 국지적 수준에서 다양한 경로로 나타날뿐 아니라 그것이 다른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완전히 밝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최근 가장 뜨거운 환경 담론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지구온난화 이론은 거의 한 세기 전에 나타난 이론이지만, 그 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에 UN기후변화협약이나 교토의정서 등을 통해 환경 담론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는 지구 온난화나 기후변화를 이야기 하며 누구나 이산화탄소, 메탄가스, 황산화물, 프레온 가스 등의 용어를 쉽게 사용하게 되었다. 요컨대 지구온난화의 문제가 사람들의 피부로 느껴지기 전에, 이미 그것은 국가간 체계에서 일종의 ‘합의’를 통해 담론화 된 것이다. 그 합의에 필요한 증거로서의 언어들은 이미 소수 전문가나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생산되어 있었다.

 

환경 담론이 정치의 문제라면 그것은 이미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자장 안에서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정교화 되면 그것은 발화 주체의 담화가 아니라 사물의 말로 전치된다. 즉, 발화 주체의 주관적 생각이 아니라 사물의 진리가 그렇다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 사물의 질서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질서에 적응해야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특히나 환경 담론은 정치적 합의의 언어가 아니라 자연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제출된다. 환경 운동이 그렇게나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환경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탈정치의 장이 아니다. 이제 환경을 탈정치의 장으로 상상하는 순진한 짓은 그만두도록하자. 문제는 환경도 아니고, 환경 오염도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다루는 인간이며,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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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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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이제 빈대떡 신사에게 돌아갈 집은 없다

 

대한민국은 1년 365일 공사중이다. 도로를 뒤엎고, 건물을 올리는 개발의 풍경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그것은 배정된 예산을 모두 소진해야 하는 공무상의 이유 때문만도 아니고, 유독 삽질을 좋아하는 대통령 탓만도 아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가진 강박의 풍경이다. 지속적이고 강제적이며, 보편적이고 중독적인 개발은 시대의 강박 그 자체이다. 개발은 경제적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여겨지며,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의 직접적 산물이기도 하다.

 

개발이란 의도적으로 자연을 변형시켜 인간의 질서 속으로 편입시키는 행위이다. 마르크스는 최악의 건축가가 정교한 벌집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꿀벌보다 훌륭하다고 말한다. 건축가는 건축물을 짓기 전에 이미 머리 속에 완성된 건물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추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하는 능력은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추상력에 기반을 둔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언급은 개발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드러내 준다. 개발이란 단순히 자연의 인위적 변형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중심에 두고 그것에 조응하도록 자연을 새롭게 발명하는 작업이다. 인간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디자인 하는 것은 하나의 도로, 하나의 건축물, 하나의 공원이 아니라 그것들을 둘러싼 자연 그 자체인 것이다.

 

다시, 인간은 자연 자체를 설계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을 그 자체의 의지에 반하여 강제적으로 인간의 질서로 편입시키는 과정에는 폭력이 개입된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폭력이기도 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할 인간 자신에 대한 폭력이기도 하다. 청계천 복개 과정을 통해 우리가 확인한 것이 바로 이 과정이다. 개천이나 강은 그 발원지에서 시작해 더 큰 강이나 바다로 흘러간다. 그것은 끝없는 물의 순환이며, 자연의 흐름이다. 그러나 복개된 청계천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청계천이 시작되는 소라광장에는 마치 그 곳이 발원지나 되는 마냥 물이 솟아오르는 분수가 있고, 청계천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있다(그러나 정작 물은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면 청계천을 둘러싼 폭 좁은 긴 풀숲이 나오지만,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대한 건물과 도로밖에 없다.

 

청계천은 마치 도심 속의 자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시선 속에서만 자연이 된다. 개발은 이처럼 인간의 의도와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自-然)을 강제적으로 인간의 삶 내부로 포섭하여 새롭게 배치하는 작업이다. 4대강 개발 역시 마찬가지이다. 4대강 개발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자연을 비자연화-인간화 하는 작업이다.

 

재개발 역시 이러한 개발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것을 개발이라고 부르지 않고 재(再)라는 접두사를 붙여 부를 때는 그냥 개발과 다른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개발은 개발과 무엇이 다른가. 용어만 풀어보자면 재개발은 다시 개발한다는 말이다. 개발의 대상이 자연 그 자체 였다면, 재개발은 개발을 통해 인간화 된 것을 개발의 대상으로 삼는다. 개발이 자연을 인간의 질서로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면, 재개발은 인간화 된 것을 재-인간화 시키는 과정이다.

 

인간화 된 것을 재-인간화 시키는 것은 현대라는 독특한 시대의 리듬에 맞게 대상을 파괴하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신이 아닌 인간에 의해 일어나는 일인 이상, 그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파괴가 수반된다. 새로움에 대한 열정이 파괴와 생성의 반복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개발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적으로 사용되는 과정이라면, 재개발은 파괴와 생성의 반복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과정이다. 재개발은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 투사되어 파괴와 생성을 강박적으로 되풀이하며, 그 자체가 생산이자, 소비이자, 욕망이 되는 사태이다.

 

“현대의 조건은 끊임없는 움직이는 데 있다. 선택은 현대화 아니면 소멸일 뿐이다. 따라서 현대사는 설계하기의 역사이자, 자연에 맞서 진행된 꾸준한 정복전/소모전에서 시도되고 퇴색되고 폐기되고 버려진 설계도의 박물관/묘지였다.”(지그문트 바우만)

 

재개발은 보통 도심 재개발과 주택 재개발로 구분된다. 도심 재개발을 통해 현대적 시설을 갖춘 업무 지구와 주상복합 지역 그리고 꿈과 희망이 넘치는 소비로 가득한 복합소비공간이 만들어진다. 주택 재개발은 무허가 주택과 저소득층 주거지역을 대상으로 하며, 재개발을 통해 고급 빌라나 맨션 혹은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형성된다.

 

개발에서 훼손된 자연이 문제시 되었다면, 재개발에서는 인간의 삶 자체가 문제시 된다. 재개발을 거쳐 만들어진 새로움은 그것을 소비할 재력이 없는 사람들을 배제한다. 새롭게 만들어진 상업 및 주거 공간에서 기존에 있던 거주자들이 배제되는 것이다. 재개발 이후 원주민들의 재정착률은 20퍼센트 이하이다. 서울의 경우,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거의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한 재개발이 계획되어 있고, 상당부분 이미 진행중이다. 재개발이 진행될수록 서울은 점점 중산층화 될 것이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민중은 점점 주변화 될 것이다.

 

용산 참사는 재개발의 이러한 모순을 정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민중의 저항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예외적인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재개발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그것이 새로운 것의 소비에 대한 열망이라는 현대의 강박으로부터 연원하는 이상, 현재에도 미래에도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인 것이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붙여 먹지.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라는 재미있는 가사 때문에 ‘빈대떡 신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재개발이 일상이 된 요즘 이 노래는 더 이상 농담으로도 못 쓰이게 되었다. 이 노래가 유행할 즈음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빈대떡 붙여 먹으러 돌아갈 집이나 방 한 칸 정도는 있었나보다. 지금은 그것도 없다. 1인당 국민 소득이 그렇게 올랐다는데, 삶은 더 팍팍해져만 간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도시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시민권이라는 용어는 재활용도 안되는 쓰레기가 되었다. 어원상 시민권(citizen)은 도시(city)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권리였다. 이제 시민권은 그 원래 의미를 찾아가는 듯하다. 시민권은 도시에 살 수 있는 중산층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재개발로 인해 도시에서 쫓겨나야 하는 민중들은 시민권을 가질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죽여도 아무도 처벌 받지 않는다. 최악의 재판으로 기억될 용산 참사 판결에서 보았듯이 말이다. 집도, 권리도, 생명도 보장받지 못하는 우리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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