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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 않은 미학을 위해 희생당한 도시민의 삶 : 개발과 투기의 일상화 2

 

 

지난 칼럼(개발과 투기의 일상화 1 : 개발에 미치고 투기에 목맨 우리시대의 자화상<칼럼보기>)에서는 개발과 투기의 열풍이 단순히 토건국가와 건설자본의 결탁으로 인해 발생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 이야기 했다. 거기에는 개발을 찬양하는 투기하는 시민이 함께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사회는 소수 지배자들의 머리 속에 설계된 대로만 형성되지 않는다. 한 사회의 성격은 지배자의 의도와 함께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독특한 합리성이 만나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구성된다. 때로 그것들은 서로 반대의 지점에 위치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친화력을 발휘하여 같은 지점에 서서 같은 목표를 바라보기도 한다. 적어도 개발과 투기의 열풍은 후자의 측면이 강해 보인다.

 

재개발 논리의 미학적 정당화

 

개발과 투기에 대한 열정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경제적 이득과 관련되어 있다면, 다른 한 축은 미학적 삶과 관련되어 있다. 도시 미학은 도시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을 넘어 도시민들의 삶 자체를 재구조화 하는 기능을 한다. 브랜드 아파트의 유행은 이 지점과 관련되어 있다. 1999년 삼성중공업의 ‘쉐르빌’을 시작으로 래미안, ‘트럼프 월드’, ‘아이파크’, ‘캐슬’, ‘e편한세상’, ‘힐스테이트’, ‘더샵’, ‘푸르지오’, ‘비발디’, ‘상떼빌’ 그리고 최근의 ‘Z클래스’까지 브랜드 아파트는 그야말로 봇물터지듯 등장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직접적으로는 외환위기 직후 단행된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조치와 관련된 것이지만, 보다 폭 넓게 보자면 당대의 독특한 합리성이 발현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브랜드 아파트의 유행은 도시가 과잉유입된 인구의 수용이라는 기능에서 삶의 미학적 구성이라는 기능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징후처럼 보인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라는 광고문구, 웰빙 열풍과 맥을 같이 하는 ‘친환경 아파트’, 성에서 음악회를 여는 귀족적 삶을 보여주는 ‘캐슬’ 같은 아파트, 미래지향적인 최첨단 아파트 등 브랜드 아파트 광고가 보여주는 삶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것들은 “사람다운” 삶, “자연과 함께 하는” 삶, 기술발전이 가져올 “미래지향적” 삶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 광고들은 개인들을 ‘대신하여’ 생태와 기술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바람직하게 도래할 삶의 이상을 만들어준다. 미래는 그렇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 광고가 늘 그렇듯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혹은 아직-오지 않은, 미-래) 이미지를 주조해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바로 그 도래하지 않을 삶의 이미지를 자신의 삶 속으로 투사시킨다.

 

여기서 삶의 미학적 구성이라는 테제의 목표가 도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맞춰져 있기 보다는 개발과 투기의 새로운 시장 개척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른바 컬쳐노믹스(culturenomics)가 보여주는 것이 미학의 시장화라는 지점이다. 도시를 미학적으로 디자인 하는 것이 도시의 경쟁력이자 경제적 힘이라는 것이 컬쳐노믹스의 모토이다.

 

세운상가 철거후 녹지를 조성하고, 동대문운동장을 디자인플라자로 조성하고, 강남대로에 거대한 미디어 폴을 세우고, 인공 꽃밭과 인공분수로 꾸며진 광화문 광장을 만드는 모습 속에서 컬쳐노믹스는 그 실체를 드러낸다. 미학적 도시를 만든다면서 그 장소 고유의 문화와 생태 그리고 역사적 특수성과 지역성을 파괴하는 모습은 재개발 논리(혹은 신개발주의) 속에서 파괴된 미학적 상상력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상상력이 제거된 문화와 미학은 재개발 논리를 세련되게 정당화해주는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 전락한다.

 

브랜드 아파트의 유행 속에서도 미학화된 재개발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브랜드 아파트는 사실 원주민들의 삶을 뿌리 뽑는 강제 철거와 미학적 상상력이 배제된 막개발의 중심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도시적 삶의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주는 듯한 미래를 향한 희망과, 다른 한편으로 부동산 가격 상승이라는 현재의 희망을 동시에 제공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도시 재개발의 주역이 된다. 이 희망들의 결합은 사회적으로 정당화된 개발과 투기에 대한 열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축이 된다. 개발과 투기에 대한 사회적 용인은 재개발의 실질적 피해자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람들조차 재개발(혹은 뉴타운 건설)을 지지하게 하는 강력한 동인이 된다.

 

우리 사회가 조감도를 보는 방식
 
미학적 도시라는 세련된 개발 논리의 실질적 효과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보기에 좋은 것은 어두운 현실에 한줄기 빛이라도 던져주는듯한 제스쳐를 취하며 그것을 넘어선다. 미학과 생태를 개발 논리의 키워드로 내세우며 미학적 도시 개발의 원형을 만들어낸 것이 청계천 복원이었다. 그 청계천에서는 비가 오면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청계천을 둘러싼 인도와 도로에 쌓여 있던 온갖 도시오염물질들이 빗물에 쓸려 유입되기 때문이다. 비가 와서 물고기가 죽고 나면, 죽은 물고기는 조용히 치워지고 새로운 물고기들이 방류된다. 다음날 청계천에 나가보면 물고기는 여전히 그곳을 유영하고 있다. 도시에서 죽음은 이렇게 감춰지거나, 쉽게 잊혀진다. 바로 이것이 도시에서 보여지지 않는(혹은 보기에 좋지 않은) 개발의 어두운 측면이 감춰지는 방식이다.

 

보기에 좋은 것이나 보여지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 자체가 아니다. 보여지는 것은 대상을 ‘보는 방식’(way of seeing)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는 방식은 생물학적 시각의 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으로 공유되어 학습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상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사회적 관점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본다는 것 자체가 대상을 의미화 하는 실천인 것이다.

 

특히 근래에 들어 사회적으로 고유한 ‘보는 방식’은 더욱 중요해 지고 있다. 시각 자체가 사회적 소통의 기반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기반을 둔 텔레비전, 영화, 사진과 같은 매체나 미디어 아트, 시각 예술의 부흥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의 지위 등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알 수 있다. 나아가 전통적으로 소리에 기반을 둔 매체였던 전화와 같은 매체는 화려한 인터페이스와 함께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즐기고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각적 매체로 전환되고 있다. 좀 더 극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보여지는 대상은 이제 우리가 보는 방식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다.

 

1년 365일 공사중인 대한민국의 수많은 건설현장이나 유래없는 규모의 개발을 진행하는 뉴타운 계획을 보자. 그 공사현장이나 재개발 설명회를 가면 항상 보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조감도이다. 최근 도시민들은 바로 이 조감도를 보는 방식을 새롭게 익혀가고 있다. 조감도는 개발이 끝나고 난 이후 지역이나 건축물의 모양을 한눈에 보여주는 청사진이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아닌 새의 시점에서 그려진 것이며, 유토피아를 가시화 시킨 것이다. 그 조감도 속에는 풍요롭게 발전한 지역의 미래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새겨져 있다.

 

조감도는 공사현장과 재개발 설명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천에서 열린 세계 도시 축전에도, 서울 디자인 올림픽에도, 2010년 세계 디자인 수도로 지정된 서울시에도 있다. 조감도는 현재 있는 것을 그리지 않는다.(그것이 실제로 있다고 해도 새의 시점에서 그려진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람들이 “직접 인지할 수 없는 세상을 다양하게 전문화된 매체를 통해 보여지게끔 하는 것”이다. 조감도는 미래에 대해 그려진 것이지만, 스스로를 현재에 드러내며 현재보다 우위에 서려는 이미지이다. 조감도의 미래에 다가가기 위해 현재는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 되며,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견뎌야 하는 것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재개발은 도시민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많은 경우 원주민들의 삶을 파탄내고 있다. 그럼에도 뉴타운 재개발이 발표되면 수많은 주민들은 그것을 열렬히 지지한다. 그 지지자의 상당수는 재개발을 통해 아무런 직접적 이익도 얻지 못하고 심지어는 재개발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모순적으로만 보이는 이 상황 속에는 현대인이 가진 독특한 합리성이 발견된다. 한편으로는 눈앞에 놓인 물질적 이익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경제적 인간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높은 삶의 질을 위해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미학적 인간이 있다. 그러나 두 태도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것들은 인간의 삶은 문명 발달과 물질적 풍요 속에서만 질적으로 향상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두 태도가 공유하는 물질적 풍요라는 전제는 언제나 직접적인 물적 대상이 아니라, 추상화된 물질성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흔히 물신주의라고 이야기 하는 그것말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물신주의의 물신은 구체적인 물질이 아니라 비물질적 물질(혹은 물질의 비물질적 육체)을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를 향하도록 하는 자본의 욕망이다. 지금 소비해서 없애지 않고, 미래를 위해(혹은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다시 투자되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 아니던가. 때문에 물신의 대상으로서의 물질은 축적할 수 있되, 소비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요컨대 현대사회에서 개발에 대한 열정은 (그것이 경제적 태도이든, 미학적 태도이든) 물질적 풍요에 대한 열망을 전제로 하며, 나아가 자본의 욕망과 연결된다. 개발과 투기가 일상화된 시점에서 투기하는 시민들, 재개발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자신이 아닌 자본의 욕망을 내화한 자본화된 시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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