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사회에 대해

민주노총 혹은 남성들의 변명... 그리고 성폭력범 K교수

1. '사실' 그리고 '성폭행 미수'라는 언어

   불과 2,3일 전의 일이다. 민주노총 간부에의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고 알려진 것이.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민주노총은 "사실 관계에 대해 피해자 확인 및 민주노총의 공식적인 확인도 없이 보도된 내용은 전부 허위 사실"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입장 표명을 할 때 그들은 이 일을 '간부의 성폭행 미수 사건'이라고 지칭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언어들 속에는 가해자 (주로)남성의 자기 정당화 논리/변명들이 스며 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의 가해나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확실한 증거가 제시되면 그것은 하나의 사실로 인정받는다. 사건에는 사실을 뒷바침하는 물증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에서 물증이란 무엇인가. 성폭력 사건에서 물증이 제시된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것일까. 물증이 쉽게 제시될 수 없다는 것은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거기에는 물리적, 육체적 흔적이 아닌 정신적 상처가 기입된다. 민주노총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며 사용한 '사실', 혹은 '허위 사실'이라는 언어들 속에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남성들의 절대적 무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남성들의 무지가 만들어낸 폭력적 구조가 바로 가부장제이다. 가부장제는 타인에 대한 통제와 배제를 통해 유지되는 전형적인 남성적 향유의 산물이다. 민주노총은 자신들의 "공식적인 확인도 없이 보도된 내용"은 "허위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민주노총의 공식적인 확인(보통은 이것을 검열이라고 한다)도 없이 보도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탄원자의 목소리이다. 그들이 통제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탄원자 (주로)여성의 목소리이다. 

   '성폭행 미수'라는 언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왜 그것을 미수라고 표현하는가. 우선 그것은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사건에 대한 그들의 지칭이다. 그러나 방금 언급했듯 성폭력 문제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다. 때문에 이 사건은 계속 '미수'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서 '미수'는 남성적 권력이 한 여성을 대상으로 성공적으로 수행되지 못했음을 지칭하는 언어이다.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별 것아닌 사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공하지 못한 성폭력은 죄질도 가벼울 것이라는 논리가 숨어 있는듯 하다. 그러나 성적 수치심과 혐오감이 정신적 외상으로 각인되는 '과정'은 성폭력이 '결과'적으로 성공했는지 여부와는 필연적 관계를 갖지 않는다. 이미 상처받은 사람이 존재할 뿐이다. 

   설피보면 사실이나 미수라는 언어가 객관적, 중립적 기술 처럼 보일 수 있다. 사실 관계의 확인이나 미수라는 언어는 확인(성공)되지 않은 것들을 가리키는 법적 용어이다. 그 법적 용어 속에 객관적, 중립적 기술이라는 환상이 자리잡고 있다. 성폭력 문제는 법에 기입되어 있는 언어들이 결코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는 환상을 폭로한다. 오히려 그 언어들은 가부장적 질서의 표상체일 뿐이다. 성폭력 사건은 동등한 지위를 가진 두 개인 사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건이 발생하는 조직(혹은 사회)의 감성과 지성 자체가 가해자를 중심으로 체계화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폭력 사건에서 객관적, 중립적 입장은 존재하지 않으며,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하나의 윤리적 입장만이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변명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개관적-중립적 언어라는 환상의 외피를 통해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윤리적 입장을 배제하려는 가해자의 논리이다.

2. '언론보도=2차 가해'라는 변명

   민주노총은 또한 언론보도가 있자마자 '언론보도는 2차 가해'라고 주장하며 이 사건이 더 이상 공론화 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통의 성폭력 사건에서 사건의 공론화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진다. 탄원자에게 부과될 수 있는 타인들의 편견에 찬 시선이나 접근을 막고, 심리적 상처를 상기시킴으로써 탄원자에게 가해질 수 있는 또 다른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조직 안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2차 가해를 막기 위한 노력은 이런 목적 하에서 이루어진다. 2차 가해를 막기 위한 노력은 조직의 배려를 확인하고 탄원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언론보도=2차 가해'라는 주장은 조직 보존이라는 맥락에서 제기된 것으로, 오히려 탄원자의 상처를 인정하지 않고 이 사건 자체를 은폐 시키려는 반치유의 과정이며 2차 가해의 과정이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2차 가해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피해자가 공개를 원치 않는 성폭력 사건을 공개하는 행위도 2차 가해에 해당하지만, 성희롱 및 성폭력 발생시 사건을 방관하는 행위, 신고자의 신고를 방해하거나 위증하는 행위, 피해자에게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행위, 피해자에게 피해사실의 구체적인 진술을 강요하는 행위, 그리고 사건을 은폐 축소 시키려는 행위 이 모든 것들이 2차 가해가 되는 것이다. 

3. 개인책임이라는 변명

   이번 사건에서도 민주노총 일부에서는 개인책임론이 등장했다. 특정 조직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빠짐 없이 나오는 주장 중 하나가 성폭력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심할 경우에는 책임 추궁이 가해자가 아닌 탄원자에게로 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충격적인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의 범인을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는 예외적 개인으로 규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무크지 문화사회 3호, 최철웅의 글 참조).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사회는 성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적 안정감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것을 스캔들화 시키는 것은 이미 사회가 성폭력 문제에 극도로 둔감한 야만상태임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저지전략처럼 보인다. 사실 우리 사회가 성폭력의 야만상태임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회적 편견이 두려워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임을 감추는 일이 허다하고, 용기내어 성폭력 문제를 고발한 탄원자는 상처 투성이가 되기 쉽다. 법정에 가도 재판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며 끝나버리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 언론보도에 대한 입장 발표가 있던 2월 5일 오전 중앙대에서 제자에게 성폭력을 행하여 고소된 K교수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K교수는 사건이 있은 직후 탄원자에게 전화해 돈을 줄테니 합의하자고 하며 통장으로 돈을 입금했다가, 성폭력 사건이 죄를 입증하기 힘들다는 점과 자신의 권력이 학교에서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한 이후 입금한 돈을 지불중지시켰다. 이 사건의 진실은 누가봐도 명백한 것이었지만, 법정에서는 K교수에게 면죄부를 부여했다. K교수는 사건 직후 태도를 바꾼 이후 집요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비열한 사적 수단과 친분을 이용해 탄원자를 압박하기도 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학교와 사회의 무책임한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결코 어느 한 예외적 개인의 잘못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은 성폭력 행위를 묵인, 방치, 은폐해 온 단체나 조직 나아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 그것은 개인의 특수성이 아닌 조직과 사회의 (성)문화의 일부로 여겨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구성원들은 일정정도 문제의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때문에 성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한 노력들은 특정한 개인이 아닌 구성원 모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폭력의 과잉이라고? 과잉의 폭력이 아니고?

   언제부터인가 폭력의 문제가 도덕의 문제로 환원되어 가고 있다. 이번 민노당의 강기갑 의원이 벌인 ‘액션 활극’을 두고 말이 많다. 조선일보는 국회가 “폭력에 굴복”했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자유선진당의 이회창은 “이번 폭력사태를 야기한 행위자”인 강기갑 의원에 대해 “즉각 고발 등의 조치”를 취하여 “엄격한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기갑 의원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폭력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규탄하고 있다. 오늘도(1/9) 한나라당의 홍준표는 “민주당이 또 폭력으로 상임위를 틀어막겠다고 하면 국민들도 이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어떤 목표가 있더라도 수단이 정당하지 않으면, 특히 폭력이 그 수단이라면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언의 근저에는 폭력은 무조건 도덕적 해악이라는 판단이, 혹은 그러한 판단을 유도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좀 더 멀리 가서 (벌써 ‘작년’이라고 불러야 하는) 2008년에 있었던 촛불집회를 생각해보자. 생각지 못했던 많은 이슈들을 만들어낸 이 집회에서 별로 다루어지지 않은 중요한 쟁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폭력의 문제이다. 시종일관 비폭력을 외치며 정부에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려했다.(물론 집회 참가자와 경찰들의 잦은 충돌이 발생했지만, 이것이 촛불집회의 비폭력적 경향의 반증이 되지는 못한다) 집회 내부에서는 몇 번의 논쟁이 있었다. 물대포 앞에서, 명박산성 앞에서, 전경에게 구타당한 어느 시민 앞에서 말이다. 그러나 매번 논쟁은 폭력의 의미에 대한 성찰보다는 폭력의 도덕적 결함으로 결론지어졌다. 집회 참가자와 경찰의 충돌이 발생할 때, 누가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는가? 누가 더 많은 폭력을 행사했는가가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 대상이 된다. 정작 집회 참가자와 경찰 신분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폭력은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발생한 폭력보다 더 많은 폭력들이 보도 되고, 그 의미도 과잉되어 간다. 이 과잉된 이미지들을 통해 폭력은 그것이 가진 의미를 상실한다. 이 지점에서 타협이 불가능한 윤리의 잣대로 폭력을 재단하고 그 의미를 초월해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폭력은 언제나 바로잡아야 할 예외상태로 상정된다. 그것은 정상에서 벗어난 것이고, 포섭되지 않은 낯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상태, 즉 정상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지금의 상태(State, 국가/상태)가 온갖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면?

   폭력이 그 모순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면? 프로이센의 군사학자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고 이야기 했다. 아렌트는 이를 역전시켜 “정치는 전쟁의 연속”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에 정상 상태란 없고, 일상적인 예외상태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회나 정치의 안정적인 자기 기반이라는 것은 없고, 이 사회는 오직 예외적 수단, 체제 외적 강제력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때로)폭력이 드러내는 것은 정치의 일상적인 모순 상태(/국가)라는 금지된 실재의 영역이다.

   나는 지금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폭력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양산한다는 점에서 분명 해악이다. 그러나 그 중의 어떤 폭력은 맹목적으로 비난하기(과잉) 보다 그 폭력이 드러내는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종 언론을 통해 수십 년 간 매맞고 살던 아내가 특정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편을 공격했다는 (결과적으로 남편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는) 소식을 접하곤 한다. 누가, 쉽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그 아내에게 절대악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겠는가? 그 아내의 폭력은 공고화된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는 폭력은 아니었을까? 이런 일상 속의 폭력 이외에 정치적, 경제적 시스템에 매개된 구조적 폭력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노동자를 노동자로 영구히 호명하는 노동법들 속에 녹아 있는 폭력도 있다. 파업은 이러한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다른 방식의 폭력이다.(조르주 소렐에 찬양하는 폭력은 바로 자본주의적 구조에 균열을 내는 총파업이라는 대항폭력이었다.)

   폭력은, 악으로 낙인찍힐 수 없는, 보다 세밀하게 분석되어야할 현상이다. 예를 들어 비비오르카가 제시한 정치이하(infrapolitical)의 폭력과 정치상위(metapolitical)라는 폭력의 구분, 조나단 프리드먼이 제시한 수평적 분단화와 수직적 분극화라는 구분, 마틴 루터 킹의 적대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폭력, 사르트르나 파농의 적대와 치유로서의 폭력 등 폭력이라는 이름만으로 매도될 수 없는 수 많은 폭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폭력을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외치는 비폭력의 의미 역시 좀 더 세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비폭력은 언론을 통해 자신을 비극적인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발생하는 스펙타클이라는 정치적 계산 없이는 무의미한 희생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경우 비폭력은 무폭력의 의미로 쓰인다. 비폭력의 사상적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간디는 비폭력을 무폭력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간디에게 비폭력은 ‘직접행동’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피비린내나는 무기의 사용을 동반하는 운동보다도 훨씬 적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 혹은 그것이 발생하는 장소는 거부하거나 회피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해 해석해야 할 정치적 저항의 근원(적 장소)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강기갑 의원, 민주당, 촛불집회에서 폭력이 가진 의미를 초월해 악으로 낙인 찍는 행위야 말로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폭력을 탈정치화 시키는 사건들을 정치적으로 읽어내는 작업일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현실세계에 뜬 팝업창(지하철 광고)

현실세계에 뜬 팝업창

광고는 텔레비전이나 웹사이트 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 이지만 상점가에 있는 간판, 거리 게시판과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포스터, 플랜카드도 모두 광고다. 그것들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틈새에 파고들어 모든 균열들을 봉합한다. 도시속의 삶은 그렇게 여유를 잃어간다. 이 광고들이 지하로 스며들고 있다.

 

<노량진 전철역>

지하 공간은 순도 100% 인공물이다. 이 공간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만큼 순수한 자본주의적 욕망의 표상인 광고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넘쳐나는 광고에 길들여져 자극적인 것에 점점 둔감해진다. 둔감함이란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 증세이다. 반면 광고는 자신을 다른 것과 더욱 차이나는 것으로 전시하고자 한다. 그것들은 관심받고 싶어한다.

<서울역 지하철 내부>

몇 년 전부터 도시를 휩쓸고 다니는 ‘랩핑(Wrapping)'광고는 그러한 광고의 욕망을 잘 보여준다. 건물이든, 교통수단이든 가리지 않고 그것들을 포장해 버린다. 광고는 자신을 자극적인 것으로 제공하는 것에는 성공하지만,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때로, 혹은 자주 시각적,촉각적 불쾌를 유발함으로써 도시형 공해가 되어 버린다.

 

<지하철 랩핑 광고>

 

 

 

영화, 텔레비전, 인터넷과 같은 화면 속 세상이 인위적으로 구성된 가상의 공간임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이제 가상은 화면 밖으로 나가 현실 세계마저 덮어 버린다. 현실 세계는 가상에 의해 덮여 버리고, 또 하나의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가 된다.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는 현실세계를 포장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증식해나간다. 인터넷에서 팝업 창을 띄워 광고를 위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듯, 스크린 밖의 공간에서도 광고는 창을 띄우듯 자신의 서식지를 만들어간다.

 

<스크린 도어 광고>

몇해 전부터 서울의 몇몇 지하철역에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고 있다. 스크린 도어는 자살이나 사고 방지 등 안전상의 이유로 설치되고 있는 시설이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스크린 도어는 사고다발지역을 중심으로 설치되어야 한다. 하지만 스크린 도어가 가장 먼저 설치된 곳은 삼성역, 강남역, 교대역, 신도림역, 광화문역 등 광고를 보고 소비할 수 있는 계층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지역, 즉 광고가 직접 소비로 연결될 수 있는 지역이다. 스크린 도어가 한 창 설치되고 있을 즈음 한 신문에서는 “1~4호선 구간 중 최근 6년간 인명사고가 5건 이상 발생한 9개 역중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역은 한 곳도 없다”고 밝힌바 있다. 스크린도어는 광고 접근성이 뛰어나고, 호소력도 강하다. 역사 내,외부는 사람들이 이동하며 광고를 스쳐가는 공간인 반면 스크린 도어가 설치된 곳은 이동이 중지하는 멈춤의 공간이며, 시선이 머물 곳을 찾아 방황하는 - 사방이 막혀있어 외부의 풍경이 없는 - 공간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도어는 현실 공간에 띄어진 광고의 팝업창이다. ‘팝업차단’ 기능조차 없는 현실 세계에서 이 창들의 범람은 꽤나 당황스럽다. 

- 문화연대 문화정책 뉴스레터 '또다른' 9호 공간수단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촛불집회에 대한 몇 가지 단상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적어 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 단상들이 촛불시위의 정당성이나 필요성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하고 싶네요.


1.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모일 수 있을까?

- 정치적 의사 결정 방식의 문제 : 형식적 민주주의의 표류가 만들어낸 시민의식의 발로라는 의견도 있지요.

-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 해당하는, 가장 보편적인 먹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우리 정치사에서만 봐도 상당히 중요하고 민감한 정치적인 협상(갈등)들이 있었음에도 이토록 오랜 기간 동안 보편적인 지지를 받으며 확산되어 온 운동은 드물었던 것 같네요. 아무리 중요해도 그것은 정치의 영역이었고 (모두가 공유하는 방식의) 생활로 직접 체험되는 것은 아니었죠. 먹거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모두가 공유하는 생활로 침투하기 때문이겠죠.

-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광우병과 같은 자극적인 언어는 아니었지만 우리나라에서 농산물이나 소고기의 수입에 관한 이야기는 예전부터 계속 있었습니다. UR이니, WTO니, GATT니, FTA니 하는 이름들은 모두 먹거리와 관계된 쟁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광우병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먹거리의 문제는 농민들의 생존권 문제로 치환되어 쟁점화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농민분들은 무슨 협상 한 번 하고 나면 쌀이니 솥뚜껑이니 하는 것들을 여의도로 들고 날랐더랬죠. 이번 일 이전에는 이와 유사한 쟁점들이 모두의 먹거리가 아니라 일부 계층의 생존권 문제로 되어 버리곤 했죠. 이번에도 분명 다른 협상 때와 마찬가지로 축산농가의 생존권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에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이번 미국산 소고기 사태는 농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어 버렸죠. 이런 담론의 변화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예전에 여중생 장갑차 사건 때처럼 이번에도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 촛불집회 확산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모두를 대표하지는 않지만, 광장에서 들리던 여리지만 단단한 그 함성이 뉴스나 UCC 등을 통해 계속해서 유포되며 촛불집회가 가진 ‘순수함’의 기호가 되어 버린 것이죠. 여학생들이 하나의 정치적 기호로 작동할 때, 즉 협잡과 음모가 난무하는 정치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순수함의 기호가 정치성을 띄게 될 때, 그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감정적 울림이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과 고명하고 있는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촛불집회의 양상들

- 여학생들의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는 좋은 의미로, 예를 들어 촛불집회는 순수한 것이라는 의미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레이 초우가 원시적 열정이라고 불렀던 것이 촛불을 든 여학생들의 모습에서 발견되는것 같아요. 초우는 여성, 아이, 자연이라는 장소에서 발견되는 순수함(원시적 열정이라는 허구적 감상)이 감성을 자극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했죠. 유모차 부대(아이)와 여학생(아이+여성)들 그리고 먹거리(자연). 그 순수한 이미지가 전형적인 여성상이나 오리엔탈리즘(혹은 내부 식민지화)을 재생산하는 정치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거죠. 그리고 의미가 고정된 이미지는 다른 의미가 유희하며 개입할 여지를 남기지 않기 때문에 소통을 차단하게 됩니다. 아마도 가부장제에서 나타나는 아이나 여성과 관련된 강한 터부가 바로 이 소통의 불가능성에서 나오는듯 합니다. 가부장/아이 혹은 여성의 단절된 소통구조가 정부/시민의 단절된 소통구조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요?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촛불집회가 만약 여학생들의 이미지를 통해 그 정체성의 일부를 획득하고 있다면 그것에는 가부장제의 혐의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촛불집회는 과연 순수한가라는 문제도 생각해 볼만한 꺼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뭐 당연히 2MB가 말하는 배후세력이니 용공세력이니 하는 것을 말하는건 아니겠죠. 순수함이라는 것은 어떤 무목적성, 무의도성을 일컫는 것이거나 혹은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 이면의 의도가 없는, 오염되지 않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 말이니까요. 이런 식의 순수함은 극단적인 쇼비니즘에나 어울립니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는 파쇼가 아닐까요? 촛불집회가 의미 있는 것은 순수함이 아니라 그 많은 오염, 즉 불순에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떤 고결함이나 순수함을 요구하지 않기에 모두가 거부감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 열심히 운동하시던 분들이 요구하던 그 숨막히는 고결함이 광장에는 없다는 것이 촛불집회의 불순한 순수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군복 입은 참여자들에 관한 얘기도 빼놓을 수 없죠. 군대는 명분상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군복을 입은 이들은 집회에서 평화 시위를 유도하고 집회에 나온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군대가 진짜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군인들일 것입니다. 실제로 얼마나 멋지게 그 역할들을 하고 있습니까. 저도 집회에서 그들을 보니 든든하고 고맙고 그러더군요. 문제는 예비군들이 군복을 입고 집회에 등장한 시점이 경찰들의 집회 탄압이 거세지고, 경찰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을 준비해야 한다는 식의 논의가 인터넷에서 급속히 퍼져나가던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군복 입은 참여자들은 폭력을 행사하기 보다는 폭력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위대들이 겪해지지 않도록 방지하고, 결찰 폭력에 맞서서 시위대를 지킵니다. 그들은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에서 폭력의 흐름을 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경계란 언제나 위험천만한 곳입니다. 물들기 쉬운 곳이죠. 군복 입은 이들은 집회 시작 전부터 집회 장소의 한 구석에 모여 앉아 있다가 거리행진이 시작되면 제일 앞에 나와 평화 시위를 이끕니다. 일종의 사수대와 같은 역할이죠. 집회에서 사수대는 다들 잘 아시겠지만,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잠재적인 대항폭력(젓가락이나 꽃병)을 준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군복 입은 이들이 잠재적인 폭력을 준비 중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그들이 위치하는 장소(경계)는 잠재적인 폭력이 마련되어 있는 장소입니다. 그 장소 속에서 그들의 역할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죠. 병역거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군대란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폭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의 존재 자체를 반대합니다. 저는 군복 입은 참여자들이 아슬아슬해 보입니다. 그들 각자가 가진 개인적인 비폭력 의사와 무관하게 그들이 입은 옷과 그들이 위치한 장소에는 잠재적인 폭력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군복이 가진 의도치 않은 효과. 인터넷 뉴스에 나온 군복 입은 이들의 사진 및에 이런 댓글들이 있었죠. “자랑스런 민중의 지킴이 군복부대를 위해 미니스커트 부대를 꾸리자”, “오빠, 저 이쁘게 하고 나갈께요.”… 물론 소수의 댓글이지만 그 댓글을 보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네요.

- 인터넷 생중계라는 새로운 방식의 디지털 미디어 운동이 등장했습니다. 등장했다기 보다는 대중화 되었다거나 새로운 진지가 구축되었다고 말해야 하나...

이번에는 특히 진보신당 컬러TV, 아프리카TV, 오마이뉴스, 민중의 소리, 라디오21 등이 대대적으로 촛불집회 인터넷 생중계를 했죠. 게다가 인터넷 동호회 등에서 자체적으로 웹 방송을 통해 실시간 중계를 하기도 했습니다. 집회 참가자들은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참가하지 못한 이들은 생중계를 보며 토론 게시판이나 자신의 블로그, 경찰청이나 청와대 홈페이지, 조중동문 같은 언론사 홈페이지를 돌아다니며 사이버 시위를 했더랬죠. 아마 집회 생중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곳은 아프리카 TV였을 겁니다. 소규모 웹방송이 이번에 2500여개나 개설되었었다고 하네요.

관련글 => http://blog.jinbo.net/sparta/?pid=88

근데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프리카 TV 운영자측에서 불법집회 중계하지 말라는 메일이 웹방송을 하는 VJ들에게 왔었다고 합니다.

관련 기사 =>http://blog.daum.net/lalala-777/4333164 - 이 기사는 5월 25일 newsnviews에서 김혜영 기자가 쓴 기사인데 왠일인지 기사가 삭제되어 있는 상태네요. 일단 다른 블로그에 스크랩된 기사를 링크 시켰어요.

위 기사에 따르면 인터넷 생중계를 하는 한 VJ는 “인터넷 방송국 아프리카 TV 운영측으로부터 시위 현장을 중계하던 많은 VJ들에게 저작권, 불법집회 선동과 관련된 방송을 중계할 경우 아이디를 정지시키고, 베스트 VJ 자격을 박탈시키는 등의 불이익을 줄 것임을 알려왔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TV 측에서는 이번 생중계를 통해 엄청난 사이트 홍보가 됐을 텐데 이런 메일을 보냈다네요. 혹시 정부측의 압력이 있었던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거 같네요. 현재 다음의 아고라에서는 인터넷 생중계를 막지 말라는 서명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4696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