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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는 원래 정치다 : 용산 판결과 미디어법 판결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한다. 무슨 오이디푸스 신화에서처럼 신탁이라도 받았단 말인가. 이제 그 아들은 자신의 눈을 찌르고 사막으로 고행이라도 떠나야 한다는 말인가. 현대의 오이디푸스는 신탁 대신 법탁을 받고, 사막 대신 감옥으로 가야 한다. 얼추 오이디푸스 신화의 현대 버전 정도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고행을 떠나는데 반해 현대의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지만 지배 권력에 의해 고행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그래도 확실히 비극은 비극이다.

 

지난 달 28일에 있었던 용산 참사 관련 재판의 결과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재판에서 재판부는 이충연 용산4구역철대위원장 등 피고인 2명에게 6년형을 선고했고, 다른 피고인 5명에 대해서도 5년형을 선고했다. 농성 참여 정도가 가벼운 두 피고인은 각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결국 용산참사는 법적으로 모두 철거민들의 책임이 되었다. 철거민들이 같은 철거민 5명까지 모두 죽였단다. 선고 받은 9명 중에 아들이, 죽은 5명 중에 아버지가 있었다. 이 재판의 부당함이야 따로 이야기 할 필요 없겠다. 그런 이야기는 입만 아프다.

 

 

 

패륜을 양산하는 법

 

어떤 것은 숨기고, 어떤 것은 우겨서 법이 완성한 것이 바로 이 패륜의 시나리오이다. 이 나라의 법은 패륜을 양산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언젠가 대통령 ‘각하’께서 말씀하셨던 “법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발언은 이제 패륜을 양산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가 강화하고 싶다던 법규가 교통법규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 않은가. 그가 강화해온 법규들, 그러니까 국가의 안녕과 개발을 위한 법들, 이를테면 집시법, 언론법, 도시 정비법 같은 것들이 그것 아니던가. 이제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법이 패륜을 만든 것이 아니라 법 자체가 패륜이라고!

 

28일에 있었던 풍경 하나를 돌이켜보자. 재판장에 한양석 부장판사와 2명의 배석판사가 입정하며 재판이 시작된다. 그들은 피고들의 혐의를 조목조목 지적하고나서 피고인들의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법정이 시끄러워지고 피고인석에 있던 이충연, 김주환씨가 “이건 재판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대기실로 들어간다. 방청석에서는 한 방청객이 “정권의 나팔수”라고 재판장을 비난한다. 이에 재판장은 “지금부터 더 떠드는 사람은 구속”이라고 경고한다. 잠시 후 또 다른 방청객이 “이게 법치주의 국가냐”라고 외쳤고, 재판장은 방호원에게 “지금 말한 사람 구속”시키라고 지시한다. 그는 바로 감치된다.

 

그 방청객은 그냥 시끄러워서 감치된 것일까? 재판장은 왜 방청객들의 입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막으려 했을까? 혹시 방청객들의 말이 그냥 소음이 아니라 이 재판의 진실을, 법의 본질을 소름끼치도록 정확하게 꼬집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재판장은 그들의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어서 섭섭한게 아니다. 결코 표면으로 드러나서는 안되는 법의 신화적 기원을, 법의 비밀을, 그것도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발설한 것에서 그들은 모욕을 느낀다. 그래서 그것은 재판장에 대한 모욕이었으며, 사법권력에 대한 모욕이었고, 법 자체에 대한 모욕이었다.

 

반복되는 이야기이겠지만 한 가지 더 이야기 해보자. 헌법재판소가 미디어법 처리과정의 위법성을 인정하면서도, 가결된 결과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논의할 일이라며 판단을 유보했다.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권한과 자율성을 인정하고 결정적 판단을 국회에 양도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삼권분립에 입각한 결정이다. 확실히 어릴적 교과서에서 삼권분립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입법, 사법, 행정부가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어야 독재를 막고 민주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개념상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이번 판결은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치 않은 것인지 보여준 듯하다. 사소한데서 서로를 견제하되 정말 중요한 문제 앞에서는 놀라울 만큼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것이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그 세력들이 아니던가(베버가 말했듯이 전문가란 작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커다란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은 진정한 정치의 전문가들이다).

 

정치 활동은 입법, 사법, 행정부 사이이건 정당들 사이이건 그들의 견제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나 타협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로 여기에 현 정치체제의 핵심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그 갈등과 타협의 정치 행위 속에 민중은 없다. 정치란 그들만의 정치이다. 실제로 정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에 민중의 의견은 개입되지 않으며, 그들은 의미 없이 사라진다. 이런 정치체제에서 이루어지는 정치행위는 갈등과 타협을 통해 민중을 도매금으로 처리하는 일종의 거래이다. 즉, 정치는 갈등, 견제, 균형, 타협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일종의 거래인데, 문제는 민중이 없는 곳에서 (민중의 의지와 상관 없이)그들을 거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여기서 선거 제도가 그 무력함을 드러낸다. 선거를 통해 뽑힌 사람이 만들어낸 법이 나의 의사와, 민중의 의사와 무관하게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에는 민중의 의견을 대표하지 않는자를 대표자로 선출해야 하는 모순이 있다. 선거라는 것은 그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 나를 위치시키는 과정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소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은폐시키는 교묘한 장치에 불과하다.

 

 

지킬 수 없는 법이라면 대담하게 위반하라

 

용산 판결과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법의 준거점이 도덕, 윤리, 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정치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가 경제 영역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결국 법은 정치경제적 상황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용산 1심 재판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타인이 관리 중인 건물을 점거하고 경찰들에게 화염병을 던진 것은 국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동으로 법치국가에서 어떤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1) 타인이 관리 중인 건물에 대한 점거, 2) 경찰들에게 화염병을 던진 것은 법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유린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번역하면 법질서는 1) 부르주아지의 소유권과 2) 소유권을 보증하는 국가 폭력을 근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유권과 국가폭력을 부정하는 것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위인 것이다.

 

용산 판결이 현실 정치와 결탁한 법질서가 구성되는 근본원리의 내용을 드러내주는 것이라면, 미디어법 판결은 법의 일반 원리가 현실 정치를 경유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법 자체는 일반적인 것이지만, 구체적 사건은 개별적인 것이다. 일반성의 원리가 구체적 사건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재판이라는 매개 과정이 요청된다. 재판은 갈등하는 주체들이 경합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재판에서 갈등하는 주체들은 대등한 입장을 가지지 못한다. 갈등 주체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자원을 활용해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재판에서 갈등하는 주체들의 역학 관계는 이미 기존의 권력 관계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재판에는 참여 주체의 권력 관계뿐만 아니라 특수한 정치적 흐름, 즉 정세가 개입된다(물론 재판 참여 주체의 정치 권력과 정세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디어법은 10월 29일에 판결이 났다. 그 전날인 10월 28일은 재보궐선거가 있었고, 11월 1일에는 방송법 시행일이었다. 판결 자체뿐 아니라 판결이 난 날짜도 정치적인 고려가 다분해 보인다. 미디어법 판결이 29일에 남으로써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받을 정치적 타격은 최소화되고, 방송법은 차질 없이 시행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앞에서 언급한 용산 판결이 있었던 28일의 재판장 풍경으로 돌아가 피고인과 방청객들이 외쳤던 그 소리들을 들어보자. “이것은 재판이 아니다”라던 이추연 김주환씨의 외침, “이게 법치주의 국가냐”고 묻던 방청객의 외침 말이다. 정말 쿨~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재판이고, 법치주의 국가다. 내가 말하면 욕먹을 테니, 남이 한 이야기를 하나 인용하며 글을 끝맺도록 하겠다. 프로이트의 말이다.

 

“법과 규제들이 본래 신성하며, 따라서 우리가 거슬러서는 안되는 어떤 속성들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는 없으며, 종종 부족절하게 구성되어 우리의 정의감을 훼손하거나 혹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훼손시킬 것이라는 사실, 또 권위가 방만해질 때 지킬 만한 가치가 없는 법들을 교정하는 방법은 대담하게 위반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서 곧 우리를 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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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자동차 양산 계획, 청계천의 반복이 되지 않기를

전기자동차 양산 계획, 청계천의 반복이 되지 않기를

 

 

근대화의 경험은 인간의 감성에 일대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 특히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인간이 시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에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그러한 변화에는 전화, 영화, 기차, 엑스 레이(X-ray), 자전거 등과 함께 자동차의 발명이 크게 일조하였다. 무엇보다 그것은 속도를 추구했다. 1900년에 프랑스에는 약 3천대의 자동차가 있었고, 1913년에는 10만 대에 이르렀다. 1896년과 1900년 사이에 최소한 10종의 자동차 잡지가 발행되었으며, 1906년에 이미 시속 200Km를 넘어서는 자동차가 발명되었다.

 

 

얼마 후 미래파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된 마리네티의 선언이 이어졌다. 그는 새로운 과학기술에 미쳐 있었고, 그것만을 찬양했다. 그는 “우리는 기계와 협력하려 한다”고 강조하며, ‘새로운 속도의 미학’을 포고한다. “우리는 선언하노라, 새로운 미, 속도라는 미가 세계의 장려함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고. 보닛에 탄환처럼 질주하는 거대한 배기관을 장식한 경주용 자동차는 ‘사모트라키의 니케’보다 아름답다.”

 

 

그것은 근대화에 대한 찬양이었으며, 모든 속도 혹은 속도를 향한 열망에 대한 찬양이었다. 속도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결국 인간이 속도를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극대화된 속도에 속에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없게 되고, 급기야 속도는 인간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교통사고는 바로 이러한 속도에 대한 열망이 야기시킨 근대화의 산물이다. 교통사고는 지금 우리의 삶에서 더 이상 예외가 아닌 일상으로 존재한다. 어린아이를 등교시키는 부모의 입에서 나오는 “차 조심”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속도가 위협하는 삶의 일상화된 측면이다.

 

 

그럼에도 속도는 이미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으며, 거부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로 기능한다. 그것은 개별적 인간의 삶의 속도를 하나의 추상적 속도로 흡수한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나 직장으로 나갈 때, 지인과의 약속 장소로 향할 때, 명절이 되어 고향으로 가야할 때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자동차의 속도이다.

 

 

근대화를 통해 추동된 인간의 시공간적 경험의 변화, 그 중추에 각인된 속도에 대한 열망은 이제 익숙한 삶의 양식이 되어 버렸다. 그 변화의 계기이자, 속도에 대한 강박의 표상이 바로 자동차이다. 이 거대한 변환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자동차는 물질적 진보와 편의를 인간에게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 물질적 진보와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괄호 안에 넣어 버렸다. 괄호 안에 들어가 고려되지 않았던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환경이다.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는가?

 

1990년대 이후 근대화의 폐해로 환경오염과 파괴가 수 없이 언급되어 왔다. 자동차와 환경파괴의 관계는 이미 지겨울 정도로 논의되어 왔다. 서울의 경우 자동차로 인한 대기오염이 전체의 66.9%에 이를 정도이며,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10조원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지난달 22일 세계 1300여개 도시와 함께 서울에서도 열렸던 ‘차 없는 날’ 행사도 자동차와 환경오염의 연관성에 대한 고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같은 배경에서 전기자동차에 관련된 논의도 다양한 방식으로 활성화 되고 있다. 전기자동차는 기존 자동차가 가지고 있던 석유 에너지를 쓰지 않기 때문에, 극심한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 고갈이라는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 개발이 필요한 분야이다. 전기자동차는 기존 자동차가 가지고 있던 석유 에너지를 쓰지 않기 때문에, 극심한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 고갈이라는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 개발이 필요한 분야이다.

 

 

8일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지식경제부는 전기자동차산업 활성화 방안을 보고했다. 이 회의에서 당초 예상되어 있던 전기자동차 양산 시기를 2년 앞당기기로 했다고 한다. 여러 측면에서 실정을 서슴치 않는 정권이기에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기는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전기자동차는 디젤 엔진, 가솔린 엔진을 사용하는 오토사이클(등용사이클)방식의 자동차보다 먼저 고안 되었고,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상당히 상용화 되어 있었다. 자동차의 발전 초기부터 전기 자동차는 이미 널리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휘발유의 가격은 떨어지고, 내연기관의 대량생산체제가 구축되면서 휘발유 자동차가 전기자동차에 비해 싼 가격으로 보급되면서 휘발유자동차의 사용이 보편화 되게 된다.

1990년대 후반에도 전기자동차는 상용화 단계에 이르렀었다. 환경 오염문제의 대두와 기술발전에 기반해 제너럴 모터스(GM)사에서 전기자동차인 'EV1'을 개발해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 임대 형식으로 보급했었다. 이용자들은 ‘EV1’의 상용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며, 몇 가지 점만 보완한다면 지금 당장 쓰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EV1은 얼마후 GM에 의해 수거되어 폐기 처분되어 버렸다.

 

 

2006년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는가?(Who Killed the electric cars?)>는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상용화될 수 있을 정도로 개발된 전기자동차가 왜 갑자기 폐기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여러 전문가들의 인터뷰와 자료를 통해 'EV1'의 폐기에는 휘발유자동차의 수요를 유지해 석유를 지속적으로 판매하기 위한 거대 석유자본과, 내연기관 산업을 기간으로 하는 자동차 산업 자본 그리고 그들과 밀접하게 유착된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강하게 관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전기자동차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아직 소망에 불과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적 상황 때문에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자동차의 발전 초기부터 현재까지 전기자동차가 보편화되지 못했던 이유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상황 때문이라면, 이명박 정권의 전기자동차 양산 계획은 더욱 걱정스럽다.

 

 

8일 이명박 대통령은 “온 세계가 지금 자동차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앞으로 어떤 차들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치열한 경쟁체제에 들어섰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하며, “전기자동차 분야는 특히 원천기술을 만들어 가면서 변화되는 상황에 대응해야 하는 만큼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에 “정부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R&D 예산의 효과적인 배분을 통해 집중적인 지원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정권에게 전기 자동차 양산 계획은 에너지의 대안적 사용이나 환경오염 문제와는 관련 없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경쟁”과 “투자”의 대상일 뿐이라는 점이다. 단지 회의에서 한 말을 가지고 청계천을 다시 떠올리는 건 그저 나만의 오해일 뿐일까. ‘자연친화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환경’을 파괴하고 개발 자본에게 엄청난 이득을 안겨줬던 그 청계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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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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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고소가 보여주는 이명박 정권의 통치 원칙

절대군주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 박원순 고소가 보여주는 이명박 정권의 통치 원칙

  

사건의 시작은 이렇다. 지난 6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위클리 경향과 인터뷰를 가졌다. 여기서 그는 국정원의 민간 사찰 의혹을 제기했다. 올 여름을 휩쓴 중요한 사회적 이슈 중 하나는 이메일 압수수색, 인터넷 패킷 감청 등 국가 감시의 문제였다. 일정정도의 위기의식을 느낀 국가는 느닷없이 수개월이 지난 일을 들추어 박원순에게 고소장을 들이밀었다. 9월 15일 발부된 이 고소장에는 박 변호사가 “지난 6월 ‘위클리 경향’과의 인터뷰에서 ‘국정원이 민간사찰을 해 시민단체들의 사업이 무산된다’는 식의 허위발언을 해 국가 안보기관으로서의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적혀 있다. 그러니까 박원순은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고소장의 원고가 대한민국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복종하지 않는자에게 가해진 치졸한 복수

  

이명박 정권에 들어 강하게 나타난 정치적 특징 중 하나는 국가에 의한 시민사회의 지배를 공고히 하려 한다는 점이다. 지배란 기본적으로 타자를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굴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국가의 지배는 시민사회의 굴복과 짝을 이루고 있다.

 

시민사회의 복종은 자발적으로 혹은 순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배는 언제나 복종에의 혐오를 통제할 수 있는 토대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 복종에의 혐오를 통제하는 토대가 바로 폭력이다. 지배는 폭력 행사를 근본적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때로 국가의 지배는 직접적 폭력이 행사 되지 않을 때에도 무리 없이 이루어 지는듯 하지만, 사실 그 때 조차 그 지배의 저변에는 폭력이 가장 혹은 변형된 형태로 놓여 있다.

 

자발적 복종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복종이 지배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실제로 자발적 복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지배에 예속될 때 복종은 피지배자의 완전한 동의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폭력적으로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이 반복될 때 복종은 자발적인 것처럼 보여 진다.

 

문제는 그 선택조차 온전한 의미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선택이란 외부 조건의 간섭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복종으로부터의 탈피, 즉 자유를 선택한다는 것은 지배자의 폭력에 노출되어 자신의 삶을 훼손당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로 진입하는 것이다. (올해 용산에서 목격한 것, 그 잔혹함에 치를 떨며 확인한 것이 바로 이러한 사실이다.) 따라서 복종은 선택이 아니다.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그래서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자유라면, 최악의 상태로 치닫지 않기 위해 복종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자유를 선택할 수 없도록 하는 것, 어쩔 수 없이 복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치적 억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종 대신 자유를 선택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저항이라 부른다. 자유를 선택하는 저항은 폭로, 시위, 캠페인, 혁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저항은 집단적으로 행해지기도 하고, 개별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때 가해지는 폭력(억압)의 방식 또한 고문, 검열, 감시, 감금, 추방 등 다양하다. 박원순 고소 사건은 지배에 저항하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방식 중 하나이다. 이 사건은 국가라는 거대 조직이 한 개인을 상대로 행하는 가장 치졸한 방식의 폭력을 보여준다.

 

어찌보면 법적 고소라는 것은 공적 규칙을 통해 시비를 가리는 것이므로 형식적으로는 폭력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거꾸로 이야기 되어야 한다. 박원순 고소는 폭력을 원초적 법 사실로 정립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것은 국가가 (언듯 합리적인 것처럼 보여지는) 법을 매개로 한 개인의 삶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원고는 대한민국, 피고는 국민

  

사실 국가가 군대나 경찰을 동원해 수 많은 개인에게 폭력을 가해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특이한 점은 그것이 법을 매개로 했다는 점, 그리고 명예를 훼손 당한 주체가 국가 자신이라는 점이다. 고소장에 원고가 대한민국으로 되어 있다. 국가가 원고가 되어 한 개인을 민사재판으로 불러들인 일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시민단체 뿐 아니라 보수적인 법학자나 단체마저 국가를 원고로 내세운 이번 고소가 법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법적으로 국가는 추상적 실체이므로 인격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격권이 없는 실체가 어떻게 명예를 훼손당할 수 있겠는가.

 

‘추측컨대’ 국정원이나 국가는 바보가 아니다.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을 몰랐을리 없다. 그러한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번 고소를 추진했다면, 이것은 이 정권의 무지가 아니라 그들이 준거하고 있는 통치 원칙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 정권은 국가의 토대가 되는 시민사회를 보호하고 유지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지배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사회를 보호하고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과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파괴하더라도 자신들의 지배의 조건들을 마련하는 것을 정치적 목표로 두고 있는 것이다.

 

지배의 조건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 폭력이다. 현대 정치 제도는 폭력의 무차별적 사용을 제한한다. 현대 정치에서 폭력은 이미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종영이 정확히 지적했듯 공적 폭력이란 그것이 지배를 위해서 사용되는 한에서, 즉 이른바 공공성이라는 것이 사실상 지배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갖는 한에서는 궁극적으로 사적폭력으로 환원된다. 이데올로기적 외장을 벗겨내고 제도적 매개를 제거하고 나면, 지배는 적나라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용산참사에서 확인되었으며, 박원순 고소를 통해 다시 한 번 반복되었다.

 

이 정권이 고소장에서 대한민국을 원고로 내세웠을 때, 즉 대한민국을 명예훼손 당할 수 있는 인격권을 가진 존재로 상정했을 때, 그 인격권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이 정권의 지배 세력들이다. 이 정권은 대한민국이 지배 세력의 것이라는 절대군주 시대에나 있을 법한 사고 방식을 통치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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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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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 전시 : 도시 속에서 발견한 외부적 사유의 공간

도시 속에서 발견한 외부적 사유의 공간

 

 

 

       도시는 자연스레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주조된 어떤 것이다.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낡은 것들이 파괴되고, 새로운 것들이 형성되는 공간이다. 도시는 파괴와 생성의 과정 속에 존재한다. 어떤 것들은 생성을 위해 파괴되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그냥 파괴되기만 할 뿐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며 시간 속에 축적시킨 삶의 흔적들은 종종 도시가 가진 변화의 속도 속에 함몰된다.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문제는 바로 그 변화의 속도이다. 휘황찬란한 변화의 속도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저 도시의 속도에 적응해 나갈 뿐, 자신만의 속도를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2008년 작 '도시의 섬'       정수진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녀가 주목하는 지점은 자동차가 질주하는 도로의 한 복판에 있는 ‘안전지대’이다. 자동차가 침범하지 못하는 공간, 자동차를 피해 사람들이 잠시 머무르는 공간. 그 곳은 움직임의 속도가 멈추는 공간이며, 그렇기에 도시의 속도에 함몰되지 않는 공간이다. 때문에 그 곳은 속도의 외부에 놓인 성찰의 공간처럼 보인다. 그녀는 2008년 첫 개인전부터 <도시의 섬>이라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일관되게 도시 속도의 외부, 그곳의 성찰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그녀는 2009년 또 다시 <도시의 섬>을 주제로 개인전을 마련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같은 것들의 작은 변주만이 존재하는 지난 전시의 반복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그녀의 작품들은 진화하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묻고 있다. 안전지대, 그 곳은 진정으로 멈춤의 공간이며, 성찰의 공간인가? 여전히 그곳은 도시의 속도를 관조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멈춤과 성찰의 공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속도에도 저항할 수 없는 무의미의 공간이기도하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 그곳은 도시의 속도를 만들어내는 생산지로서 기능한다. 이 정지된 공간은 도시의 속도를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환영들을 만들어낸다.

 

      

        이 환영들은 나무에 장식된 현란한 조명들을 통해, 다양한 모양을 연출해내는 토피어리를 통해 재현된다. 이 토피어리들은 때로는 화목한 가정을, 때로는 해피엔딩을 예고하는 동화의 한 장면을, 때로는 도시 진보를 형상화한 상징들로 전시된다. 도시에서 사는 이들의 속도는 자신의 속도라기보다는 가정을 위해, 아직 오지 않은(未-來)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앞으로도 오지 않을 해피엔딩을 위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족, 민족, 회사 등 허구적 공동체의 앞날을 위해 적응하고 버텨야할 삶의 속도이다.

 

 

2009 년 작 '도시의섬'        어떤 사물도 다른 사물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 않는다. 도시가 파괴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개별자들이 독특하게 지니고 있는 시간의 질적 차이이다. 도시의 속도는 개별적 시간을 하나의 균일한 시간으로 흡수해버린다. 정수진의 작품에는 개별자들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 있다. 그녀는 도시의 속도가 물결치는 도로 한 복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 한다. 속도가 멈추는 곳에서, 즉 추상화된 속도의 텅 빈 결들 속에서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안전지대에서 그녀가 찾으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시간을 구성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곳에는 이미 도시의 속도를 긍정케 하는 신화적 형상들로 가득 차 있다. 정수진은 화려한 조명과 토피어리를 통해 그 신화적 형상들을 비판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비판 대상이 안전지대 자체가 아니라 안전지대를 채우고 있는 신화적 형상들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도시의 신화를 비판하면서도, 안전지대를 여전히 도시의 공적 공간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추상적 속도가 휩쓸고 다니는 그 도로의 한쪽 편에 있는 안전지대에 조그마한 호수와 정자를 그려 넣음으로써 삶의 여유를 찾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곳에는 어김없이 시속 60Km 이상을 금지하는 도로 표지판이 놓여 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천천히 혹은 자신의 속도대로 살아가라고 이야기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속삭임이기도 하다. 도시의 속도 속에서 살아오며 자신이 느꼈던 상실, 결여, 혼돈의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정수진은 젠체하는 조언자가 되기보다는 자기 삶의 고민들을 이야기하고 공유하는 작가가 되고자 한다. 그녀의 작품들이 다른 치기어린 작가들의 작품과 달리 허황되거나 과장되지 않고,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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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 2009 개인전 '도시의 섬' , 전시 서문

 

전시 : 2009. 9. 18 - 9. 30(수), 오전 11:00 - 오후 7:00

장소 : 문화일보 갤러리(충정로, 문화일보 사옥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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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과 정치의 이상한 만남

문제라는 단어에는 비정상, 예외, 비틀어짐과 같은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은 해결해야 할 것,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는 지향을 가진다. 때문에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즉 문제의 대상을 무엇으로 설정하는가는 해결이라는 지향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적합한 문제 대상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종종 듣는 용어 중에 여성문제라는 것이 있다. 이 용어에는 문제의 대상이 여성인 것과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들을 규정해온 남성적 시선이다. 여성문제라는 용어를 썼을 때 거기에는 문제의 핵심을 굴절시키는 어떤 전도의 논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2PM의 재범 ‘문제’ 혹은 재범 사태라고 명명된 사건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도 이와 유사한 전도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문제의 대상은 2PM의 재범이 아니다. 논란을 유발한 계기는 그이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논란의 핵심은 재범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형성된 담론의 지형 그리고 그런 담론이 형성된 사회적 맥락에 있다.

 

아이돌 가수는 일반적으로 젊은 층에 인기를 얻는 가수를 말한다. 그들은 가수지만 음악만이 아닌, 젊은 층이 자신들을 동경할 수 있는 갖가지 조건들을 갖추어야 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만들어진 이미지 속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하나의 우상이 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대중들을 위한 환상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대중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이미지에 자신들을 끼워 넣기도 한다. 그들이 만들어낸 환상은 언제나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선에서 구성되어야 한다. 문제는 한국적 상황에서 아이돌이 되기 위해 혹은 아이돌로서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부합해야 하는 대중의 기대라는 것이 정치적 맥락과 강하게 밀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이돌에게 부여된 정치적 임무


10여 년 전부터 아이돌은 한류열풍의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그들은 ‘한류 열풍의 중심에 선 아시아의 스타’이면서 ‘아시아를 정복한 대한의 건아’가 되었다. HOT나 NRG를 넘어 비, 원더걸스, 보아와 같은 스타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동방신기나 천상지희 같은 아이돌 그룹은 아시아 시장을 겨냥해 팀 이름도 한자로 만들었고, 기획 단계에서는 중국 현지에서 같이 활동할 현지인 멤버까지 고려되어 있었다. 슈퍼주니어에는 중국인 멤버(한경)가 한국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다.

 

아이돌 가수들은 한류열풍 속에서 연예 산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이 해야 할 역할을 넘어 국위를 선양하고, 국부를 증진시키는 역할까지 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연예 산업을 넘어 국가의 부와 명예를 드높여야 한다는 정치적 임무가 부여되었다. 아이돌에게 부여된 정치적 임무라는 상황 속에는 미묘한 괴리가 숨어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돌 중 상당수가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교포이거나 외국국적자이고, 그들이 하는 음악 역시 한국적인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탈국적화된 정체성을 가진 아이돌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정치적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러니까 아이돌 스스로가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있든 말든, 그들에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기여를 기대하는 상황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2PM의 재범에게 가해졌던 비난은 이러한 맥락과 결코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4년 전에 썼던 글이 문제의 계기가 되었지만, 그 이후에 비난의 강도와 폭은 확장되었다. 재범의 일과 관련된 글이나 그의 사과문에 달린 댓글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사과문 개제 이후에도 반성의 시간을 갖지 않고 한동안 활동을 지속한 그의 태도를 문제삼기도 했다. 그러나 보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한국인 비하 발언을 지속적으로 문제 삼았으며, 어떤 이들은 유승준의 군 회피로 인한 연예계 퇴출과 연관지어 미국 시민권과 군대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흐름에 편승해 <해럴드 경제>의 한 대중문화전문기자는 “교포출신 연예인에 대한 정체성 교육”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비난의 지점들은 이미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 비난들은 이제 연예인의 역할과 직업 윤리를 넘어 폐쇄적인 정치적 심급으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오리지널을 완성시키는 번역들의 경합


2PM의 재범은 비난을 못 이겨서든, 그 비난을 수긍하고 반성하기 위해서든 팀을 탈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 상황은 반전되어 그를 동정하는 누리꾼의 글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의 한국 비하를 문제삼던 연예 뉴스에서도 팀 탈퇴로 이끈 일부 누리꾼들을 꾸짖으며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관점을 바꾸었다. 이러한 변화는 재범의 팀 탈퇴와 출국이라는 결과가 보여준 임팩트의 사후 효과이기도 하지만, 그 관점 변화의 근거를 제시해준 것은 팬클럽과 이 사건을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의 귀결로 규정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한 비평가들이었다. 그들은 재범에게 강한 알리바이를 제공해 주었다. 죄가 발생한 장소에 재범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강한 알리바이들 말이다. 그 알리바이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글을 새롭게 번역하는 과정에서 마련되었다.

 

재범의 소속사였던 JYP 측과 2PM의 팬들은 재범의 글이 악의적으로 번역되고, 이용당했다며 글의 전문을 번역해서 새롭게 제시했다. 실질적인 글의 의미뿐 아니라, 맥락을 보고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부 비평가들은 글 속에서 재범이 하고자 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제대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그 글이 쓰여진 시점은 재범의 ‘치기 어렸던’, ‘철없었던’ 혹은 ‘건방졌던’ 과거였을 뿐이라고(그래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표현이 상당히 거칠긴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답답한 심정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좀 더 나아가 한 비평가는 재범의 글을 “저급한 상품문화에 포섭된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쓴 소리”로 번역하기도 했다.

 

어떤 측면에서 이번 사태는 ‘악의적 번역’(재범에 대한 비난의 근거)과 ‘호의적 번역’(재범의 알리바이) 사이의 갈등 과정으로 읽힐 수도 있다. 담론 속에서 제시된 재범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악의적 번역에서 호의적 번역으로 옮겨감으로써 나타나게 된 것이다.

 

악의적 번역에서 재범은 한국을 폄하하고 한국민을 모욕한 죄인이지만, 호의적 번역에서 그는 상품화된 대중문화에 쓴 소리를 하거나 철없었던 과거를 극복하고 어른이 된 사람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두 번역 모두 너무 적거나 너무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두 입장 모두 재범의 글이라는 오리지널에 대한 번역을 수행함으로써 올바른 번역과 그렇지 못한 번역의 대립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원본과 파생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다. 두 입장은 오리지널이 의미의 기원이며, 번역된 것은 기원에서 파생된 해석에 불과한 것이라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리지널 혹은 원본으로 알려진 것이 어떤 확고한 입장이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그 원본이 충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 그 원본이 어떤 의미의 결여를 가지고 있어서 번역 과정에서 파생된 것들의 보충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진 의미를 완성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번역들의 경합이 오히려 오리지널의 의미를 보충하고 결정하는 요인이라면 어떨까?

 

여기서 원본이나 오리지널(재범의 글)의 위치는 토착적인 것 혹은 국가로 소급되는 정치성이 차지한다. 그렇다면 오리지널의 결여를 문제시 하는 것은 국가로 소급되는 토착성(nativism) 자체가 의미의 불충분함과 결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국가로 소급되는 토착성 자체가 고유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담론의 형성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2PM의 재범은 더 이상 이 사태의 핵심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재범 문제라고 명명했을 때 이미 거기에는 이러한 담론이 발생시키는 효과의 핵심을 굴절시키는 전도의 논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논란이 계속되는 과정, 즉 재범을 둘러싼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 속에는 이미 재범은 없다. 거기에는 대신 미완의 국가 정체성과 토착성을 (때때로 그것에 대한 저항 혹은 비판까지도 흡수하면서) 완성시키는 무엇인가가 공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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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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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법 : 퇴보를 향한 위험한 도발

저작권법이 개정과 함께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저작권법은 ‘창조성과 같은 인간의 정신적 능력’과 ‘창조적 생산물을 향유하는 문화적 삶’을 구성하는 법적 규제의 하나이다. 인간의 정신적 능력과 문화적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위험해 보인다. 문화는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을 거치며 풍요로워져야 하는 무엇이다. 저작권법은, 특히 이번 개정 저작권법은 그것들을 통제하고 규제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무엇이 문제인지 한 번 살펴보자.

 

이번에 개정된 저작권법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일명 ‘인터넷 3진 아웃제’의 도입에 관한 것이다. 인터넷 3진 아웃제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음악 등의 저작물을 허락 없이 대량 유포하는 업로더의 계정이나 인터넷의 게시판을 저작권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3회 경고 후 최대 6개월까지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행정 권력의 과도함이라는 문제와 표현의 자유 침해의 문제 등을 지니고 있다.


개정 저작권법의 문제들


우선 개정 저작권법에 따르면 독립된 사법 영역을 행정 권력이 침해할 소지가 있다. 저작권과 관련된 분쟁은 침해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기 어렵기 때문에 법원에서도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개정 저작권법에 따르면 그것을 행정 권력이 판단한다는 것이다. 또한 현행법의 기준에 따르자면 저작권 침해 사례는 무수히 많기 때문에 전수 조사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행정 기관은 무수히 많은 침해 사례 중 일부를 자의적으로 골라내야 한다. 누군가는 법적 책임을 면제받고, 누구는 처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형평성의 문제를 낳는다. 그리고 저작권법 위반자나 게시판을 찾아낼 때 정치적 고려가 개입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저작권법에 따른 처벌 대상은 단순한 위반자나 게시판이 아니라, 행정 권력이 위반했다고 판단하는 이용자나 게시판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저작권을 위반했다고 판단된 게시판이 이용 정지될 경우 저작권 위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 역시 그 게시판을 이용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법에 저촉되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공간을 잃게 된다. 이를테면 ‘다음의 아고라’의 특정 게시판이나 디시인사이드의 어떤 갤러리를 행정 권력이 저작권법을 근거로 이용 정지 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이용자들에게 이것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일일 수 있다.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즉 자신의 표현물이 올라간 혹은 올릴 예정인 게시판이 정지될 수 있다는 위협 때문에 인터넷 이용자의 표현 행위 자체가 위축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위와는 아무 관계없이 자신이 올린 표현물이 일정 기간 동안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정 저작권법의 주 내용인 인터넷 3진 아웃제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이미 이 제도를 입법하려는 흐름이 있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 때문에 시민 사회 단체의 주도로 위헌소송이 제기되었고, 결국 프랑스 헌법위원회는 6월 초에 위헌 판정을 내렸다. 프랑스 헌법위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은 인권에 관한 문제”라고 명시하고 개인의 인터넷 접근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은 법원 판사의 판결을 통해서만 부여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인터넷 표현의 자유와 그것을 규제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최근 중국의 청소년 보호용 인터넷 차단 프로그램인 그린댐(Green Dam)을 비롯해 호주나 뉴질랜드, 영국, 스웨덴,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인터넷에 대한 규제 시도가 해외의 사례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그 제도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 나라에서 역시 인터넷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인터넷 규제 법규들은 해외의 사례와 차별되는 독특한 방식을 띠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한 게시판 자체를 일정 기간 동안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은 해외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개정 저작권법은 ‘헤비 업로더와 불법 복제물의 유통에 이용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상업적 이익을 제공하는 게시판을 규제’하는 것이며, ‘포털 등의 카페, 블로그, 미니 홈피 등은 정지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법안에는 ‘헤비 업로더’와 같은 개념 자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블로그나 활동 카페에 타인의 글이나 신문기사 등을 옮겨 놓는 행위는 모두 저작권법 위반에 해당한다. 행정 명령을 통해 블로그나 카페 등의 게시판도 정지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에서 산업으로


이러한 사실 이외에도 개정 저작권법에서는 눈에 띠는 변화를 한 가지 더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저작권법 1조(목적)의 한 문구이다. 우리나라 저작권법에서 1986년 1차 전부 개정 이후 2009년의 17차 개정 이전까지 1조는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었다. 이번 개정 이전에 저작권법 1조는 ‘저작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번 17차 개정에서는 1조의 ‘문화의 향상발전’이라는 문구가 ‘문화 및 관련 산업의 향상 발전’으로 바뀌었다.

 

이는 저작권법이 존재하는 실질적인 이유를 보여주는 증상적인 변화로 보인다. 어찌보면 이러한 변경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저작권법은 명목상 저작자와 저작 인접권자의 권리를 보호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지만, 저작권법을 통해 실제로 이익을 얻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해 본다면 이 법의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저작권법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 개인 창작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문화는 그러한 극소수의 개인들의 창작물을 통해서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하는 수많은 창작자들과 그들의 창작물을 공유하고 향유하는 이용자들, 그리고 창작물들을 활용해서 새롭게 해석하고 발견하는 패러디 작가들(겸 이용자들)등 모두의 노력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다. 저작권법은 그나마 있는 개인 창작자에게 돌아 가야할 권리마저 특정 기업이나 조직으로 전환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저작권을 포함한 지적재산권의 제도화와 함께 개별 창작자의 이득은 거대 기업의 이익으로 대체된다. 개별 창작자들은 종종 무시되거나 착취당한다. 기업이나 정부에 고용된 이들이 보호할만한 가치를 가진 창작물을 만들어냈을 때 그것은 해당 조직의 저작물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은 창작물이 유통되는 과정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상품이 유통과정에 들어가기 위해서 창작자는 판매자가 되어야 하는데 개별 창작자는 직접 판매 활동을 하는데 한계가 있다. 상품의 유통로를 거대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 창작자는 판매자가 된다 하여도 거대 기업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창작자는 자신의 생산물을 판매하기 위해서 유통로를 장악하고 있는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판매의 유통로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계약을 통해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의 일부 혹은 전부를 이전받는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창작물은 기업소유가 되고 창작물의 판매에 따른 보상은 기업으로 돌아간다. 창작자의 개성은 기업의 자본이 된다.

 

이처럼 저작권법은 개별 창작자를 보호하기 보다는 저작물이 탄생하는 산업 구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번 개정 저작권법 1조의 문구 개정은 저작권법의 실질적 목적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저작권법의 개정은 이러한 목적을 충실히 실행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문화 산업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말 그대로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들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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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작가>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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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망명 : 억압적 국가를 거부하는 정치적 사유의 매개

 

한국판 위키 백과에 따르면 사이버 망명은 2009년 6월 “검찰의 PD수첩 수사 관련 내용”이 발표되면서 불거진 용어이다. 지난 6월 검찰에 의해 PD수첩 작가의 이메일 내용이 공개되면서, 사생활 보호 및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국가 권력에 의해 심각하게 침해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 이후에 YTN 노조원들의 이메일이 압수수색 당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러한 불안감은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사실 이와 같은 사이버 검열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지난 4월 주경복 전 서울시교육감 후보에 대한 선거법 위반 수사에서 수사 대상자 100여명의 이메일 7년치가 압수수색 당한 바 있다. 사이버 망명은 이와 같은 국가 권력에 의한 인터넷 규제에 대한 저항의 한 방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인터넷 본인확인제, 통신비밀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저작권법 등 나날이 인터넷에 대한 국가 권력의 규제는 확대되고 있으며, 사이버 망명 역시 계속 확대되고 있다.


포섭과 탈주가 경합하는 사이버 공간


망명이란 정치적 탄압이나 종교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타국으로 도피하여 보호를 요청하는 행위를 말한다. 망명을 정의하는 데는 두 가지 핵심적 요소가 필요하다. 정치적 억압과 타국의 보호가 그것이다. 사이버 망명은 정치적 발화에 대한 국가 권력의 검열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외국의 서버로 인터넷 계정을 옮긴다는 점에서 하나의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망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 망명을 일반적인 망명의 하나로 정의하려 할 때 미묘한 괴리가 발생한다.

 

망명은 하나의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의 이동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망명은 민족국가의 경계를 문제시하는 정치적 질문을 내포한 행위이다. 사이버 공간이 물리적 한계, 즉 국경이 없는 공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사이버 세계에서 망명이란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공간이 민족국가라는 정치적 경계에 포섭되어 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사이버 공간에 대한 수많은 담론 속에서 그것은 대의제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곤 한다. 그런 식의 담론들은 사이버 공간의 형성과 관련된 정치경제적 기반을 무시하는 매체 결정론에 불과하다. 사이버 공간은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경합하는 갈등의 장소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인터넷의 기원인 아르파넷(ARPANET)은 미국방부의 첨단기술연구계획국(ARPA)에 의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은 1990년대 초 ‘정보고속도로 구상’을 발표하고 인터넷 민간화 이후의 지구적인 정보화 격랑을 예고했다. 이는 1993년 발표된 ‘국가정보하부구조(NII)구상 행동계획’과 1994년 발표된 ‘지구정보하부구조(GII) 구상’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정보고속도로 구상’ 발표 이후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고속도로라는 은유에 대한 것이다. 고속도로라는 이미지는 선형적 운동, 물리적 이동, 물질적 고체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사이버 공간의 다방향적 정보통신, 가상적 상호작용을 지시하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는 반론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국가에 의한 디지털 기간망의 증진이라는 목적만큼은 분명히 보여줄 뿐 아니라 인터넷의 발달이 새로운 매체환경을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기존 권력의 통제 아래에서, 그것들을 위하여 설계 및 추진되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인터넷은 9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전유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95년 이후 국가 주도의 통신 정책이 수립 된다. 정부는 한국통신의 글로벌경쟁력을 갖추게 한다는 명분과 초고속 정보통신사업의 조속한 추진을 목표로 ‘정보화촉진기본법’을 제정한다. 그리하여 95년에 PC통신 서비스에 인터넷접속 서비스(일명 PPP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이때 설립된 규격화된 인터넷 구조의 기반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요컨대 인터넷 구조의 상당 부분이 경제적, 그리고 그 경제 성장의 필수적 요소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조건을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은 결코 기존의 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곳도, 그것이 가진 내적 가능성이 자동적으로 실현되는 곳도 아니다. 인터넷의 발전을 통해 발생한 사이버 공간은 ‘기존의 정치경제적 권력’과 그 곳에 내재된 ‘권력으로부터의 도피 가능성’이 경합하는 곳이다. 적극적 저항 없이 사이버 공간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버 망명은 억압적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그리고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향해 가는 하나의 시도로 볼 수 있다.


사이버 망명, 국가 그리고 정체성


앞서 언급했듯이 망명이란 정치적 억압을 피해 타국의 보호를 요청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정치적 억압의 외부를 사유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세계에서 망명은 타국의 보호를 요청하고 허가를 기다리는 과정 없이 진행된다. 망명은 (인터넷 계정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과정을 따라 진행된다. 그것은 타국의 존재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망명객이 속했던 국가의 억압적 정치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이다. 사이버 망명은 다른 국가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기보다는 국가라는 억압적 정치체 자체를 거부하는, 즉 국가부재를 사유하는 한 방식이다.

 

국가부재를 상상하는 힘은 국가에 의해 버려진 이들이 보이는 정치에 대한 환멸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억압적 국가를 거부하는 힘이다. 국가의 외부에 있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 억압적 국가를 거부하는 이들이 귀환하는 곳은 자연상태가 아니라 다른 정치가 상상되는 공간이다. 물론 ‘거부’ 자체가 다른 정치에 대한 ‘생성’은 아니다. 그럼에도 ‘거부’는 기존의 억압적 정치를 부정함으로써, 다른 정치를 상상할 수 있는 ‘정치적 사유의 공간’을 배태하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사이버 망명이 거부를 통해 다른 정치를 상상하는 적극적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은 파업이나 혁명과 같이 일거에 모든 것을 바꿔버리는 집단적 힘이 아니다. 때문에 그것이 가진 희망의 계기는 조심스럽게 제기되어야 한다. 새로운 정치가 이미 존재한다거나, 이미 존재하는 대안적 정치에 다가감으로써 기존의 정치를 폐기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하지 말도록 하자. ‘거부’는 정치적 사유의 공간을 개시하는 하나의 형식일 뿐이다. 그것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 어떤 것도 직접 지시하지 않는다.

 

사이버 망명이 가진 저항의 가능성은 미시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정체성 게임과 관련되어 있다. 국가는 특정한 소속양식을 제공함으로써 국민 혹은 시민이라는 봉합된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정치체이다. 국가부재를 상상한다는 것은 이러한 소속양식을 거부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새로운 정치를 상상할 수 있는 ‘정치적 사유의 공간’은 국가가 제공하는 소속양식을 거부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낡은 이야기이지만, 현대적 의미의 사이버 망명의 문제를 거의 최초로 제기한 <공각기동대>를 떠올려보자. 그곳에는 사이버 세계로부터 유발된 정체성의 문제가 강하게 기입되어 있다. 공안 9과에 들어간 ‘인형사’는 정치적 망명을 요구한다. 사이버 세계에 떠도는 하나의 프로그램에 불과한 인형사는 과연 망명할 수 있는 ‘존재’인가. 그를 존재하는 실체로 만드는 그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인형사는 고정된 정체성을 필요로 했는가. 오히려 정체성을 버림으로써 사이버 세계에 존재하는 실체가 된 것은 아닌가. 그는 결코 고정된 정체성을 획득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낡은 정체성을 회복함으로써 뻔한 결론을 맺으려 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정체성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집착은 자신을 구속한다. 그것을 돌파하라”. 정체성, “그것은 자신을 제약”하는 것이다. <공각기동대>는 거부가 개시하는 정치적 사유의 공간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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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대학원 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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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망명 : 저항의 공간을 개시하는 작은 몸짓

일단 세 가지 사건을 이야기해 보자.

1. 4월 : 주경복 전 서울시교육감 후보에 대한 선거법 위반 수사에서 수사 대상자 100여명의 이메일 7년치가 압수수색 당했다.
2. 6월 : 쇠고기 광우병 관련 보도를 조사 중이던 검찰이 PD수첩 작가의 이메일 내용을 공개했다.
3. 7월 : YTN 노조원 20여명의 이메일이 압수수색 당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널리 알려진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이 널리 알려진 예외적 사례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민주당 박영선 의원실에서 내놓은 자료를 보면 올 상반기에 다음 한메일과 네이버 메일에 대한 압수수색이 3360건이나 있었다고 한다. 다른 포털까지 합산한다면 이 수치는 엄청나게 불어날 것이다. 나랏님께서 국민의 안전과 치안을 위해 이메일 몇 개 본거가지고 무슨 큰 문제가 생길까라고 깔보면 안된다. 인터넷 본인확인제를 비롯해 통신비밀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저작권법 등 인터넷에 대한 국가 권력의 규제가 무제한적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잉된 권력이 흘러 넘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망명을 시작했다. 일명 사이버 망명이 그것이다.

 

내친김에 한 가지 사건을 더 이야기해 보자. 얼마 전 구글은 유튜브 한국 사이트에서 우리나라의 인터넷 본인확인제를 거부한다고 밝혔다. 사실 구글이 한국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본인확인제를 거부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트위터 같은 마이크로 블로그의 확산 사례(지난 1월 트위터 방문자수는 1만 4천명이었던데 비해 6월 방문자수는 58만 7천명이었다. 이는 국내 마이크로 블로그인 미투데이 6월 방문자수가 12만명인것과 비교해도 엄청난 수치이다)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에 의한 인터넷 규제의 과잉과 함께 사이버 망명이 늘어나면서 외국계 인터넷 기업에 의한 국내 시장 잠식이 점점 증대하고 있다.

 

구글과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이 거대 자본과 인터넷 시장 잠식을 통해 국내 인터넷 업체를 인수합병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국내 인터넷 기업을 수호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사이버 망명의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이버 망명이라는 것이 단지 국내 자본에서 외국계 자본으로의 시장 이동만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없다. 거기에는 흥미로운 저항의 계기들이 숨어 있다.

 

인터넷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는 표준 선점이다. 표준을 선점하면 그 소프트웨어의 독점력도 강해지고, 시장 지배력이 급격히 강화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한글이나 마이크로 소프트 오피스 같은 것이다. 이런 소프트웨어들의 독점은 시장 독점외에도, 다른 프로그램과의 호환성을 차단하기 때문에 정보 독점의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독점 소프트웨어는 프로그램 소스 정보를 활용할 수 없도록 하는 지식 독점 체계에 기반한 상품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소스 공유를 통한 소프트웨어의 혁신적 발전을 가로막고 있기도 하다. 또한 한글이나 MS오피스는 소프트웨어 독점력 때문에 잠금효과가 강해서 어떤 측면에서는 그것들보다 더 편리하고 뛰어난 기능을 가진 오픈 소스에 기반을 둔 오픈오피스(open office)와 같은 소프트웨어의 사용을 가로막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사이버 망명이 발산하는 효과 중 하나는 이와 같은 독점 소프트웨어로부터의 탈주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가장 강력한 독점 소프트웨어 중 하나가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웹 브라우저인 인터넷 익스플로러(IE)인데, 사이버 망명이 활성화 되면서 웹 브라우저의 독점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가진 정보 독점과 악용 문제의 심각성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사이버 망명이 유행처럼 번져 나가고 있는 요즘 인터넷 익스플로러 사용 비중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아일랜드 웹분석 업체인 ‘스캣카운터’에 따르면 2009년 3분기 기준 한국 웹브라우저 점유율에서 모질라 재단의 파이어폭스가 8.5%, 구글의 크롬이 1.8%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국내 이용 비중은 90% 후반에 달했었던데 비해 현재는 87%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사용 비중이 여전히 상당히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점유율이 이렇게 떨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정치적 억압의 외부를 사유하는 사이버 망명

 

사이버 망명이 가진 더욱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정치적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망명은 정치적 탄압이나 종교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타국으로 도피하여 보호를 요청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이버 망명은 정치적 발화에 대한 국가 권력의 검열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외국의 서버로 인터넷 계정을 옮긴다는 점에서 하나의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망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 망명을 일반적인 망명의 하나로 정의하려 할 때 미묘한 괴리가 발생한다.

 

망명은 하나의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의 이동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망명은 민족국가의 경계를 문제시하는 정치적 질문을 내포한 행위이다. 사이버 공간이 물리적 한계, 즉 국경이 없는 공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사이버 세계에서 망명이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공간이 민족국가라는 정치적 경계에 포섭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인터넷은 국가적 프로젝트를 통해서 물리적 기반을 확립하고 발전해왔다. 자연스레 사이버 공간은 국가의 규제와 통제 속에서 형성되었고, 그 역할이 규정되어 왔다. 올해 개정된 저작권법에서 문화부 장관의 권한으로 특정 개인 혹은 게시판을 활동 정지 시킬 수 있게 된 것은 사이버 공간에 대한 국가 통제의 적절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제시한 세 가지 사례들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은 인터넷 규제가 상당히 정치적인 사안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이버 망명은 이와 같은 국가의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기 위한 방식으로 고안되었다. 따라서 사이버 망명은 국가의 정치적 억압의 외부를 사유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정치적 억압의 외부를 사유하는 것은 정치적 자유를 향한, 즉 폭넓은 의미에서 표현의 자유를 향한 몸짓이다. 자유란 저항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사회를 통제하는 금지, 규제, 권위, 법률과 같은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지 않고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없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사이버 망명이 나타난다면, 망명 후 망명객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가진 생각들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저항의 언어를 획득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는 일이다. 때문에 사이버 망명이라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정치적 자유를 향한 적극적 실천의 일환이 된다. 뿐만 아니라 사이버 망명은 망명객이 속한 국가의 억압적 정치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이다. 때문에 그것은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의 이동을 추구한다기보다는 억압적 국가의 외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정치를 요청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이버 망명은 시장 독점과 정보 독점 그리고 억압적 정치에 대한 저항을 동시에 보여주는 다층적인 문화 현상이다. 그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사이버 공간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거부’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 거부는 곧바로 대안적 정치경제시스템을 생산해 내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그것들을 사유할 수 있는 새로운 외부의 공간을 개시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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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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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법이 발병시킨 문화적 우울증

개정 저작권법이 시행된지 일주일여가 흘렀다. 막상 시행되고 나니 인터넷 3진 아웃제에 대한 논란도 잠잠해졌다. 이제 ‘창작물에 대한 이용자의 권리’와 ‘웹공간에서 표현의 자유’가 가혹하게 침해당하는 일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이에 대응해서 참여연대나 정보공유연대는 3진 아웃제의 위헌성을 문제 삼아 헌법소원을 준비 중에 있긴 하다) 물론 지금까지도 이용자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는 지나치게 많이 침해당해왔다. 개정 저작권법은 그 침해를 극대화 할 것이다. 개정 저작권법의 주 내용은 저작권을 침해하는 이들에 대한 처벌 규정을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저작권은 정보사회 혹은 지식기반경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없어서는 안될 경제적 장치로 인식되고 있다. 저작권은 창작자의 (경제적) 권리를 보장해 줌으로써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핵심 동력으로 취급된다. 우리 주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저작권을 둘러싼 논의는 창작자에 대한 경제적 보상과 그 방식에 집중되어 있다. 창작에 대한 경제적 보상은 창작의 유발동기가 되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문화를 즐기고 활성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며, 그것은 강력한 법적(처벌)장치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작권에 대한 강한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두 가지 축일 뿐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일종의 허구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은 간단하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저작권은 왜 저자의 권리(author's right)가 아니라 복제의 권리(copyright)인가?

저작물 혹은 창작물은 왜 그리고 어떻게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단속의 대상이 되었는가?

과연 특정인이 문화적 생산물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문화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가?

문화적 생산물을 함께 공유하고 향유하는 것이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저작물은 유일하고 특수한 개인의 온전한 창작물인가?

저작물의 독점적 소유권자로 상상되는 저자란 무엇인가?

저작권을 통해 실재로 경제적 이익을 얻는 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하나씩 곱씹어 본다면 저작권을 강화시켜온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물론 어떤 질문들은 쉽게 증명될 수 없고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만, 다른 어떤 질문들은 저작권의 역사나 현재의 상황에 대한 간단한 서술만으로도 쉽게 논증될 수 있다.



정보에 대한 반독점적 권리로서의 저작권


역사적으로 보면 초기의 저작권은 지식이나 정보를 배타적으로 사유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저작권은 15세기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등장했다. 그것은 1496년에 시행된 출판특허제를 그 제도적 효시로 해서 16세기 초에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저작권은 인쇄술의 발명과 연관되어 있다. 인쇄술이 발명됨에 따라 지식과 지식 창안자 사이의 분리가 이루어졌고, 지식은 창안자로부터 독립되어 남에게 양도할 수 있는 상업적 권리로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에 저작권 제도는 근대 인쇄혁명이라는 사회역사적 조건에서 생겨난 법률적 제도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저작권은 인쇄술의 발명으로 출판업이 발달하면서 넘쳐나는 출판물을 규제하기 위한 제도로 고안되었다.

 

근대적 의미의 저작권법은 1710년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이것이 앤 여왕법(Statute of Anne)이다. 앤 여왕법은 두 가지 의미에서 과거의 저작권법과 질적으로 다른 차별성을 지닌다. 하나는 저작권의 보호기간을 설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의 권리를 등장시킨 것이다. 앤 여왕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출판업자들은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사는 것은 집이나 땅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으므로 출판물에 대한 권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제한 없이 보장되었다. 따라서 출판업자들은 한 번 판매된 저작물의 권리가 아무리 오래되어도 그것을 시장에서 독점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앤 여왕법은 이러한 출판업자들의 독점적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 저작물에 대한 권리에 기간을 정했다.

 

그리고 앤 여왕법은 서문에서 ‘의심할 바 없는 재산을 가진 저자의 동의 없이는 어떤 저작물도 출판할 수 없다’고 명시함으로써 처음으로 저자의 권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저작권의 기간 한정이나 저자의 권리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출판업자들의 독점을 깨기 위한 의도적인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저자(author)라는 개념은 출판 독점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당시의 저작권은 엄밀히 말하면 ‘저자의 권리’(author-right)가 아니라 ‘복제의 권리’(copy-right 혹은 right to print)였다. 저자 개념 자체가 저자의 소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출판업자들의 독점적 복제권을 견제하기 위해 네거티브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초기의 저작권법은 반독점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의 권리를 명시함으로써 이제 타인의 소유물과 저자의 소유물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 그리고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해 졌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 진행된 ‘결정판’ 혹은 ‘전집’의 편집 열기라는 18세기의 사회적 배경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당시에 내가 쓴 글과 타인이 쓴 글을 구별하는 인용부호와 같은 문법적 규칙이 표준화되고 그것의 강제적 사용이 의무화된다. 현대사회에서 사용하는 표준화된 인용부호가 완성된 것이 바로 18세기 후반이다. 18세기 이전에도 인용부호와 같은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표현의 소유자를 규명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8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인용부호는 그 인용된 구절의 소유권이 타인에게 있다는 표시가 아니라 성서나 격언, 속담과 같이 특별히 신경을 써서 읽을 필요가 있음을 표시하는 기호에 불과했다.



저자 살리기 혹은 저자 죽이기


저자란 지식이나 정보가 특정한 개인에게 소유될 수 있다는 관념을 유지시키기 위한 (그러나 실제로는 저작권을 구조화 시키는 중심으로서 기능하는) 허구적 개념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적재산권을 통해 실질적인 이윤을 얻는 소유권자가 창작자로서의 개인에서 기업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크발(Ekbal, B)에 따르면 “지적재산권의 제도화와 함께 개인창작자의 이득은 거대 기업의 이익으로 대체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창작자는 지적재산으로부터 이익을 얻지 못한다. 독립된 발명가들은 종종 무시되거나 착취당한다. 기업이나 정부에 고용된 이들이 보호할만한 가치를 가진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해당 조직의 저작이나 특허가 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기업은 독창성과 영감을 가진 낭만적 저자라는 개념에서 자신들의 (일종의 갈취) 행위의 정당성을 찾고 있다. 정보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다면 기업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목격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업이 정보의 소유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적재산권의 성립근거가 되고 있는 ‘정보의 창작자가 생산물을 소유’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창작물이 기업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는 창작물의 자기 소유라는 이데올로기가 거부되어야 한다. 그리고 창작자가 창작물을 소유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부정되기 위해서는 창작물이 ‘생산자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창작물이 창작자로부터 분리되어야 ‘개인 생산자의 소유’라는 사실이 부정되고 소유권이 기업으로 이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 창작자의 소유가 부정되고 소유권이 기업으로 이전되는 과정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 하나는 ‘업무상 저작물(works made for hire)’이라는 형태로 기업이 개인이 생산한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통과정에서 계약을 통해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의 일부나 전부를 양도 받는 것이다.

 

먼저 업무상 저작물에 대해 살펴보자. 18세기 이후 확고하게 자리 잡은 ‘낭만적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창조적 업무에 종사하는 일개 노동자(creative worker)로 전락한다. 저작권법 내에는 ‘업무상 저작물’에 대한 규정이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작품을 창작한 사람은 개인일지라도 작품의 실질 소유자는 이들에게 임금을 지불한 기업이 된다. 이렇게 기업은 작품의 소유자, 즉 저자가 된다. 여기서 저작권자로서의 기업은 창작한 노동자들에게 일정액의 보상금을 주고 그 창작물을 양도받는 것이 아니라 고용주이기 때문에 그 권리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방송 사업자가 자신이 고용한 방송작가, 소속 배우, 소속 음악가 등 기타 인력과 설비를 투입하여 영상물을 만드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러한 경우 방송사업자는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영상저작물 작품은 물론이고 ‘사용된 어문저작물, 음악저작물, 실연 등에서의 권리’ 등 모든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게 된다. 이때 외부의 독립제작사를 활용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스스로 자체 제작한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에 방송사업자가 저작권자가 된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만들어진 영상저작물이 향후 다원적으로 활용될 때에도 개별 권리자의 권리는 주장될 수 없다. 더욱이 업무상 저작물에 대한 조항은 저작권법이 개정될수록 점차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정보의 실질적 소유권자가 개인에서 기업(법인)으로 옮겨 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유통과정에서 창작물의 소유권이 개인에서 기업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자. 상품이 유통과정에 들어가기 위해서 창작자는 판매자가 되어야 하는데 개별 창작자는 직접 판매 활동을 하는데 한계가 있다. 상품의 유통로를 거대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 창작자가 판매자가 된다 하여도 거대 기업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창작자는 자신의 생산물을 판매하기 위해서 유통로를 장악하고 있는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판매의 유통로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계약을 통해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의 일부 혹은 전부를 이전받는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창작물은 기업소유가 되고 창작물의 판매에 따른 보상은 기업으로 돌아간다. 창작자의 개성은 기업의 자본이 된다.


이처럼 앞서 제기된 질문들을 조금만 들여다본다면, 저작권을 둘러싼 논의가 얼마만큼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간단히 독점이나 보상과 같은 저작권의 경제적 측면만을 살펴보았지만, 그것의 정치적 측면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이에 대해서는 '저작권, 정치에 다가가기' 참조해도 될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 측면이든, 경제적 측면이든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저작권이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 협소한 의미의 정치 혹은 경제의 한 측면이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창조성과 같은 인간의 정신적 능력’과 ‘정신적 생산물을 공유하는 문화적 삶’ 그 자체라는 점이다. 저작권법은 우리의 문화적 삶을 치명적인 문화적 우울증에 빠뜨리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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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정치에 다가가기

 
이달 23일 시행되는 개정 저작권법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번 저작권법의 핵심은 일명 ‘인터넷 삼진 아웃제’라고 불리는 제도의 도입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음악 등의 저작물을 허락 없이 대량 유포하는 업로더의 계정이나 인터넷의 게시판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3회 경고 후 최대 6개월까지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사법부의 판단 없이 행정부가 죄를 판단하고 처벌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월권을 내포한 제도이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삼권분립이라는 원칙을 직접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과 관련된 분쟁은 침해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기 어렵기 때문에 법원에서도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행정권력이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규제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권력자의 시선으로 규제할 수도 있고, 거대 기업의 경우 각종 로비를 통해 행정명령을 무력화 시킬 위험도 있다. 때문에 인터넷 삼진 아웃제는 행정권력에 의한 인터넷 사업자와 이용자에 대한 일방적 통제가 확대될 위험성을 잉태한 제도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저작권법 개정안은 더욱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논란이 발생하는 지점도 바로 이 곳인데, 그것은 바로 표현의 자유라는 영역이다. 특히 인터넷이라는 영역에서 표현의 자유는 핵심적인 동력이 되는 만큼 문제를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이제 상식을 넘어 식상하고 진부한 것이라 표현될 만큼 기본적인 권리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 정부의 통치하에서는 역대 그 어느 정권보다도 심각하게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 (이 글에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는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를 모두 이야기 하긴 힘들다. 관심이 있다면 지난달 22일 문화연대를 비롯한 진보넷, 인권운동사랑방 등이 공동으로 발표한 <이명박 정부 표현의 자유 침해 실태보고> 기자회견문을 참조하라.)

 

물론 개정 저작권법에서 추진하고 있는 ‘인터넷 삼진아웃제’가 유독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기는 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에도 인터넷 삼진 아웃제(Three strike out policy 혹은 유럽권에서는 graduated response-누진대응) 입법을 추진 중이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이미 이 제도의 입법을 추진했었지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 때문에 시민 사회 단체의 주도로 위헌소송이 제기되었고, 결국 프랑스 헌법위원회는 지난달 10일 위헌 판정을 내렸다. 프랑스 헌법위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은 인권에 관한 문제”라고 명시하고 개인의 인터넷 접근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은 법원 판사의 판결을 통해서 부여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이와 관련된 일부 내용을 수정해서 이달 8일에 안건을 재상정 했고, 상원 의결을 통과했다. 수정된 내용은 인터넷 접속을 차단할 수 있는 권한을 신설되는 정부 전담기구인 아도피(Hadopi)에 두었던 것을 판사에게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처럼 인터넷 표현의 자유와 그것을 규제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최근 중국의 청소년 보호용 인터넷 차단 프로그램인 그린댐(Green Dam)을 비롯해 호주나 뉴질랜드, 영국, 스웨덴,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다.

 

해외의 사례에서 발견된다고 그 제도가 정당화를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인터넷 규제 법규들은 해외의 사례와 차별되는 독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인터넷 규제 시도가 저작권을 이용해 정치적 맥락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외국의 사례에서 발견되는 삼진 아웃제는 저작권을 어긴 인터넷 이용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개정저작권법은 이용자 삼진아웃뿐 아니라 게시물이 올라간 게시판까지도 삼진아웃 시키겠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로써 인터넷 상에서 적극적인 정치적 발화가 이루어지던 아프리카 TV나 아고라의 게시판을 활동 정지시킬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 다시 거대 언론사나 그것의 대리 역할을 하는 법무법인들이 시민 단체 등을 상대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는 행위에 대해 저작권 침해 배상 요구를 하고 있다. 신문 기사의 제목만을 노출시켜놓고 이를 클릭했을 때 해당 신문사 사이트로 이동하도록 링크를 거는 행위는 합법이지만, 기사를 스크랩하는 행위는 저작권법 위반이기 때문이다. 스크랩은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토론을 유도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일반적 행위이지만, 그 자체를 불법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특히나 기사 스크랩에 따른 저작권 침해 배상 요구는 재정이 취약한 시민단체를 표적으로 삼아 그 단체를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악용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저작권법의 목적은 창작자에게 창작물에 대한 일정한 보상을 부여함으로써 창작 활동을 활성화 시키고 나아가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데에 있다. 창작 활동이란 표현의 자유를 기반으로 삼지 않으면 결코 활성화 될 수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시행되고 있는, 혹은 앞으로 시행될 저작권법은 창작 활동의 기반이 되는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저해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상황에서 악용될 소지를 가지고 있다. 지금 연출되고 있는 것은 법을 만든 정부가 자신이 만든 법의 원래 목적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테러범도 피해가는 저작권법의 힘


정보를 제3자가 사용한다고 해서 아이디어나 정보의 창작자 또는 보유자가 가진 지적재산은 양적으로 줄어들거나 그 효용이 감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아이디어와 정보를 이용할수록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후생과 이익은 커진다. 특히 인터넷은 정보를 유통시키는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정보의 가치를 증진시켰다. 인터넷의 힘이 가진 긍정성은 타인이 정보에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정보는 소유가 아닌 공유를 통해 가치를 증진시키며, 정보기술의 혁신은 공유 문화를 확산 시킬 수 있는 기술적 배경이 된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과 내가 사과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서로 교환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나와 당신은 각각 하나의 사과를 가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과 내가 아이디어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서로 교환 한다면 우리는 두 개의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역시 “내게서 어떤 생각을 전달받는 사람은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지만, 그로 인해 나의 지식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는 내 촛불에서 자기 초에 불을 붙여 간 사람은 빛을 얻게 되지만, 그로 인해 내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고 말한다.

 

버나드 쇼나 제퍼슨의 말은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 결코 지식 혹은 그것의 사용에 대한 독점이 아니라 공유와 나눔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저작권법은 이런 의미에서 문화 발전에 대한 기여라는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저작권법은 창작물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끊임없이 권리자에게 귀속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창작물에 대한 권리가 창작자가 아닌 그 권리를 사들이거나 양도받는 기업에 귀속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창작자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다. 창작자는 자신의 창작물을 유통시키기 위해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 기업에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의 일부 혹은 전부를 해당 기업에 (계약을 통해) 양도해야하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작권의 왜곡된 법 체계보다 더욱 위험해 보이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저작권이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영역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저작권법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잘못 악용될 경우 극도로 위험할 수 있다. 유나바머로 알려진 카진스키(Theodore John Kaczynski)의 사례에서 이러한 위험성을 확인할 수 있다.

 

유나바머는 대학과 공항을 중심으로 폭탄테러를 자행한 테러리스트이다. 유나바머는 1995년 테러를 중단하는 조건으로 유력지에 과학문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과학기술문명비판논문 게재를 요구했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지에 그의 논문이 실렸다. 이것이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제목을 가진 유나바머 선언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선언문의 각주 16번에는 “만약 저작권법이 문제가 되어 게재가 불가능하다면 주16을 다음 문장으로 바꿔주기 바란다”는 구절이 나온다. 유나바머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16차례에 걸친 폭탄테러를 행한 현대 사회의 가장 위협적인 테러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폭탄테러라는 강력한 무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저작권법 때문에 자기 글이 실리지 못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선언문에서 그는 자신의 테러를 하나의 혁명이라고 말하며 “혁명의 목표는 정부의 전복이 아니라 현존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테크놀로지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대사회를 병들게 한 것은 각종 테크놀로지라고 비판하는 극단적인 기술혐오주의자였고, 주된 테러 대상도 대학에서 테크놀로지를 연구하는 학자였다. 문제는 그의 공격 대상인 각종 테크놀로지가 자신이 존중하는 저작권이나 특허와 같은 지적재산권을 통해 보호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96년 체포 당시 그는 산골 오두막집에서 전기와 수도도 없이 살고 있었다. 그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현대문명을 등진 채 살고 있을 정도로 테크놀로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정작 그것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지적재산권을 문제 삼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처럼 저작권과 같은 지적재산권은 인간의 의식 영역에 침투해 내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유나바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 내면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저작권의 위력이다. 앞서 지적했듯 저작권법의 강화는 창조성과 같은 (협소한 의미의) 문화적 퇴보를 야기시킬뿐 아니라 특정 정치적 맥락에서 이용될 경우 법적 감시와 통제 그리고 처벌을 통해 정치적 개인들이 가진 비판의 언어를 탈각시키는 기재로도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즉 정치적 맥락에서 기능하고 있는 저작권법 집행 및 개정의 방향은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하나의 증상처럼 보인다. 이제 저작권법은 단순한 하나의 규제가 아닌 듯하다. 그것은 민중의 정치적 삶의 방식을 강제적으로, 그러나 내면 깊숙이 변화시키는 정치적 매개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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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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