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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재산기본법, 그 위험한 상상력

지난 16일 정부에서는 지식재산기본법(안)을 입법 예고 했다. 이 법은 특허, 상표, 저작권 등으로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관리되던 지적재산의 영역을 포괄하여 관리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법이 제정되고 나면 지적재산과 관련된 “타 법률의 재,개정시 이법에서 제시하고 있는 목적과 기본이념”에 준거해야 한다.(법안 제 6조) 정부에서 제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 법은 “지식재산 중심의 국가경쟁력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세계적 흐름을 반영함으로써 지식재산강국 실현을 위한 정책적 추동력 및 상징성을 뒷받침”하는데 의의를 둔 법이다. 즉 이것은 지식기반 경제를 체계적으로 재구조화하려는 정책적 시도의 일환인 것이다.

지식기반 경제와 관련된 담론은 이미 수도 없이 많은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 등이 자본 축적의 기반이 된다는 생각은 극히 최근에 발생한 관념 체계이다. 그럼에도 이 관념 체계는 무서운 속도로 일상의 영역까지 퍼져나갔으며, 이제 경제에 대해 말하는 누구에게나 이것은 상식이 되었다.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담론의 일상적 지평까지 확장되어 보편화 된 것이다. 이는 하나의 말의 모듬으로써의 담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경제 활동에서 주어지는 특정한 상황에 대처하고 판단하는 합리성의 준거로 기능한다. 경제적 현실이 이 담론을 매개로 재구축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담론은 김영삼 정권이 영화 <쥬라기 공원>을 현대자동차 매출과 비교할 때 이미 시작되었으며, 외환위기를 거치며 기존의 자본 축적 체계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 형태로 자리잡았다. 물론 지식기반 경제와 관련된 담론은 우리 사회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탈산업사회론이나 정보사회론과 같이 서구사회에서 시작된 학술적 논의나 미국식 구조조정 모델을 경제 개혁 모델로 제시하는 경영학의 논의를 비롯해, IMF, OECD, WTO 등의 국제 기구가 제시한 경제 행로 등을 통해 예비되고 있었다.

서동진은 이와 같은 경제적 담론의 변화는 단순히 더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으로 축소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시장의 상품 가격부터 기업의 자산과 투자가치에 대한 평가와 노동주체의 경제적인 활동을 가치화하고 보상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영역의 변동을 촉발시키며, “매우 세부적인 담론들과 그것과 연결된 테크놀로지들을 통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식기반 경제에서 유행하는 ‘기업가정신’을 둘러싼 캠페인은 이 담론이 만들어낸 경제 주체 형성의 세부 테크놀로지 중 하나이다. 그것은 ‘경영 마인드’나 ‘벤처 정신’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여기서 단적인 문제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이 기업가 정신과 같은 것이 기업과 직장 안에 존재하는 권력 관계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사와 부하, 감독자와 노동자, 경영자와 사원처럼 위계화된 형식적 구분을 초월해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업의 경영자”라는 주장인데, 이런 주장은 “기존에 노사관계라는 이름으로 자본과 노동 사이에 존재하던 대립 관계가 불가항력적으로 표현되던 것을 넘어서려는 경영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이 사례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이 새로운 경제 담론은 착취나 계급 불평등이 제거된 경제 분석을 단순한 사회적 사실로 환원해 버리고 있다. 또한 지식 기반 경제라는 경제적 가상은 그것이 유지되기 위해 요청되는 수많은 물질 노동의 사회적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다시 지식재산기본법(안)으로 돌아가보자. 이 법은 지금 지적한 것처럼 지식기반 경제라는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경제적 가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보도자료에서 이 법안의 제정이유를 직접 거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법 제정안에서도 기존의 ‘지적재산’으로 불리던 관련 법의 용어들을 모두 ‘지식재산’으로 교체할 것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부칙 2조 1항부터 20조까지) 그 동안 지적재산으로 불리던 법률 용어들을 애써 하나씩 거론하며 ‘지식’재산으로 바꾸는 것은 그 동안 논의 되어 왔던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에서 자신의 정당성의 근거를 찾고 싶어 하는 노력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추상적인 수준의 문제 이외에 다른 문제도 있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은 법 제정안에서 이 법의 목적을 제시하고 있는 1조의 내용이다. 법안에 따르면 이 법의 목적은 “관련 산업의 육성 및 문화, 예술의 진흥”에 있다. 일반적인 내용처럼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는 작년에 개정된 저작권법의 영향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저작권법에서 1986년 1차 전부 개정 이후 2009년의 17차 개정 이전까지 1조(목적)는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었다. 작년 저작권법 개정 이전에 저작권법 1조는 ‘저작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던 것이 작년 개정을 통해 1조의 ‘문화의 향상발전’이라는 문구가 ‘문화 및 관련 산업의 향상 발전’으로 바뀌었다. 이는 저작권법이 존재하는 실질적인 이유를 보여주는 증상적인 변화로 보인다.

실제로 저작권법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 개인 창작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문화는 그러한 극소수의 개인들의 창작물을 통해서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하는 수많은 창작자들과 그들의 창작물을 공유하고 향유하는 이용자들, 그리고 창작물들을 활용해서 새롭게 해석하고 발견하는 패러디 작가들(겸 이용자들)등 모두의 노력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다. 저작권법은 그나마 있는 개인 창작자에게 돌아 가야할 권리마저 ‘산업 육성’이라는 명목하에 특정 기업이나 조직으로 전환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재산기본법의 1조(목적) 역시 이러한 변화의 자장 안에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문제 삼을 수 있는 내용은 지적재산권자의 권리‘만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이 법안에는 “지식재산이 권리로서 신속, 정확하게 확정되고 효과적으로 보호될 수 있도록 필요한 시책을 수립, 추진”하고 “지식재산권 보호를 위한 집행 활동이 충실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침해행위에 대한 대응방안을 마련, 시행”하기 위해 집행을 강화하는 내용만 채워져 있다. 상식적으로 이 법안이 목적대로 문화와 예술의 진흥을 추구한다면, 즉 지적 창작물이 그 가치를 극대화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공유하고 향유하는 이용자의 권리도 함께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법안 어디에도 이용자의 권리나 향유권을 진작시키기 위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다시 이 법안이 문화와 예술의 진흥과는 관계없이, 소위 문화 ‘산업’만을 위한 법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우리 삶에서 경제적 가치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의 유일한 가치라거나, 나아가 그것만을 위해 다른 가치들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법안은 그렇게 주장하는 듯하다. 지적인 생산물에 관한 법률이 일반적인 재산권과 다른 지점은 명확하다. 법은 단순히 하나의 규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을 구조짓는 것이다. 특히 지적인 생산물과 관련된 법률은 우리의 창조적 능력과 문화적 삶을 구조짓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 가치로 완전히 환원될 수도 그렇게 되어서도 안되는 어떤 것이다. 지식재산기본법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혹은 과연 이런식으로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근본적으로 되물어야 할 시점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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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다시, ‘파랑새’와 ‘외톨이야’ : 표절과 저작권 침해


 

와이낫의 ‘파랑새’와 씨엔블루의 ‘외톨이야’ 사이의 표절 논쟁이 한창 지난 지금, 다시, 표절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당시 격한 논쟁이 오고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이제 사태는 법정으로 옮겨졌다. 1년 이상이 소요되는 긴 싸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대중적 관심이 사그라든 시점에, 정보공유연대의 주최로 4월 8일에 표절을 주제로 한 조그만 세미나(이달의 토크: 창작과 표절 그 미묘한 지점)가 진행되었다. 한물 지나간 주제로 뒷북이나 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리는 치열했던 논쟁을 차분히 되짚어 보며, 표절문제에서 핵심적이지만 정작 논쟁 속에서는 누락되었었던 어떤 것들을 드러내고 이야기 하는 자리였다.

 

지난달 와이낫은 ‘외톨이야’의 작곡가를 상대로 저작권침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하는 소송을 걸었다. 소송을 제기하며 와이낫의 리더 주몽은 소송이 최선의 수단은 아니었지만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말한바 있다. 이달의 토크에서 그는 표절을 방치하는, 혹은 어떤 측면에서는 구조적으로 그것을 조장하는 음악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문제제기의 방식에서 소송이 최선의 수단이 아니었다고 말할 때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표절과 저작권 침해가 완전히 일치 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음악계의 구조적 병폐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음악계에 여러 측면에서 경종을 울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표절을 막기 위한 해결책에 대한 논의에서는 쉽게 저작권 침해 방지 정책으로 귀결되곤 했다. 과연 저작권 침해 방지가 표절을 막는 최선의 길이고, 유일한 길일까? 사실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의 저작권이 저작권자의 권리를 강화 시키는 방식으로 개정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번 지적되어 왔다. 거기에는 이용자의 향유권은 거의 고려되어 있지 않다. 저작권의 유용성을 옹호하는 이들이 저작권법 1조를 거론하며 그것이 문화의 향상 발전(지난번 개정에서 문화와 관련 ‘산업’의 향상 발전으로 문구가 수정되었다)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여도, 그 세부 내용에서는 그 목적을 부정할만한 수 많은 악소조항으로 가득차 있다. 대중음악계의 유명작곡가들의 표절 관행에 문제제기를 하기 위한 소송이 저작권 강화로 환원된다면, 역설적으로 그 결과는 유명작곡가들(만)의 이익을 더 확실히 보장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버릴 것이다. 따라서 표절을 저작권 침해로 동일시 한다거나, 표절 방지를 저작권 강화로 환원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사실 표절과 저작권 침해는 개념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보호기간이 만료된 저작물이나 공공영역(public domain)에 있는 표현물, 그리고 공정이용에 해당하는 경우 저작권 침해는 인정되지 않는다. 반면 표절에는 그런 예외가 전혀 없다. 표절에는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의 표현물이 타인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절은 단지 타인의 창작물을 흉내내거나 도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타인의 창작물이 처음부터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때문에 표절에서는 타인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다.

 

또한 저작물이 저작권자의 동의하에 이용된다거나 이용 후에 문제가 발생할 때 저작권자의 용인이 있다면 그것의 이용이 법적으로 정당화 되는 반면, 표절에는 원 창작자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표절은 타인의 창작물에 있는 오리지널리티 자체를 부정하는 한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때문에 표절자는 원 창작물을 도용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창작자는 창작물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 말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는 침묵해야 하며,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 말할 (저항의) 언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창작은 원래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창작은 모방과 참조의 계기가 새겨져 있다. 모방과 참조를 통한 훈련과 그것들의 축적이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조금 모방하면 창작이 되고, 많이 모방하면 표절이 되는 것처럼, 즉 창조와 표절의 경계는 모호한 것이기 때문에, 창작자를 함부로 표절자로 매도해서는 안되고, 설사 그가 표절자로 판명이 난다고 해도 그를 쉽게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외톨이야’의 작곡가중 한명인 김도훈은 이러한 논리에 근거해서 자신이 표절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가 제기한 주장 중 하나는 와이낫의 ‘파랑새’가 박상민이나 컨츄리꼬꼬의 노래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외톨이야’가 표절이면 ‘파랑새’도 표절이며, ‘파랑새’가 표절이 아니라면 ‘외톨이야’도 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모방이나 유사한 음악적 요소들은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차용되거나 이용되었다고 해서 표절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표절은 단순한 모방이나 저작물 침해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표절에는 타인에 대한 부정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권력이 각인되어 있다. 표절 문제에서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또 하나! 표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작권법이 가진 문제에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저작권법은 여전히 문화의 향상 발전이나 이용자의 향유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반하는 것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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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 폭력의 양상들

얼마 전 <무법자>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화에서 다뤄지는 소재가 흥미롭다. 묻지마 살인, 혹은 좀 더 그럴듯하게는 현실불만형 우발범죄가 그것이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어떤 폭력의 양상들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폭력은 두 가지 계기를 가지는데, 하나는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비열한 수단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의 위계를 가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묻지마 살인은 이 두가지 모두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실행되는 것도 아니며, 권력의 위계 속에서 수직적으로 행사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목적을 상실한 폭력이며, 수직적이기 보다는 수평적으로 발현되는 폭력처럼 보인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수많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학교폭력이나 성폭력처럼 규정적인 폭력이 있는가 하면, ‘나는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라거나 ‘너의 말은 너무 폭력적이야’라고 할 때처럼 추상적인 수준의 폭력도 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행사되는 물리적 폭력이 있는가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노동 사이에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도 있고, 동일자의 언설 속에서 타자를 배재하는 상징적 폭력도 있다. 이것들을 모두 똑같은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폭력은 다양한 층위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사용되는 용례 속에는 상처, 말소, 파괴, 위해와 같은 것들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다.

 

우리는 여기서 최근에 논란을 일으켰던 폭력의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김길태 사건말이다. 잔혹한 폭력의 가해자였던 그가 경찰에 붙잡혔고, 사형과 관련된 언설들이 흘러나왔다. 사형은 폭력에 대응하여 도입된 또 하나의 폭력이다. 한 라디오 방송에서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은 “사형제가 주는 범죄예방 효과, 과학적인 인과관계가 꼭 증명된다고 할 수 없지만 범죄예방 효과하고는 또 관계없이 흉악한 범죄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벌이 주어져야 한다는 징벌응보의 관점”에서 사형제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폭력에 대응하는 폭력이라는 논리는 칼 슈미트가 언급한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평화주의자들은 인간을 말살시키는 전쟁에 반대하는 궁극적인 전쟁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 어떤 전쟁보다 강렬하고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 전쟁은 단순히 상대방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힘의 우위를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상대방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멸시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하의 존재로(즉 괴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이 전쟁에서 적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형은 한 인간에게 가하는 물리적 위해임과 동시에 그의 인간성 자체를 말소시키는 행위이다. 그는 인간 이하의 존재, 즉 괴물이 되어 법의 바깥으로 추방당한다. 법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이처럼 가장 잔혹한 형태의 폭력이 숨어 있다.

 

잠깐 다르게 질문 해보자. 폭력, 그것은 언제나 항상 부정적인 것인가, 때문에 폐기되어야 하 것인가? 대항폭력, 대안폭력이라는 언어 속에는 우리가 구출해야 하는 어떤 종류의 폭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억압에 맞선 피억압자의 폭력은 역사의 한 축을 구성해 왔다. 그것은 때로는 독립운동이라고, 또 때로는 파업이라고, 또 때로는 시민불복종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폭력과 억압에 저항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폭력이 똑같은 폭력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대안적인 새로운 개념을 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개념적으로 분리될 수 있을지라도 많은 경우 현상적으로는 결합되어 있다.

 

폭력은 언제나 선정적이며, 흥행력 있는 뉴스거리를 제공해 준다. 사람들이 잠재적으로 폭력적이어서, 인간의 본성은 잔인한 악함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혹시 거기에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금기에 대한 도전과 위반이나 억압적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열망혹은 억압적이고 비참한 현실에 대한 폭로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규정할 수는 없다. 전자를 부정하고 후자를 옹호할 근거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사형제 합헌 결정이 있고난 이후의 여론조사에서 사형제 유지를 옹호하는 여론의 확산이 사형제 자체에 대한 옹호인지, 김길태 사건 등이 이슈화되고 난 이후에 나타난 잔인한 폭력에 대한 거부의 발현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현실불만형 우발범죄는 정말 어떤 권력의 위계도, 목적도 없는 폭력일까? 그들의 불만이 형성되는 지점은 바로 현실이다. 현실의 비참함 속에서 그들이 가지게 되는 심적 동요를 불만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는 지점이 현실이라는 것, 그리고 쌓여가는 불만을 분출할 통로를 현실의 틀 안에서 찾지 못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심각한 폭력을 가하는 개인들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문제삼고 있는 지점은 이러한 우발범죄가 극히 드문 예외가 아니라 사회적 범죄의 한 유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개인의 정신 이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 항상 위기라고 호명되는 경제적 상황과 파국이라는 말이 어울릴법한 정치적 현실이 놓여 있다. 그 안에서 현실은 점점 비참해 지고 있으며, 그 비참한 상태에 놓은 개인들을 보호해줄 사회적 안전망은 급속히 파괴되고 있다.

 

현실불만형 우발범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 폭력이 ‘그’ 비참한 현실을 만든 권력자들이 아니라 아무런 경제적 자원도, 정치적 권력도 없는 자들을 향한다는 점이다. 폭력의 대상이 선택될 때, 가해자가 대상을 선택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어떠한 의도도 목적도 갖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런 의도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정의될 때, 그 폭력이 내포한 적대의 전선은 완전히 은폐되어 버린다. 그러나 폭력이 발생할 때, 그 대상이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며, 때로 방향전환을 통해 다른 희생물로 대체되기도 한다. 르네 지라르는 특정한 희생물이 선택되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 가해자가 끔찍한 보복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직시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우발범죄의 모호성이 아니라, 그것이 발생하는 원인과 폭력의 대상이 대체되는 매커니즘이며, 그 모호함이 은폐하는 적나라한 적대의 선이다. (사회적인 현상으로 등장할 때) 이 폭력은 희생물에 대한 폭력일뿐아니라, 파국으로 치닫는 현실에 대한 폭로이자 어떤 경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출구가 없는 사회적 모순의 축적이라는 현실에 대한 폭로이자 경고 말이다. 분출구가 없다는 것은 무슨말인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권력 없는 자들이 개입해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선거이다. 그러나 수많은 선거를 해왔지만, 삶은 더 팍팍해져 간다. 답답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합법한 유일한 통로인 선거는 이제 더 이상 현실의 축적된 모순을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닌 것 같다.

 

선거는 합법적이라는 이유로 항상 현실 개혁의 최선의 수단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온 현실은 어떤가. 그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권력자들을 재승인해 자신들을 착취하게 하는 괴이한 재생산의 통로였다. 우리 사회는 소통, 대화, 토론, 연대, 합의, 통합 등을 민주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다. 툭하면 여기저기서 이제 대화가 필요하다거나, 분열이 아닌 통합이 사회적 목표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댄다. 마치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화와 소통을 통해 완전한 합의나 통합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합의란 언제나 적대적인 다른 의견에 대한 묵살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내세우는 대화와 소통, 통합이라는 사회적 가치는 다름 자체를 억압하는 정치적 기능을 수행한다. 선거는 이 불일치를 다수결이라는 아주 경제적인 장치로 은폐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어쩌면 선거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권리를 박탈시키는, 어찌보면 우리 사회의 가장 정교한 폭력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어떤 폭력들은 이와 같은 장치들이 가진 억압적 기능을 다시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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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담비 흉내 UCC 저작권 침해 불인정 판결의 허와 실

지난해 5살짜리 아이가 손담비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올린 블로그 게시물이 게시 중단 조치를 당한 사건이 있었다. 동영상을 올린 당사자는 게시 중단 조치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사)음악저작권협회와 (주)엔에이치엔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이번 달 18일 원고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이용자의 향유권을 일부 인정했다는 점 때문에 환영할만한 조치로 평가되고있다. 판결이 난 다음날 참여연대는 논평을 내어 부당한 삭제 요청에 대해 세계 최초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이라는 점과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규제들을 개선할 여지를 남겼다는 점을 들며 이번 판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을 무턱대고 환영할 수만은 없다.


이번 판결은 결과만 본다면 이용자의 향유권을 보장하는 당연한 조치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 판결을 이끌어내는 논리(과정)를 들여다보면 이 당연한 권리가 법의 영역에서는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 권리로 여겨지는지, 나아가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권리가 얼마나 누리기 힘든 것인지가 드러난다.


법원은 이번 사건을 “기본권 주체의 표현의 자유 및 문화․예술의 자유라는 기본권이 상대방 기본권 주체의 저작재산권이라는 기본권과 충돌하는 상황”, 즉 저작물에 대한 생산자의 소유권과 이용자의 향유권 사이의 충돌하는 상황으로 규정하며, 이러한 충돌이 발생할 경우 “저작자와 이용자의 권리의 균형 및 조화를 도모”하고 있는 저작권법을 통해 “조화롭게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저작권법이 “여러 조문에 걸쳐 저작재산권의 제한규정을 두어 저작물을 자유이용할 수 있는 경우를 명문화” 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같은 사건의 조화로운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 저작권법에서는 보도·비평·교육·연구를 위한 목적 하에서만 저작물에 대한 인용이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법원은 “인용저작물이 피인용저작물을 대체할 수 있어 피인용저작물의 시장가치를 훼손”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용이 이뤄져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법원은 문제가 된 게시물이 “원고의 딸의 귀엽고 깜찍한 행동에 대한 기록과 감상, 대중문화가 어린 아이에게 미친 영향 등에 대한 비평 등을 담아 이 사건 게시물을 작성하고 공개한 것으로서 이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며, “사건 저작물의 시장가치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시장수요를 대체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만한 여지가 없고, 오히려 이 사건 저작물의 인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기여한다고 볼 수도 있는 점”을 들어 원고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다시 말해, 문제의 게시물이 비평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저작물의 시장가치를 훼손하지 않기 때문에 저작권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보면 꽤나 관대한 판결처럼 보인다. 그러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 이 판결에서 핵심이 된 것은 비평과 시장가치라는 두 요소이다. 비평에 대해 살펴보자. 문제가 된 게시물에는 아이의 엄마가 가요프로그램도 보지 않는 아이가 이 노래를 어디서 보고 들은 것인지 궁금하다는 글 한 줄이 담겨 있다. 법원은 이 한 줄의 글을 인용하며 “대중문화가 어린아이에게 미친 영향 등에 대한 비평”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그것에 비평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 엄마의 의문이 간단하지만 비평이라 부를 만한 요소가 담겨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만약 그 한 줄의 글이 없었다면 이 게시물은 비평이 아닌 것이 되며, 정당한 목적에 의한 인용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게시물이 ‘비평 글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적인 효력을 가지는 보도·비평·교육·연구라는 범주의 글(혹은 다른 매체를 통한 표현물)들이 뚜렷한 척도를 가지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법원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사건의 계기가 된 게시물이 (법원이 판결문에서 강조했던) “비전문가”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는 점과 그 게시물이 가진 일상적 성격을 고려해 본다면 저작권법에서 규제하고 있는 게시물의 범위가 얼마나 자의적으로 판단될 수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비평의 기준이 자의적인 것이라면, 따라서 그것이 엄격한 법적 척도가 되지 못한다면 이번 판결의 결정적 근거가 된 것은 시장가치의 훼손 여부에 있을 것이다. 문제가 된 게시물은 손담비가 부른 노래가 발생시키리라 예상되는 수익에 결정적인 손실을 가져다 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작권법을 위반하지 않은 게시물이 된 것이다. 이처럼 판결문을 조금만 들여다본다면 이번 사건이 결코 생산자의 저작재산권과 이용자의 향유권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용자의 권리는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으며, 단지 (자본주의 사회를 성립시키고 유지케 하는 법적 근간인) ‘재산권이 침해되었는가 아닌가’가 문제의 핵심에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번 판결은 이용자의 향유권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확장하기 위한 판결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결과론일 뿐이다. 판결의 결과보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은 그 결과를 이끌어내는 법적 논리(과정)이다. 그 논리 속에는 공유되어야할 문화적 산물들을 하나의 상품으로 전유해 나가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합리성은 법의 이름으로 개개인의 사고 속에 자리잡는다. 각 개인들은 그 합리성 속에서 판단하고 행위하게 된다. 특정한 행위의 근거가 되는 합리성이 시장가치만을 척도로 삼아 형성될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 가치를 판단의 최우선 척도로 놓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변형을 가하며 풍성해지는 문화적 영토를 파괴하는 비합리적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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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미디어센터를 다시 시민에게!

 

 

교육과 언론은 MB정부가 가장 탐욕스럽게 집착하는 영역일 것이다. 그것들은 그 탐욕스러운 집착 때문에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져가고 있다. 교육과 언론에 대한 집착은 MB정부의 통치 원칙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육과 언론은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고 전파하는 가장 대표적인 장치이다. 국가가 이것들을 장악했을 때 사라지는 것은 비판이라는 독특한 영역이다.

 

비판이란 소수의 평론가들이 전문적인 소견을 가지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가진 차이를 드러내는 일상적 실천이다. 때문에 비판은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합의하는 소통의 기반이 된다. 비판없는 사회란 소통없는 사회이며, 소통없는 사회에서 행해지는 정치란 독재에 불과하다.

비판과 소통의 필요하다니! 사실 하나마나한 뻔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뻔한이야기를 반복하게 하는 사태가 눈앞에서 매일 벌어진다. 너무 노골적이고, 유치하고, 치사해서 눈을 감아버리는게 차라리 속편한 그런 사태들 말이다. 그런데 요즘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은 직접적인 삶과 너무 맞닿아 있어서 그럴 수도 없다.

 

영상미디어센터를 둘러싸고 발생한 문제는 최근에 벌어진 일 중 가장 황당하고 노골적인 사건이다. 영진위는 작년 초에 독립영화전용관과 미디어센터를 공모제로 전환해 사업자를 선정하겠다고 밝혔다. 사실 이 공모제라는 것이 기존의 운영주체들을 내쫓고 새로운 운영주체들을 내세우겠다는 노골적인 의사표시였다. 이에 따라 독립영화전용관의 운영은 ‘한국다양성발전협의회’가, 영상미디어센터 운영은 ‘시민영상문화기구’가 맡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달 영진위와의 계약이 끝나는 서울아트시네마도 공모제 전환에 따른 운영진 교체가 예상된다.

 

뭐 실력있는 운영자가 등장해서 더 잘 운영된다면 별문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그리 간단치 않아 보인다. 공모를 통해 운영주체를 선정하는 과정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운영주체를 교체하려면 기존의 운영 방식에서 문제가 되는 지점이 명확히 지적되어야 하고, 새로 선정된 주체가 과거의 운영주체보다 뛰어나다는 점도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다양성발전협의회’는 지난해 11월 13일 설립되었고, ‘시민영상문화기구’는 미디어센터 사업운영자가 재공모 되기 바로 직전인 올해 1월 6일에 설립되었다. 이 단체들은 독립영화전용관과 영상미디어센터를 더 잘 운영할 수 있으리라는 근거가 될만한 아무런 실적도 없는 것이다.

 

이들이 어떻게 정부 기관의 공모에서 선정될 수 있었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게다가 새롭게 사업자로 선정된 단체들은 친정부 성향을 지닌 보수단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시민영상문화기구를 이끄는 김종국은 문화계 대표 보수단체인 문화미래포럼의 사무국장이다. 현재 영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희문 역시 이 단체에서 주요멤버이다. 직접적인 공모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이념적 편향의 문제가 공모 과정에 개입했을 가능성은 높은듯하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27일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에서 영진위에 보낸 공개질의서에 따르면 ‘시민영상문화기구’는 영상미디어센터 운영 스탭을 채용 공고해놓은 상태로, 채용 확정일이 2월 3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시민영상문화기구가 공식적으로 운영을 시작하는 것이 2월 1일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다. 새로 사업을 맡아 진행할 때 초기의 혼란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혼란을 막기 위해 미리 스탭을 모집하고 준비를 해야 하는 것도 당연한 조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진위에서는 ‘시민영상문화기구’를 사업운영자로 선정하며, 그 선정 이유중 하나 로 “영상미디어센터를 운영할 사무국 구성원의 전공분야(영화영상예술학,촬영전공예술전문석사,한국영화아카데미)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어 교육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운영 스탭도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사무국 구성원들에 대한 평가가 가능했을까.

 

독립영화 전용관이나 영상미디어센터 그리고 시네마테크는 영화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영진위 주도로 만들어진 사업이 아니다. 그것들은 독립영화 진영의 오랜 운동의 성과였다. 사업자 재선정은 그 오랜 노력들을 일거에 없애버리는 것이다. 단순히 오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서 안타깝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운동을 해왔다는 것은 독립영화나 미디어센터에 대해 그만큼 고민하고 그 고민을 실질적인 방식으로 전환하려고 노력 해왔다는 뜻이다. 사업자 재선정을 통해 잃어버린 것은 바로 그 고민과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운영의 전문성과 그 공간(과 운영 스탭들)이 가지고 있던 영상 운동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다. 특히 영상 운동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단순한 심리적 동기가 아니라 미디어 운동에 접근하는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이다.

 

이 지점에서 퍼블릭 액세스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자. 미디어센터 활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퍼블릭 액세스인데, 그것은 비전문가들에게 표현의 수단을 제공하는 것뿐아니라, 교육을 통해 소비의 주체가 아닌 문화생산의 주체를 양산해내고, 소통을 통한 공동체 경험을 공유하며, 나아가 지역운동의 근거지를 형성하는 것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이는 영상미디어센터의 운영과 영상 운동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반복하자면, 영상미디어센터의 운영은 퍼블릭 액세스 담론을 중심에 둔 하나의 사회 운동의 성격을 지닌다.

 

때문에 이곳은 영상운동에 대한 애정과 열정 그리고 그에 바탕을 둔 고민과 노력 없이 결코 운영될 수 없는 공간이다. 과연 이런 영상미디어센터를 영상 운동과 퍼블릭 액세스에 대한 고민과 노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시민영상문화기구’가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시민영상문화기구는 기존에 활동하고 있던 스탭들과 그들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와 열정들을 배제하고 부정하면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이미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퍼블릭 액세스는 기본적으로 배제되어 왔던 목소리들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결코 그동안의 고민과 노력들을 배제하면서 추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상미디어센터는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끊임없이 기록하고 드러내는 시민들을 배양함으로써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해왔고, 그 시민들을 배양하기 위한 교육의 장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영진위의 운영 사업자 공모제 전환은 언론과 교육의 장인 영상미디어센터의 비판 기능을 소거하는 조치이다. MB정부와 그것의 사회적 신체로 전락한 영진위에 대한 비판도 필요하겠지만, 영상미디어센터의 기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탄압을 견디고 살아 남는 것도 끈질긴 저항의 방식중 하나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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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를 다루는 사회, 에이즈를 다루는 정치

일반적으로 질병에 걸린 이들은 그들이 놓인 위치나 상황 때문에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할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회적 편견과 힘겹게 싸워나가야 하며, 때로는 자존감이 훼손될 정도로 타인으로부터 멸시 당하기도 한다. 특히 몇몇의 질병들은 동정이나 시혜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성 생활, 위생 그리고 심리적 불안정과 관련된 질병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것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 문란한 성생활, 지저분함 그리고 성격 이상 등의 개인적 잘못을 통해 야기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개인 책임이라는 문제는 특정 질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낳는 중요한 원인이다. 자기 관리가 인생의 과제로 여겨지는 당대에는 과거에는 비난받지 않던 심장계통의 질환에 대해서도 지나친 다이어트나 약물 복용과 같은 이유가 거론되며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된다. 폭식이나 거식증 등이 비난 받거나 희화화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에 대한 논의는 아마도 질병을 대하는 사회적 태도을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대상일 것이다. 에이즈가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감염되는 것이라는 오해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에이즈 감염인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죽음과 함께 사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에이즈가 아주 특별한 경로를 통해서만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 조차 그런 생각은 일상적이다.


그러나 에이즈는 다른 질병과 다른 위치를 차지하는 독특한 것이기도 하다. 우선 에이즈는 아주 치명적이고 심각한 질병으로 취급되지만, 그것은 질병의 이름이 아니다. 에이즈는 질병이 발생할 수 있는 특정한 의학적 조건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인체의 면역 기능이 망가진 면역 결핍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 상태, 즉 면역 결핍 상태로 인해 이후에 치명적인 감염에 이를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요컨대 에이즈는 질병의 획득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결여 상태인 것이다.

 

다음으로 에이즈는 암과 같이 신체 내부의 변형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내부로 감염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에이즈는 신체 내부에 “침투”함으로써 신체를 “오염”시키는 어떤 것이다.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공포에 기반한 것인데, 그 공포는 그것이 가진 치명성과 신체 내부의 정상성, 순수성을 외부에서 위협하는 형식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 에이즈는 나와 타자의 ‘관계‘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치명적 상태이다.

 

수잔 손탁(Susan Sontag)은 ‘에이즈와 그 은유’라는 글에서 암 환자는 “왜, 하필 나야?”라고 비통하게 절규하는 반면, 그런 것을 궁금해 하는 에이즈 환자는 없다고 말한다. 에이즈는 감염인에게 궁금함이 아니라 정체성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정체성(identity)이란 타자와의 동일시(identity)를 통해 형성된다.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에이즈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치명적 상태라면, 그것은 관계맺음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계기이다. 감염인, 비감염인 모두에게 에이즈는 그 자체가 관계 맺기를 방해하는 치명적 장벽이 된다. 그리고 비감염인에게 감염인은 자신의 정상성, 순수성을 위협하는 어떤 것이 된다.


에이즈를 다루는 사회, 에이즈를 다루는 정치

 

과거에 질병을 다루는 이는 의사들이었지만, 이제 그것을 다루는 것은 사회의 임무가 되었다. 특히 에이즈는 더욱 그러하다. 질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질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보호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와 달리 우리 사회가 질병을 다루는 방식은 배제와 퇴출이다. 한국은 에이즈에 대한 강도 높은 국가 통제를 시행하는 나라이다. 그동안 한국은 에이즈 감염인에 대해 비자 발급을 제한하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에이즈 감염여부를 강제조사해 왔다. 이에 더해 체류기간에 감염사실이 드러난 외국인에 대해서는 강제출국 조치를 취해왔다.

 

이달 초 법무부는 에이즈 감염 외국인의 입국규제를 완화한다고 발표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이 조치를 시행한 이명박 정부를 격찬했다. 그러나 법무부의 발표는 출입국 규제의 완전 폐지가 아닐뿐더러, 공개되지 않은 일부 지침의 변경에 불과하다. 법무부와 반기문 총장의 어이 없는 ‘오바’ 이외에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국가 통제는 변한 것이 없다.

 

에이즈, 유독 에이즈에 걸린 외국인은 우리 사회의, 국가의, 민족의 정상성과 순수성을 위협하는 오염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들)은 “침투”하여 “오염”시키는 “바이러스”가 된다. 이쯤 되면 에이즈에 대한 논의에서 왜 그토록 군사적 은유가 사용되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에이즈는 내부와 외부를 나누고, 외부를 적으로 간주하며,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전쟁상태로 규정하고, 외부를 격퇴하지 못하면 내부는 치명적인 죽음에 이른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침략자”이자 “적”이고, 그것은 신체에 “침투”하여 우리 몸을 “점령”한다. 그리고 에이즈를 연구하거나 극복하려는 노력은 에이즈와의 “전쟁”이 되며, 전쟁에서 패한 자들은 생명을 위협받는다. 에이즈와 전쟁은 이제 은유가 아니라 실질적인 생명 위협에 반한 정상성과 순수성에 대한 강박이 만들어낸 하나의 사건이 된다. 전쟁이 그러하듯 에이즈 역시 거대한 오해와 소모적 조치들이 만들어낸 적대의 산물인 것이다.

 

다시 한국의 에이즈 통제로 돌아가보자. 그것은 국가에 의한 사회 보호 조치가 아니다. 우선 우리 사회 내부에도 에이즈 감염인이 존재한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구성된 새로운 외부로 격리되거나 배제당한다. 다음으로 강제 출국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가진 이주노동자의 경우 에이즈 감염 치료는 물론이고 검사조차 꺼려한다. 에이즈를 예방하기 위한 법이 오히려 그들을 에이즈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은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 정책이나 조치가 보호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공간이다. 사회 보호 조치라는 명분을 통해 민족국가의 정상성이나 순수성이 강조된다. 그리고 이 조치들은 공포에 대한 위협을 통해 (특정한 명분에 위배될 때) 언제든, 누구든 배제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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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 않은 미학을 위해 희생당한 도시민의 삶 : 개발과 투기의 일상화 2

 

 

지난 칼럼(개발과 투기의 일상화 1 : 개발에 미치고 투기에 목맨 우리시대의 자화상<칼럼보기>)에서는 개발과 투기의 열풍이 단순히 토건국가와 건설자본의 결탁으로 인해 발생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 이야기 했다. 거기에는 개발을 찬양하는 투기하는 시민이 함께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사회는 소수 지배자들의 머리 속에 설계된 대로만 형성되지 않는다. 한 사회의 성격은 지배자의 의도와 함께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독특한 합리성이 만나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구성된다. 때로 그것들은 서로 반대의 지점에 위치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친화력을 발휘하여 같은 지점에 서서 같은 목표를 바라보기도 한다. 적어도 개발과 투기의 열풍은 후자의 측면이 강해 보인다.

 

재개발 논리의 미학적 정당화

 

개발과 투기에 대한 열정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경제적 이득과 관련되어 있다면, 다른 한 축은 미학적 삶과 관련되어 있다. 도시 미학은 도시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을 넘어 도시민들의 삶 자체를 재구조화 하는 기능을 한다. 브랜드 아파트의 유행은 이 지점과 관련되어 있다. 1999년 삼성중공업의 ‘쉐르빌’을 시작으로 래미안, ‘트럼프 월드’, ‘아이파크’, ‘캐슬’, ‘e편한세상’, ‘힐스테이트’, ‘더샵’, ‘푸르지오’, ‘비발디’, ‘상떼빌’ 그리고 최근의 ‘Z클래스’까지 브랜드 아파트는 그야말로 봇물터지듯 등장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직접적으로는 외환위기 직후 단행된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조치와 관련된 것이지만, 보다 폭 넓게 보자면 당대의 독특한 합리성이 발현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브랜드 아파트의 유행은 도시가 과잉유입된 인구의 수용이라는 기능에서 삶의 미학적 구성이라는 기능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징후처럼 보인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라는 광고문구, 웰빙 열풍과 맥을 같이 하는 ‘친환경 아파트’, 성에서 음악회를 여는 귀족적 삶을 보여주는 ‘캐슬’ 같은 아파트, 미래지향적인 최첨단 아파트 등 브랜드 아파트 광고가 보여주는 삶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것들은 “사람다운” 삶, “자연과 함께 하는” 삶, 기술발전이 가져올 “미래지향적” 삶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 광고들은 개인들을 ‘대신하여’ 생태와 기술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바람직하게 도래할 삶의 이상을 만들어준다. 미래는 그렇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 광고가 늘 그렇듯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혹은 아직-오지 않은, 미-래) 이미지를 주조해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바로 그 도래하지 않을 삶의 이미지를 자신의 삶 속으로 투사시킨다.

 

여기서 삶의 미학적 구성이라는 테제의 목표가 도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맞춰져 있기 보다는 개발과 투기의 새로운 시장 개척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른바 컬쳐노믹스(culturenomics)가 보여주는 것이 미학의 시장화라는 지점이다. 도시를 미학적으로 디자인 하는 것이 도시의 경쟁력이자 경제적 힘이라는 것이 컬쳐노믹스의 모토이다.

 

세운상가 철거후 녹지를 조성하고, 동대문운동장을 디자인플라자로 조성하고, 강남대로에 거대한 미디어 폴을 세우고, 인공 꽃밭과 인공분수로 꾸며진 광화문 광장을 만드는 모습 속에서 컬쳐노믹스는 그 실체를 드러낸다. 미학적 도시를 만든다면서 그 장소 고유의 문화와 생태 그리고 역사적 특수성과 지역성을 파괴하는 모습은 재개발 논리(혹은 신개발주의) 속에서 파괴된 미학적 상상력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상상력이 제거된 문화와 미학은 재개발 논리를 세련되게 정당화해주는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 전락한다.

 

브랜드 아파트의 유행 속에서도 미학화된 재개발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브랜드 아파트는 사실 원주민들의 삶을 뿌리 뽑는 강제 철거와 미학적 상상력이 배제된 막개발의 중심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도시적 삶의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주는 듯한 미래를 향한 희망과, 다른 한편으로 부동산 가격 상승이라는 현재의 희망을 동시에 제공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도시 재개발의 주역이 된다. 이 희망들의 결합은 사회적으로 정당화된 개발과 투기에 대한 열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축이 된다. 개발과 투기에 대한 사회적 용인은 재개발의 실질적 피해자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람들조차 재개발(혹은 뉴타운 건설)을 지지하게 하는 강력한 동인이 된다.

 

우리 사회가 조감도를 보는 방식
 
미학적 도시라는 세련된 개발 논리의 실질적 효과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보기에 좋은 것은 어두운 현실에 한줄기 빛이라도 던져주는듯한 제스쳐를 취하며 그것을 넘어선다. 미학과 생태를 개발 논리의 키워드로 내세우며 미학적 도시 개발의 원형을 만들어낸 것이 청계천 복원이었다. 그 청계천에서는 비가 오면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청계천을 둘러싼 인도와 도로에 쌓여 있던 온갖 도시오염물질들이 빗물에 쓸려 유입되기 때문이다. 비가 와서 물고기가 죽고 나면, 죽은 물고기는 조용히 치워지고 새로운 물고기들이 방류된다. 다음날 청계천에 나가보면 물고기는 여전히 그곳을 유영하고 있다. 도시에서 죽음은 이렇게 감춰지거나, 쉽게 잊혀진다. 바로 이것이 도시에서 보여지지 않는(혹은 보기에 좋지 않은) 개발의 어두운 측면이 감춰지는 방식이다.

 

보기에 좋은 것이나 보여지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 자체가 아니다. 보여지는 것은 대상을 ‘보는 방식’(way of seeing)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는 방식은 생물학적 시각의 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으로 공유되어 학습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상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사회적 관점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본다는 것 자체가 대상을 의미화 하는 실천인 것이다.

 

특히 근래에 들어 사회적으로 고유한 ‘보는 방식’은 더욱 중요해 지고 있다. 시각 자체가 사회적 소통의 기반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기반을 둔 텔레비전, 영화, 사진과 같은 매체나 미디어 아트, 시각 예술의 부흥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의 지위 등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알 수 있다. 나아가 전통적으로 소리에 기반을 둔 매체였던 전화와 같은 매체는 화려한 인터페이스와 함께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즐기고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각적 매체로 전환되고 있다. 좀 더 극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보여지는 대상은 이제 우리가 보는 방식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다.

 

1년 365일 공사중인 대한민국의 수많은 건설현장이나 유래없는 규모의 개발을 진행하는 뉴타운 계획을 보자. 그 공사현장이나 재개발 설명회를 가면 항상 보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조감도이다. 최근 도시민들은 바로 이 조감도를 보는 방식을 새롭게 익혀가고 있다. 조감도는 개발이 끝나고 난 이후 지역이나 건축물의 모양을 한눈에 보여주는 청사진이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아닌 새의 시점에서 그려진 것이며, 유토피아를 가시화 시킨 것이다. 그 조감도 속에는 풍요롭게 발전한 지역의 미래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새겨져 있다.

 

조감도는 공사현장과 재개발 설명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천에서 열린 세계 도시 축전에도, 서울 디자인 올림픽에도, 2010년 세계 디자인 수도로 지정된 서울시에도 있다. 조감도는 현재 있는 것을 그리지 않는다.(그것이 실제로 있다고 해도 새의 시점에서 그려진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람들이 “직접 인지할 수 없는 세상을 다양하게 전문화된 매체를 통해 보여지게끔 하는 것”이다. 조감도는 미래에 대해 그려진 것이지만, 스스로를 현재에 드러내며 현재보다 우위에 서려는 이미지이다. 조감도의 미래에 다가가기 위해 현재는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 되며,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견뎌야 하는 것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재개발은 도시민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많은 경우 원주민들의 삶을 파탄내고 있다. 그럼에도 뉴타운 재개발이 발표되면 수많은 주민들은 그것을 열렬히 지지한다. 그 지지자의 상당수는 재개발을 통해 아무런 직접적 이익도 얻지 못하고 심지어는 재개발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모순적으로만 보이는 이 상황 속에는 현대인이 가진 독특한 합리성이 발견된다. 한편으로는 눈앞에 놓인 물질적 이익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경제적 인간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높은 삶의 질을 위해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미학적 인간이 있다. 그러나 두 태도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것들은 인간의 삶은 문명 발달과 물질적 풍요 속에서만 질적으로 향상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두 태도가 공유하는 물질적 풍요라는 전제는 언제나 직접적인 물적 대상이 아니라, 추상화된 물질성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흔히 물신주의라고 이야기 하는 그것말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물신주의의 물신은 구체적인 물질이 아니라 비물질적 물질(혹은 물질의 비물질적 육체)을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를 향하도록 하는 자본의 욕망이다. 지금 소비해서 없애지 않고, 미래를 위해(혹은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다시 투자되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 아니던가. 때문에 물신의 대상으로서의 물질은 축적할 수 있되, 소비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요컨대 현대사회에서 개발에 대한 열정은 (그것이 경제적 태도이든, 미학적 태도이든) 물질적 풍요에 대한 열망을 전제로 하며, 나아가 자본의 욕망과 연결된다. 개발과 투기가 일상화된 시점에서 투기하는 시민들, 재개발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자신이 아닌 자본의 욕망을 내화한 자본화된 시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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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에 미친고 투기에 목맨 우리 시대의 자화상 : 개발과 투기의 일상화 1

개발에 미치고 투기에 목맨 우리 시대의 자화상

: 개발과 투기의 일상화 1

 

## 개발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드는 생성의 과정이지만, 필연적으로 폭력적 파괴를 수반한다. 과거에는 토건국가와 건설자본이 자연을 훼손시키고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의 주체였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그들과 조용히 공모하여 스스로의 목을 죄기 시작했다. 스스로 나서 자연을 훼손시키고 서로의 삶을 파탄내기 시작한 것이다.

 

작년에 나온 가장 흥미로운 책 중의 하나는 『부동산 계급사회』라는 책이다. 이 책의 가치는 부동산 투기와 개발의 관계를 비판적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도 있지만, 그보다도 자신의 모든 주장을 “통계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이 가치 있는 이유는 통계(statistics)라는 것이 그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국가의 (이해를 대변해주는) 학문(state + -tics)이라는 점에서 국가를 비판하기 보다는 국가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기능을 더 잘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손낙구는 그러한 통계를 기능전환시키고 있다. 특히 그는 국가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새로운 통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토해양부와 행정안전부, 통계청, 국세청 등의 통계를 재구성해 활용하고 있다.

 

개발이나 부동산 투기와 관련하여, 저자가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지금까지 “정부나 기업이 만들어 온 통계는 대부분 부동산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려는 것”이었다. “건설회사가 집을 많이 지어야 주택문제가 해결된다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 쓸 만한 통계”나 “주택 공급을 확대함으로써 주택 사정이 좋아졌다는 통계는 많아도 지하실, 판잣집, 움막, 동굴과 같이 처참한 곳에서 몇 명이 살고 있는지에 대한 통계”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가장 흥미로운 통계 중 하나는 부동산값 폭등기를 정부의 개발정책과 관련하여 4단계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1차 폭등기는 1965~69년으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맞물려 있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착공을 계기로 이 시기의 부동산 투기는 정점에 달한다. 2차 폭등기는 1975~79년 사이이다. 이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선언한 박정희 정권의 대규모 개발 정책과 각종 특혜를 받으며 땅 개발과 주택 공급에 나선 민간 건설회사의 급성장, 중동 건술 붐에서 벌어들인 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부동산값 폭등을 야기한 것이다. 3차 폭등기는 1988~89년 사이로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위한 대규모 개발 사업, 서해안 개발, 3저 호황으로 발생한 여유 자금의 투기 자금화 등이 겹치면서 발생했다. 끝으로 4차 폭등기는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 지금까지이다. 4차 폭등기는 아파트값 폭등, 강남 투기 열풍의 강북․수도권으로의 확산, 지역 도시 개발 정책 등의 영향 때문이었다.

 

손낙구는 이러한 4차례의 부동산값 폭등의 주체를 부동산 5적이라 부르며 비판한다. 부동산 5적은 건설재벌, 부동산 관벌, 정치인, 보수언론, 일부 학자 들을 가리키며, 그는 이들의 투기 동맹이 부동산값 폭등의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결국 토건 국가 관료와 건설 재벌, 그리고 그들에게 빌붙은 언론과 학자들이 개발과 부동산 투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중요한 변화 하나를 놓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정부와 재벌 그리고 그들과 공모한 일부 특권 계층 이외에) 개발과 부동산 투기 주체로 일반 시민이 등장하는 과정이다.

 

1966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의 방문과 함께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있었다. 당시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 참전 우방국들을 순례하고 있었고, 우리나라도 그 방문국들 중 하나였다. 이 방문은 미국의 입장에서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것이었다. 때문에 존슨 대통령이 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오는 모습부터 도착까지 모든 과정이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 생중계 되었다. 이 때 존슨 대통령의 환영식이 서울시청 근처에서 열렸고, 카메라에는 자연스레 주위 풍경이 담겨졌다. 당시 그곳 대부분은 판잣집이었다. 이 모습이 미국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교포들에게까지 비쳐졌다. 이후 재미동포들이 청와대에 연판장을 보내왔는데, 여기에는 몇 천 명의 서명과 함께 서울 도심을 재개발해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1966년은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점으로, 이 사건은 정부나 투기 자본이 아닌 민간 영역에서 개발을 독려한 최초의 사례라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 사건 하나를 보편화 시켜서 개발과 부동산 투기가 민간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었다고 일반화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개발이 단순히 국가와 자본의 이익을 위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83년에는 도시 재개발의 새로운 형태로 ‘합동재개발’ 방식이 도입된다. 합동재개발은 재개발 지역의 주민들과 민영회사가 함께 재개발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이는 이전까지 시행되었던, 정부와 주민추진위 그리고 민영 건설 업체가 함께 재개발을 진행하던 위탁개발과 기본적으로 비슷한 형식을 띄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역할이 축소되고 건설 업체의 역할이 증대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정부는 합동재개발 방식을 시행하며 민간 자본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조세경감과 공공지원 등 다양한 조건들을 제공했다. 정부는 이 방식을 조기 정착시키기 위해 1984년 1월에 ‘합동개발세부시행방침’을 마련하기도 했다. 정부가 나서서 민간 영역에서의 개발을 장려한 것이다. 또한 건설 업체는 자체적으로 개발을 시행할 수 없기 때문에, 정부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주택 소유자로 구성된 재개발 조합과의 파트너십이 중요해 진다. 민-관 파트너십이 민-민 파트너십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손낙구의 분석에서 빠져 있는 민간 영역의 역할은 그가 4차 투기 시점이라고 이야기 한 외환위기 이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4차 투기 시점은 외환위기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때 김대중 정부는 위환위기 극복 수단으로 부동산 투기를 막는 각종 규제를 완화시킨다. 예를 들어 김대중 정부는 1998년 5월 22일부터 1999년 12월 31일까지, 그리고 2000년 11월 1일부터 2003년 6월 30일까지 두 시기 동안 신축 주택을 구입하는 경우 잔금 지급일로부터 5년 안에 되팔기만 하면 1가구 2주택이라도 조세특례제한조치로 양도소득세를 면제해 주었다. 이는 전용면적 50평 이하의 경우로 한정되기는 했지만, 주택을 소유한 이들이 다른 주택에 투기를 하고 그에 따른 이익을 보장해 주는 조치였다. 이러한 조치는 국가가 직접 민간 영역에서의 개발과 부동산 투기를 인정하는 것, 나아가 투기를 장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 투기와 개발 열풍을 불러온 핵심적 대상은 아파트이다. 아파트 가격 상승의 직접적 원인은 정부와 민간 두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정부의 영역에서 보자면 외환위기 직후 단행된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조치를 아파트값 상승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다른 한편, 지금 주목하고 있는 민간 영역에서는 아파트 부녀회 등의 민간 자치회가 아파트 가격 상승을 이끈 주체로 등장한다. 그들은 아파트 가격을 올리기 위해 담합을 하고 아파트 입주자들을 상대로 캠페인을 벌인다. 2006년 강북지역의 한 아파트 입구에는 “평당 1,500 이하로는 팔지 맙시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아파트에 설치된 엘리베이터 주민 게시판에는 “지방도 평당 천만원인 넘습니다. 강북의 대치동, 아름다운 우리 아파트. 최고의 아파트를 만듭시다. 우리 모두 하나가 됩시다.”와 같은 선동적인 문구가 등장했다.

 

아파트 가격 담합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부녀회와 같은 아파트 자치회는 구체적인 거래 액수를 정해 그 액수 밑으로 매물을 내 놓는 집을 공개하겠다고 압박을 넣기도 하고(“시세 이하로 매물이 나올 경우 동호수를 실명공개하며, 이전에 내놓은 매물은 해당 세대와 협의해 매물가격을 고치도록 하겠다”), 그 매물을 받은 부동산 중개업소와는 거래를 하지 않도록 결의함으로써 실질적인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부동산 업소에게는 매물 회수와 불매 운동에 들어갈 수 있음을 엄중히 경고해 주십시요”). 이 외에도 경기 부천시 중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단결하라, 그리하면 오르리라”는 제목의 전단지가 신문에 끼워져 배포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2006년 여름 이러한 담합행위를 ‘시장질서 교란행위’로 규정하고 법적으로 규제하려했다. 하지만 정부는 곧바로 태도를 바꿔 담합 자제를 유도하는 간단한 행정 조치로 마무리 지었다. 이후 자치회의 직접적인 아파트 가격 담합 행위는 자제되는 듯 했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공공연하게 가격 담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개발과 부동산 투기는 토건 국가와 건설 자본의 고유한 영역이 아니다. 일반 시민들은 개발과 부동산 투기의 주체가 되었으며, 그들에게 투기는 일상이 되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서울시의 뉴타운 재개발은 이러한 투기의 일상화와 강하게 유착되어 있다.

 

이제 일상의 투기꾼들은 재개발 뉴타운이 “MB시대 부동산 투자의 핵”이며, 이러한 투자를 통해 “강남부자 따라 잡기”가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그들은 소액으로 투자에 성공할 수 있다고 외치며, “내집 마련 최고의 기회”가 재개발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전 부동산 투자 교육”을 통해 그러한 기회를 포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이 사회는 시민들에게 “뉴타운이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뉴타운 재개발에 미쳐라”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 외침들을 내화하여, 삶을 꾸려나가고 행동을 규제하는 원칙으로 받아들인다. [『재개발 뉴타운:MB시대 부동산 투자 핵, 금액대별 투자 비법. 알짜 투자지역 전격 공개 』(중앙일보조인스랜드, 2008); 『강남부자 따라잡기 재개발 뉴타운』(위더스콤, 20008); 『앞으로 5년, 내집 마련 최고의 기회 재개발에 있다: 소액으로 성공하는 뉴타운ㆍ재개발 투자의 모든 것』(더난출판사, 2008);『재개발.뉴타운 100% 정복하기: 실전 부동산 투자교육 』(예응, 2009); 『뉴타운이 희망이다』(제플린 북스, 2009);『뉴타운 재개발에 미쳐라』(제플린 북스, 2009)]

 

요컨대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4차 투기와 개발의 열풍은 이전의 단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개인들이 개발과 투기의 주체로 등장하면서 투기의 일상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토건)국가와 (건설)자본과 (투기) 시민은 개발과 부동산 투기라는 지점에 모여 있는 모종의 공모자가 된다.

 

그런데 시민이 개발과 투기의 공모자가 된다는 점은 여전히 미심쩍어 보인다. 투기하는 시민은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 능력을 가진 이들과 일확천금을 노리고 없는 돈까지 끌어들여 투기자금으로 활용하는 일부 과잉 투기꾼에 한정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발과 투기에 대한 열정은 중산층이나 과잉 투기꾼과 같은 일부의 욕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광범위한 시민들의 동참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집이 없는 거주민과 뉴타운 재개발 때문에 자신이 살던 지역에서 쫓겨나야 하는 사람들마저도 서울시의 뉴타운 재개발을 지지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재개발 지역 원주민의 재정착률은 20% 미만이다) 2008년 총선에서는 뉴타운 재개발을 공약으로 내세운 이들이 당선되면서 ‘타운돌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신도시 건설과 같은 개발 사업에서도 역시 (재개발의 피해자가 될 것이 분명한)다수의 주거 약자들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개발과 투기에 대한 열정이 단순히 경제적 이득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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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이제 빈대떡 신사에게 돌아갈 집은 없다

 

대한민국은 1년 365일 공사중이다. 도로를 뒤엎고, 건물을 올리는 개발의 풍경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그것은 배정된 예산을 모두 소진해야 하는 공무상의 이유 때문만도 아니고, 유독 삽질을 좋아하는 대통령 탓만도 아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가진 강박의 풍경이다. 지속적이고 강제적이며, 보편적이고 중독적인 개발은 시대의 강박 그 자체이다. 개발은 경제적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여겨지며,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의 직접적 산물이기도 하다.

 

개발이란 의도적으로 자연을 변형시켜 인간의 질서 속으로 편입시키는 행위이다. 마르크스는 최악의 건축가가 정교한 벌집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꿀벌보다 훌륭하다고 말한다. 건축가는 건축물을 짓기 전에 이미 머리 속에 완성된 건물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추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하는 능력은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추상력에 기반을 둔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언급은 개발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드러내 준다. 개발이란 단순히 자연의 인위적 변형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중심에 두고 그것에 조응하도록 자연을 새롭게 발명하는 작업이다. 인간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디자인 하는 것은 하나의 도로, 하나의 건축물, 하나의 공원이 아니라 그것들을 둘러싼 자연 그 자체인 것이다.

 

다시, 인간은 자연 자체를 설계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을 그 자체의 의지에 반하여 강제적으로 인간의 질서로 편입시키는 과정에는 폭력이 개입된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폭력이기도 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할 인간 자신에 대한 폭력이기도 하다. 청계천 복개 과정을 통해 우리가 확인한 것이 바로 이 과정이다. 개천이나 강은 그 발원지에서 시작해 더 큰 강이나 바다로 흘러간다. 그것은 끝없는 물의 순환이며, 자연의 흐름이다. 그러나 복개된 청계천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청계천이 시작되는 소라광장에는 마치 그 곳이 발원지나 되는 마냥 물이 솟아오르는 분수가 있고, 청계천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있다(그러나 정작 물은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면 청계천을 둘러싼 폭 좁은 긴 풀숲이 나오지만,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대한 건물과 도로밖에 없다.

 

청계천은 마치 도심 속의 자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시선 속에서만 자연이 된다. 개발은 이처럼 인간의 의도와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自-然)을 강제적으로 인간의 삶 내부로 포섭하여 새롭게 배치하는 작업이다. 4대강 개발 역시 마찬가지이다. 4대강 개발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자연을 비자연화-인간화 하는 작업이다.

 

재개발 역시 이러한 개발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것을 개발이라고 부르지 않고 재(再)라는 접두사를 붙여 부를 때는 그냥 개발과 다른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개발은 개발과 무엇이 다른가. 용어만 풀어보자면 재개발은 다시 개발한다는 말이다. 개발의 대상이 자연 그 자체 였다면, 재개발은 개발을 통해 인간화 된 것을 개발의 대상으로 삼는다. 개발이 자연을 인간의 질서로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면, 재개발은 인간화 된 것을 재-인간화 시키는 과정이다.

 

인간화 된 것을 재-인간화 시키는 것은 현대라는 독특한 시대의 리듬에 맞게 대상을 파괴하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신이 아닌 인간에 의해 일어나는 일인 이상, 그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파괴가 수반된다. 새로움에 대한 열정이 파괴와 생성의 반복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개발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적으로 사용되는 과정이라면, 재개발은 파괴와 생성의 반복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과정이다. 재개발은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 투사되어 파괴와 생성을 강박적으로 되풀이하며, 그 자체가 생산이자, 소비이자, 욕망이 되는 사태이다.

 

“현대의 조건은 끊임없는 움직이는 데 있다. 선택은 현대화 아니면 소멸일 뿐이다. 따라서 현대사는 설계하기의 역사이자, 자연에 맞서 진행된 꾸준한 정복전/소모전에서 시도되고 퇴색되고 폐기되고 버려진 설계도의 박물관/묘지였다.”(지그문트 바우만)

 

재개발은 보통 도심 재개발과 주택 재개발로 구분된다. 도심 재개발을 통해 현대적 시설을 갖춘 업무 지구와 주상복합 지역 그리고 꿈과 희망이 넘치는 소비로 가득한 복합소비공간이 만들어진다. 주택 재개발은 무허가 주택과 저소득층 주거지역을 대상으로 하며, 재개발을 통해 고급 빌라나 맨션 혹은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형성된다.

 

개발에서 훼손된 자연이 문제시 되었다면, 재개발에서는 인간의 삶 자체가 문제시 된다. 재개발을 거쳐 만들어진 새로움은 그것을 소비할 재력이 없는 사람들을 배제한다. 새롭게 만들어진 상업 및 주거 공간에서 기존에 있던 거주자들이 배제되는 것이다. 재개발 이후 원주민들의 재정착률은 20퍼센트 이하이다. 서울의 경우,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거의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한 재개발이 계획되어 있고, 상당부분 이미 진행중이다. 재개발이 진행될수록 서울은 점점 중산층화 될 것이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민중은 점점 주변화 될 것이다.

 

용산 참사는 재개발의 이러한 모순을 정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민중의 저항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예외적인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재개발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그것이 새로운 것의 소비에 대한 열망이라는 현대의 강박으로부터 연원하는 이상, 현재에도 미래에도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인 것이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붙여 먹지.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라는 재미있는 가사 때문에 ‘빈대떡 신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재개발이 일상이 된 요즘 이 노래는 더 이상 농담으로도 못 쓰이게 되었다. 이 노래가 유행할 즈음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빈대떡 붙여 먹으러 돌아갈 집이나 방 한 칸 정도는 있었나보다. 지금은 그것도 없다. 1인당 국민 소득이 그렇게 올랐다는데, 삶은 더 팍팍해져만 간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도시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시민권이라는 용어는 재활용도 안되는 쓰레기가 되었다. 어원상 시민권(citizen)은 도시(city)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권리였다. 이제 시민권은 그 원래 의미를 찾아가는 듯하다. 시민권은 도시에 살 수 있는 중산층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재개발로 인해 도시에서 쫓겨나야 하는 민중들은 시민권을 가질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죽여도 아무도 처벌 받지 않는다. 최악의 재판으로 기억될 용산 참사 판결에서 보았듯이 말이다. 집도, 권리도, 생명도 보장받지 못하는 우리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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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발간의 정치적 함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정치적 함의

: 미래를 향한 역사 그리고 민족과 국가의 결속

 

 

조선과 동아가 발작을 일으켰다. 친일인명사전의 발간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대한민국이 친일 청산을 못해 정통성이 북에 비해 부족하다는 좌파사관의 확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동아일보는 사전이 발간된 바로 다음날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 노린 좌파 사관 친일 사전”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조선과 동아를 제하고도 사전 발간은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만한 논란을 일으켰다.

 

조선과 동아를 비롯해 사전에 등재된 당사자의 후손은 물론이고,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네티즌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친일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자극적인 용어인듯하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정치적 올바름, 민족 정체성, 국가 정당성과 관련된 논의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조선과 동아의 발작은 이 사건이 가지는 외상적 강렬함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그런데 사전의 발간은 현재 일고 있는 논란과는 다른 층위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전을 발간한 이들도, 그것을 옹호하는 이들도, 혹은 반대하는 이들까지, 그들이 진보이건 보수이건 간에, 모두 역사가 함축한 가치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사전 발간과 관련된 논란은 그 (역사적 가치에 대한 동의라는) 기반 위에서 역사적 사실의 진위 문제, 인물 선정의 기준의 편향성 여부, 그것의 정치적 악용문제 등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좀 뜬금없긴 하지만 이러한 논란에서 한 발짝 비켜서서 이 논란이 기반을 두고 있는 ‘독특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도 논의해 볼만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 인간은 역사적 소여를 통해 언어를 습득하고, 소통하며, 그 안에서 지식을 얻고, 행위의 근거가 되는 사회적 합리성을 형성시킨다. 다시 말해 특수한 문화적 요소들의 전승 - 어떤 것들은 버려지고, 어떤 것들은 그대로 전달되며, 또 어떤 것들은 적당히 변형 된다 - 을 통해 인간은 역사적 존재가 된다.

 

이에 반해 사물 혹은 사건 그 자체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 사물 혹은 사건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스스로는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다. 사물은 인간에게 인식되고, 언어를 부여받으면서 독특한 의미 체계 속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역사적 존재인 인간의 의미망 속에 포착됨으로써 역사화 되는 것이다.

 

사물 혹은 사건이 인간의 언어 속에서 역사화된 존재가 되고 나면 기록 속에서 과거라는 시간대로 편입되고 회자되게 된다. 그리고 과거 속에 기록을 통해 역사화된 존재는 계승을 통해 현재의 정치 속에 기입된다. 버려지지 않고 계승된다는 것은 그 사물 혹은 사건이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역사화된 존재는 현재의 시간에 남아 반성의 계기가 되거나 본받아야 할 이상이 되어 미래로 투사된다. 반성의 계기로서의 역사는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계획의 지평을 마련하고, 본받아야 할 이상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한 준거가 되어 미래로 투사되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경향일보의 한 사설은 “친일사전은 과거 단죄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은 친일인명사전을 계기로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치유”해야 하며, 그것이 “역사 정의 실현의 단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 정의 실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있다는 선형적 이행의 시간이 역사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화된 존재는 과거 속에서 이미 사라진 대상이라는 점에서 상실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료라는 형태로 현재에 남는다. 이러한 태도는 상실을 상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아의 일부를 상실된 대상과 동일시함으로써 상실된 것을 자아 속에 보존한다는 점에서 우울증적 구조와 일치한다. 우울증적 태도는 이미 상실된 역사화된 존재를 상징화 이상화 시켜 현재 속에 삽입시킨다. 이렇게 역사화된 존재들은 잃어버린 정통성, 상실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명분으로 현재의 정치 속으로 회귀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역사화된 존재의 회귀가 이상화, 상징화된 민족적 표상이라는 형식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고통은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행한다. 이러한 선형적 역사의 이행은 역사의 시간 외부에 있는 존재들, 즉 역사화 되지 못한 존재들을 망각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고통의 공통성에 기반을 두고 역사적 기억으로부터 시작해 미래를 지향하는 결속체, 에르네스트 르낭은 이것을 민족(nation)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역사화된 존재를 되살려 “역사 정의를 실현”하고 “국가 정통성”을 세우려는 노력의 이면에는 민족과 국가의 결속(민족-국가)을 강화시키는 정치적 기능이 숨어 있다. 이러한 정치적 기능 속에서 망각된, 역사화 되지 못한 존재들, 역사적 시간에서 추방된 시간들, 그의 역사(history)에는 포함되지 못한 그녀들, 망명자들, 이민자들, 외국인 노동자들은 체계적이고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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