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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04
    우리사회, 폭력의 양상들
    와라

우리사회, 폭력의 양상들

얼마 전 <무법자>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화에서 다뤄지는 소재가 흥미롭다. 묻지마 살인, 혹은 좀 더 그럴듯하게는 현실불만형 우발범죄가 그것이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어떤 폭력의 양상들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폭력은 두 가지 계기를 가지는데, 하나는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비열한 수단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의 위계를 가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묻지마 살인은 이 두가지 모두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실행되는 것도 아니며, 권력의 위계 속에서 수직적으로 행사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목적을 상실한 폭력이며, 수직적이기 보다는 수평적으로 발현되는 폭력처럼 보인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수많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학교폭력이나 성폭력처럼 규정적인 폭력이 있는가 하면, ‘나는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라거나 ‘너의 말은 너무 폭력적이야’라고 할 때처럼 추상적인 수준의 폭력도 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행사되는 물리적 폭력이 있는가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노동 사이에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도 있고, 동일자의 언설 속에서 타자를 배재하는 상징적 폭력도 있다. 이것들을 모두 똑같은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폭력은 다양한 층위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사용되는 용례 속에는 상처, 말소, 파괴, 위해와 같은 것들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다.

 

우리는 여기서 최근에 논란을 일으켰던 폭력의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김길태 사건말이다. 잔혹한 폭력의 가해자였던 그가 경찰에 붙잡혔고, 사형과 관련된 언설들이 흘러나왔다. 사형은 폭력에 대응하여 도입된 또 하나의 폭력이다. 한 라디오 방송에서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은 “사형제가 주는 범죄예방 효과, 과학적인 인과관계가 꼭 증명된다고 할 수 없지만 범죄예방 효과하고는 또 관계없이 흉악한 범죄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벌이 주어져야 한다는 징벌응보의 관점”에서 사형제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폭력에 대응하는 폭력이라는 논리는 칼 슈미트가 언급한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평화주의자들은 인간을 말살시키는 전쟁에 반대하는 궁극적인 전쟁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 어떤 전쟁보다 강렬하고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 전쟁은 단순히 상대방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힘의 우위를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상대방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멸시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하의 존재로(즉 괴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이 전쟁에서 적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형은 한 인간에게 가하는 물리적 위해임과 동시에 그의 인간성 자체를 말소시키는 행위이다. 그는 인간 이하의 존재, 즉 괴물이 되어 법의 바깥으로 추방당한다. 법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이처럼 가장 잔혹한 형태의 폭력이 숨어 있다.

 

잠깐 다르게 질문 해보자. 폭력, 그것은 언제나 항상 부정적인 것인가, 때문에 폐기되어야 하 것인가? 대항폭력, 대안폭력이라는 언어 속에는 우리가 구출해야 하는 어떤 종류의 폭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억압에 맞선 피억압자의 폭력은 역사의 한 축을 구성해 왔다. 그것은 때로는 독립운동이라고, 또 때로는 파업이라고, 또 때로는 시민불복종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폭력과 억압에 저항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폭력이 똑같은 폭력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대안적인 새로운 개념을 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개념적으로 분리될 수 있을지라도 많은 경우 현상적으로는 결합되어 있다.

 

폭력은 언제나 선정적이며, 흥행력 있는 뉴스거리를 제공해 준다. 사람들이 잠재적으로 폭력적이어서, 인간의 본성은 잔인한 악함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혹시 거기에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금기에 대한 도전과 위반이나 억압적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열망혹은 억압적이고 비참한 현실에 대한 폭로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규정할 수는 없다. 전자를 부정하고 후자를 옹호할 근거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사형제 합헌 결정이 있고난 이후의 여론조사에서 사형제 유지를 옹호하는 여론의 확산이 사형제 자체에 대한 옹호인지, 김길태 사건 등이 이슈화되고 난 이후에 나타난 잔인한 폭력에 대한 거부의 발현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현실불만형 우발범죄는 정말 어떤 권력의 위계도, 목적도 없는 폭력일까? 그들의 불만이 형성되는 지점은 바로 현실이다. 현실의 비참함 속에서 그들이 가지게 되는 심적 동요를 불만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는 지점이 현실이라는 것, 그리고 쌓여가는 불만을 분출할 통로를 현실의 틀 안에서 찾지 못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심각한 폭력을 가하는 개인들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문제삼고 있는 지점은 이러한 우발범죄가 극히 드문 예외가 아니라 사회적 범죄의 한 유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개인의 정신 이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 항상 위기라고 호명되는 경제적 상황과 파국이라는 말이 어울릴법한 정치적 현실이 놓여 있다. 그 안에서 현실은 점점 비참해 지고 있으며, 그 비참한 상태에 놓은 개인들을 보호해줄 사회적 안전망은 급속히 파괴되고 있다.

 

현실불만형 우발범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 폭력이 ‘그’ 비참한 현실을 만든 권력자들이 아니라 아무런 경제적 자원도, 정치적 권력도 없는 자들을 향한다는 점이다. 폭력의 대상이 선택될 때, 가해자가 대상을 선택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어떠한 의도도 목적도 갖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런 의도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정의될 때, 그 폭력이 내포한 적대의 전선은 완전히 은폐되어 버린다. 그러나 폭력이 발생할 때, 그 대상이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며, 때로 방향전환을 통해 다른 희생물로 대체되기도 한다. 르네 지라르는 특정한 희생물이 선택되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 가해자가 끔찍한 보복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직시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우발범죄의 모호성이 아니라, 그것이 발생하는 원인과 폭력의 대상이 대체되는 매커니즘이며, 그 모호함이 은폐하는 적나라한 적대의 선이다. (사회적인 현상으로 등장할 때) 이 폭력은 희생물에 대한 폭력일뿐아니라, 파국으로 치닫는 현실에 대한 폭로이자 어떤 경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출구가 없는 사회적 모순의 축적이라는 현실에 대한 폭로이자 경고 말이다. 분출구가 없다는 것은 무슨말인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권력 없는 자들이 개입해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선거이다. 그러나 수많은 선거를 해왔지만, 삶은 더 팍팍해져 간다. 답답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합법한 유일한 통로인 선거는 이제 더 이상 현실의 축적된 모순을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닌 것 같다.

 

선거는 합법적이라는 이유로 항상 현실 개혁의 최선의 수단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온 현실은 어떤가. 그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권력자들을 재승인해 자신들을 착취하게 하는 괴이한 재생산의 통로였다. 우리 사회는 소통, 대화, 토론, 연대, 합의, 통합 등을 민주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다. 툭하면 여기저기서 이제 대화가 필요하다거나, 분열이 아닌 통합이 사회적 목표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댄다. 마치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화와 소통을 통해 완전한 합의나 통합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합의란 언제나 적대적인 다른 의견에 대한 묵살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내세우는 대화와 소통, 통합이라는 사회적 가치는 다름 자체를 억압하는 정치적 기능을 수행한다. 선거는 이 불일치를 다수결이라는 아주 경제적인 장치로 은폐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어쩌면 선거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권리를 박탈시키는, 어찌보면 우리 사회의 가장 정교한 폭력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어떤 폭력들은 이와 같은 장치들이 가진 억압적 기능을 다시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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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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