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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12
    아이돌과 정치의 이상한 만남
    와라
  2. 2009/01/11
    경험(Erfahrung) - 발터 벤야민, 1913, trans by 민호
    와라

아이돌과 정치의 이상한 만남

문제라는 단어에는 비정상, 예외, 비틀어짐과 같은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은 해결해야 할 것,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는 지향을 가진다. 때문에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즉 문제의 대상을 무엇으로 설정하는가는 해결이라는 지향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적합한 문제 대상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종종 듣는 용어 중에 여성문제라는 것이 있다. 이 용어에는 문제의 대상이 여성인 것과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들을 규정해온 남성적 시선이다. 여성문제라는 용어를 썼을 때 거기에는 문제의 핵심을 굴절시키는 어떤 전도의 논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2PM의 재범 ‘문제’ 혹은 재범 사태라고 명명된 사건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도 이와 유사한 전도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문제의 대상은 2PM의 재범이 아니다. 논란을 유발한 계기는 그이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논란의 핵심은 재범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형성된 담론의 지형 그리고 그런 담론이 형성된 사회적 맥락에 있다.

 

아이돌 가수는 일반적으로 젊은 층에 인기를 얻는 가수를 말한다. 그들은 가수지만 음악만이 아닌, 젊은 층이 자신들을 동경할 수 있는 갖가지 조건들을 갖추어야 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만들어진 이미지 속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하나의 우상이 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대중들을 위한 환상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대중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이미지에 자신들을 끼워 넣기도 한다. 그들이 만들어낸 환상은 언제나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선에서 구성되어야 한다. 문제는 한국적 상황에서 아이돌이 되기 위해 혹은 아이돌로서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부합해야 하는 대중의 기대라는 것이 정치적 맥락과 강하게 밀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이돌에게 부여된 정치적 임무


10여 년 전부터 아이돌은 한류열풍의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그들은 ‘한류 열풍의 중심에 선 아시아의 스타’이면서 ‘아시아를 정복한 대한의 건아’가 되었다. HOT나 NRG를 넘어 비, 원더걸스, 보아와 같은 스타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동방신기나 천상지희 같은 아이돌 그룹은 아시아 시장을 겨냥해 팀 이름도 한자로 만들었고, 기획 단계에서는 중국 현지에서 같이 활동할 현지인 멤버까지 고려되어 있었다. 슈퍼주니어에는 중국인 멤버(한경)가 한국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다.

 

아이돌 가수들은 한류열풍 속에서 연예 산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이 해야 할 역할을 넘어 국위를 선양하고, 국부를 증진시키는 역할까지 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연예 산업을 넘어 국가의 부와 명예를 드높여야 한다는 정치적 임무가 부여되었다. 아이돌에게 부여된 정치적 임무라는 상황 속에는 미묘한 괴리가 숨어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돌 중 상당수가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교포이거나 외국국적자이고, 그들이 하는 음악 역시 한국적인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탈국적화된 정체성을 가진 아이돌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정치적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러니까 아이돌 스스로가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있든 말든, 그들에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기여를 기대하는 상황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2PM의 재범에게 가해졌던 비난은 이러한 맥락과 결코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4년 전에 썼던 글이 문제의 계기가 되었지만, 그 이후에 비난의 강도와 폭은 확장되었다. 재범의 일과 관련된 글이나 그의 사과문에 달린 댓글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사과문 개제 이후에도 반성의 시간을 갖지 않고 한동안 활동을 지속한 그의 태도를 문제삼기도 했다. 그러나 보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한국인 비하 발언을 지속적으로 문제 삼았으며, 어떤 이들은 유승준의 군 회피로 인한 연예계 퇴출과 연관지어 미국 시민권과 군대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흐름에 편승해 <해럴드 경제>의 한 대중문화전문기자는 “교포출신 연예인에 대한 정체성 교육”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비난의 지점들은 이미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 비난들은 이제 연예인의 역할과 직업 윤리를 넘어 폐쇄적인 정치적 심급으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오리지널을 완성시키는 번역들의 경합


2PM의 재범은 비난을 못 이겨서든, 그 비난을 수긍하고 반성하기 위해서든 팀을 탈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 상황은 반전되어 그를 동정하는 누리꾼의 글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의 한국 비하를 문제삼던 연예 뉴스에서도 팀 탈퇴로 이끈 일부 누리꾼들을 꾸짖으며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관점을 바꾸었다. 이러한 변화는 재범의 팀 탈퇴와 출국이라는 결과가 보여준 임팩트의 사후 효과이기도 하지만, 그 관점 변화의 근거를 제시해준 것은 팬클럽과 이 사건을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의 귀결로 규정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한 비평가들이었다. 그들은 재범에게 강한 알리바이를 제공해 주었다. 죄가 발생한 장소에 재범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강한 알리바이들 말이다. 그 알리바이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글을 새롭게 번역하는 과정에서 마련되었다.

 

재범의 소속사였던 JYP 측과 2PM의 팬들은 재범의 글이 악의적으로 번역되고, 이용당했다며 글의 전문을 번역해서 새롭게 제시했다. 실질적인 글의 의미뿐 아니라, 맥락을 보고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부 비평가들은 글 속에서 재범이 하고자 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제대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그 글이 쓰여진 시점은 재범의 ‘치기 어렸던’, ‘철없었던’ 혹은 ‘건방졌던’ 과거였을 뿐이라고(그래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표현이 상당히 거칠긴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답답한 심정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좀 더 나아가 한 비평가는 재범의 글을 “저급한 상품문화에 포섭된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쓴 소리”로 번역하기도 했다.

 

어떤 측면에서 이번 사태는 ‘악의적 번역’(재범에 대한 비난의 근거)과 ‘호의적 번역’(재범의 알리바이) 사이의 갈등 과정으로 읽힐 수도 있다. 담론 속에서 제시된 재범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악의적 번역에서 호의적 번역으로 옮겨감으로써 나타나게 된 것이다.

 

악의적 번역에서 재범은 한국을 폄하하고 한국민을 모욕한 죄인이지만, 호의적 번역에서 그는 상품화된 대중문화에 쓴 소리를 하거나 철없었던 과거를 극복하고 어른이 된 사람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두 번역 모두 너무 적거나 너무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두 입장 모두 재범의 글이라는 오리지널에 대한 번역을 수행함으로써 올바른 번역과 그렇지 못한 번역의 대립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원본과 파생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다. 두 입장은 오리지널이 의미의 기원이며, 번역된 것은 기원에서 파생된 해석에 불과한 것이라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리지널 혹은 원본으로 알려진 것이 어떤 확고한 입장이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그 원본이 충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 그 원본이 어떤 의미의 결여를 가지고 있어서 번역 과정에서 파생된 것들의 보충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진 의미를 완성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번역들의 경합이 오히려 오리지널의 의미를 보충하고 결정하는 요인이라면 어떨까?

 

여기서 원본이나 오리지널(재범의 글)의 위치는 토착적인 것 혹은 국가로 소급되는 정치성이 차지한다. 그렇다면 오리지널의 결여를 문제시 하는 것은 국가로 소급되는 토착성(nativism) 자체가 의미의 불충분함과 결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국가로 소급되는 토착성 자체가 고유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담론의 형성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2PM의 재범은 더 이상 이 사태의 핵심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재범 문제라고 명명했을 때 이미 거기에는 이러한 담론이 발생시키는 효과의 핵심을 굴절시키는 전도의 논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논란이 계속되는 과정, 즉 재범을 둘러싼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 속에는 이미 재범은 없다. 거기에는 대신 미완의 국가 정체성과 토착성을 (때때로 그것에 대한 저항 혹은 비판까지도 흡수하면서) 완성시키는 무엇인가가 공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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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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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Erfahrung) - 발터 벤야민, 1913, trans by 민호

벤야민이 1913년에 쓴 ‘경험(Erfahrung)’이라는 글이다.

원문은 독일어이지만 내가 독일어를 못하는 관계로 영역본을 기초로 번역했다.

내가 참고한 영역본은 Havard University Press에서 나온 벤야민 선집이고(이 선집에서 이 글은 제일 처음 실려 있다), Lloyd Spencer와 Stefan Jost가 영역했다.

벤야민 영역본에는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이 구분되지 않고, 둘 다 Experience로 번역되어 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이 글에서도 경험(experience)이라는 단어만 나오고 있다. 아직 독어판과 비교해 보지 못한터라 Erlebnis도 Experience로 번역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경험과 체험이 이 글에서도 (표기는 경험으로 되어 있지만, 내포된 의미를 보면)명확히 구분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뒷부분에서 경험으로 번역한 몇몇 부분은 체험으로 옮겨 적어야 의미가 명확해 질 듯 하다. 이 구분은 벤야민의 사상을 연구할 때 핵심적인 내용을 가진 것이므로 개념적으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벤야민은 영상 매체가 대중에게 던지는 충격을 체험이라고 말한다. 경험에 대한 체험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상징계에 대한 실재의 침입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나는 여기서 경험=상징계, 체험=실재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벤야민에게서 이 두 개념의 구분은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떠들어도 이 글을 번역해서 올리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 글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태해지려할 때,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어떤 것이든 전환점이 필요할 때 즐겨 읽는 글이다. 내 영어(와 번역_ 실력의 미천함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읽기 싫은 사람은 안 읽으면 되니 내 책임은 아니겠지... 라고 정당화해 본다. 아직 초벌 번역이라 문장이 이상한 데가 많을테니 감안하고 읽어 보시길.


추가 : 연구소의 로아님이 벤야민 독어판 전집을 가지고 있어서 비교해 본 결과, 이 글에 나오는 경험이라는 단어는 모두 Erfahrung으로 나와 있었다고 합니다(로아님 확인 감사^^). 그리고 영어로 sprit(독어 Geist)이라고 되어 있는 용어를 제가 영혼이라고 번역했는데, 보통 독어의 Geist는 영어로 spirit로 번역되는데 한글로도 정신으로 옮기는 것이 통례라고 지적해주셨습니다. 제가 영혼이라고 번역한 것들(옆에 spirit이라고 영문표기를 달아놓았습니다)은 정신(geist)라고 생각하고 읽으시면 됩니다. 다만 제가 spirit을 영혼으로 옮긴 것은 without spirit과 같은 문구가 나와서 인데,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정신 없이'정도가 되서 어감상 오해의 여지가 있으리라 판단해서입니다. 정신없다는 말은 우리말에서는 관영어구처럼 쓰이기 때문에 벤야민이 쓰는 맥락과 조금 다르게 다가올수 있으니까요. 어쨋든 이런 점 주의해서 읽으시면 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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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Experience, Erfahrung, 1913) - 발터 벤야민


adami-benjamin_2.jpg   책임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가면 쓴 이들에 맞서 싸운다. 어른들의 가면은 ‘경험’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표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고 항상 동일하다. 어른은 항상 이미 모든 것을 경험했다: 젊음, 이상, 희망, 여성. 그것은 모두 환상이다. - 종종 우리는 겁먹거나 괴로워한다. 아마도 그는 옳다. 우리의 반론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다.[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가면을 벗기려 시도해 보자. 어른이 경험한 것은 무엇일까? 그가 우리에게 증명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그 역시 한 때 젊었었다는 것, 그 역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했었다는 것, 그 역시 그의 부모에 대한 믿음을 거절당했다는 것, 그러나 그들이 옳다는 것을 삶이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보자, 그는 훌륭한 방식으로 웃는다.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다. - 그는 미리 우리가 살아갈 (진지한 삶의 기나긴 엄숙함 이전에 오는)철없는 환희의 세월들을 평가 절하한다. 이렇게 선한 것, 교화된 것. 우리는 우리에게 짧은 젊음을 허용조차 하지 않는 씁쓸함(bitterness)이라는 다른 선생들을 알고 있다: 진지하고 엄한, 그들은 우리들을 삶의 고역으로 바로 밀어 넣는다. 양자의 태도는 우리의 세월들을 평가절하하고 파괴한다. 게다가 감정에 엄습 당한다: 우리의 젊음은 짧은 밤이다(환희로 채워라); 그것은, 타협의 세월들, 관념의 빈곤, 그리고 활력의 결여와 같은, 거대한 ‘경험’에 뒤따라 올 것이다. 그런 것이 인생이다. 그것이 어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경험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그들의 경험이다. 이 하나, 결코 다를 것 없는: 인생의 무의미함. 그것은 잔인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훌륭하거나 새롭거나 진취적인 어떤 것을 장려한 적이 있던가? 아니다, 명확히도 이것들은 경험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 - 진실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 - 는 그 자신 안에 지평을 수립한다. 그럼, 경험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 그리고 이 속에 비밀이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위대한 것, 의미 있는 것에 시선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속물(the philistine)은 경험을 그의 복음으로 취한다. 그것은 그에게 인생의 공통성에 관한 메시지가 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거기에 경험과는 다른,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험될 수 없는 가치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포착하지 못한다.

   속물에게는 왜 삶이 의미도, 이유도 없는 것일까? 그는 (다른 것은 모른채) 경험만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sprit)의 부재와 황량함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공통적인 것 그리고 항상-이미-낡은 것 외에 다른 것과 내적 관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경험이 우리에게 줄 수도 앗아갈 수도 없는)다른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비록 지금까지의 모든 사상들이 잘못된 것이라 해도,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혹은 비록 아직까지 그 누구도 완료하지 못했다 해도 지속되어야 하는 충실함을 알고 있다. 그런 것들은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 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나이든 이들은, 피곤한 몸짓과 초연한 절망으로, 모든 것에서 옳은 것일까? 다시 말해, 우리가 경험한 것은 후회일 것이고, 초석이 되는 용기, 희망, 의미는 경험될 수 없는 것이라는게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영혼(spirit)은 자유로울 게다. 하지만 또 다시 삶은 쇠약해질 것이다. (경험의 총체인)삶은 위안 없는 것일 뿐이므로.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런 물음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혼(spirit)과 함께 그런 낯선 삶을 인도해야 하는가? 그들의 나태한 자아는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같은 삶에 의해 농락당해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 각자의 경험은 값어치가 있다. 우리 자신은 우리만의 영혼으로 그것들에 값어치를 투여한다 - 경솔한 그는 착오에 만족한다. 그는 탐색자에게 “너는 절대 진리를 찾을 수 없어”라고 외친다. “그것이 내 경험이야.” 그러나 탐색자에게 ‘착오는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스피노자). 다만 어리석은 자에게 그것은 의미와 영혼이 결여된 경험이다. 아마 맞서는 자에게 경험은 고통스럽겠지만, 그를 절망으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어째든, 그는 결코 덤덤하게 포기하지도, 속물의 리듬에 마취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은 속물에게 ‘(당신은)모든 새로운 무의미함 속에서 기쁨만 느낄 수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그는 옳음 속에 잔존한다. 그는 스스로 재-확신 한다: 영혼(spirit)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영혼’ 앞에서 위대한 경외와 가혹한 복종을 요구하는 이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비판적이 된다면, 그도 그가 만들 수 없는 것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지에 반해 그가 겪는) 영혼의 경험 조차도 그에게는 무관심한 것이 된다. 


그에게 말하라
그가 한 사람의 남자/어른(a man)이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젊음의 꿈을 우러러보아야 한다는 것을.
(프리드리히 실러, 돈 카를로스 중)


   속물에게는 “그의 젊음의 꿈”만큼 꺼림칙한 것이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감성적임은 그의 혐오의 보호적 위장이다. 왜냐하면 그의 꿈에서 그에게 나타난 것은 (모두에게 그렇듯이, 예전의 그를 부르는)영혼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젊음이 끊임없이 그리고 불길하게 그를 일깨우는 어떤 것이다. 그것이 그가 젊음에 적대적인 이유이다. 그는 어린 사람들에게 그런 무서움(압도적인 경험)에 대해 말하고, 그들에게 그들 자신을 비웃도록 가르친다. 특히 영혼 없이 경험하는 것이 편하다고, 만약 되찾을 수 없다면.

   다시: 우리는 다른 경험을 알고 있다. 그것은 영혼에 적대적이고, 피어나는 꿈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범접할수 없고, 가장 직접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젊음을 유지하는 동안 결코 영혼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짜라투스트라가 말했듯이, 개인은 방황의 끝에서만 자신을 경험할 수 있다. 속물은 그만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속적인 영혼없음(spiritlessness) 중의 하나이다. 젊음은 영혼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가 덜 쉽게 위대함을 얻을수록, 방황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영혼과 더 많이 대면할 것이다. - 그가 남자/어른이 되었을 때, 젊음은 측은하게 될 것이다. 속물은 불관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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