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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11
    폭력의 과잉이라고? 과잉의 폭력이 아니고?
    와라

폭력의 과잉이라고? 과잉의 폭력이 아니고?

   언제부터인가 폭력의 문제가 도덕의 문제로 환원되어 가고 있다. 이번 민노당의 강기갑 의원이 벌인 ‘액션 활극’을 두고 말이 많다. 조선일보는 국회가 “폭력에 굴복”했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자유선진당의 이회창은 “이번 폭력사태를 야기한 행위자”인 강기갑 의원에 대해 “즉각 고발 등의 조치”를 취하여 “엄격한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기갑 의원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폭력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규탄하고 있다. 오늘도(1/9) 한나라당의 홍준표는 “민주당이 또 폭력으로 상임위를 틀어막겠다고 하면 국민들도 이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어떤 목표가 있더라도 수단이 정당하지 않으면, 특히 폭력이 그 수단이라면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언의 근저에는 폭력은 무조건 도덕적 해악이라는 판단이, 혹은 그러한 판단을 유도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좀 더 멀리 가서 (벌써 ‘작년’이라고 불러야 하는) 2008년에 있었던 촛불집회를 생각해보자. 생각지 못했던 많은 이슈들을 만들어낸 이 집회에서 별로 다루어지지 않은 중요한 쟁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폭력의 문제이다. 시종일관 비폭력을 외치며 정부에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려했다.(물론 집회 참가자와 경찰들의 잦은 충돌이 발생했지만, 이것이 촛불집회의 비폭력적 경향의 반증이 되지는 못한다) 집회 내부에서는 몇 번의 논쟁이 있었다. 물대포 앞에서, 명박산성 앞에서, 전경에게 구타당한 어느 시민 앞에서 말이다. 그러나 매번 논쟁은 폭력의 의미에 대한 성찰보다는 폭력의 도덕적 결함으로 결론지어졌다. 집회 참가자와 경찰의 충돌이 발생할 때, 누가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는가? 누가 더 많은 폭력을 행사했는가가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 대상이 된다. 정작 집회 참가자와 경찰 신분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폭력은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발생한 폭력보다 더 많은 폭력들이 보도 되고, 그 의미도 과잉되어 간다. 이 과잉된 이미지들을 통해 폭력은 그것이 가진 의미를 상실한다. 이 지점에서 타협이 불가능한 윤리의 잣대로 폭력을 재단하고 그 의미를 초월해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폭력은 언제나 바로잡아야 할 예외상태로 상정된다. 그것은 정상에서 벗어난 것이고, 포섭되지 않은 낯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상태, 즉 정상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지금의 상태(State, 국가/상태)가 온갖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면?

   폭력이 그 모순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면? 프로이센의 군사학자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고 이야기 했다. 아렌트는 이를 역전시켜 “정치는 전쟁의 연속”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에 정상 상태란 없고, 일상적인 예외상태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회나 정치의 안정적인 자기 기반이라는 것은 없고, 이 사회는 오직 예외적 수단, 체제 외적 강제력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때로)폭력이 드러내는 것은 정치의 일상적인 모순 상태(/국가)라는 금지된 실재의 영역이다.

   나는 지금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폭력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양산한다는 점에서 분명 해악이다. 그러나 그 중의 어떤 폭력은 맹목적으로 비난하기(과잉) 보다 그 폭력이 드러내는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종 언론을 통해 수십 년 간 매맞고 살던 아내가 특정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편을 공격했다는 (결과적으로 남편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는) 소식을 접하곤 한다. 누가, 쉽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그 아내에게 절대악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겠는가? 그 아내의 폭력은 공고화된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는 폭력은 아니었을까? 이런 일상 속의 폭력 이외에 정치적, 경제적 시스템에 매개된 구조적 폭력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노동자를 노동자로 영구히 호명하는 노동법들 속에 녹아 있는 폭력도 있다. 파업은 이러한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다른 방식의 폭력이다.(조르주 소렐에 찬양하는 폭력은 바로 자본주의적 구조에 균열을 내는 총파업이라는 대항폭력이었다.)

   폭력은, 악으로 낙인찍힐 수 없는, 보다 세밀하게 분석되어야할 현상이다. 예를 들어 비비오르카가 제시한 정치이하(infrapolitical)의 폭력과 정치상위(metapolitical)라는 폭력의 구분, 조나단 프리드먼이 제시한 수평적 분단화와 수직적 분극화라는 구분, 마틴 루터 킹의 적대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폭력, 사르트르나 파농의 적대와 치유로서의 폭력 등 폭력이라는 이름만으로 매도될 수 없는 수 많은 폭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폭력을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외치는 비폭력의 의미 역시 좀 더 세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비폭력은 언론을 통해 자신을 비극적인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발생하는 스펙타클이라는 정치적 계산 없이는 무의미한 희생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경우 비폭력은 무폭력의 의미로 쓰인다. 비폭력의 사상적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간디는 비폭력을 무폭력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간디에게 비폭력은 ‘직접행동’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피비린내나는 무기의 사용을 동반하는 운동보다도 훨씬 적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 혹은 그것이 발생하는 장소는 거부하거나 회피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해 해석해야 할 정치적 저항의 근원(적 장소)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강기갑 의원, 민주당, 촛불집회에서 폭력이 가진 의미를 초월해 악으로 낙인 찍는 행위야 말로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폭력을 탈정치화 시키는 사건들을 정치적으로 읽어내는 작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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