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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편향의 사회 : 영상매체의 발달과 된장녀 논란 - 민호

은수 님의 '고대녀와 네이년은 한끝 차이'를 읽고 예전에 썻던 글이 생각나서 올려본다.  

2006년에 쓴 글이니 벌써 3년이 지난 글이지만... 그래도...

(예전에 문화사회 2호에 기고했었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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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편향의 사회 : 영상매체의 발달과 된장녀 논란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은 시각이다. 우리는 어딜가든 만들어진 영상들과 대면한다. 거리에서는 만들어진 영상들이 나와 함께 걷고, 집과 사무실에서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쏟아내는 영상들의 폭격을 받는다. 필자는 현대사회의 주된 특징이 이러한 시각 편향성-그 중에서도 특히 영상매체에 의존한 시각 편향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의 시각편향성은 다른 감각을 억압할 뿐 아니라 같은 시각에 의존한 매체인 활자매체마저 배제시킨 채 영상매체를 특권화 시킨다. 영상매체가 특권화되는 과정에서 기술복제가 가능한 사진과 영화 그리고 텔레비전 등의 전자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현대사회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 매체발달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매체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대상을 재현하고 인식하는 방식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글은 영상매체의 발달과정을 추적하고 그에 따른 인지방식의 변화(혹은 그 가능성)를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나아가 마지막 사례인 된장녀 논란이 발생하는 과정을 매체의 특성과 함께 분석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머물고 있는 매체발달의 지형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 사례 1. Video killed the radio star

 

   1981년 하나의 살해사건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범인은 video였고 피해자는 radio star였다. 1981년 개국한 MTV는 그들의 첫 뮤직비디오로 그룹 가 1979년 발표한 앨범에 수록된 '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내보냈다. 이 곡의 가사를 잠시 살펴보자.

 

“… Video killed the radio star / Video killed the radio star / In my mind and in my car / We can't rewind / We've gone to far / Pictures came and broke your heart / Put the blame on VCR …”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어 / 내 마음, 내 차 속에서 살아 있던 / 되돌릴 수는 없어 / 너무 멀리 와버렸거든 / 영상이 너의 맘을 짓이겼지 / VCR을 원망해라.)

- The 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 중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건 살해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은 라디오 스타의 청각 중심 음악이 시각성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청각중심의 음악에 시각성을 부여하는데 실패한 몇몇 음악인들은 살해당하기도 했고, 크게 다치기도 했다. 안타깝지만 그것은 청각에만 의존하던 음악인들의 필연적인 퇴화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청각만으로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VCR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VCR을 활용하는 것이다.

 



# 사례 2. 전화와 카메라

 

   멀리 있는 것을 소리를 통해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전화이다. 따라서 전화는 청각에 기반을 둔 매체이다. 핸드폰도 전화의 일종이고 당연히 청각에 기반을 둔 매체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청각 장애인은 전화를 사용할 수 없지만 핸드폰은 사용할 수 있다. 2001년 방영된 드라마 <엄마야 누나야>에는 청각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나왔으며 핸드폰은 타인과의 중요한 소통수단으로 쓰였다. 핸드폰에는 시각에 기반한 소통 수단인 문자 서비스 기능이 있다. 따라서 당연히 청각장애인도 사용 가능하다. 근래에 나오는 핸드폰에는 문자 서비스 외에 중요한 기능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이 바로 ‘카메라’ 기능이다. 요즘은 카메라 없는 핸드폰은 구하기도 힘들다. 카메라 없는 핸드폰은 잘 팔리지도 않는다니 핸드폰에 카메라는 필수적인 구성요소라 할 수 있다. 핸드폰 기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게임과 인터넷은 기본이고, 작년에는 핸드폰에 텔레비전마저 부착되었다. 이쯤 되면 핸드폰은 더 이상 전화가 아닌듯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핸드폰이 전화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오늘날 시각과 청각이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마샬 맥루한에 따르면 (알파벳의 발명과 함께) 인쇄술의 발달 이후 인간의 감각은 시각에 편향되어 왔다. 활자매체를 접하기 위해 인간은 시각을 사용해야 했다. 활자매체를 해독하기위해 시각을 주된 정보 수용 감각으로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경험은 단편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선형적 문자에 따라 선형적 사고가 복합적인 비선형적(혹은 직물적) 사고를 가로막아왔다.(선형적 사고에 대해 빌렘 플루서는 그의 글 ‘코드화된 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의 텍스트를 해독하려면(읽으려면) 눈은 행을 따라 미끄러져야 한다. 행의 마지막에 가서 비로소 우리는 메시지를 수신해 그것을 요약하고 종합하도록 해야 한다. 선형의 코드는 그것의 통시성을 동시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전진적인 수신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결과 새로운 시간 체험이, 말하자면 선형의 시간, 철회할 수 없는 진보의 흐름, 반복 불가능성이라는 극적인 상황, 구상, 간단히 말해 역사라는 새로운 시간 체험이 생겨난다.” 플루서의 이러한 관점은 뒤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맥루한은 이를 시각이 다른 감각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특권화시키는 일종의 왜곡이라고 본다. “시각 기능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알파벳은 어떤 문자문화에 있어서도 청각, 촉각, 미각과 같은 시각 이외의 감각의 역할을 줄여버린다(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맥루한은 활자매체 이후 전자매체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가 보기에 전자매체는 활자매체의 시각편향적인 왜곡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매체였다. 맥루한이 전자매체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텔레비전을 논의의 중심에 둔다. 텔레비전은 시각에 청각을 결합시킴으로써 활자매체에 의해 잠식된 청각을 복원시키는 매체이다. 즉 그에게 텔레비전은 단편적인 경험이 아닌 종합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이다. 텔레비전을 시각과 청각의 종합적인 매체로 본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맥루한이 텔레비전을 정세도definition가 낮고 참여도participation가 높은 쿨한 미디어로 본 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그의 미디어에 따른 지각방식의 변화에 대한 이론이 시대착오적인 것은 단순히 텔레비전에 대한 잘못된 분석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가 시각 편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판단 자체가 더 시대착오적이다. 앞에서 제시한 두 가지 사례는 시각과 청각의 결합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은 텔레비전과 다른 결합이다. 두 사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순수하게 청각에 의존한 예술과 매체가 시각에 의해 ‘흡수’되고 있는 현상이다.

   가장 순수하게 청각에 의존하는 예술인 음악이 시각과 결합하였다. 그것은 청각이 사라질 수 없다는 점에서 보면 결합이지만 현대의 음악 중 어떤 음악들은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는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흡수이다. 얼굴과 몸으로 음악을 하는 댄스 가수들과 영화제작비와 맞먹는 물량을 투입해서 만든 화려한 뮤직비디오들을 생각해보라. 음악은 마치 영상의 배경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또한 벨벳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들으면 앤디워홀의 바나나가, 핑크플로이드의 음악을 들으면 베를린 장벽이, 야니의 음악을 들으면 자금성이 떠오른다. 패션을 생각하지 않고 그램록과 힙합을 들을 수도 없다. 음악은 이제 청각만으로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없다. 핸드폰도 마찬가지이다. 통화 기능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카메라가 없는 핸드폰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활자매체 시대를 지나 전자매체 시대에도 시각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감각 기관이다. 그렇다면 현재도 맥루한이 말한 시각편향의 구텐베르크 은하계에 속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금 시대는 활자매체 시대와 다른 시각 편향을 보이고 있다. 활자매체 시대와 다른 지금 시대의 시각편향의 특징을 포착해 내기 위해서는 레이 초우를 따라 루쉰의 사례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 사례 3. 뉴스영화와 루쉰

 

   루쉰은 의학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인이 처형당하는 영화(슬라이드)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충격을 받은 루쉰은 사람들의 병든 몸보다 병든 마음을 개조하는게 더 시급한 일임을 인지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영화 매체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담고 있는 레이 초우의 책 <원시적 열정>은 이처럼 루쉰을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만든 (루쉰 자신이 서술한) 에피소드를 분석하면서 시작한다. 레이 초우는 루쉰의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새롭게 출현하고 있던 ‘근대성’이, 특히 시각에 기초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는 세계 곳곳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루쉰의 경험은 마르틴 하이데거와 발터 벤야민과 같은 유럽 지식인들이 근대에 대해 썻던 것을 선취했다. … 잔니 바티모는, 아주 상반된 내용의 하이데거와 벤야민의 두 논문이 같은 해인 1936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그들이 최소한 ‘방향감을 상실했다는 것에 대한 집착’이라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 루쉰이 충격 속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영화라는 미디어에 의한 확장과 증폭의 과정’이라는 것은 거의 지적된 바가 없다(레이 초우, 원시적 열정).”

 

   루쉰의 에피소드는 영상이 근대인에게 가져온 충격과 그 영향력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서 규명되어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루쉰은 영상매체에 충격을 받았는데 ‘왜 활자매체를 병든 맘을 치유하는 수단으로 선택하게 되었는가’하는 것이다. 초우는 이를 ‘전향’-나아가 ‘물러남’과 ‘도피’라고 표현한다. “‘신체’가 아닌 글쓰기를 통해서 중국의 ‘정신’을 치유하겠다는 루쉰의 결심은 일종의 '물러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초우는 ‘루쉰의 물러남’을 통해 과거의 활자매체와 현대의 영상매체의 차이를 포착하고 있다.

 

“루쉰이 택한 문학으로의 전향이라는 ‘해결책’은 말의 의의를 계속해서 특권화한다는 오래된 대책이었다. … 루쉰의 이야기에는 의학에서 문학으로의 근본적인 전향말고도 또 하나의 다른 전향, 즉 ‘전통으로의 재전향’이 있다. … 루쉰이라고 하는 박학한 남성 지식인은 ‘문자텍스트로 도피’했는데, 그것은 초국적 제국주의의 한가운데서 학살당하는 중국인 남성이 야비하고 잔혹하게 전시되는 것을 은폐하는 것이 된다(레이초우, 원시적 열정).”

 

   활자매체와 영상매체는 둘 다 시각 편향의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영상매체와 활자매체 사이에는 초우가 문자텍스트를 ‘전통’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볼 수 있는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 차이는 초우가 루쉰에게 문자 텍스트로 도피함으로써 전시되는 것을 은폐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우는 활자매체가 영상매체가 가진 날것의 느낌과 그것이 보여주는 시선, 다시 말해 영상을 통한 재현의 충격적 사실성과 제 3세계를 대상화하는 제국주의의 시선을 은폐시킨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은폐는 활자매체의 전통이 영상매체의 새로움을 억압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시각은 “억압되어도 반드시 돌아온다. 쓰기와 읽기 개념을 내부에서부터 변화시키기 위해서.” 초우에 따르면 루쉰의 소설은 과거의 소설과 상당히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과거 왕조의 전통적인 소설이 장광설이었던 데 비해, 짧은 문학형식은 압축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메시지를 전하는 언어텍스트이다.” 초우는 근대의 소설쓰기 방식의 변화를 포착하여 영상문화가 어떻게 전통문화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초우가 보기에 “그것은 그림이 텍스트가 되는 문제가 아니라 언어텍스트가 그림으로 변화하는 문제이다.”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전통과 구별되는 현대사회의 시각 편향은 사진과 영화로부터 출발한다. 벤야민은 사진과 영화를 찍는 기술적 도구인 카메라를 통해 인간의 지각 방식이 변화할 것이라 예언했다. 카메라는 클로우즈 업과 고속촬영을 통해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를 탐구할 수 있게 했고 이는 시각의 변화와 함께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영상매체는 그 기술적 잠재성을 실현하여 활자매체와는 다른 시각 편향을 가져왔다. 카메라로 대표되는 영상매체의 기술적 가능성은 바로 그 새로움에 있다. 활자매체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생각이 고정되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자기 완결성을 갖는다. 그 자기 완결성은 선형성의 외부를 사유할 수 없게 한다. 활자매체 안에서 우리는 활자매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플루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어는 ‘논리’라고 불리는 규율을 따르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언어는 방언적․상상적 그리고 모든 비언어적인 사고를 비판하는 데 막강한 도구가 되었다. … 문자언어는 탈신비화 및 탈마술화를 위한, 곧 계몽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논리적 규율을 지키는 문자언어는 서양의 사고에서 강력한 우위를 차지한 나머지, 그 규칙, 곧 논리는 모든 사고규칙과 동일해졌다. 사람들은 우리가 비언어적으로도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기 시작했다(플루서, 코드전환)."

 

   영상매체는 활자매체가 가진 이러한 한계를 넘어선다. 영상은 자기 완결적 텍스트가 아니다. 우리는 영상을 통해 시각적 무의식을 탐구할 수 있으며,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상은 열린 텍스트이다. 그것은 언어적 사고 능력을 벗어나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영상매체는 복제의 전면성과 전복성을 가지며, 비언어적 사고(선형성을 탈피한 직물적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기존의 시각 체제를 동요시키는 영상매체의 기술적 잠재성은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했다. 영상매체의 기술적 잠재성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는 “테크놀로지 일반이 그러하듯 정치․군사적, 산업적 논리에 의해 매개되어 제도화됨으로써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기술적 잠재성이 정치경제적 논리에 의해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배태된 영상의 범람 속에서 살고 있다. 주은우가 메츠의 말을 빌어 이야기 하듯 “영화제도란 영화 산업일 뿐만 아니라 영화에 친숙해진 관객이 역사적으로 내면화해 왔고 소비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정신적 기계’이기도 하다.” 주은우의 말에서 영화를 영상매체로 바꾼다 해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다.

   영상매체의 전면성과 전복성이 활자매체와 다른 현대사회 시각 편향의 내용이다. 우리는 루쉰처럼 영상을 통해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지만 엄청난 정보량을 자랑하는 영상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루쉰처럼 충격을 받지 않는 이유는 이미 영상을 소비하는 능력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영상매체의 또 다른 기술적 잠재성인 비언어적 사고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것이 가능하게 되기 위해서는 영상을 단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 사례 4. 핸드폰으로 찍은 영화

 

"세계 최초로,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한 장편영화가 등장했다. <버라이어티>는 남아프리카 출신 감독 아리안 카가노프가 이라는 90여분짜리 장편영화를 100%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완성했다고 보도했다. 카가노프 감독이 이 영화를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11일, 들인 제작비는 약 16만5천달러다. 감독은 소니 에릭슨 W900i 기종의 휴대폰 8대를 동원해 영화를 찍고 극장 상영이 가능한 버전으로 블로업까지 마쳤다. 카가노프 감독은 '블로업 결과도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좋았다'며 '휴대폰 카메라가 35mm카메라의 독재로부터 영화감독을 해방시켰다. 나는 기술적인 제약없이 정말 마음껏 내가 찍고 싶은 것을 찍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흥분을 감추지 않고 있다(시네21 No. 545, 순도 100% 휴대폰 카메라 영화 등장)."

 

   영상매체의 기술적 잠재성을 포괄적으로 실현할 가능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것은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 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영상매체의 일상화를 가져왔다. 영상을 소비 하던 대중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함께 영상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핸드폰에는 디지털 카메라가 달려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들은 심지어 영화까지 찍는다.) 반드시 핸드폰이 아니더라도 휴대하기 쉽고 가격도 싼 디지털 카메라나 디지털 캠코더도 이미 널리 보급되었다. 만들 의지만 있다면 비전문가도 영상을 간편하게 찍어 컴퓨터로 편집하여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위의 사례가 핸드폰으로 장편 극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가지지만 이미 몇 해 전부터 핸드폰이나 디지털 캠코더로 찍은 다큐멘터리나 간단한 영상물들이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영상을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영상 생산 과정의 비밀이 대중에게 베일을 벗고 드러난다. 대중은 영상을 생산할 수 있게 됨으로써 비로소 영상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영상의 생산이 가능해지고 나서 비로소 대중들은 영상을 통해 비언어적(혹은 직물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직물적 사고란 창조하는 것이다. 선형적 사고가 우리를 미리 프로그램화된 해석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았다면 직물적 사고는 우리를 둘러싼 울타리를 제거하고 마음껏 활개하도록 만들어 준다. 선형적 사고에서는 현재의 원인이 되는 과거-즉 이미 있는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데서 머무른다. 하지만 직물적 사고에서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대안적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주어진 객관적인 세계의 주체가 아니라, 대안적인 세계들의 기획이다.(플루서, 디지털 가상)"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우리는 직물적으로 사고하고 있는가?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함께 누구에게나 영상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영상을 생산해 내는 것이 대안적 삶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영상을 생산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원시인들은 영상을 통해 자신들의 상상력을 펼쳤다. 그들이 영상을 통해 사유한 것은 문자와 같은 소통할 수 있는 매체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시시대의 상상력은 자연을 모방하거나 허구적 표상에 염원을 담아두는 "주술적 상상력"이다. 현대사회에서 영상은 문자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이다. 오랜기간 문자를 통한 사고와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문자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인은 문자가 내포한 사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영상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현대의 상상력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타고 넘는 "기술적 상상력"이다. "기술적 상상technoimagination은 그림들을 개념으로 만든 후 그러한 그림들을 개념의 상징으로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다(플루서, 코무니콜로기)."

 

# 또 하나의 사례. '된장녀' 논란의 발생 과정

 

   몇 해 전부터 여성을 'oo녀'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개똥녀', '떨녀', '딸녀', '월드컵녀', '덮녀', '괴물녀', '귀족녀' 그리고 '된장녀' 등이 그것이다. 이 수많은 ‘oo녀’들의 탄생은 디지털 카메라와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카메라에 찍힌 여성들에게 누리꾼들이 관심을 보이며 나타나는 현상이 ‘oo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최근에 크게 논란이 되었던 '된장녀' 논란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된장녀 논란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영상매체 발달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하나의 징후로 포착되어야 한다. 2006년 여름 우리사회는 '된장녀' 논란에 휩싸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된장녀가 논란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과정이다. 사치와 허영을 여성으로 표상하는 문제적 시선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식민지 시기 '신여성(모던걸)'이나 영화 <자유부인>이 일으킨 논란이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된장녀 논란은 내용 자체로 보면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또한 '된장녀'라는 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쓰이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된장들의 저녁식사(cafe.daum.net/ihat-edwhenjang)'같은 인터넷 카페 등에서는 한국 여인들을 '된장'으로 표현, 서양 문화를 추종하고 서양 남자라면 맥을 못 추는 한국 여성들을 성토해왔다(월간 말 No. 243, 21세기 된장녀로 부활한 식민지 시대 모던걸)."

   된장녀가 논란이 되기 시작한 시점은 디씨인사이드(www.dcinside.com)에 <된장녀와 사귈 때 해야 되는 9가지>라는 만화가 올라오면서 부터이다. 몇 몇 누리꾼들이 이 만화를 보고 된장녀에 관심을 보이며 널리 퍼져 나간 것이다. 특히 초기에 된장녀는 디지털 카메라에 찍힌 - 특히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외국 브랜드를 소비하는 - 여성들의 ‘사진’과 함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된장녀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쏟아진 분석과 언론의 과잉 보도로 하나의 주류 담론이 되었다.

    된장녀가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이다. 첫째, 된장녀는 사치와 허영을 표상하는 (과거부터 있어왔던 문제적 시선의)언표로써만 존재할 뿐 실체가 불분명하다. 둘째, 불분명한 대상이 만화나 사진 등의 영상을 통해서 ‘구체성을 획득’함으로써 명확한 (지배규범을 만들어내는 남성들의)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영상은 대상을 확인 가능한 형태로 재현함으로써 구체성을 부여한다. 또한 영상은 충격적인 사실성과 구체성으로 사람들을 자극한다. 영상을 생산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영상을 통해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 사람들은 그 가능성을 살해한다. 사람들은 영상의 일차적인 직접성에만 천착함으로써 문자를 타고 넘는 것이 아니라 문자의 프로그램 안으로 흡수된다. 여기서 세 번째 과정이 완성된다. 사람들은 프로그램화된 구조 속으로 그림을 투여함으로써 그림을 보기 ‘전에’ 해석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프로그램을 만드는게 아니라 프로그램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된장녀 사례는 우리 사회가 머물러 있는 기술적 상상력의 단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영상은 문자가 내포한 사고의 결핍을 극복하는 기제가 아니라 그 결핍을 강화시키는 보족물로써 사용되고 있다. 이로써 디지털 카메라와 인터넷이라는 최첨단 디지털 매체는 대상에 대한 믿음이나 표피적 재현만을 수행함으로써 ‘주술적 상상력’과 조우한다. 이를 퇴행으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며, 필자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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