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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팅볼 투수가 되고 싶다.

새해 계획 세우고 뭐 이런거 잘 안한다. 귀찮아서.

학생운동 할 때, 해마다 연초에 올해 조직적인 목표와 개인적인 목표를 세우라고 하면

참 난감했었다. 뭐라고 대답을 하지? 학생운동은 그나마 학사행정 때문에

1년 단위로 일정한 싸이클이 반복되지만, 그래도 나에겐 너무 힘든 질문이었다.

나는 한 번도 1년 단위로 세월을 나눠서 생각해보질 않았다.

12월 30일과 12월 31일, 그리고 12월 31일과 1월 1일. 나에겐 그저 똑같은 하루 차이다.

지나가 버린 세월은 한 해 한 해 어느정도 갈무리가 되지만 남아있는 세월은 그냥 한무더기다.

어디서 쉼표가 찍힐 지, 어디서 마침표가 찍힐지 나는 알 수 없다.

 

2009년을 갈무리 해본다. 너무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다.

사는 일이 다 이별하는 일이라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관계가 멀어졌다.

앞으로는 내 곁에 어느 누구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그럴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러고 싶지않다.

 

2010년 계획 따위는 없다. 사실 내 인생 계획이 없다. 목표를 세우고 용맹정진하는거

그런 거 잘 못한다. 그냥 지금처럼 살거다.

2010년에 이룰 목표나 꿈은 아니지만, 2009년을 지나면서 꿈이 하나 생겼다.

 

내 꿈은 배팅볼 투수가 되는 거다. 속 150을 넘나드는 정통파 에이스도 아니고 방어율 제로를 자랑하는 철벽마무리도 아니다. 각해보면 지금까지 내 삶은 항상 주인공이었다. 학생운동을 할때도 선미와 창언이의 말처럼 언제나 소수파에서도 메인스트림에 속해 있었다. 골든글러브를 받을 정도로 훌륭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1군 붙박이에 누구나 이름을 알 정도의 주전급이었다고 생각한다. 전담포수까지는 아니어도 나와 호흡이 잘 맞는 포수가 누군인지 신경쓸 정도. 물론 과대망상일 수도 있다. 허나 적어도 내 스스로는 그렇게 의식하고 살아왔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 삶에 맞추기를 바라며 살았다.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가 주전이니까 당연한거였다. 그래서 내가 속한 팀이 인기없는 팀이고 약팀이었을지언정 나는 그 안에서 최소 5선발 로테이션에 항상 끼어있는 1군 주전 투수였다.

 

이제는 배팅볼 투수가 되고 싶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보지는 못했지만(그 자리에 딱히 관심도 없었으니) 충분히 할만큼 해봤다.이제는 다른 플레이를 하고 싶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고 싶다. 내가 누군가의 삶에 도움을 주고 내 희생이 다른 이들을 돋보이게 하고, 다른 타자들을 성장시키는 그런 삶. 강속구로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지 않고, 변화구로 다른 사람들을 속이며 농락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칼같은 제구력으로 꼭 필요한 공은 던져주는 배팅볼 투수. 내 자신의 기록지보다 내가 볼을 던져준 타자가 낸 성적으로 보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

 

근데 아직 나는 배팅볼투수가 몸에 익지 않았다. 여전히 승부처에 올라 살얼음판을 내딛는 것이 익숙하다. 아직 나를 완전히 죽이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타자가 배팅볼을 뻥뻥 쳐내기라도 하면 약올라 전력투구로 삼진을 잡겠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믿고 맘놓고 연습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몸쪽빠른직구를 빈볼처럼 느끼게될지 모른다. 아니 빈볼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배팅볼투수가 되고 싶다. 에이스 투수가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하는 것처럼

배팅볼투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내가 빛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는 삶, 참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렇게 한 번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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