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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10/21
    20071020 -- 대선후보 정책평가
    땅의 사람
  2. 2007/10/21
    20071017 -- 사실감 부족
    땅의 사람
  3. 2007/10/16
    20071014 -- 오대산 산행
    땅의 사람
  4. 2007/10/07
    20071007 -- 버마 민중학살 규탄과 민주화 지지 국제 공동행동
    땅의 사람
  5. 2007/10/01
    20070929 -- 버마 민주화운동 지지를 위한 촛불문화제
    땅의 사람
  6. 2007/09/30
    20050507 -- 고딩들의 외침
    땅의 사람
  7. 2007/09/30
    20050515 -- 광주 망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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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9/30
    20041128 -- 고구려 유적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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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9/30
    20041031 -- 부여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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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9/30
    20041016 -- 빨치산 전적지 답사 (임방규선생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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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0 -- 대선후보 정책평가

100인 유권자위원회 2007대선 정책 평가 위크숖

 

 

구태의연한 정치와 미디어때문에 정치가 이미지 정치로만 흐르면 안되고

정책에 대한 분석 및 평가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첫걸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대선 후보들이 직접나온건 아니지만 그나마 캠프의 관계자들이 나와서 정책에 대한

설명과 유권자위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후보 - 이용대정책위의장

한나라당 이명박후보 - 국회의원 전재희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후보 - 류근관 교수

문국현후보 - 신봉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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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7 -- 사실감 부족

지난 주에 일때문에 목포에 갔었습니다.

하룻밤 자야했기에 어느 호텔에 자리를 잡았고 밤에는 목포의 세발낙지를 맛보았습니다.

 

다음날 호텔을 나서기 전에 로비에 걸린 그림을 보았습니다.

어제밤에 본 낙지 아줌마를 그린 그림인듯 싶은데...어딘가 이상합니다.

 

 

바닷바람을 맞는 사람들은 저렇게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도톰한 입술과 관능미가 느껴지는 목덜미는 아줌마가 아니라 아가씨로 보입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수건인지 머리카락인지 불분명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수건이라면 저렇게 어두운 색의 수건을 쓰는 아줌마는 거의 없으리라 추측이 되고

흰머리가 있는 머리카락이라면 제법 나이가 되신 분인데 목덜미와 손이 

저렇게 고울수가 없겠지요.

 

 

한마디로 사실감 부족입니다.

경험하지 않고 상상으로 그린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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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4 -- 오대산 산행

#1 산은 참 예쁩니다.

산에게 예쁘다는 형용사가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고마고마한 등성이와 바위들,

돌멩이 하나 하나가 예쁘게 보입니다.

 

바람소리, 새소리, 낙엽소리, 물소리... 모든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소리입니다.

마주치는 이들에게 싫든 좋든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를 나누고픈 곳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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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7 -- 버마 민중학살 규탄과 민주화 지지 국제 공동행동

버마 민중학살 규탄과 민주화 지지 국제 공동행동

2007. 10. 7. 14시

서울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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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9 -- 버마 민주화운동 지지를 위한 촛불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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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7 -- 고딩들의 외침

2005. 5. 7. 광화문 교보문고옆

 

고1 동생들이 할 말이 많아서 모였다.

요즘 나오는 내신이니 본고사니 하는 제도에 대해선 난 잘 모른다.

그리고 이들이 하고픈 말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를 잘 못하겠다.

하지만 나도 같은 학생시절이 있었고 머리 빡빡 밀고 아침일찍부터 밤 늦게 까지 학교에서

숙식하듯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계같은 삶이 싫었고 오늘날 까지도 그 삶이 계속되기에 오늘의 이 집회에 대해서 박수를 보낸다.

 

그들도 할 말이 있고 하고싶은걸 할 자유가 있다.

경쟁위주의 학창시절을 사회는 다 그렇다고 무마하지 말고 친구를 적으로 만들지 마라.....

 

#1

 

양해를 구하고 동의를 얻어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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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찰 6,000명 교사와 교육청관계자들이 쫙~깔린 광화문.

연신 터지는 카메라 후렛쉬.. 학생들은 긴장했다.

얼굴을 가리거나 마스크를 쓰고 추모제에 참여했다.

오늘 만큼은 그들 얼굴을 직접찍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우리언론은 3류 아니 4류도 못된다.

기자들은 행사진행에 방해가 되건말건 자기들 촬영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학생들이 바닥에 앉을 자리까지도 점령하고 취재에 열을 올렸다.

 

나는 보았다.

기자들 당신들이 얼마나 저질인지를..

주최측에서 거의 애원조로 행사장 밖으로 나가달라는 수십번의 협조방송을 무시하고

촬영에만 열을 올리는지를.

 

부끄러워 하십시요...

기자이기 이전에 사람이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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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15 -- 광주 망월동

2005. 5. 15 - 5. 16
광주 전남대, 망월동, 금남로 그리고 페트리어트 미사일 미군기지

돌아오는 차안에서 누군가 2박3일은 다녀온듯하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일들을 하였고 많은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힘든 길이였지만 반드시 필요한 길이고 누구나 한번 쯤 가야할 길이라

생각해 봅니다.

언뜻 생각해 보면 미군기지에서 철조망을 뜯어낸다는 것이
거만한 그들에게 무슨 해로움을 줄까 싶은 생각이 들지만
곱씹어 생각해 보건데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일이라면
이로움과 해로움을 떠나 필요한 일이라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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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8 -- 고구려 유적 답사.

2004. 11. 28. 고구려 유적 답사.

 

동북공정(東北工程)...

동북변강역사~~연구공정의 줄임말로 중국 동북 변경지방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일련의 연구 작업으로

2002년 시작하여 2006년까지 계획되어 있다.

중국인구에는 90%의 한족이 있고 나머지 인구중에 55개의 소수민족이 주변부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리고 그 56개의 민족가운데 5개의 민족이 주변에 모국(母國) 또는 망명정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몽고족(몽고), 조선족(남한과 북한), 하사크족(카자흐스탄), 티벳족 (달라이라마의 망명정부)

그리고 대만.

 

현재 대만은 독립한다고 하고 티벳 문제도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그렇게 독립을 원하는데 그냥 독립을 허용하면 안될까? 하지만 그건 도미노처럼 다른 소수민족의

연쇄독립을 불러올 것이고 그러다간 그곳의 지하자원은 둘째치고 국토또한 지금의 반도 안남게 될꺼다.

 

만약 이들 소수민족이 동시다발로 독립을 요구한다면? 그건 중국이 가장 싫어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조막조막한 무리들이 개길때는 그럭저럭 어르고 달랬지만 같은 목적으로 지들끼리 뭉친다면...?

고구려때문에 수나라가 패망한 걸 은근히 부끄러워하며 불안해하는 그들이 남북이 통일되어

간도에 대해 주권을 주장하거나 남북한과 조선족과 동북3성 지역의 민족이 우리민족의 기치아래

민족주의로 뭉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중국이 택한건 역사를 이용하는 것이다.

중국의 이 계획은 집요하고 장기간 준비해오고 있었다.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를 그들의 역사로 편입하려하고 있다.

나아가 고조선, 발해의 역사까지 왜곡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역사는 시간적으로는 2000년,

공간적으로는 한강 이남에 국한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중국은 동북지역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하고 사전에 이 지역의

역사를 중국사로 공언해 둠으로서 통일 한국에 대한 향후 상황변화에 대비하고자 하며 또한 과도기

한반도에 대해 개입의 여지를 확보해 두려고 한다.

 

최근 동북공정이 문제가 되자 외교부에서 경제력으로 중국정부와 외교를 벌인다고 했다.

후후후 우리나라 인구만큼의 중국인구가 최상류층으로 한끼에 우리돈으로 수백만원어치의

식사를 한다든지...

우리는 기껏 고구려 역사연구를 위해 수억원 쓰면서 중국은 수십억원을 쓰는걸 아는지...

2002년에 동북공정을 시작했다고 정말 그때부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지...

지피지기(知彼知己)해야한다...

 

#1 오두산성.

답사자료에는 테뫼식으로 축성된 석성(石城)이라지만 안개가 껴서 이게 산인지 섬인지 구분도 힘들었다.

그저 안개의 분위기에 빠져 묘한 느낌을 즐기기 바빴다.

오두산성에 대한 설명을 듣기위해 가는 일행

 

#2 어느덧 오두산성은 머리속에서 지워지고 통일전망대를 오른다.

근데 이건 뭐야? 여기에 이게 왜 있지?

통일전망대와 2002월드컵... 아무리 생각해도 연결이 안되네...

 

#3 폭3.2Km의 임진강 건너 북한이 보인다.

미니어쳐이지만 지금 밟고 있는 땅이 새롭게 느껴진다.

맑은 날에는 북한 주민도 보인다고 한다.

 

#4 남과 북의 말이 다르다.

북의 말이 주체성을 살린 말이라고는 하지만 이러다가 나중에 서로 말이 안통하면 어쩌나 싶다.

 

축구용어의 차이

헤딩슛-머리받기, 골든골-금골, 프리킥-벌차기, 골키퍼-문지기, 조별리그-조연맹전, 토너먼트-승자전,

터치라인아웃-직선바깥, 공점유-공관할, 홈그라운드-자기마당, 페널티킥-11m벌차기,

시뮬레이션-엄살동작, 미드필드-중간지대, 핸들링-손다치기.....시뮬레이션은 정말 웃긴다.

 

#5 호로고루성.

성이라 하면 수원성 정도는 해야 볼만하겠는데 이건 작은 언덕만한 성이다.

근데 가만...수원성은 조선후기 정조때 지은 성이구 이 성은 5세기때 지은 성이다.

한 1000년넘게 차이가 나니 어찌보면 이 정도 보존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봐야하네.

 

늘 크고 웅장하고 용맹하다는 고구려의 선입견때문에 나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려하네.

자료를 뒤져보니 이일대에서는 4~7세기까지 고구려-신라는 16차례,

고구려-백제는 31 차례(혹은 33차례), 백제-신라는 29차례에 걸쳐 피말리는 전투를 벌였다고한다.

피말리는......

 

#6 나무와 풀과 같은 건 시간이 지나면 모양이 변하지만 돌은 그대로이다.

그래서 오래 남는 것들만 역사의 유물이 되나 보다..

사용 도구로 나누면 돌-청동-철이 되는데 맨앞에 원래는 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7 호로고루성에서 바라본 임진강.

물이 깊지 않아 적들이 강을 건너가기 쉬워 이성에서 적들의 도하를 감시했다고 한다.

삼국의 국경하천이었으며, 훗날에는 신라와 당나라가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왜 하필 호로고루냐?

무릎 정도밖에 차지 않은 이곳은 임진강 하류에서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널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기 때문이다.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 전차부대도 개성에서 문산쪽으로 직진하지 않고 20㎞나 우회,

호로고루 여울목을 도하했다고 한다.

 

#8 이것이 치인지 보루인지 잘 모르겠다.

설명은 들었는데 잊어 버렸다. 성벽과 같은 높이로 성벽위에서 감시할때 사각이 생기는 부분을 이

시설물이 보완한다고 한다.

승용차로 치자면 사각잡는 보조거울이라고나 할까..

 

 

#9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능에서 자원활동으로 관광객에게 설명해주시는 분이다.

상당한 역사지식의 소유자라는 생각은 들지만 어째..우리일행과의 의사소통에는 원활하지 못했다.

직접 절을하며 왕능에대한 예절을 일러주셨지만 내게는 그리 와닿지 않았다.

 

#10

 

#11

 

조선 영조시기에 보완된 왕릉의 묘비다. 6.25 전쟁의 흔적으로 묘비에 탄흔이 선명히 있다.

얼마나 아팠을까...

 

 #12 당포성

 

#13 임시보호용으로 시커먼 보호비닐을 덮어두었다.

 

#14 당포성에서 바라본 임진강

 

#15 당포성위에서 임진강을 바라보는 우리 일행.

 

 #16

 

아무리 군사시설을 보고다니지만 저런 참호는 보기싫다.

깔끔하게 마루리된 참호는 군인들이 흘린 땀방울이 흐르는 자국같다.

 

#17 열심히 인터뷰를 따는 일행들. 좋은 인터뷰화면이 나올 듯 합니다.

 

#18 은대리성으로 이동중에 어느 민가 담벼락을 치장한 모습에 걸음이 멈춘다.

후후후 특이하네.. 근데 이 돌들은 바닷가 돌인데...돈 좀 쓰셨군요...

 

#19 어른 허리정도 높이의 은대리성은 보기에 안타까웠다.

성 높이가 허리높이라...

성위를 걸어가다 그 때 쓰였을 법한 돌이 눈에 든다. 이돌은 잘 알겠지..

은대리성이 그 당시 어떠했을지....

 

#20 은대리성에서 바라본 임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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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31 -- 부여답사

백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15년, 춘정월(春正月)에 궁실을 새로 지었는데
儉而不陋 華而不侈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유홍준 창작과비평사 1997)
백제의 문화를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한다고 합니다.
 
2004. 10. 31. 부여 답사.
 
BC 18. 시조 온조왕 위례성(한성)에서 즉위
백제는 마한의 소국으로 출발했기에 백제의 시작을 이 시기로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강학(講學)상 이 시기를 시작으로 본다.
AD 32. 남한지역에서 처음으로 벼농사
132. 북한산성 축조
232. 고이왕 즉위
346. 근초고왕즉위(~375)
371. 고구려 평양공격
475. 고구려 침입, 웅진(공주)천도
538. 성왕 사비(부여)천도.
641. 무왕죽고 의자왕즉위
660. 계백전사, 백제멸망.
 
한성시대(bc 18 - ad 475)
지금의 서울이다. 고교 국사시간에 배웠듯이 삼국은 한강유역을 차지하려고 서로 동맹을 맺기도
하고 적대시 하기도 했다.
근데 지금의 서울이 백제의 수도로 500년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 첨 들은것처럼 생소하다.
내가 무식한 것도 무식한 거지만 우리 역사가 백제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조선왕조 500년이란 말은 많이 쓰지만 그보다 더 긴 백제왕조 678년은 안 쓰니까.
아마 패배자의 역사이기에 그러하리라.
한성시대의 유물은 풍납토성과 , 몽촌토성이다.
난 이게 백제 유물인지도 몰랐다. 쪽팔려라~~
판축(版築-흙을 얇은 층 모양으로 다져서 쌓아올리고 다시 사람이 밟아서 여러 층으로 이루어짐)
방식으로 쌓은 토성은 요즘 군인이 쌓는 진지보다 더 튼튼하다고 한다.
그 길이는 수Km이며 폭은 넓은 곳이 45m도 있다고 한다.
꼭 한번 가봐야겠다.
 
웅진시대(475-538)
웅진은 공주다. 공주는 분지로 되어 있어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그러다 보니 배산임수니 뭐니하는 것도 없이 급조한 것이다.
처음 이곳을 수도로 천도한 왕은 성왕인데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밀려 대충 정한 것이 웅진이였다.
자료를 보면 이곳에서는 고분이 한 특징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곳은 차안에서 지나가면서 봤을 뿐이다.
 
사비시대(538-660)
이번 답사의 장소이고 백제의 문화가 중흥기와 멸망기가 동시에 일어난 시기이다.


손병주선생님


 

능산리 고분군
이런데 오면 저 무덤안에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데..전혀 그렇게 할 수 없다.
난 거기 죽은 사람이 누워있는 관에도 한번 누워 보고 싶은데...

그래~ 이렇게 상품화하면 어떨까? 한번 누워보는데 만원...

 

 










정림사지 5층석탑
사비천도 이후 건립, 높이는 8.33m, 총 149개의 화강암 돌맹이를 이용해 잘 짜 맞추어 올린 탑.
멀리서, 중간에서, 가까이서 볼때마다 탑의 느낌이 다르다 하는데..정말 다르다.
그렇게 볼 수 있는건 환상적인 황금비율을 적용했기에 가능하단다.
자료에 보면 백제인의 돌을 다루는 기술이 상당하다고 한다.
요즘에야 좋은 도구로 충분히 좋게 돌을 다듬지만 그때는 무엇으로 어떻게 깍고 황금비율을 적용했을까? 대단합니다....







모서리를 둥굴게 말아올려 경쾌한 상승미를 보여준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1층 탑신에 "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고 새겨놓은 글을

길잡이 손병주선생님이 알려준다.
한 때 이 글 때문에 평제탑(平濟塔-백제를 평정한 탑)이라 불리며 설움을 당한적도 있었다.




부여시내를 유유히 걷는 말탄 사람.
우리는 신기하게 보는데 그곳 사람들은 뭐가 신기하냐는 듯 시큰둥하다.







계백과 그 외 충신을 모신 사당.
동입서출 -선생님이 알려준 사당 출입법. 들어갈때는 동쪽으로 나올때는 서쪽으로.
나침판 가지고 다녀야겠다.....




그 몽촌토성처럼 쌓은 토성이다.
흙을 쌓고 다지고 다시 돌을 넣고 다지고 해서 아주 딴딴한 토성이다.













낙화암...
설움이 깃든 곳이다.
길잡이 선생님은 3천궁녀니 뭐니하는건 승자의 역사적 관점이고 패자를 폄하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하시며 아예 3천은 메모리에서 델리트시키라 하신다.
어느 기록에도 3천은 없다 하신다.

참고로 지금은 3만여호가 사는 부여이지만 기록에는 그 당시 13만호가 살았다고 한다.
13만호...지금보다 4배더 많다....상상해 보라...




궁남지
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
차라리 마지막 코스로 저녁 무렵에 가기를 잘했다.
경주의 안압지를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보니 더 실망스럽다.
가운데 정자는 공사중이라 추운 듯 공사장 옷을 두르고 있고 주위는 듬성듬성한 버드나무만 늘어서 있다.
이곳이 예전에는 왕의 유흥장소이면서 도성을 방비하는 목적도 있었다한다.
그 당시보다 1/3크기라 왠지 안쓰럽다.

 

 

빡빡한 일정에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다음코스로 이동한 경우도 있다.
그래도 이 정도라도 느끼게 된걸 감사한다.
한가지 아쉬움이라면 우리의 역사유물이 지배자의 유물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보니 그 당시 민초들의 삶을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때 민초들은 감히 접근도 못할 왕의 유흥장소나 쌀 한되라도 시주해야 볼 수 있는 탑에서 민초의 삶을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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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16 -- 빨치산 전적지 답사 (임방규선생님과)

빨치산(partisan)

 

'파르티잔(partisan)'은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며,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나,

현재는 유격대원·편의대원(便衣隊員)을 가리킨다.

따라서 에스파냐어에서 나온 게릴라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발음이 어색한건 소련식 발음을 그대로 우리가 사용한 것이라 그렇고,

그리고 빨치산하면 뉴앙스가 가지는 한국인 특유의 거부감으로 감히 발음하기도 눈치를 보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소설 태백산맥과 이태원작의 영화 남부군에서 빨치산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빨치산은 그들이 가진 순수한 이상과 신념을 가지고 힘겹게 일본에 대항했고 민족통일에 이바지했습니다.

비참한 최후만큼이나 역사적 소외를 받아오며 정권의 비인간적인 온갖 회유공작을 받다 돌아가신 분도

있고 굳굳하게 이겨내어 북으로 송환되신분도 있습니다.

 

평균 30년의 감옥생활과 평균연령 70의 고령에도 빨치산 활동가들은 우리사회에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자 뛰어다니십니다.

바로 그이들에게 멍에를 가져다준 국보법폐지를 위해 서명운동도 하시고 더 이상의 오도된 역사를

물려줄 수 없기에 빨치산의 기록과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계십니다.

 

 

 

2004. 10. 16 - 10. 17 빨치산 전적지 답사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모두 32년 6개월을 복역한 비전향장기수출신 통일광장 대표

임방규선생님과 빨치산 전적지 답사여행을 갔다왔다.

전북 순창, 임실, 부안근처의 가막골과 쌍치를 주무대로 당시 활동하시던 기억을 되살리며

생생한 빨치산활동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선생님은 73살의 고령에도 장거리 여행과 산행을 버거워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후대에 연구할 수 있게 생존해 계실동안 자료를 수집하고자 했습니다.

기록자의 마음으로 차분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1 회문산 들머리에 자리잡은 당시 전북도당 사령부 벙커를 재현한 모습.

내부에는 군대내무반처럼 꾸며져있고 인형으로 당시를 묘사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흡족해 하지 않으셨다.

 

#2

 

#3

 

<치안을 어지럽히고 양민을 학살하는등 비인도적인 만행을 자행하였던바,...>

.....아직도 역사의 사관은 한쪽에 치우쳐있다.....

 

#4 가막산 구릉에서 옛날을 회상하며 설명해주신다. 한 때는 이곳이 선생님에게 텃마당과 같은 곳이였다.

 

#5

 

#6 멀리보이는 2개의 봉우리중 뒤의 더높은 봉우리에는 여성으로만 이뤄진 여성중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선생님나이 19세.

묘한 기분을 느껴본다.

 

#7 욕심이 나시는 모양이다.

차안에서도 그때상황에 대해 말씀을 하신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신거다.

 

#8 딱 53년전 오늘(1951.10.17) 뒤로보이는 공터에서 빨치산 투쟁역사에 길이 남을 군용기차탈취

성공 축하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인근의 빨치산들과 농민들이 모여 모처럼 소리치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때를 벅차오르는 기쁨을 기억하는건 선생님과 감나무일겁니다.

 

 

#9

 

 

#10

 

당시에 보초를 서던 곳이다.

비가 올때는 뒤에보이는 바위틈에서 보초를 섰다고 합니다.

그때는 2명의 어른이 충분히 들어갈 공간이였지만 50년의 세월이 이젠 더 들어오지 못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11

 

#12 비트..잠자리를 편평하게 만들었던 자리.

 

 #13 뭔가 싶었는데 굴뚝입니다. 근처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은듯한 숯이 널려있었다.

 

#14

 

임시로 나무지팡이를 사용하시지만 아직 한 5년은 알려주기위한 답사가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15 다큐멘터리 제작하시는 분도 같이 갔었습니다. 열심히 찍고 좋은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16 그곳에서 서럽게 숨져간 동지들을 위해 위령제를 올립니다.

 

#17

 

쌍치의 돌고개언덕을 오르는 선생님. 나무들이 죄다 20년도 안되었다.

그때는 나무를 다 태워 민둥산과 같았다고 하십니다.

 

#18 요즘 말로하면 적의 침입에 대비한 진지다.

이곳에서 3개월 정도 점령하셨다고 하시는데 그나마 가장 잘 보존된 곳이라 하신다.

 

#19

 

#20

 

임방규 선생님.

본적 : 전북 부안 동진면 당산리(당아리)

 

경력사항

1932. 6.16 출생.

1946. 부안군 부안소학교 졸

1946. 9. 고창중학교 입학

1947. 민주학생동맹 가입

1948. 전주 공업고등학교 전학

1950. 중퇴. 전쟁시 의용군 입대

1950.10. 후퇴시 임실 성수산으로 입산. 외팔이부대(전인원 약5백명) 정치부 중대장.

1952. 3. 민트에서 체포. 광주 포로수용소 수용.

1952. 9.14. 국방경비법 32조에 의해서 사형언도.

1954. 3.14. 군법에서 무기로 감형과 동시에 대전으로 이감

1960. 4.19. 20년감형

1968. 4.12. 전주로 이감

1972. 7.14. 전주에서 석방. 서울에서 페인트공으로 생활

*1975. 사회보안법 시행

1977. 4. 결혼.

1977.10. 1. 보안감호소 재수감

1989. 9. 7. 석방. 민중탕제원

2000. 통일광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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