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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3/10
    브라질 땅없는 노동자 운동 활동가 인터뷰
    토리
  2. 2005/03/09
    구름이의 눈길이 나를 피하지 않던 날, 소통에 대해 생각하다(2)
    토리
  3. 2005/03/09
    [외전]새로운 화풍~(4)
    토리
  4. 2005/03/09
    [외전]나의 이미지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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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03/07
    컥!! 이런 낭패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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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03/07
    [외전] 신선 뜨끈뜨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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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03/07
    [외전] 어떻게 알았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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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03/07
    브라질, 세계사회포럼을 가다 ④(8)
    토리

브라질 땅없는 노동자 운동 활동가 인터뷰

신마리님 블로그에서 발견한 글... '땅없는 노동자' 라고 하는 구나~

진즉에 찾아서 읽고 갔으면 좋았을 것을... -_ㅠ

 

피터 허디스, 루 터너(Peter Hudis. Lou Turner) <뉴스와 편지> 1998년 11월
원 제목 = 브라질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몸부림


브라질에서 활동하는 이 단체의 사람들이 땅 소유 문제에 대해, 생산 과정의 문제에 대해, 남녀 평등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뭘 고민하는지 보여줍니다. 너무나 근본적이고 철저한 고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룰라가 대통령이 될 정도로 상황이 많이 바뀌었지만, 룰라 뒤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브라질 진보 세력 사이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글입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브라질 `땅없는 노동자 운동'(Movimento dos Trabalhadores Rurais sem Terra, or MST)의 활동가 모니카 디아스 마르틴스 (Monica Dias Martins) 인터뷰다. 1979년에 세워진 이 단체는 회원이 50만명이며 수많은 땅 점거와 항의에 참여했다. 이 인터뷰는 1998년 11월2일 피터 허디스 루 터너(Peter Hudis. Lou Turner)가 진행했다.



- `땅없는 노동자 운동'이 요즘 전반적으로 강조하는 것에 대해 말해주시죠?

-- 우리의 쟁점은 토지 개혁 그 자체가 아닙니다. 땅 문제에서 시작했지만, 다른 많은 문제들도 제기합니다. 생산, 교육, 사회주의, 급진적인 사고 같은 거죠. 우리는 우리가 단순히 땅만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생산 관계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기계, 트럭같은 물건은 나눌 수가 없어요; 모든 가족이 참여하는 재산의 사회적 소유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점유한 땅은 우리 단체의 소유도, 그렇다고 정부의 소유도 아닙니다. 직접 생산하는 가족이나 모임의 것이죠.

모든 것이 집단적으로 결정됩니다. 먼저, 사람들은 땅을 어떻게 쓸지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두번째로, 많은 개선작업에 필요한 기금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과정을 토론하면서, 우리는 이익이 사회 과정 측면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익을 나눌 것인가 같은 많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학교에는 얼마를 배정할 것인가? 건강 관리와 어린이 양육을 위해서는 얼마를 쓸까? 땅을 점유하면서 협동노동 과정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 것은 싸움속에서 떠올랐습니다. 이 문제는 소규모 집단에서만 생긴 것이 아니에요. 어떤 정착지는 800가구 이상이나 됩니다.

생산물을 시장에 내놓으면서 다른 문제가 생기더군요. 우리는 우리의 협동노동 체계가 자본주의 체계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 도시의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때는 생산자들이 직접 손으로 종이에 글을 써 옥수수나 콩 자루 안에 넣었어요. 자신들이 다른 방식으로 생산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구요.

우리는 새로운 사회의 생산 과정을 창조하려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부도 해야 합니다. 아침에 일하고 오후에는 공부를 하죠.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과 관련된 것입니다. 정착지에 학교가 있습니다. 선생님도 아침에는 육체노동을 해야합니다. 자신의 생계수단은 자기 스스로 마련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누군가는 경험을 체계화해야하고,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경험을 잃어버리지 않고 보존할 수 있으니까요.

정착지 내부에서 토론하는 것외에도 우리는 지역별, 주별, 전국 단위 세미나를 매년 엽니다. 여기서 우리가 각각 활동한 서로 다른 것에 대한 지식을 교환합니다. 이런 모임에서 정치 변화, 정부 변화, 자본주의 변화에 관한 전략이 나옵니다. 여기의 논의 결과를 정착지로 되가져가서 새롭게 생각을 주고 받습니다.

- `땅없는 노동자 운동'이 20세기에 이미 실패한 혁명의 조명 아래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의 구별을 의식적으로 허물려고 한다고 말하시겠습니까?

-- 처음부터 그렇게 분명했는지는 잘모르겠는데요, 지금은 분명합니다. 땅없는 이들만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들도 정착지에 와서 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봄으로써 공부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시작된 민초운동(민중운동)은 사람들에게 가난해지고 모든 것을 잃고, 지식인의 모든 것을 버리고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땅없는 노동자 운동'은 이런 편견을 고집하지 않아요. 지식인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지시하지 않아요.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지시합니다.

나는 한 때 혁명당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땅없는 노동자들과 함께 있으니 그들을 지시할 수 있을 거라고 좋아했어요. 그러나 나는 대중운동과 당 사이에서 변속장치 벨트 구실을 하려고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정착지의 교육과정, 그러니까 급진적인 행동을 하고 급진적인 사고에 참여하는 모든 것들이 사회를 바꾸는 문제와 관련해 제 흥미를 끄는 것들입니다. 정치 정당 대부분은 이런 문제를 토론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거니까요. 그들은 먼저 선거에서 이기고 나중에 여성 문제나 땅없는 이들 문제를 논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 말을 안믿어요. 선거는 크게 바꾸지 못해요. 우리는 기다릴 수 없어요. 스페인 내전 때와 꼭같은 거죠. 대중은 생산관계를 당장 바꾸고 싶어했지만 정당들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 혁명적으로 권력을 쥔 뒤에 생길 새로운 관료주의의 문제를 어떻게 피할까 하는 문제에 대한 토론도 하십니까?

-- 혁명적이 되도록 남들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사회주의적 생각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과정을 바꿀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권위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육과정 중에 우리는 마르크스, 레닌, 그람시, 체(게바라) 등등을 공부합니다. 땅없는 사람들은 이들을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사회 변화에 대한 중요한 생각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성공하지 못했지만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것인가를 익히는 과정의 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아주 놀랍고 도전적인 운동입니다. 우리가 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하면 꼭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결코 그치는 일이 없어요. 내가 사회주의 지식을 갖췄으니 이제 이것이 전형이라고 퍼뜨릴 수 있게 해달라,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못해요.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문제, 구체적인 사회 문제를 파악하느라고 바쁩니다. 우리가 사회 변화를 만들고 있으며 이것은 브라질을 사회주의로 이끌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 협동 과정에서 남녀 차별주의와 노동의 남녀 구별을 허무는 것과 관련해 문제에 직면한 것이 있습니까?

--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밖에서는 혁명을 할거야, 하지만 집 안에서는 매우 전통적이 돼야지. 우리는 함께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려고 하고 어떻게 달라질지 토론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내부에서부터 변화를 이끌어내는 과정의 하나입니다.

땅 점유 과정에서 처음 행동한 이들이 여성입니다. 협동노동을 하는 여성들은 남성과 똑같은 댓가를 받습니다. 여성이 언제나 음식을 만든다거나 남성이 언제나 한다거나 하지 않고 교대로 합니다. 저는 큰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상호관계 측면에서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큰 변화를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 브라질의 여성운동가들이나 흑인운동과 관계를 형성하셨습니까?

-- 네, 아주 흥미있는 방식으로요. 저는 북동 브라질에서 일하는데, 그곳은 아주 보수적이에요. 우리는 남쪽의 여성 모임에 초청받아 갔습니다. 거기 사람들은 여성 문제에 훨씬 진보적입니다. 400명의 여성과 모임을 준비했어요. 아주 컸지요: 우리 단체가 한 것은 모두 큰 것같아요. 1997년 8월에 나흘동안 만났습니다. 여성의 구실, 살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부억에서는 어떻게 해야하나, 침실에서는 어떤 관계가 형성되나 등등의 주제를 토론했습니다. 사회 조직 문제, 남성과 여성의 공적, 사적 관계 문제도 토론했습니다.

흑인운동은 브라질에서 강력합니다. 그 뿌리는 퀼롬보(Quilombo) [탈출한 노예들이 세운 독립 공화국]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들 또한 협동 생산 과정이 있었습니다. 우리 단체는 몇몇 흑인 조직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성운동에 관해서는 특정한 단체와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우리 단체 활동가들이 도시에서 흑인 조직이 주도하는 대중동원에 참여합니다.

- 현재 당신 단체에서 토론하고 있는 이론적 문제 몇가지를 언급해주시죠?

-- 우리는 좀 더 이론적인 잡지뿐 아니라 신문도 발행합니다. 활동가들을 위한 내부 저널도 있습니다. 신문에서 신자유주의 문제가 제기됐고 토론됐습니다. 우리는 세계화 과정이 정말 새로운 건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로 발전한 제국주의인지 토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혀 새롭고 다른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이들을 연구해서 그들이 제국주의같은 주제에 대해 어떤 말을 했는지 보기도 했습니다. 우리 조직의 어떤 이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견해를 비판했습니다. 생각이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원문: www.newsandletters.org/12-98brazil.htm
번역: 신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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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의 눈길이 나를 피하지 않던 날, 소통에 대해 생각하다

습지괴물양이 강아지 구름이를 데리고 온지 어느덧 서너달이 넘어가는 요즘. 내 손을 두번이나 물어 분노에 떨게 만들었던 구름이. 습지괴물양은 구름이를 키울 수 있는 장소가 없어져서, 새로 살 곳을 찾기 위해 굉장히 바쁜 시간을 보냈다.

 

친척을 통해 시골집에도 데려갔었는데, 그 곳은 개를 식용으로 키우는 집이었고, 사람들 품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하던 구름이는 낯선 곳에서 철장에 갖혔다가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콧등이 찢기는 상처를 받았다. 보다못한 습지괴물양은 구름이를 다시 데리고 왔고, 최근 몇달처럼 사무실 옆에 이불을 깔아주고 재우는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주인만 따르고, 낯선 사람에게는 컹컹 짖어대고, 사무실 사람들도 손도 대지 못하게 움츠러있던 구름이도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 싸게되면서 어느덧 이 생활에 익숙해졌나보다.

 




두번째 내 손을 물었던 날, 나의 이성을 잃은 발길질과 뭇매를 맞았던 구름이는 나만 보면 습지괴물양 치마밑에 숨고 공포스러운 눈빛을 보내곤 했었는데, 이제는 담배라도 피우려고 구름이 옆 의자에 앉아있으면 가만히 다가와 발밑에 드러눕기까지 한다.

 

그게 기특하기도 하고, 살 곳을 잃어서 안스러운 마음에 종종 구름이에게 혼잣말하듯 말도 걸어보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오래 눈을 마주치면 쉭 고개를 돌려버리고, 손을 전혀 댈 수 없도록 하는 구름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무료하게 개로서는 취하기 힘든 이런 저런 해괴망측한 자세를 취하던 구름이 앞에 앉아있는데, 창밖을 보다가 구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구름이가 쭈그려 누운 상태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5초 후면 눈을 돌리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흘러도 구름이는 나를 계속 바라본다.

'

저 인간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하는 분위기가 풍기긴 했지만... 그 조금의 변화에 구름이와 나의 험악했던 관계가 어느덧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브라질에서 낯선 이국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소통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볼 기회가 많았었는데, 복잡한 단어와 긴 문장을 사용하지 않아도, 혹은 손짓 발짓 만으로도 소통이 되는 것을 느끼면서 찰나의 바디랭귀지만으로도 '이 사람과 나는 지금 뭔가 통하고 있구나'라는 기쁨을 갖게 됐었다.

 

그런데 짧은 단어도 언어 자체로는 소통이 되지 않는 강아지 구름이와의 이 눈빛 교감이 나에게는 더욱 큰 기쁨을 줬다. 구름이에게 인정받고 싶은 나의 기대가 컸기 때문인 것인가? 아니 그보다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다'는 느낌 자체만으로도 기뻤던 것 같다.

 

그런 기쁨을 느끼는 한편, 나와 주변의 인간관계를 동시에 돌아보게 되는데, 무수하게 많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뭔가 풀리지 않는 갈증은 나를 항상 괴롭게 만든다.

 

브라질에서 언어문제로 애를 먹을 때, 나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로구나 생각하면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많은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한달이 넘게 지난 지금 여전히 소통은 어렵고,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상대방이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것을 알아내기는 너무나 힘들다.

 

차라리 언어가 없는 세상이라면, 이것 저것 복잡하고 복합적인 조건과 상황을 따지지 않고 그 순간의 감정과 욕구에 충실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활자화되지 않은 몸의 언어로 소통하던 원시인들은 더 순수하게 사랑을 키워나갔을까?

 

너무 많은 생각들이 존재하고, 거칠은 폭력과 상처내기가 난무하는 지금, 눈빛과 몸으로 마음을 전하는 단순한 세상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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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새로운 화풍~

역시 타블렛 장만 기념 2탄입니다.
-_- 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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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나의 이미지란...

오늘 있었던 일입니다.
밑의 '어떻게 알았어'의 연장선상에 그려봤습니다.

사무실에서 타블렛을 썼을 땐 좋았는데
집에서 해보니 펜이 너무 쭉쭉 나가서
그리기가 상당히 힘드네요.
적응에는 많이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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컥!! 이런 낭패가!!!

=ㅁㅠ 스킨 한번 바꿔보려고 이것저것 누르고 있었는데

한개가 응답없음이 나와서 웹브라우저를 닫았는데

그 다음부터 제 블로그 메뉴중에 category 혹은 글 분류

통으로 사라져 버렸어요.

스킨 소스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이쪽저쪽 돌아다녀봐도

나같은 문제는 안나온 것 같고...

 

어떻게 해야하나요!!

도와주세요!!! =_ㅠ)/

 

ps. 전 블로그 시작한지 일주일 갓 지난 꿈나무란 말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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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신선 뜨끈뜨근한....

 

오늘 큰맘 먹고 타블렛을 장만해부렸습니다.

마우스나 펜마우스나 아직 별 차이는 안나지만...

 

그러나 곧 이어 그린 그림은 일취월장 하여....

 





 

남자인가, 여자인가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오랜만에 길쭈~욱하게 그린 그림... 므흐흣~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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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어떻게 알았어?


개인홈피에 올렸던건데...

이건 아주 슬픈 개인사를 담은 만화입니다.

-_-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젠 괜찮지만 (2주 지났다!!)

진지하게 그린 만화입죠...

 

 



어떻게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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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세계사회포럼을 가다 ④

CCFD 일행이 MST 대학을 방문해 풍경을 둘러보고 있다.

 

* 이 글은 참소리에 연재하고 있는데, 이제 네편째... 헥헥~ 두편 남았습니닷!!


새로운 브라질을 만든다- MST 대학

 

 

땅없는 사람들 캠프에서의 세 번째 날(21일), 저녁 무렵이 되자 장대처럼 쏟아지던 비가 멈추고, 일행들은 어딘가로 이동해야 한다고 전해 들었다. ‘Mystic Ceremony’라는 표현에 ‘일행이 모두 천주교인들이니까 종교행사를 하나 보다’ 생각하고,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나는 망설이다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에서 1백여미터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니 커다란 폐공장 처럼 생긴 건물이 보였고 문 앞에 있던 캠프의 아이들이 우리 일행에게 다가와 한명씩 손을 잡고 안으로 안내했다.

아이들과의 아쉬운 작별

건물 안에는 캠프의 주민들이 동그랗게 원을 만들어 기다리고 있었고 전기불 대신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불을 비춘 행사장이 마련돼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는 우리들을 위해 송별행사를 준비해준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들어서면서 장미꽃 하나씩을 선물로 받았고 주민들 사이에 서서 함께 원을 만들었다. 원 안에는 색깔을 입힌 왕겨(탈곡 후 벼 껍질)로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포르투갈어로 프랑스, 아프리카, 한국 등 나라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왕겨로 만든 세계지도와 정성스레 송별행사를 치러준 캠프의 주민들.

주민들은 우리에게 “땅없는 사람들의 캠프를 방문해 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연대하자”는 메시지와 함께 선물을 주었다. 나중에 열어보니 직접 나무를 깎고 쌀알로 장식하고 ‘마누엘 네토’ 캠프 이름이 새겨 넣은 조그만 탁상용 장식장, 귀여운 곡괭이 모형, MST에서 발간하는 ‘TERRA(땅)’라는 월간잡지, 어린이들의 포르투갈어 동요집 등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나무를 깎아 만든 반지를 하나씩 받았는데, 이 반지는 ‘사회정의를 위해 나는 신과 결혼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정성스러운 선물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머뭇거리는 사이, 주민들이 준비한 노래공연이 진행됐다. 아코디언, 조그만 기타 등을 든 연주자들의 흥겨운 노래가락에 맞춰 주민들과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함께 춤을 췄다. (사람들은 젊은이들끼리 어울려 두손을 맞잡고 친밀하게 춤을 췄지만,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 탓인지 아무도 나에게 춤을 권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고 여자아이들 서너명과 함께 원을 만들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는데, 청년들과 춤을 추고 있는 마르가리타, 크리스텔이 그리 부러울 수가 없었다.) 두시간 정도 행사가 진행되고 몇몇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젊은이들과 아이들은 숙소 앞에 남아 늦은 시간까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밤이 깊어갔다.


▲떠나기 전 모두 함께 기념사진 촬영.
마지막 날(22일) 아침에도 주민들은 이른 시간부터 숙소에 모여서 떠나는 우리를 배웅해줬다. 특히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건 함께 여러 가지 놀이를 했던 아이들이었는데, 엄지손가락과 중지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내는 것을 잘 하지 못했던 아이 완더스는 며칠을 연습해 조그만 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며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우리 옆에서 소리내기를 계속했다. 기념사진을 몇 장 촬영하고, 사람들은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만남과 작별인사 모두 껴안고 양볼에 서로 키스하는 것이었는데, 어색해서 껴안기만 했던 나도 이번엔 아이들 하나하나를 꽉 껴안고 진하게 뽀뽀를 해줬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아이들의 노래를 녹음한 것을 반복해 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마르가리타와 함께 노래를 들었는데, 마르가리타도 “캠프에서 만난 아이들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다”며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땅없는 사람들, 10년 프로젝트로 스스로 학교를 만들다


차량 소통이 거의 없던 캠프를 벗어나 조그만 마을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우리는 MST 대학에 도착했다.


잘못된 토지관리정책에 반대하며 시작된 이들의 운동은, 이제 토지점유를 넘어 브라질 전체의 농지개혁과 새로운 주체들을 만들기 위한 투쟁으로 확장되고 있다. 친환경적이고 공동체적인 농경법의 개발, 농산물 유전자조작에 대한 반대운동, 그리고 각종 사회개혁운동 등. 그리고 MST 대학을 스스로의 손으로 세워 보다 폭넓은 활동을 위한 주체들을 재생산하고 있었다.


▲언덕위에서 본 MST 대학의 일부풍경. MST 대학에 다닐 학생들이 학교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신문을 판매하고 있다.
우리가 학교를 방문했던 날은 마침 MST 대학이 정식으로 문을 열기 전날이었다. 학교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포크레인이 길 한가운데 들어서 있고, 군데군데 땅이 파여진 흔적이 있었다. MST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에서 물건을 사고, 각자 흩어져서 학교를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학교에는 공사하는 사람과 함께 10대에서부터 4~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넓은 운동장 한 켠에는 약 1천여명이 모여 집회와 같은 행사를 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 휴게실이었는데,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 화면을 보니 운영체제가 윈도우가 아니라 리눅스였다. 이 학교에 있는 컴퓨터는 모두 리눅스냐고 물어봤더니 그렇다고 말했다. 컴퓨터 운영체제에 있어서도 독점적인 윈도우를 지양하고 대안적인 운영체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일행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더니 리눅스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대개의 국가에서 8~90% 이상을 윈도우 운영체제가 차지하고 있다 보니 당연한 반응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강의실로 보이는 공간에는 브라질 각지의 캠프에서 온 사람들의 침낭과 짐들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설명으로는, 이 MST의 무토지 농민운동 활동가들은 이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10년을 준비했다고 한다. 기획작업에 수년 건물 토대를 만드는 데만 4년이 걸린 이 학교 설립을 위해 전국 각주의 캠프에서 60여명씩 사람들을 보내고, 이들이 흙과 돌을 재료로 해 몇 차례의 오류를 거치며 가장 친환경적인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교의 한 실무자는 “전문가들이 하는 게 아니다 보니 건물을 짓는 것도 설계작업에 문제가 있어서 2번을 새로 지었다. 그런 오류를 통해 지금은 어느 건물보다 친 환경적이고 훌륭한 건물이 됐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학교를 연 후에는 MST 활동가와 캠프의 주민들이 이 대학에 다니며 농업, 언어, 컴퓨터 등 다양한 학과목을 배우며 보다 체계적인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이들은 학교의 교육자 양성을 위해 1백여명의 활동가를 해외로 7년간 유학을 보내는 등 치밀한 준비작업을 거쳤고, 상파울로 국립대학에서도 교수들이 파견을 나와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돈 토마스 발드로.
다른 캠프를 방문했던 CCFD 그룹 멤버들까지 모두 함께 모인 자리에서 MST 대학의 책임자이자 천주교 사제인 돈 토마스 발드로(Don Thomas Balduro)씨는 이렇게 말했다.


“브라질의 땅없는 사람들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운동가들의 활동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다시 서고 있다. 그들은 역사의 주체이며 자신의 미래를 바꿀 힘을 갖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땅없는 사람들을 비롯해 남미 전국가의 빈곤계층의 운동, 인도의 달리트 운동(카스트 제도의 최하위 계급의 차별철폐운동), 국가가 없는 사람들의 운동 등 인종차별, 성차별 등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에 함께 하며 함께 연대할 것이다. 땅은 자연 공동체의 상징이고, 우리의 운동은 다른 사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운동이다.”


브라질 좌파정권의 우경화 경향은 외부의 보수언론들로부터 ‘보라! 좌파정권도 이렇듯 훌륭한 정책을 하고 있지 않느냐’며 칭송받고 있지만, 그들로부터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투쟁을 일구어가며 정부의 편향을 바꾸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길을 열어나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마르셀로


여기에서 잠깐, 앞에서도 언급했던 우리 일행의 가이드 마르셀로에 관한 가슴 아픈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넘어가야겠다. 캠프에서의 사흘, MST 대학에서의 하루로 꼬박 나흘간 우리와 함께 하며 자질구레한 대화까지 친절하고 차분하게 통역해주었던 MST 활동가 마르셀로.


▲마르셀로.
며칠을 함께 있다 보니 일행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도 꽤 있었는데, 31살의 이 남성은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졸업한 후 브라질에서 가장 큰 규모라는 한 언론사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다가 3년 전부터 땅없는 사람들 운동에 뛰어들게 됐다고 한다. 마르셀로는 자신도 직접 캠프 생활을 하면서 우리와 같은 방문자들에게 땅없는 사람들의 운동을 설명해주고, 또 운동을 조직하는 일에 힘쓰고 있었다.


가족에 대한 얘기도 들을 수 있었는데, 마르셀로는 자신이 캠핑하고 있는 곳을 직접 방문한 어머니가 “왜 하필 네가...”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운동의 대의에는 동의하지만 자식의 고생스러운 생활을 보기 안타까워하는 어머니가 있다면 누구나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잘나가는’ 언론사에서 직업으로 의무화된 기자일을 하는 것보다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것을 만드는 현재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영어 전공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는 경력과 나이도 비슷하고, 게다가 ‘체 게바라’를 연상케 하는 외모 등으로 개인적으로 큰 관심(!)을 갖게 됐는데, 함께 했던 일행의 나머지 4명의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가장 젊은 크리스텔이 대뜸 ‘아이가 몇 명 있느냐’고 질문하자, 마르셀로는 자신은 독신이고 결혼의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일행 여성들이 마르셀로의 옆에서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는데, 사적인 대화는 익숙지 않은데다가 영어가 잘 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런 상황을 연출할 수가 없어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를 확실히 세운 것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MST 대학을 방문하던 날. 영어가 제일 짧은데다 촬영을 한다는 이유로 일행에서 이탈해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잦았던 나를 잘 챙겨주던 마르셀로 옆에 낯선 빨간머리의 여성이 서 있었다. 어디로 이동하든지 마르셀로 옆에 꼭 붙어있어 우리를 눈살 찌푸리게 만들었던 그 여성은 나중에 알고 보니 함께 MST 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오래된 여자친구였다. 나를 비롯한 일행 여성들은 “그는 독신이라고 말했지만 결코 혼자는 아니야”라고 수군거리며 가슴 아파해야 했다.


MST 대학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상파울로 시로 돌아가야 할 시간. 우리는 마르셀로를 위해 새 다이어리 북에 각자 감사의 메시지를 자기 나라의 말로 적어서 작별의 선물을 전했다. 이메일 주소 등도 교환하고, 나는 마르셀로에게 캠프에서 찍은 아이들의 사진을 보낼테니 꼭 전해달라고 당부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성실하고 친절한 브라질의 한 열성 활동가와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지만, 남미의 운동 그리고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을 계속하는 한 그와의 조그만 인연은 계속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작은 희망을 가지며 우리는 자리를 떠났다.


드디어 세계사회포럼이 열리는 포토알레그레(Porto Alegre)로


23일 일주일여간 머물렀던 상파울로 시를 떠나 제5회 세계사회포럼이 열리는 도시 포토알레그레로 출발했다. 각자 미리 비행기표를 끊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이동을 해야 했는데, 다행히 아폴로니에라는 프랑스 흑인 청년과 비행기가 같아서 그의 도움으로 두시간의 비행기 여행은 수월하게 이뤄졌다. 그는 영어를 못하고 나는 프랑스어를 몰랐지만 의사소통에는 그다지 무리가 없었다.


포토알레그레 시는 브라질 남부에 위치해 있는데, 상파울로에 비해 훨씬 한적하고 조그만 도시였다. 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각국 각지의 단체들이 피켓을 들고 방문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세계사회포럼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우리는 안내인이 나오지 않아 직접 택시를 타고 숙소인 리터 호텔로 이동했다.


순조로웠던 이날 나의 여행은 호텔에 도착한 순간 난관에 부닥쳤다. 프론트에서 CCFD 일행으로 단체예약이 돼 있을 숙박객 명단에 나의 이름이 없어서 방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일행들은 도착하지 않았고, 무거운 짐을 들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포럼이 시작되는 시기에다가 여름이어서 성수기인 호텔에서 함부로 방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브라질로 오기 전 꿨던 악몽이 현실로 나타났나 보다, 이제 혼자 따로 떨어져서 브라질을 헤매야 하는가보다 생각하며 불안에 떨었다.


로비에서 기다린 지 두 시간 정도 지나서야 호텔 측에서는 명단 입력에 오류가 있었다며 새로운 방의 룸키를 건네주었다. 뒤늦게 도착한 베트남 친구 칭과 또 다시 한방을 쓰게 됐는데,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던 탓인지 다른 일행은 3~5명씩 비좁게 쓰는 방을 나와 칭은 두명이 넓고 편한 방을 쓸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브라질 방송에 출연하다!


▲세계사회포럼이 열리기 사흘 전. 메인 행사장 풍경
짐을 풀고 난 후 땅없는 사람들 캠프 방문을 친해진 마르가리타와 크리스텔 등 일행들과 함께 세계사회포럼이 열리는 장소를 방문했다. 장소는 호텔에서 버스로 약 15분, 걸어서 한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해안가였다. 아주 넓은 홀에 대규모로 회의가 진행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도착해서 본 포럼 장소는 폐공장과 잔디밭에 세운 천막들로 넓게 분산돼 있었다. 일요일에는 해안가를 따라 장신구 등 수제품을 파는 벼룩시장이 열리는데 마르가리타와 함께 그곳을 거닐고 아이쇼핑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산책을 마친 후 마르가리타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오는 다른 일행을 위해 포럼 참가자 명단을 확인해야 한다고 해서, 천막으로 세워진 안내데스크로 갔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ENG(야외촬영) 카메라를 든 카메라맨과 리포터로 보이는 사람들이 내게로 다가와서 인터뷰를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세계사회포럼에 어떻게 참가하게 됐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CCFD라는 단체를 통해 일주일전에 브라질에 도착해 브라질의 운동현장을 돌아봤고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영어로 더듬더듬 말했다. 어찌나 엉성하게 말했는지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장면이 진짜 TV에 나오게 되면 큰일이다’ 생각하며 진땀을 흘렸는데, 다행히 리포터가 ‘당신 나라의 말로 다시 한번 얘기해 달라’고 주문했다. 한국말로 화면을 내보내고 영어로 말한 것을 통역해 포르투갈어로 자막을 내보내겠다는 생각이 들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인터뷰가 끝난 후에야 정신이 들어 안내데스크에서 구경하고 있던 자원활동가에게 방금 다녀간 사람들이 어느 방송이냐고 물었더니, 브라질 연방 TV라고 대답해줬다. 세상에! 외국사람과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한 내가 이 먼 곳으로 와서 TV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나는 포럼기간 내내 만나는 일행들에게 TV에 출연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세계사회포럼을 기대하며...


포럼이 열리는 날은 26일. 24~25일 1박 2일간은 호텔에서 CCFD가 주관하는 토론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CCFD가 주관하는 세계화에 따른 경제적 빈곤과 북반부, 남반부 차별 문제에 관한 토론을 했는데, 대륙별 이슈를 중심으로 다루다보니 아시아는 칭과 나 달랑 두명밖에 없어서 다른 그룹의 토론을 청취하는 정도에 그쳐야 했고, 토론마저도 프랑스어로 이뤄져서 이틀간의 일정은 고역이었다. 그나마 틈틈이 진행되는 댄스, 노래 등의 친목 프로그램이 있어서 고된 일정을 버틸 수 있었다.


이틀의 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마음은 이미 처음 참가하게 되는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기대로 기울었다. 물론 10만명이 넘게 참가하는 행사에서 내가 뭘 듣고 배울 수 있을까, 대규모 행진 중에 길이라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한국 참가단을 잘 만날 수 있을까 등등 걱정이 앞섰다. 36~8도를 넘나드는 이 무더운 날씨와 뜨거운 땡볕 아래에서 한국에서도 백옥같이 지켜온 내 피부를 다 태우지는 않을까 하는 사소한 걱정도 함께.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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