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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4/13
    오랜만에 만난 큰신부님(3)
    토리
  2. 2005/04/11
    와~ 포럼!!
    토리
  3. 2005/04/11
    골머리 썩히는 삽화 그리기(2)
    토리
  4. 2005/04/07
    구글 이미지 검색이 최고지~
    토리
  5. 2005/04/04
    아무도 모른다 / 지독히 건조한...
    토리
  6. 2005/04/04
    주말에 있었던 일
    토리

오랜만에 만난 큰신부님

큰신부님이 오랜만에 평택에서 전주로 내려와

사무실을 방문하셨다.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 얘기를 한참 하다가(듣다가!)

저녁을 사주신다고 해서 근처 보쌈과 부대찌게 집에 갔다.

사무실 식구들이 모두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여러사람을 만나는게 좋으셨던지

술을 잔뜩잔뜩 권하고 이런저런 얘기도 많이 해주셨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말,

휴가를 갔다가 평택에 들른 습지괴물 녀석이

활동의 성과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나보다.

신부님은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술먹고 들은거라 정확하진 않지만)

 

"운동이란 것은 성과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부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고 하더라도

그게 보통사람들에게 성과가 보이는 일이냐?

운동은 더욱 그렇지 않다.

진득하게 투쟁하고 그러다가 '성과'란 것이 나오면

그렇게 받아들으면 되는 것이다."

라고... 그리고 또 한마디 덧붙이길...

"운동은 30년쯤은 하고 봐야 돼!"

(컥! 앞으로 몇년 남았냐!!!)

 

술을 거나하게 드신 신부님은 노래방도 가자고 하시더니

필리핀에 갔다가 딱 오늘 1년만에 귀국한 한 언니 환영식에

가시겠다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떠나셨다.

 

애정이 많으신 분이란 건 진즉 알고 있던 일이지만...

오늘 새삼 느끼는 것은, 안보면 잊어버리는 나에 비해...

신부님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 가림없이 애정을 표하신다.

 

물론 애정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만큼 많이 서운해 하기도 하신다.

신부님은 요즘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고 말하신다.

고립돼 투쟁하고 있는 팽성 주민들을 보면서도 가슴이 아프고...

여럿이 함께 하다보니 생활에서 나타나는 갈등도 힘드시고...

얼마전 인혁당 추모행사에 나타난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도 크다고 하신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우울증과 울화병의 합병증인 것 같긴 했다.

 

항상 큰신부님을 보면 기운을 얻고 나도 더 잘해야지~ 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오늘... 일의 퍽퍽함과 어려움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내게는

큰신부님 특효약도 그닥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지금 쓴 글을 다시 읽으며 생각을 정리해봐야겠다.

 

신부님! 건강하셔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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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포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멀리서만 소식듣던.... 정보운동 포럼이닷!!!

-----------------------------------------

 

■ 개요
1) 날짜: 5월 중순 (2박 3일 혹은 1박 2일)
2) 장소: 미정
3) 대상: 정보운동단체, 인권운동단체, 단체활동가, 정보운동에 관심 있는
개인, 학생
4) 홈페이지: http://act.jinbo.net/forum2005 (예정)
5) 주최단체: 공동주최단체를 조직하고 있습니다.

■ 내용
1) 전체 토론:
- 저작권법 전문 개정에 대한 대응 방안

2) 주제별 워크샵:
- 의약품 특허와 강제실시
- 디지털 환경과 저작권
- CC와 정보공유 라이선스
- A2K
- 창작 영역별 저작권 문제 (만화, 영화, 음악 ... )
- 공개 SW
...

3) 전체 강의:
- 지적재산권 개요 : 저작권, 특허, 상표 등의 개념에 대한 쉬운 소개
- 지적재산권 관련 국제 기구/조약 : WTO TRIPS, WIPO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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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머리 썩히는 삽화 그리기

항상 바쁘네 어쩌네 말은 해도

간혹 어디에선가 삽화 요청이 들어오면 거의 거절하질 못한다.

이유는 약간의 사례금에 혹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내용에 동의하며, 공부도 하고, 뭔가 일조했다는 보람이 뿌듯해서다.

 

최근에도 '호주제 폐지 후 목적별 신분등록제' 자료집 삽화를 요청받았는데...

<삽화 총 8컷 중 하나... 가족을 통해서만 신분을 확인하는 문제점>

 

이번에도 여지없이 내 속을 썩히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처음 삽화요청이 온 것은 약 한달전, 이번에도 흔쾌히 오케이 했지.

(게다가 이번엔 삽화비용이 나오는지 여부도 확인도 안하고, 마음이 쏠려서!!)

그런데 별도로 메일이 안오길래, 그냥 까묵고 지나가 버렸다.

 

그러다 지난주 목요일에사 연락이 왔다.

이번주에 공청회가 있으니 사흘안에 그려달라는...(자료도 이제 보낸다고)

크헉!! =_ㅠ 주말엔 울 아빠 환갑잔치가 있는데다 밀린 일 처리해야 하는데...

-_- 이미 일은 떨어져있는 상황, 투정부리기도 뭐하고...

 

그냥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제 저녁 시골집에서 돌아와서

급한 일 처리하고, 속독으로 자료를 읽고

무려 다섯시간만에 삽화를 완성했다. (최단기록 =_=)b)

 

일단 완성했다는 안도감과 뿌듯함과 동시에 밀려오는 허탈함.

왜 항상 일처리가 이렇게 되는 것일까!

 

삽화요청하시는분들께 요구합니다!!

1. =_ㅠ 자료는 일찍 보내주세요. 나중에 변경되더라도...

2. 한달전에 얘기해놓고 일주일단위로 체크해주세요! 나도 까묵으니까...

3. 삽화 내용은 이런게 좋겠다, 귀뜸좀 해주세요!! -_ㅠ 더 전문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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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이미지 검색이 최고지~

* 이 글은 동동이님의 [google life] 에 관련된 글입니다.

오늘(7일) 점심먹고, 오이와 네이버 지식검색, 구글 검색기능에

대해 한참 수다를 떨다가 진보넷블로그에 들어오니

동동이 님의 구글 예찬론이 있었다~ =ㅂ=)v

 

나는 조금전까지 구글을 이미지 검색하는데 주로 이용하고

도메인이 손에 익숙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야후를 뉴스나 관련자료 검색에

이용했는데... 얼마전 즐겨찾기 연결부분을 야후에서 네이버로 바꾸었다.

(안녕, 프란체스카를 검색했더니 수천개의 상세한 지식즐이~ 오홋!)

 

그러다 새만금 해양연구원 3차보고서 관련자료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포탈사이트를 찾아다니다가 헛수고를 하고

구글을 들어갔는데, 핵심적인 뉴스만 시간대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며

깔끔하게 검색되는데 그 놀라움이란...

 

요즘 광고에 지저분한 기능과 이미지 로딩에 시간걸리는

다른 포탈사이트 말고 구굴을 하라는 내용이 나오던데,

-_-)=b 절대 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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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 지독히 건조한...

* 이 글은 지후님의 [아무도 모른다 / 고레다 히로카즈] 에 관련된 글입니다.


<영화포스터 이미지 중 일부>

 

14세 소년 주인공이 예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봤는데... -_-;;;

 

담백하게 시작해서, 지독히도 건조한 느낌으로 끝을 맺죠.

2년여간 아이들의 성장을 따라서 촬영한 것처럼

이야기 전개와 결말도 옆집의 누군가를 관찰한 듯 단편만을 보여주더군요.

영화 안에서는 선과 악을 가를 잣대를 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여운이 남고 씁쓸한 느낌...

아이가 아이스럽지 않은 상황을 겪는 것을 지켜본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그렇다면 뭘 어떻게?

... 라고 생각하다보니 -_- 영화 제목이 이해가 가더군요...

 

* 덧붙여. 그 중학생 여자애는 도대체 왜 나오는 거?n!

 



# 스가모 어린이 유기 사건

 

이것은 1988년 일어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5년 전 한 남녀의 동거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의 어머니는(이때는 아직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남편이 구청에 혼인신고를 했다고 믿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 출생 신고를 남편에게 부탁했지만
이 때도 그는 했다고 말만하고
구청에는 가지도 않았다.
한동안은 남편이 월급을 제대로 가지고 와서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
그가 회사의 돈을 유용하다 발각이 되었고
이로 인해 상황이 크게 변하게 된다.
이때 장남은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취학통지서가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이 입학시기를 놓치고 말았고
결국 구청에 가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은 미혼이고 자신이 낳은 아이들은
호적도 없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된 처리를 했다면 그녀가 복지사무소나 아동상담소 등을 찾아갔어야 했겠지만
그녀는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충고를 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이후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기로 한다.
사건이 발각된 후 알려진 그녀의 거짓말은
슬프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예를 들면
"저는 게이오대학을 나와서 지금은 미츠코시의 외상부에 출근하고 있어요."
"죽은 남편은 외교관이었어요."
"아이는 리코중학에 다니고 있어요." 등등......
그리고 맨션에 입주할 때는
"이거 제 직장에서 가지고 온 건데요....."라고 말하며
미츠코시의 물품을 나눠주고 다녔다고 한다.
 그 후에도 그녀는 반복적으로
수명의 남성들과 사귀다 임신해서는 집에서 출산했다.
출생신고는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낳은 아이는 모두 5명.
그 중 차남은 병사했지만
호적이 없었기 때문에 매장허가도 얻을 수 없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어떻게 매장허가를 받을 수 있을까...
결국 이 때에도 그녀는 세상에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궁리를 짜냈다.
그녀는 차남을 비닐에 악취제거제와 함께 싸서 벽장에 넣었다.
장남은 그런 어머니를 보고자라면서 동생들을 돌보았다.
어머니는 장남을 '굉장히 똘똘한 아이'라고 생각해
아이들 돌보는 것을 전면적으로 맡기고
자신은 백화점 판매직으로 받은 급여로 아이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다시 이들의 생활을 크게 변화시킨 사고가 일어났다.
1988년 1월 어머니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겼다.
그뿐이라면 이전 몇 번이고 있었던 일이지만
이번에는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녀는 그 남자와 동거하기 위해
아이들을 맨션에 버려 두고 나가버린 것이다.
그녀는 집을 나갈 때 장남에게
"아이들을 부탁할게. 엄마가 가끔 살피러 올게. 돈은 등기로 보낼게."라고 했다.
당시 장남은 14세, 여동생 셋은 7세, 3세, 2세였다.
어머니가 매월 보내온 금액은 7-8만 엔이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가끔 전화를 한다든지
역 근처 맥도날드 같은 데로 장남을 불러낸다든지 해서
'애들은 어때?'라고 묻기만 할 뿐
언제나 아이들이 사는 맨션에는 들르지 않고 동거남의 집으로 가버렸다.
이런 식으로 아이들만의 폐쇄된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무리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고 존재를 숨긴 인간이라지만
장남은 동생들을 위해 시장을 보러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고
또 집에 가만히 있을 리도 없었다.
주변을 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두 명의 친구가 생겼다.
한 명은 A라고 하는 아이로
복잡한 가정사 때문에 학교에 거의 나가지 않았는데,
장남과 만난 후에는 이 집에 살다시피 하였다.
또 한 명의 B라는 아이는
가정도 있고 학교도 다니고 있었지만 공격성이 강한 성격이었는데,
하굣길에 거의 이 집에 들렀다고 한다.
아무리 장남이 나이에 비해 똘똘하다고는 하지만
14세의 아이일 뿐이다.
어린 여동생들에게 먹이는 것이라고는
과자나 컵라면이 아니면 냉동식품이었다.
집안은 더러워져가고
차녀와 막내는 아직 기저귀를 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갈아주었던 것은 처음뿐이고
돈이 부족해지자 새 기저귀는 살 수가 없었다.
두 달이 지나자 하루에 한 번만 갈아 주게 되었다.
동생들은 발육기에 균형있게 먹지 못해
영양부족에 동작이 느렸고 냄새가 났고 계속 보챘다.
장남은 분명 동생들을 생각해주는 아이었지만
이런 나날이 계속되자 점점 '귀찮다','멀리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앞서
집에 놀러오는 친구들을 우선시하는 때가 많아졌다.
이러던 때 사건이 일어났다.
4월 21일 B가 사두었던 컵라면이 없어졌다.
배고파하던 동생들 중 한 명이 먹었다고 여긴 B가 추궁하자
차녀가 먹은 것 같았다.
화가 난 B는 아직 2살인 차녀를 때려 골절시켰다.
그 때 장남도 A도 같이 때렸다고 한다.
한참 소동이 끝나니 이번엔 차녀가 오줌을 쌌다.
B가 또 뼈를 부러뜨리겠다고 하자
A와 장남은 '맘대로 하라'고 하고 구석방에서 tv를 봤다.
B는 벽장의 윗칸에서 차녀를 몇 번이고 떨어뜨렸고,
하다보니 재미가 들려서
머리부터 떨어뜨린다던지
일부러 떨어지는 곳에 발을 뻗어서
배를 차 올린다던지 하기 시작했다.
차녀는 공처럼 채여서 마구 울었다.
그 소리가 재미있어서 다시 차는 것을 반복하다
그 수위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문득 장남이 깨닫고 보니 방이 조용했다.
엿보니 차녀가 B의 발치에 쓰러져있었다.
"이거 큰일이다. 죽었을지도 몰라."
구급차나 어머니께 연락하는 등
여러가지 방안을 궁리해봐도
구급차를 부르면 모두 발각되어버리고,
어머니께 전화를 해도 혼날테고 하여
결국 어찌할 지 모른 채
차녀에게 인공호흡을 하고 이불을 덮어서 몸을 보온시켰다.
그 모습을 뒤로 B는 "7시니까 난 집에 가야해."라며 가버렸다.
다음 날 아침 장남이 눈을 떠보자 차녀는 차가워져 있었다.
죽은 다음의 처치는 어머니가 차남이 죽었을 때 했던 것을 따라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닐 봉투에 시체와 악취제거제를 넣어서 벽장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악취제거제의 양이 적었던 것일까 냄새가 나기 시작하여 그곳에 둘 수 없게 되었다.
 26일 장남과 A는 차녀의 시체를 여행가방에 넣고
전철로 치치부 시의 공원에 가지고 갔다.
이 때 B는 책임을 회피하여 같이 가지 않았다.
그 공원을 선택한 이유는 예전에 A가 소풍에 왔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장남이 여동생에게 산을 보여주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공원 주차장 옆 잡목림에 시체를 버리고 위를 나무 잎과 가지로 감췄다.
 7월이 되어 집주인은 '아무래도 저기는 아이들만 사는 거 같다.'고 여겨
경찰에 통보하게 된다.
경찰이 복지사무소에 연락해 상담원이 방문을 했더니
아이 셋이 방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장녀과 막내는 영양실조로 심히 쇠약해져
곧 보호시설로 가게 되었다.
이때 A와 B는 이 집에 없었다.
 경찰이 가택수사를 한 결과 차남의 시체가 벽장에서 발견되었다.
사건은 곧 매스컴에 퍼져 tv와 신문에 보도되는 한편
'어머니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보도를 본 어머니는 '이게 혹시 나?'라고 생각해 경찰에 출두했다.
어머니가 아이들과 만나자 그제서야 차녀가  없어진 것이 밝혀졌다.
 우선 어머니는 보호자유기, 치상으로 기소되었다.
특히 막내는 전치 1개월 반이라는 심각한 영양실조였기 때문에
치상죄가 추가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의 판결이 내려졌다.
 장남은 차녀에 대한 상해치사, 사체유기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사정청취를 하면서 A와 B(특히 B)의 사건 관여가 큰 것이 밝혀져
장남에게는 동정의 여지가 커졌다.
A,B는 구호원에 송치되었고
(나중에 B는 보호관찰로 끝남. 이 차이는 재판관의 인식의 차로 보여짐)
장남은 양호시설에 보내져 거기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장녀와 차녀도 보호 센터에서 양호시설에 보내졌지만
둘은 후에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안타깝게도 장남은 자료부족으로 소식을 알 수 없다.

영화와는 조금 차이는 있지만.. 정말 아무도 모를만하네요..

 

- 네이버 지식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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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있었던 일

근 1년만에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아빠 환갑을 맞아 가족모임을 이번 주말에 하기로 했는데...

돈없는 내가 -_- 할 수 있는 선물이라곤 몸으로 떼우는 것밖에 없더라고요.

가족앨범을 만들기로 하고, 서울에 있는 오빠 둘을

인터뷰 촬영하기 위해 간 것이죠.

 

간김에 서울서 고생(!)하고 있는 춘자도 만나고...

 

 



토요일 오후 6시경 춘자와 대학로에서 만나고 나니

오빠들한테 전화가 와서, 자기네 집으로 오라고 (움직이기 싫으니까!)

하더군요. 맛있는 걸 사주는 전제조건으로 먼길을 갔는데

-_-;;삼겹살 묵었습니다.

 

춘자는 산소, 탄소를 온라인으로 익히 알고 있는지라

나를 포함해 세남매와 어지간히 낯안가리고 잘 놀더군요.

잠시 놀기로 했는데, 술도 먹고 오빠 연애상담-_-도 들어주고

결국 오빠네 구석쪽방에서 같이 놀고 자고 갔어요.

다음날에는 10분거리에 있는 시장에서 반찬을 옴팡사서 밥도 해묵고...

 

그리고 오빠들 인터뷰를 했는데...

주제는 아빠 환갑 축하 메시지와 가족사에서 아빠와 얽힌 기억나는 에피소드...

얘기를 듣다보니... 이런!... 아빠는 나한테만 잘해준 줄 알았더니

오빠들한테 더 잘해줬더군요! =ㅁ=;;; (맞기도 내가 더 맞고 자란 것 같고)

 

평소 가족에 대한 대화가 없던지라 인터뷰는 그간 잊고 지나쳤던

옛날을 회고하는 감동적인 시간이 되었습니다.(편집하려면 시간 걸리겠지만)

 

그렇게 오빠네 집에서 -_- 1박 2일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춘자 오랜만에 보는 김에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카메라는 가방에 쳐박아 두고 수다만 떨었다는 것!!!

 

뭐, 앞으로 자주 놀러가기로 했으니깐... 괜찮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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