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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죠선생님이 안갈쳐주는 공부법] 나훈아와 미스터 트롯의 차이점

 

 

 

 

 

[나훈아-3-테스형!.mp3 (10.67 MB) 다운받기]

 

 

 

 

  미스트롯, 미스터트롯이 유행일때 나는 말을 참았다.  왜냐면 내 한 마디가 이들의 입지를 강화해주는 효과에 보템이 될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뭐 대단한 영향력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들의 행태에 힘을 조금이라도 보태기 싫었다. 나는 참고로 TV조선, 채널A 채널을 지워버렸으나 다른 채널에서 재방송을 해서 미스,미스터트롯을 보게 되었다.)

 

 트롯이란 장르는 누구에게나 부담이 없으며 이런저런 크고 작은 마음을 표현한다.  농업이 기반일때 집단 노동 속 힘들때 부른 노동요가 사라진 요즘..  비슷한 역할을 하는게 바로 트롯이란 노래장르이다.   트롯의 탄생은 불행한 일제식민지에서 근거를 두고 있다.  그후로 60, 70년대 노래들은 트롯이건 아니건 모두다 노랫말 속에 이런저런 삶의 모습을 담았다. 그것이 어려움을 극복할 희망이 있건 없건 한계를 가질지언정 최소한 대부분의 노랫 말 속엔 모두 삶의 크고 작은 모습들을 담아내는 암묵적 약속이 있었다.

 

  미스,미스터트롯의 노래와 편집은 그간의 트롯 노래전통을 잇고 있지 않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로 대표되듯이 기존 트롯과는 다르게 삶의 이런저런 모습들을 노래한 것과는 달리 한마디로 불륜, 섹스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단지 자극. 이거 하나에 촛점이 맞춰져 그간의 트롯이 갖고있는 장점을 모두 거세해 버렸다.  성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전형의 기획과 연출이 바로 미스, 미스터 트롯이다.

 

  그러나 나훈아 노래는 60,70,80년대 서정적인 트로트 연장선상에 분명히 서고 있다. 가벼운듯 우리들 삶의 한 양태를 표현하는 트로트 장르의 장점을 그는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아니 고수하고 있다. 살아가며 이런저런 고민들을 무척이나 편하게 승화시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순응적 삶을 노래한 한계도 분명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작가의 의도된 대중성, 전하려는 의미의 접점에 서있음을 노랫말과 가락을통해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어떤 노래도 이렇게 대중친화적인 성격이 없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해야만한다. 

 

  집단노동이 사라지고 개별화 되고 부속화된 노동을 하고 있는 요즘, 힘들때 함께 부른 노동요 자리를 시간이 지나다보니 트로트가 대신하고 있는 현실이다.  나훈아는 바로 그 트로트를 계승하고 있다.  그 연령대의 삶은 삶과 노동이 분리되기 이전의 세대이다. 70대이면 빈곤과 산업화를 살아내며 아직은 어릴적 농촌기억을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한 세대이다.  나훈아는 자연스레 이러한 정서를 노래한다. 이게 그가 살아오며 각인된 솔직하게 나올 수 밖에 없는 정서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미스,미스터트롯은 절대 이러한 자리를 대신하지 못한다.  며칠전  KBS 힘내라 대한민국 나훈아 콘서트를  본다면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트롯을 하는 모든 이들은 많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격는 모든 행위는 삶과 동떨어져서는 다 가짜다. 죽어서 어찌되건 당장 내가 살아가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교는 도데체 왜 있는지 모르겠다. 현재의 삶과 무관한 종교는 다 없어져야 한다.  아니 삶을 좀먹는 질병이다.  삶과 무관한 글과 노래 역시 돈벌기 위해 무한정 찍어내어 공해와 공멸의 시체를 만들고 있는 죽음의 자본주의 모습이다.

 

  트롯의 장점과 건강성은 모두에게 친화적이며 이런저런 삶을 표현하며 한편으로는 승화시키는데 있다.  나훈아는 존경스럽고 솔직한 예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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