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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최종]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II

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

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I

[번역]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II

 

리차드 레빈스


현실 과학에 대한 비판 


“현실에 존재하는 과학”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 수준에서 진행해야 한다. 좀 쉬운 비판으로 자유주의 비판이 있다. 그것은 과학이 자신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 과학은 국제적으로나 대중적으로 공개하는 규칙이 있는데, 이 규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군사기밀이나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거부된다. [막대한] 연구비용과 과학교육 그리고 과학 언어의 난해함은 일반 대중이 독자적으로 [과학을] 논증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한다. 앞으로 과학자의 자격 증명서나 [과학자의] 염색체 같은 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각을 발표할 수도 없을 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과학에 관한 대중적인 결정을 할 때 과학의 권위에 최종적으로 호소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신뢰성은 권력 내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답을 줄때에만 유지된다. 과학자에게 신뢰성은 중요한 재산이다. 그런데 그 신뢰성은 그들의 충고를 정책 결정자가 잠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과학이 스스로 정한 규칙을 따르지 못한다는 비판 보다 더 중요한 비판은 객관성에 대한 기준 자체가 종종 객관성을 유지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아이디어는 그 생각의 원천에 대한 기준 없이 과학 자신의 힘으로, 과학의 틀 내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논쟁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기준인 것처럼 보이며, 기본적으로 공정한 것으로 보인다(역주- 예를 들어 과학의 공정성을 평가할 방법이 있다면, 그 평가 방법을 또 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무한히 반복해야 될까?). 그러나 페미니스트 측의 과학 비판에서 강조했듯이 연구 활동에서 연구자[특히 자본주의 남성]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발견의 과정에 대한 [일종에] 사기이며 과학 논쟁을 이해하는데 장벽으로 작용한다.


인종주의자와 성차별 주의자들이 억압을 위해 [만들어 낸] 이성의 역사와 내용을 모른다면, 지식, 질병 혹은 사회적 행동에 대한 생물학적 결정성에 대한 논쟁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과학 논쟁의 원천과 사회적 결과를 명확하게 하는 것은 그 논쟁에 해답을 줄 수는 없을지라도 문제를 명확하게 분석하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감정(feeling)에서 사고(thinking)를 분리해 내는 것은 과학적 활동의 필수 단계이지만 단지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이 될 때, 과학자들은 잔인하리만큼 초연하게 가장 살인적인 기술과 이론을 개발한다(역주-원자 폭탄 개발을 생각해보라). 과학 활동이 중립적이라는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작업가설(역주- 여러 가지 얻은 실험결과를 기초로 하여 다음의 실험계획을 세우기 위한 잠정적인 가설)을 선언해야 한다: 억압에 관대하고, 정당화하며 그 억압을 증진시키는 모든 과학 이론은 잘못되었다; 과학 자료, 논리, 분석 혹은 함축된 의미를 유추할 때 그 속에 결점이 있는지 없는지를 발견해 내는 것은 우리들의 임무이다. [팽배한] 이데올로기 내에서는 잘못된 방법론이 받아들여지고 잘못된 논리들이 [마치 정당한 것으로] 이해되고, 잘못된 주장들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것 역시 우리들의 [중요한] 임무이다. 



이것이 맑스주의가 주류 과학적 이데올로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맑스주의는] 세계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고 [변혁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결과와 밀접하게 관계하는 실천의 이데올로기다. 이러한 당파성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맑스주의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게 한다: 인류의 생존과 해방; 그것은 어떤 문제를 볼 때, 더 넓은 맥락에서 문제를 설정하기 위해 그 문제의 경계에서 부터 이의를 제기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 주위를 흔들고 있는 이데올로기들 때문에 보지 못하는 분석 목록들을 볼 수 있다. 또 맑스주의는 문제의 해결책들이 인민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하게 한다. 그러나 더 좋은 세계에 대한 강력한 열망은 우리가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사람들이 우리의 프로그램에 얼마나 응답하는지, 얼마나 빨리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지 혹은 승리 후에 우리가 직면할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아무튼, 맑스주의는 과학과 공통으로 그리고 철학과 공통으로 일부 특성을 공유하지만 그것은 과학도 아니며 철학도 아니며 그리고 그 둘을 기계적으로 합쳐놓은 것도 아니다.


과학 그리고 좌파


과학적, 기술적 접근방법 역시 과학의 자기평가를 객관적 생산력으로 그리고 진리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파괴적인 결과를 [단순히] 과학을 잘못 이용했기 때문으로 보고, 또 과학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진리를 왜곡한 것으로만 본다(역주- 과학 자체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데, 잘못 이용하거나 왜곡했기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IQ평가나 우생학과 같은 과학은 과학을 왜곡하거나 오용한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래서 과학-정치는 과학 정책으로 대치되고, 과학 정책의 임무를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족쇄를 제거 하고 이데올로기적 왜곡을 제거하는 것으로 본다. 같이 실린 글(“과학과 발전: 농업에서 7가지 과학 발전주의자의 미신”)은 이러한 견해가 갖는 함정에 대해 잘 설명해 놓았다.


이러한 기술 관료적 견해에 반대하고 저항하기 위해, 과학의 계급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오만한 측면이 강조된다. <급진 과학 저널(Radical Science journal)>로 잘 알려진 이러한 견해는 다음 슬로건으로 요약된다. “과학은 사회적 관계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과학은 사회통제(social control)이다. [과학] 이론은 자연과는 관련이 없고 사회에 대한 의미만이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는 아원자 입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개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관한 것이다. 생산 확장의 목적은 더 이상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주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객관성은 계급 이데올로기를 숨기기 위한 슬로건이다.


페미니스트는 과학적 화법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것을 남성 가부장적인 측면이라고 강조하다. (수잔 그리핀(Susan Griffin(미국, 에코 페미니즘 문학가)의 “비인칭 수동문“에서) 예를 들어 지배를 나타내는 표현들, 자연을 ”관통하는(penetrating) “ ”그녀(자연)로부터 그녀(자연)의 비밀을 캐내는”,”지배(conquering) “ 등. 그리고 세계에 대한 공격적이고 거만한 [과학의] 자세는 피할 수 없는 재앙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특히 과학이 앎을(지식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은 대중 지식, (비이성이 아닌) 탈 이성적인(역주-이성 이외의 정신작용, 즉 감성, 감정 등을 의미) 그리고 “직관적” 지식, 즉 기원은 모르지만 특정 단계에서 감정적이고 심미적이고 지적인 결론을 통합한 과거 경험에 비추어 해석되는 인식들의 복합체들에 도전받고 있다(역주-과학은 아주 전문화되고 고도로 발전되었다고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정작 내일 만날 애인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직관이나 경험보다 더 해답을 주지 못한다).


자본주의 기술에 대한 천박한 미국 비평가들도 역시 [과학을] 유럽의 창조물로서 이질성을 강조하고 자연에 대한 전통적인 종교적 접근 속에서 저항의 원천을 찾고 있다. 기존에 과학에 대한 도전은 대안적인 치료와 생태학 등 여러 운동에서 그리고 새로운 전체론적(holism)인 여러 학회에서 실천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비판들은 우리가 과학을 분석할 때 중요하게 취급되고 고려되어야 한다. 이들은 기존의 과학 기구(institutions)의 외부이지만, 너무나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하기에] 통상적으로 질문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신선하고 새로운 시각을 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존의 과학을 부정할 때 단순히 기계적 의미에서 과학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되는 측면을 다시 통합하는 변증법적인 부정을 의미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적인 견해와 반과학적인 모든 견해를 극단적이라서가 아니라 일면적(one-sided)이기 때문에 비판한다. [이 두 측면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유주의자들은, “극단적인 것”은 나쁘고 “중도적인 것”이 좋다고 한다. 그리고 극단주의에 대한 비판은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1964년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에 대항한 린든 존슨(Lyndon Johnson)의 선거 캠프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곤 했다(*). 그러나 극단-중도의 축은 세상에 대한 양적인 견해이다. 반면에 “일면적”이라는 비판은 질적인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다원적 혹은 유연한 방식이기 때문이 아니라 변증법적이 때문에 강조되어야 한다. 변증법적이라는 것은 어떤 견해에 대한 여러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자의 속기(shorthand, 날림의 언어)를 이용하는 것은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기에 반드시 피해야 한다.


기술과 과학의 도입과 발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과학과 기술은] 사회적 생산물로써 그 내용은 자연을 그대로 반영한 것도 아니며 미리 운명 지워진 특별한 어떤 길을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해로운 기술에 대한 대안으로 기술 그 자체가 거부 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기술은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물질세계에 작용하기 위한 의식적인 방법이다. 넓은 의미에서 기술은 우리 종(species)만큼 오래되었다. 우리는 단순히 기술 이전의 목가적인 자연 상태를 선호한다고 해서 그것을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 사회적 필요를 보다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는 다른 대안적 기술을 찾을 수 있다.


과학에서 대안적인 길을 만드는 문제는 과학사회 내부에서 그리고 외부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문제이다. 그것은 과학이 가지고 있는 전 영역의 모순을 이해해야 하고, “실제 존재하는”, 대부분 부르주아지적인, 과학에 투쟁적이며 협동적일 수 있는 유연성을 필요로 한다. 파괴와 이윤을 위해 과학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저항은 물론이고 그것을 선호하는 제도적 구조 그리고 과학자들이 재생산되고 사회화되는 방식, 그들이 연구하는 지적인 틀에 대해서도 저항할 필요가 있다. 혁명운동은 과학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의 전쟁터로 다시 한 번 재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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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2004 Gale Group


(*) 역주- 골드워터는 북베트남에 핵폭탄을 투하하고, 사회보장제도를 없애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친 극우주의 정치가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1964년 대선에서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운동을 했다. 린드 존슨은 골드워터의 핵폭탄과 같은 극단적인 발언을 비판하기 위해 광고를 제작했다. 데이지 꽃잎을 따며 놀던 순진한 어린 소녀의 눈망울에 핵폭발의 버섯구름이 투영되는, 그 유명한 ‘데이지 걸’광고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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