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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과 좌파4]우연에도 종류가 있다.: 양자역학의 두 그룹

 

[양자역학과 좌파4]우연에도 종류가 있다.: 양자역학의 두 그룹

                                  기관지노힘  제81호

A는 A이면서 A가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오랫동안 파동으로 알려져 있던 빛이 입자와 같이 운동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빛도 중력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실제 관찰에 의해 증명되는데, 개기일식 때 별빛이 태양 주위의 중력에 의해 휘는 현상이 관찰되었다(1919년). 빛은 물질의 또 다른 존재형태였던 것이다. 엥겔스도 그의 책 [자연 변증법]에서 "에너지("빛, 운동")를 물질의 존재 형태이며 내재된 속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역으로 드브로이는 입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본질적으로 파동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내었다. 입자성이란 일정한 공간에 국한되어 있고 서로 충돌하는 특성을 말하며, 파동성이란 전 공간에 퍼져있고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중첩하여 보강-간섭하는 성질을 말한다. 이 두 개념은 상호 배타적이며 반대되는 개념이다.


당시 물리학자들이 혼란에 빠진 이유는 미시세계의 이러한 물리적 특성을 “일반 상식”(특히 형식논리학)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형식논리학은 ‘A는 항상 A와 동일하다(동일률).’ 와 ‘A는 A가 아닌 것 (not-A)과 같을 수 없다(모순율).’이라는 기본법칙을 가지고 있다. 근대 과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형식논리학은 미시세계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형식논리학에 따르면 파동성이 A라면 입자성은 not-A가 된다. 그리고 A는 non-A가 절대로 될 수 없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A가 not-A의 특성을 나타내므로 모순율에 위배된다.


변증법의 핵심에는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때 대립물이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통일을 이루면서도 서로 배제하는 가운데 서로 침투하는 관계에 있는 것, 즉  모순 속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모순 관계로 입자성과 파동성을 설명할 수 있다. 이렇듯 형식논리학이 답을 주지 못하는 곳에서 변증법은 좋은 해답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변증법의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라는 개념은 더 상세한 해명과 발전을 필요로 한다. 

 



미시세계의 우연성과 거시세계의 합법칙성 : 양-질의 전환


 양자역학에서 파동성과 입자성을 만족할 수 있는 물리적 해석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이 바로 보른(Max Born)이었다. 일반적으로 파동성은 공간에 퍼져 있는 것이지만 입자성은 한 장소에 국한되어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른은 파동 방정식으로는 입자 자체를 기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보른은 한 장소에서 파동함수의 세기는 (입자를 관찰 할 때)  그곳에서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나타낸다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파동함수가 특정 위치에서 입자의 존재확률을 나타낸다.' 뜻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이해한다면 입자가 항상 명확한 경로를 지나간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 된다. 즉 이중 슬릿 실험에서 전자가 두 슬릿(구멍)을 통과할 확률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스크린 상에 도달한 전자는 두 슬릿중 적어도 하나를 통과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만약 그렇다면 간섭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보른의 해석은 파동함수가 특정위치(예를 들면 스크린)에서 입자를 관찰할 때 그 곳에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말하는 것이다. 아주 미미한 차이 같지만 나중에 엄청나게 다른 해석으로 발전한다. 일단 ‘관찰’이라는 말만 기억하고 넘어가자.


 보른의 통계적 해석은 자연현상을 아이러니하지만 아주 정교하게 해석해준다. 이 해석은 입자 하나하나의 측정 결과를 정교하게 예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입자를 발견할 확률이 어느 곳에 얼마인지만을 예측한다. 그러나 입자가 실제 어디에서 발견되는지는 모른다. 이런 점에서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이 매우 정확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유사한 시도들을 여러 번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평균적 분포를 양자역학만큼 정확하게 예측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중 슬릿 실험에서 엄청나게 많은 전자를 순차적으로 통과 시킬 때 스크린 위의 전자 분포를 그 확률로 정확하게 예측한다. 그러나 실제 개별 전자들이 어디에 부딪힐 지는 예측하지 못한다. 이러한 평균 예측 결과는 여러 과학자들의 정교한 실험결과들과 잘 일치한다. 양자역학으로 원자의 주기율표에서 부터 햇볕이 빛나는 방법이나 전자회로의 작동원리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다.


물리학에서 확률적 해석은 양자역학만의 특별한 해석이 아니다. 19세기에도 확률-통계학은 일반 물리학에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기체 이론에서 개별 분자는 완전히 무작위적인(우연적인) 운동을 보여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기체를 구성하는 거대 분자 집합은 통계적으로 정교한 역학 법칙(필연성)에 지배받는다.


이러한 법칙을 큰 수의 법칙(law of great numbers)이라고 하는데, 하나하나의 개별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우연에 의해 일어나서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지만 많은 수가 모인 집단에의 사건들은 일정한 규칙(합법칙성)을 따른 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전체 인구로 보면 인간의 평균 수명을 예측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자연 현상을 변증법에서는 양-질의 변환 법칙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양자역학에 의해 미시세계에는 대한 우연성과 확률성이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거시세계에 까지 인과론(합법칙성)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연에도 종류가 있다.: 양자역학의 두 그룹


양자역학의 확률적 해석은 미시세계에 우연성이 지배하기 때문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이 ‘우연‘에는 종류가 있다. 흔히 주사위를 던질 때 각각의 숫자가 나타날 확률은 1/6이고 결과는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성은 자연법칙의 본질적인 우연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식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사위를 던져 나타나는 숫자는 초기 손에서 떨어질 때의 각도, 속도, 위치와 관련이 있고, 그때 바람의 세기와 방향 그리고 땅에 떨어졌을 때 탄성, 표면 거칠기와 모양 등등에 관련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알면 주사위의 숫자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완전히 우연에 의해 지배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결과를 결정하는 많은 요인들을 충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우연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의 확률적 해석은 더 깊이 있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연 현상의 본질적인 우연성 때문일까? 물리학자들 사이에도 이 대한 명확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까지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 해석을 둘러싸고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 그룹은 양자역학의 확률적 특성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는 어떤 원인(숨은 변수)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그룹에는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 그리고 드브로이가 있다. 또 한 그룹은 자연이 근본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요인, 즉 완전한 우연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는다. 이 그룹에는 양자역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그룹으로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있다. 

 

참고문헌

1. The Möbius Trip (강추)

2. 맑스주의와 현대과학(번역중)

3. 정리되는데로 링크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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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변증법I-산술연산의 변증법

 

 (*)  현대의 과학기술은 수학에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과학기술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수학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지금 연재중인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이유로 수학에 대해 쉽게 설명된 글이 있기에 번역하였다. 이 글은 미국의 진보노동당(Progressive Labor Party)web page http://www.plp.org/misc/dialofmath.html에 올라온 글이다. 이 글은 1편 산술연산의 변증법에 이어, 2편 기하학의 변증법 그리고 3편 산술연산과 기하학의 상호관계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서는 먼저 1편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이 글은 [현장에서 미래를] 108호에 실려있다.

 

수학의 변증법 I


번역(*) 김영식

수학은 우리 생활의 한부분이다. 잔돈을 계산할 때도 도로 지도를 읽을 때도 책꽂이를 만들 때도 그리고 논리적으로 증명할 때도 수학을 사용한다.


이 글에서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이야기할 것이다. 먼저 수학이 매우 변증법적이라는 점이다. 수, 도형, 공식 전반에 걸쳐 변증법적 유물론의 법칙과 범주는 작동한다. 수학을 이해하는 것은 변증법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에 의존한다. 


두 번째는 수학적 생각이 실제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학의 법칙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소수 천재들의 머릿속에서 마술처럼 생겨난 것도 아니다. 수학적인 생각은 인간의 실천의 필요에서 부터 나왔고 실제-삶의 투쟁 속에서 나온 것이다.




 

1. 산술연산(Arithmetic)의 변증법


몇 명의 아이들이 핫도그를 원하고 있나?


김씨는 아이들을 위해 핫도그 파티를 하고 있다. 몇 개의 핫도그를 요리해야할지 알아보려고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핫도그 먹고 싶은 사람, 손들어!" 그러자 세 명의 아이가 손을 들었다. 한 아이는 금발에 스파이더 맨 옷을 입고 있고 또 한 아이는 검은 머리에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마지막 한 아이는 갈색 머리에 빨간 목욕신발을 신고 있었다. "음, 세 명! 핫도그 세 개를 요리하면 되겠군."


일상적인 판단이지만, 이러한 과정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른 것이다. 즉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같은 것’과 ‘다른 것’의 개념을 적용한 것이다. 자 하나씩 살펴보자. 아이들은 모두 달랐다. 한명은 금발이고 한 명은 검은 머리이며 나머지 한명은 갈색 머리였다. 또 한명은 스파이더맨 옷을, 또 한 명은 푸른 옷을 입고 있었고 나머지 한명은 목욕신발을 신고 있었다. 김씨는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고 아이들이 얼마나 같은지에만 주목하였다. 즉, 아이들은 배가 고팠고 핫도그를 먹고 싶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몇 명인지를 세었다. "한넘, 두넘, 세넘" 김씨는 아이들이 가진 차이를 무시하고 단지 그들이 먹고 싶어 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핵심 범주 : 구체(Concrete)와 추상(Abstract)


김씨는 수학의 핵심인 구체와 추상의 개념을 적용한 것이다. "구체"와 "추상"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중 하나인 철학적 개념이다.


"구체(Concrete)"는 라틴어로 "결합하다. 자라서 하나가되다"는 뜻이다. 만약 사람들에게 어떤 것의 구체적인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하라고 하면 그 사물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특별한 면을 이야기 할 것이다. (건축 자재로 콘크리트(Concrete)를 생각해 보자. 콘크리트는 광물성 재료 모두를 한데 썩고 굳혀서 지하실 벽 재료로 사용된다.) 첫 번째 아이를 보고 금발에 스파이더맨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이 구체적인 특징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추상적 개념을 이용 한다.


많은 사람들은 추상적인 개념을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추상적인 생각은(사유는) 박사학위를 받은 "가방끈이 긴" 소수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추상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추상(abstract)" 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떨어뜨리다. draw away"의 뜻에서 나왔다. 어떤 것을 마음속에서 추상적으로 다룰 때, 그 사물의 구체적인 면을 뒤로한다(즉 무시한다).


"추상"은 "실제적이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사물이나 과정에서 나타나는 추상적인 특성은 구체적인 특성만큼이나 실제적이다. 앞의 예에서 "핫도그를 원하는 아이들"도 여러 아이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추상화시킨 것이다. 이렇게 추상화시킨 개념은 아이들의 구체적인 머리색이나 옷을 만큼이나 실질적이다. 게다가 모든 사물에는 구체적인 면만큼이나 많은 추상적인 면이 있다. 예를 들어, 김씨가 핫도그 요리를 하면서 뒤뜰에 있는 사람들과 한 쌍의 고양이와 나무들을 보았다고 하자. 만약 그가 본 사람들과 고양이 나무들의 특별한 면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그것들 모두 살아 있는 존재라는 일반적인 특징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배고픈 아이들에 대해 또 다른 추상적인 면을 찾아보면, 그들은 (고양이와 같이) 네발로 걷지 않고 직립보행을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모두 사물의 현상을 추상적으로 보는 것이다.


추상과 구체 : 배고픈 아이들이 몇 명인지 세는 것


앞에서 아이들을 셀 때 김씨는 그들의 구체적인 특징, 즉 그들의 머리색과 옷을 무시했다.(즉 추상화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핫도그를 원하는 아이들"이라는 추상적인 생각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한명의 "핫도그를 원하는 아이"와 다른 한명의 "핫도그를 원하는 아이"는 같기 때문에, 그들이 몇 명인지를 셀 수 있었다. 이때 아이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그들이 머리색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수를 샌다는 것은 추상화시키는 능력을 포함하는 것이다. 


더많은 배고픈 아이들, 더 높은 수준의 추상화


핫도그를 먹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더 있다. 두 명의 아이들이 더 달려와 핫도그를 요구했다. 그러면 김씨는 앞에서와 같은 과정을 밟을 것이다. 새로 달려온 아이들의 옷이나 머리 스타일을 무시하고 핫도그를 원하는 아이들의 수를 세고, 두 명임을 확인할 것이다. 앞에서는 3명의 아이들이 핫도그를 원했고, 지금 2명이 더 왔다. “음 그러면 3+2=5. 모두 5명의 아이들이 핫도그를 원하고 있군” 


여기서 김씨는 더 높은 수준의 추상화 단계로 옮겨갔다. 더 이상 3과 2의 숫자가 "핫도그를 원하는 아이들"의 개념에 메이지 않는다. 김씨는 완전히 3과 2의 숫자를 아이들의 특징으로부터 분리해서 완전히 추상적인 숫자를 가지고 정신적인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3과 2의 숫자로 산술연산을 한 것이다. 그래서 불판위에 핫도그를 몇 개를 올려놓아야 할지를 확신을 가지고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옛날 인간은 숫자로 투쟁했다.


이제 김씨의 핫도그 파티를 떠나 2-3천 년 전 과거로 돌아가 보자. 인간의 초기 역사를 살펴본다면 김씨가 핫도그 파티에서 생각했던 것과 유사한 인식 발전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어떤 물건을 셀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수의 개념을 가지고 일을 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옛날 사람들은 숫자에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물건더미 들이 각각 얼마나 큰지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과거 사람들은 20개 통나무 한 묶음이 5개 통나무 한 묶음보다 크다는 것을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통나무의 개수는 모호하게나마 장작과는 분리할 수 없는 특성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특성이 (20이나 5와 같은)특정한 수로는 이해되지는 않았다.

손가락, 발가락 그리고 수


인간발달의 다음 단계에서, 수는 여러 물건들의 특성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는 아직까지 물건과 구별될 수 없었고, 숫자 자체도 물건과도 아직 구분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옛날 일부 사람들은 숫자 5를 대신해서 "손"이라는 단어를, 숫자 20을 대신해서 "사람 전체"라는 단어를 사용했었다. "20"은 사람의 손가락과 발가락만큼을 의미했다. 숫자 5와 20은 손가락과 발가락과 분리된 추상적인 수로 이해되지 않았다.


거대한 진보 : 추상적인 숫자.

옛날 사람들은 물건의 개수를 비교할 필요가 있었다. 숫자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사람들은 어떤 물건들이 더 많은지 서로 비교하면서 구분할 수 있었다. 장작더미 혹은 소떼 들을 이런 식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 이런 비교는 의식주를 위한 일상적인 활동에서 나온 것이다. 많은 세대가 지나는 동안 사람들은 수백만 번 이런 활동을 반복했을 것이다. 이러한 수많은 비교과정을 통해 점차적으로 "추상적인 숫자"(한명의 소년과 같은 것을 ‘구체적인 수(명수)’라고 하고, 단지 하나, 둘과 같이 숫자만 때 놓은 것을 ‘추상적인 숫자(무명수)’라고 한다.)개념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통나무 5개나 20개가 아니라 그냥 "5"나 "20"이 되었다. 이 추상적인 숫자는 구체적인 통나무 묶음이나 소떼들에서부터 추상화된 개념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수는 수세기 동안 실제 사람들에 의한 육체적 노동(통나무, 바위, 동물들에 대한 노동)과 정신적인 노동(물건들의 수를 비교하는 것)의 결과인 것이지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에서 마법사에 의해 갑자기 생각이 난 것이 아니다.


수의 정의


다음은 수학책에서 읽을 봤을 법한 수에 대한 "엄격한" 정의이다. 이 정의로 부터 숫자의 개념이 일상의 물건들에 대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적 육체적 투쟁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수는 물건들을 여러 개 모아놓은 것의 특징이다. 그 물건들을 모아 놓은 것과 숫자는 서로 1대 1로 대응하는데, 그러한 모음들에 공통적이다. (핫도그 5개와 장난감 5개에서 5라는 숫자와 1대1로 대응하고 5개라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이 특징은 그런 대응이 불가능한 모음과는 다르다.“


함께 쌓아 올리는 것 : 산술연산(산수)의 기원


(추상적인) 숫자는 옛날 사람들이 물건더미들을 매일, 매년 비교하면서 나온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모아 놓은 물건들을 비교했을 뿐만 아니라 모아 놓은 물건들을 서로 연결시키기도 했다. 만약 5개의 통나무더미와 7개의 통나무더미를 각각 1개의 묶음으로 묶어 놓았다고 해보자. 만약 두 묶음을 합친다면 12개의 통나무 더미가 될 것이다. (통나무 더미처럼) 물건더미들을 반복해서 연산을 한 결과, 사람들은 수를 가지고 연산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숫자를 더하는 것은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모음들을 함께 놓거나 합치는 것과 같다. 곱셈은 아마도 같은 수의 모음들을 셀 때 나온 것으로 보인다. 예들 들어 두개씩 묶어 놓은 물건이 4개가 있다면 모두 8개가 되고, 세 개씩 모아 놓은 물건이 2묶음 있다면 모두 6개가 된다. 빼기와 나누기 역시 같은 방식에서 나왔을 것이다. -즉, 물건들을 모아 놓은 더미를 다루는 실제 사람들의 삶 속에서 나왔을 것이다.


수의 법칙

수를 세는 과정에서 옛날 사람들은 물건과 분리된 숫자들만의 관계를(특히 5와 7을 더하면 12가 된다)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법칙을 만들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 매일 경험을 통해 옛날 사람들은 더하는 순서를 바꾸어도 같다는 결과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5개의 장작더미를 먼저 세거나 7개의 장작더미를 먼저 세어도 결과적으로 모두 12개의 장작더미를 갖게 된다. 5와 7을 더하면 12가 되고 7과 5를 더해도 역시 12가 된다(나중에 수학자들은 숫자에 대한 여러 가지 많은 법칙들을 발견했다. 이것이 숫자 이론의 기초가 되는 원칙이 되었다)


산술연산에서 핵심은 숫자들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나 이들 관계는 물건들을 모아놓은 것들 사이의 관계를 추상화한 이미지이다. 산술연산은 (많은 지도자급 “학자”들이 믿어 왔던 것과는 다르게) 순수한 사유(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반면에, 산술연산은 실질적인 노동 속에서 나타나는 명확한 특징들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그것은 많은 세대의 장구하고 실질적인 경험으로부터 나왔다.


수학 기호(심벌)는 수천가지 물건에 대해 가치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 어떤 물건들의 수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에 대한 개념이 생겼고 숫자에 이름을 붙여주게 되었다. 사회생활이 더 복잡해짐에 따라 점점 더 큰 가축 떼들 혹은 교환하기 위한 상품들의 개수를 셀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그 숫자를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것을 위해  숫자의 기호(심벌)와 이름을 더 편리하게 개선해야 했다. 


숫자에 기호(심벌)를 도입한 시기는 명백하게 인간이 글자를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이후 기호(심벌)는 숫자들 사이의 연산으로, 예를 들어 덧셈에 대해서 + 기호(심벌)로 발전했다. 이러한 숫자와 수학적 연산에 대한 기호(심벌)는 산술연산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계산하는 것 보다 “종이위에 계산 하는 것”이 더 쉽게 느꼈다. 수학적 기호는 머릿속(정신적인) 연산을 계산으로 대체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계산은 글씨로 적을 수 있었고 모든 계산 과정을 볼 수 있게 하여, 모든 것을 검토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계산은 정확한 규칙에 의해 지배받게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줄에 있는 숫자를 다한다고 할 때, ‘첫 번째 줄을 먼저 더하고 그 다음에 10번째 줄로 가져와서 더해라“는 식의 연산이 가능하다.

기호(심벌)의 발전으로 엄청나게 큰 수를 쉽게 다룰 수 있었다. 만약 한 친구가 김씨에게 “일곱(칠)”이라고 말했다면 김씨는 일곱 개의 물건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기호 “7”을 생각할 것이다. 이 “7”은 추상적인 숫자 “일곱(칠)”에 대해 명백한 틀을 형성한다. 18759와 같은 큰 수에 대해서, 그것을 어떤 물건들이 이 숫자만큼 있다고 마음속에 그리면서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큰 수를 이해하기 위해서 “18759”와 같은 기호(심벌)가 필요하다. 이러한 기호의 발명은 숫자의 발견을 더 용이하게 하였다. 이 발견은 직접적인 관찰과 수를 세는 행위와는 관계없이 발생했을 것이지만, 큰 수에 대한 연산은 고대 사회에서 세금을 걷거나 무기를 만들거나 준비하기 위해서 필요했을 것이다.


왜 산술연산은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유용할까?


왜 산술연산이 식료품가계나 경기장 등에서 이렇게 많이 도움이 될까?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적 과정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산술연산의 결론과 개념은 수천 년의 세월과 경험에서부터 나왔다. 이러한 개념은 추상적인 형식 속에 사람들이 생활하는 실제 세계를 반영한다. 아이들은 방안에 있는 사람이나 장난감을 셀 수 있고 밤하늘에 별을 셀 수 있다. 산술연산은 이러한 것들의 일반적인 특성들로 부터, 즉 특별하고 구제적인 것에서 부터 추상적인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산술연산이 이렇게 생활에 유용한 이유는 산술연산이 많은 실제 상황에 대해 모두 적용할 수 있게 일반적인 특성(추상성)을 고려한 것이기 때문이다. 산술연산의 바로 이 추성성은 그것을 아주 넓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추상성은 공허한 추상(빈-추상)도 아니며, 신비스러운 어떤 것도 아니다. 이 추상은 당신과 그렇게 다르지 않는 사람들, 당신의 조상들의 오랫동안 실천적인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다음호에는 기하학의 변증법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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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1

수학과 실제 세계에 대해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순수수학에서 단순히 정신의 창조물과 상상물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수와 도형의 개념은 현실세계에서 유래한 것이지 결코 다른 곳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사물의 개수를 세는데 있어 최초의 수단이며, 처음으로 산술계산을 가르쳐 준 것은 손가락 열 개다. 그러므로 산술연산은 ‘정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숫자를 세기위해서는 어떤 대상이 필요하고 그 대상에서 개수 이외의 다른 모든 특성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능력은 오랜 역사를 통해 경험적으로 발전한 결과이다. 수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도형의 개념도 전적으로 외적 세계에서 유래한 것이지 결코 머릿속의 순수한 사유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형체를 가진, 그리고 그 형체를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사물이 있어야 우리는 도형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순수 수학은 현실세계에서 공간적 형태를 취하고 양적인 관계를 갖는 것-즉 매우 실제적인 소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재가 대단히 추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소재가 외적 세계(실제 세계)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표면상으로 감추어져 버린다. 그리고 이것의 형태와 관계를 순수 그 자체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형태와 관계가 담고 있는 내용자체를 분리해서 무시해야 한다. 그래서 부피가 없는 점, 부피와 넓이가 없는 선, a와 b, x와 y 변수와 상수가 나오고 결국 처음으로 정신 자신의 자유스런 창조물과 상상물, 즉 상상적인 양에 도달한다. 


상호관계로부터 명백하게 유도된 수학적인 크기는 그것이 선험적인 기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합리적인 상호 연관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직사각형의 한 변을 중심으로 회전시키면 원통이 된다는 생각은 사람들이 불완전한 형태로 나마 무수하게 현실적인 직사각형과 원통을 연구한 결과였을 것이다. 다른 모든 과학과 마찬가지로 수학도 인간의 필요에 의해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학은 토지 측량 및 내용물을 담을 그릇의 크기를 계산하기 위해 그리고 시간을 계산하고 (기계)역학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유적 분야에서와 같이 일정한 발전단계에서는 현실세계에서 추상된 법칙이 현실세계와 분리되어, 마치 현실세계 밖에서부터 유래되어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처럼 독립된 어떤 것으로 현실세계와 대립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사회와 국가에서도 일어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순수 수학도 바로 실제 세계에서 유래한 것이고 또 실제 세계의 구성형식의 일부분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 때문에 이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실세계에서 나왔기 때문에 적용 가능한 것이다.

-엥겔스, 반듀링론 page 46 (새길)

 

BOX 2.

세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추상의 중요성을 레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적인 것으로 전계되는 사유는 -만약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할 때.............-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가까이 접근한다. 물질이라는 추상, 자연법칙이라는 추상, 가치라는 추상 등등 한마디로 말해 모든 과학적인(올바른, 진지하게 생각하는, 무의미하지 않는) 추상들은 자연을 보다 깊게, 보다 정확하게 보다 완벽하게 반영한다. 생생한 직관에서 추상적인 사유로 그리고 이 추상적인 사유로부터 실천으로-이것이 진리인식의, 즉 객관적 실재를 인식하는 변증법적인 길이다. (강조는 레닌)

-레닌, 철학 노트 page 120(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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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과좌파3]괴기한 이중 슬릿 실험

/* 이 글은 노동자의 힘 기관지에 연재중에 있습니다. */

[양자역학과 좌파3]괴기한 이중 슬릿 실험

파동인줄 알았던 빛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입자의 특성이 발견되었고, 입자인줄 알았던 전자는 드브로이와 데이비슨에 의해 파동의 특성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입자-파동의 이중성은 1989년에 <이중 슬릿(구멍) 실험>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밝혀졌다. 이 실험을 살펴보는 것이 앞으로 양자역학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므로 자세히 살펴보자.


낮은 에너지의 전자총으로 서로 간섭현상을 일으키지 않게 낱개의 전자가 튀어나오게 한 다음 이 전자들을 그림과 같은 작은 구멍에 통과시키자. 그리고 그 뒷면에 전자를 감지할 수 있는 스크린을 두어 전자의 분포를 확인한다. 이 단일 슬릿 실험에서는 예상과 같이 구멍 뒷면에서 가장 많은 분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림 1    

                             

                           

                                                        그림 2

 

여기까지는 고전 역학적 해석으로도 아무른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두개의 구멍사이로 전자를 통과시키면 어떻게 될까? 예상대로라면(입자라면) 두개의 구멍위치에서 가장 많은 분포를 얻을 것을 것이고, 각각을 합한 결과와 같을 것이다(그림 2).

                        

                                                   그림 3

그러나 실험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그림 3과 같이 스크린에 줄무늬모양의 간섭무늬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는 어떻게 움직였을까? 쉽게 '전자는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갖는다.'고 앵무새처럼 암기해서 '이해한 척' 넘어갈 문제도 아니다. 양자역학적 해석에 따르면 전자 하나를 통과시켜도 이러한 간섭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전자 하나를 두 개의 구멍을 향해 발사했는데, 간섭무늬가 나타났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뿐이다. 전자 하나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해서 스스로  간섭무늬를 만들어 낸 것이 된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더 이상 고전 물리를 일부 수정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 난해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물리학자들은 수학적 방법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수식이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인 것이다. 뉴턴의 운동 방정식(힘=질량X가속도)을 풀면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구할 수 있으며, 이 위치와 속도는 실제 공간에서 그대로 위치와 속도이므로, 이해하는데 아무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파동 방정식을 풀어서 나온 해답인 파동 함수가 무엇인지 물리적 의미를 부여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았다. 한 가지 대안으로 슈뢰딩거는 전자를 현실 물리 세계에서 자신의 파동 방정식을 따르는 파동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해석은 단일 입자의 경우에만 잘 맞았다. 슈뢰딩거 방정식에 따르면, 다-입자(multi-particle)계에서는 관련된 파동이 다차원 공간에 나타난다. 만약 3개의 입자를 다루면 9차원 공간을 생각해야 한다. 9차원 공간?! 이 말은 슈뢰딩거의 파동이 존재하는 공간은 실제 공간이 아닌 수학적인 추상 공간인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슈뢰딩거 파동 방정식에서 전자와 관련된 파동은 실제 공간에서의 파동으로 해석할 수 없다. 그렇다고 양자역학을 무시할 수는 없다. 파동 방정식을 기반으로 한 양자역학은 그 어떤 역학보다 미시세계를 잘 기술하고 있음이 실험적으로 무수히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파동 방정식의 파동함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아인슈타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은 이 문제에 대해 해결을 시도했다. 그는 수학적인 추상공간의 파동함수 크기를 제곱하면 측정시 나타나는 입자의 물리량(위치 혹은 속도)을 발견할 확률로 해석하자고 제안하였다. 이것이 아직까지 양자역학 주류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파동함수의 해석 방법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 역시 부분적으로 해답을 주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전자의 파동성은 현실공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림 4


다시 이중 슬릿 실험으로 돌아가 보자. 이중 슬릿 실험에서 전자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안다면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자가 매 순간 어느 구멍으로 통과하는지를 관찰하기 위해 위쪽 구멍에 '전자 측정 장치'를 설치해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희한하게 간섭 무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입자 특성이 나타났다(그림 4). 이것은 측정방법에 따라 전자가 파동의 특성(스크린만 두었을 때)을 보이기도 하고 입자특성(전자 측정 장치를 두었을 때)을 보이기도 한다는 뜻이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의 문제를 많이 해결하였지만 양자역학의 해석을 둘러싸고 여전히 혼돈 속에 있다. 주류과학자들은 양자역학의 난해한 현상들로 인해 오직 측정 가능한(경험적인 것)양에만 집착했다.(실증주의) 또 다른 과학자들은 보른의 확률적 해석을 완전한 우연적 현상으로 오해해서 불가지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또 소수이기는 하지만 관측방법에 따라 변하는 양자역학적 현상을 신비주의/종교에 빠져들기도 한다. 물론 아주 소수로 좌파적 해석도 있다. 그러나 주류 양자역학의 개척자들의 강한 실증주의적인 견해는 양자역학 해석을 더욱 혼란을 가중시켰다. 예를 들어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은 공식적으로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낼 수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우리는 원자의 구조와 같은 진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원자를 관찰할 때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만을 다룬다."고 주장했다. 다음에는 이러한 양자역학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에 대해 알아보자.(다음호에 계속)

 

/* 오래 기다렸습니다. 다음호 부터 진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이 이중 슬릿 실험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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